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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곡주 한 잔이면 설움조차 흥겨운 가락이 되는 법 - 옛날부터 신경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다 못해 두통으로 번지면 포도로 빚은 이국풍의 술을 입에 대던 버릇이 있었다. 주량이 센 편은 아니라서 자주 즐길 수는 없었지만, 그리고 쥐꼬리 비슷했던 수입으론 원하는 만큼 마신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지만, 입안에 맴돌던 그 향취만큼은 기억의 창고 가장 안쪽으로 소중히 갈무리해뒀다. 하여 수백, 수천 번씩 잇달아 부활하여 다른 인물로 살아왔음에도 여전히 나는 피로감을 느낄 때마다 혀로 그 맛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시곤 했다.
동대륙 사람들은 그걸「와인」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 육신은 아직 열 살짜리 어린애다.
더하여 이사실 사람들이 미성년자에게 술을 제공할 정도로 정신 나간 건 아니니까...
「이건 그냥 포도즙을 섞은, 발효가 되지 않은 일반 음료수겠지.」
짙은 분홍이다 못해 보랏빛이 감도는 액체로 뻗던 손을 도로 거두어들이면서 약간 실망했다.
그저 달기만 한 음료는 취향이 아니다. 단 맛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이사실 사람들의 입맛에는 근사하겠지만 나 같은 외국인에겐 충치를 예감한 턱이 좌우로 진동하며 쓰라려오는 그런 맛일 뿐이다.
「에잉, 차라리 냉수가 낫겠다.」
그렇게 판단하고 탁자에서 몸을 돌려 나오는데 곶감을 띄운 건정과에 눈독을 들이던 다른 사람과 어깨가 부딪쳤다.

『아, 미안합...』
반사적으로 사과를 하려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뒷말이 쏙 들어갔다.
등을 떠밀며 나에게 시비를 걸던 무리 중 한 명으로 린청에게 턱을 얻어맞은 아이를 부축하여 달아났던 바로 그 소년이었다. 상대방도 내가 누구인지 알아차리고 짧게 앗 소리를 냈다. 그리고 눈동자를 또륵 굴려 주변을 재빨리 훑었는데 아마도 내 편을 들어주던 린청이 혹시라도 가까운 곳에 있을까봐 주의하는 눈치다.
「이거 느낌이 영 안 좋은데.」
당연한 수순을 밟아 린청의 부재를 확인한 소년은 갑자기 의기양양해져 입가로 하나 가득 미소를 걸었다. 그리고 그 미소는 내 눈에 보기에 썩 보기 좋은 종류는 아니었다.
『여어, 가난뱅이.』
역시나 2차전이냐, 피곤하게. 법으로 텃세 부리기는 하루에 딱 1회만 허용하도록 하라.
허나 그런 법은 세상에 없어 소년은 개기름 줄줄 흐르는 목소리로 신이 나 떠들어댔다.
『네겐 참 다행이겠구나. 이렇게나 공짜 음식이 넘치니 말이다. 이참에 많이 먹어둬야겠지?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상다리 부러지는 모습을 구경 못 할테니 후회하지 않으려면 사양하지 말아야 할 거야.』
그러면서 검붉은 빛깔을 띈 건정과를 주걱으로 옮겨 나에게 건네주었다. 뭐, 거기까진 괜찮았다. 그런데 내 손에 건정과가 담긴 그릇을 쥐어주기 전에 그 안에 침을 탁 뱉었다. 할 말을 잃고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니 목안을 긁어 가래를 억지로 끌어올려 카악, 하고 누런 덩어리를 한 번 더 뱉었다.
『자, 공짜야. 그러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얼른 마시렴.』

이렇게 꼬인 심성을 가진 아이가 나중에 자라 뭐가 될지 진심으로 걱정되기 시작했다. 저런 녀석이 관리가 되면 나라 돌아가는 꼬라지가 제법 볼만할 것이다.
물론 내가 처한 상황도 당장 걱정되긴 했다. 모르는 척 마시려니 비위가 상한다. 그렇다고 거부하자니 후환이 두렵다. 저치도 귀족이고 내 신분 또한 귀족이지만 나는 집안을 내세울 수 없는 상황이니 우리의 관계는 서로 동등하지 않다. 이런 마당에 상대방이 억지를 쓰면 곤란해지는 건 이쪽이다.
『어서 쭈욱~ 들이키렴.』
내 마음 한 가운데로 내리꽂힐 번뇌의 우뢰가 짐작된다며 아이는 심술로 가득 찬 눈을 반짝였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잔을 입술에 가져갔다.
어차피 독이 든 것도 아니니 마신다고 죽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주란새가의 정치범 수용소를 떠올리면 이런 건 차라리 귀여운 장난이다. 거기선 간수가 죄수에게 억지로 오줌을 마시게 하거나 진흙을 먹게 만들었다. 침을 뱉은 음료수? 단 맛을 보고 싶었을 죄수들은 허락해달라며 반대로 애걸복걸했을 거다.
눈을 감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꿀꺽 삼키는 것으로 끝을 낼 수 있으면 그렇게 하도록 하자.

- 진짜로 그걸 삼키려고? 그렇게 화가 났으면서?
입술을 벌려 액체를 입안에 담던 순간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안즈도 아니고, 원래의 나도 아닌, 막연하게 꺼려지는 그런 종류였다.
잔을 도로 입에서 떼어내며 이마를 찌푸렸다.
- 차라리 저 녀석의 목덜미를 으드득 콰드득 씹어 삼키는 건 어때. 보라고, 아주 연약해 보이는 고기잖아?
이건 도대체 무엇의 목소리일까.
- 먹음직하게 생겼구나. 저 어린 살은 분명 맛도 좋겠지.
짐승의 목소리?

실눈을 가만히 뜨고서 입에 머금은 걸 빨리 삼키라 종용하는 소년을 쳐다봤다.
『푸웃---!!』
그리고 나는 사래가 들어 입안에 든 건정과를 만장하신 가운데 뿜었다.
건정과는 빛깔이 제법 짙은 음료로 밝은 옷감에 매우 심각한 얼룩을 남긴다. 급히 빨아도 깨끗하게 지우기 힘들다. 나름 꾀를 내어 뜨거운 물에 삶으면 반대로 얼룩이 고착되어 영원히 지울 수 없게 된다.
아니, 그 이전에... 나는 진심으로 허둥거렸다.
- 방금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사람을 먹는 상상을 하자 입안에 침이 고이려 했다.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이건 고의가 아니었어요.』
『뭐얏?!!』
『진짭니다. 일부러 그런게 아닙니다. 이걸 어쩌죠. 정말 미안합니다. 얼룩이...』
『닥쳐! 네가 한 짓에 대한 댓가는 앞으로 톡톡히 갚아나가야 할 거다.』
얼굴이 벌겋게 변해 부리나케 연회당을 빠져나가는 소년을 붙잡지도 못하고 나는 망연자실했다.

『이야... 못 말리는 녀석이군. 저거, 이제 보니 완전 습관 아니야?』
날  비난하는 목소리는 실내에서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반쯤 열린 창문 밖에서 들려왔다.
『내 머리엔 토를 뿜더니, 이젠 건정과도 먹다 말고 뿜는 거냐. 그거 참 뭐랄까, 적을 물리치는 방법으로는 최악이잖아. 따라하려는 자가 있으면 감히 맹세하는데 주먹으로 때려죽일테다.』
얼어붙었다가 가까스로 몸을 움직여 뒤를 돌아보니 창문 너머로 스물 초반 나이의 청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기 집 안방인양 편안하게 나무를 타고 올라간 그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투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대는 중이었다. 오늘만큼은 장수의 복장이 아닌 자색 비단의 평복 차림새였지만 나는 단번에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사실 그와의 만남이 어떠했다는 걸 고려하자면 옷을 바꿔입은 걸로 못 알아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여어! 꼬맹이.』
묶지 않은 목덜미의 끈 두 가닥이 바람에 하늘하늘 나부꼈다.

Posted by 미야

2015/05/20 10:14 2015/05/20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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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 예식은 지루함을 느낄 정도로 별 문제없이 진행되어 마침내 석양이 사방으로 붉게 번짐과 같이하여 모든 행사가 무사히 종료되었다.
《퇴전~! 향락~! 응립~!》
물러가라는 신호에 따라 맨 앞줄에 섰던 이들부터 눈두덩이를 손등으로 누른 자세로 제보전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맨 뒷줄에 선 관계로 가장 늦게 입장했음에도 가장 늦게 빠져나가게 된 우리는 얌전히 순서를 기다렸는데, 무료한 건 둘째고 그 와중에도 내 실수를 못 마땅히 여긴 의전관이 슬그머니 다가와 남들 모르게 옆구리를 꼬집는 걸 잊지 않았다. 그게 또 무지하게 매운 손맛이어서 나는 그냥 자지러졌다.
「이놈이 도중에 갑자기 망할 머리를 쳐들어 여러 사람 놀라게 만들고... 사고를 안 쳐 다행이지. 하여간 촌뜨기들은 어디를 가든 꼭 말썽이라니까. 폐하의 용안이 어떤 모습일지 그게 그렇게 궁금하더냐. 흥! 소원은 성취했으니 당장 죽어도 불만은 없겠구나.」
입술도 안 움직이고 소리를 내어 날 책망하는데 뭐라 대들지도 못하겠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소원을 성취하다니.
붙잡고 진지하게 묻고 싶었다.
아니, 이보시오. 저 높은 곳으로 누가 있기는 있었소?!

더듬더듬 물어보자 린청은 가만히 물그릇을 내밀었다. 갈증이 심해 내 머리가 살짝 이상해졌다 여기는 듯했다. 물론 나는 매우 목이 마른 상태였고, 이젠 살았다는 투로 벌컥벌컥 물을 들이키느라 바빴다. 서둘다보니 사래가 들려 기침도 터졌다. 덕분에 입으로 넣은 물이 콧구멍을 통과하여 줄줄 새어나왔다.
『황제? 몰라. 코가 하나 달리고 눈이 두 개인 사람이겠지. 적손의 얼굴은 네가 쳐다봤지, 내가 본게 아니잖아.』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답답하여 가슴을 치니 물 마시고 체한 거냐 안스럽게 쳐다본다. 이걸 어떻게 얘기를 풀어간담.
『적손께서 거기에 계셨어? 분명 계셨어?』
『응?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거기에 안 있음 경공법을 써서 지붕 위에라도 올라가셨겠어?』
린청은 내가 무엇을 묻는 건지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렇게 허둥거려, 안즈. 훔쳐보니 평범한 사람과 달라 이마에 눈이 하나 더 달렸든? 그래서 그렇게 놀랐어?』
『그런게 아니라...!』
『아, 국화 찐빵이다.』

만 하루 동안의 단식이 끝났으니 이어지는 것은 잔치다. 단단히 허기졌던 아이들은 지금만큼은 예절이고 품위고 모두 팽개치고 정성껏 마련한 음식에 팔을 걷어붙인 채 달려들었다. 하수들도 모처럼 신이 나서 있는 솜씨 없는 솜씨 부린데다 시장기에 맹물도 꿀처럼 달게 느껴질 터이니 평소 점잔을 빼던 연회당은 시장바닥처럼 소란하기 짝이 없었다.
모양만 좋을 뿐 감질나게 만드는 다과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고 식사 대신으로 삼을 국수며 찐빵이며 고기완자에 잔뜩 눈독을 들인 상태로, 린청만 해도 접시에 옮겨 담은 고기의 가짓수가 장난이 아니었다. 밀가루 반죽에 큰 새우를 넣어 기름에 튀긴 메보는 무려 다섯 개나 집었다. 그러고도 성이 차질 않는다며 굴 즙으로 맛을 내고 양파와 같이 볶은 밥을 주걱으로 푹푹 떴다. 소식을 하는 내 입장에선 이틀 치 식사량이었지만 린청은 당연히 혼자서 전부 먹어치울 거라 했다.
『음, 이건 많이 매운데. 그래서 궁금한게 뭐라고?』
『그.러.니.까!』
『닭요리 싫어해? 왜 접시에 음식을 하나도 담지 않는 거야. 혹시 편식하는 거야? 그럼 못 쓰지.』
『어... 그건. 나도 닭요리는 좋아하는 편이고...』
『오! 그건 집지 마라, 맛이 엄청 짜다. 제국인들은 원래 맵고, 짜고, 단 음식을 좋아하나? 세상에, 단팥을 넣은 이 스란은 왜 이리 단 거야! 설탕 범벅이잖아.』
이래선 대화 자체가 되지 않는다. 안타까움과 속상함이 배가 되어 나는 발을 동동 굴러댔다.

『못 봤단 말이야.』
『뭘.』
『황제 폐하.』
『아이고, 그거 억울했겠구나~!! 작정하고 노렸는데 실컷 야단만 맞고 결국 적손의 버선코만 본 거야? 너 진짜 억울했겠다. 게다가 그 망할 의전관이 널 엄청 꼬집어댔잖아.』
우물우물 밥을 씹던 린청이 정말 안 되었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 반응도 이해가 안 간다.
애초부터 황제가 그 자리에 있기는 있었느냐고.
내가 봤던 건 사람이 아니라 그저 내관이 들고 옮긴 깃발이었다.

린청의 입으로부터 튀어나와 내 뺨으로 옮겨붙은 밥알을 떼어내며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다시 이어갔다.
『내관이 깃발을 앞세우고 나타나서 그걸 적손이 앉을 가람막 뒤로 가져가더라고.』
『깃발? 무슨 깃발.』
『그러니까 아까부터 계속 얘기하잖아. 적손은 온데간데 없고 대신 깃발이 있었다니까!』
내 심각함에 덩달아 린청 역시 그 얼굴에서 웃음을 슬그머니 지웠다.
『너 분명 더위 먹었다. 황제 납시오, 이러고 뜬금없이 깃발이 대신 등장했다는 거냐?』
『그렇다니까!』
『너.., 시력이 그렇게 많이 안 좋아?』
『몰라!』
그만할란다. 더 얘기했다간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릴 것 같다.

전해져 오는 옛날 이야기에 이런게 있다.
신라국에 고귀한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는 요술의 비단이 있었는데 그걸 둘째라면 서러울 부자가 엄청난 금액을 들여 다섯 필을 구입해 자신의 의복을 짓게 했다.
그런데 완성된 물건이랍시고 받아보니 상자 속이 텅 비어 있었다.
여기 들었을 물건은 보물인데 그걸 빼돌렸구나 - 부자는 화가 치밀어 배달을 책임진 하인을 회초리로 때렸다.
하인은 애고 아프다 고함을 지르며 항변한다.
이 고운 빛깔의 외출복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아 절 꾸중하는 겁니까, 나리.

하여 생각해볼 수 있는 건
① 하인이 끝까지 거짓말을 했다. 상자는 처음부터 비어 있었다. 부자는 사기를 당했다.
② 부자는 고귀한 자가 아니라서 신라국의 요술 비단으로 지은 외출복을 눈으로 볼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그다지 기분 좋은 결말은 아니다.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런가. 요술...이었나.』
신라국의 비단까지는 아니겠으나 그것들 전부가 요술의 일종이었다고 하면 그럭저럭 설명이 된다.
제보전에 나타난 황제는 요술로 만든 허상이었다 - 모두가 눈치를 채지 못하는 가운데 내관이 요술 깃발을 재빨리 가림막 뒤로 옮기면 황제 또한 자리를 옮긴 것처럼 보이게 된다. 어쩌면 허기와 탈수로 인한 집단 환각이었을 수도 있지만... 요술이라고 여기는게 적절할 것이다.
『헤에, 뭐야. 그런 거였나. 나이가 있을 테니 몸이 안 좋았을 수도 있고... 단순히 행사 참석이 귀찮았던 거였을지도 모르지. 그래... 이제 이해가 간다. 요술이었구나.』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때리며 스스로 납득하자 옆에서 린청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것저것 말하기 귀찮았던 나는 마실 것을 가져오겠다고 적당히 둘러대고 장소를 떠났다.

Posted by 미야

2015/05/18 22:33 2015/05/18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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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5/05/20 01:31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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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감상을 적자면 이런 건 결코 무용이라고 할 수 없었다.
『무게가 거의 없는 솜뭉치를 안는 기분으로 양팔을 앞으로 내밀어. 그리고 오른쪽 다리를 사선으로 틀어 옆으로 반보 전진하는 거야. 아니야, 그렇게 많이 벌리면 상체가 흔들려서 안 돼. 미끄러지듯 조금만. 거기서 재빨리 돌아 크게 숨을 내쉬고, 엉덩이와 허리를 일직선으로 고정하여 똑바로 선다. 이제 팔을 위아래로 흔들면서 무릎을 살짝 굽혀... 아니, 그보다 더 구부려.』
그보다는 건강 체조에 더 가깝지 않은가 - 그렇게 생각한다.
게다가 제1보부터 2보까지만 외우면 이후로는 식은 죽 먹기라서 예의 동작이 고스란히 반복된다.

하늘에 감사하고, 땅에 감사하고, 은하와 별들의 운행함에 감사하고, 부모에게 감사하고...
용신의 은혜에 감사하고, 생명 있음에 감사하고, 황제의 은덕에 감사한다. 이것이 칠배례.

『요령을 알면 아주 쉬워.』
『과연.』
소년은 기억력이 좋았다. 세 번 정도 반복하자 어색했던 동작이 물 흐르듯 바뀌고 틀리는 부분이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보기에 매우 좋았다. 무예를 익힌 몸이라 그런지 간결하고도 기백이 넘쳤다.
책에 적혀진 그대로 정확하게 움직일 줄 알아도 근본부터가 물렁뼈인 나와는 느낌이 많이 달라 나는 박수라도 치고 싶어졌다. 세상에, 같은 춤인데 사람에 따라 이렇게나 느낌이 달라질 수 있는 거였다. 앞줄에 세워 자랑하고 싶을 정도다. 머리를 길게 기른, 남의 말 안 듣는 변방국 사람이라는 불리한 조건만 아니었으면 선발되어 뽑혔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저 등을 전부 덮는 길이의 머리카락은 여기선 너무 눈에 튀는데...
『머리카락은 죽어도 안 자를 거다.』
속으로 생각만 했을 뿐인데 린청이 투덜거렸다.
그 짧은 기간동안 나름 마음 고생이 심했던 것 같다. 어쩌면 직접적으로 가위를 들고 린청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을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린청은 주먹질을 해가며 위기를 모면해왔던 걸까, 냅둬라, 관둬라, 언성을 높여가며 싸웠을 그를 상상해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왜 한숨이야. 기분 나쁘게.』
『글쎄, 왜 한숨이 나오는 걸까,』
당분간 머리 모양에 대한 이야기는 서로의 심혈관 질환 방지를 위해서라도 피하는게 좋을 듯하다.

『어쨌든 부럽다. 내가 추는 예식의 춤은... 뭐랄까. 운동을 전혀 못하는 자가 억지로 시늉하며 허우적대는 그런 느낌인데 말이지.』
『자학이 심하군, 안즈.』
『하지만 그렇게 보인다고 늘 놀림을 받은 걸. 커다란 물 양동이를 들고 무게에 버거워하는 엉덩이 큰 여인처럼 하체가 이리저리 흔들흔들...』
『누가 그런 심한 말을 하든? 예의 그 꺼벙이들?』
『아니, 그 녀석들이 아니라 사실은...』
오래 전 내 친구가, 라고 말하려다 합죽이가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린청은 반쯤 벌어진 내 입을 주시하며 이어질 대답을 차분하게 기다렸다.
하지만 그「오래 전 나의 벗이었던 자」에 대해 설명을 할 수 없었던 나는 가볍게 도리질하며 웃기만 했다.
『누가 그랬다고?』
『어, 그게.』
『무시해버려.』
꺼벙이들 짓이라고 멋대로 단정을 지은 린청은 시원하게 잘라 말했다.
『머리가 텅 빈 바보가 지껄이는 말에 일일이 신경 쓰다간 오장육부가 썩는다.』
그가 지적한 바보라는 자가 제국의 황제라는 걸 알면 린청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돌연 궁금해졌다.

「그로부터 세월이 이렇게나 오래 흘러버렸으니 나의 친우도 많이 늙었겠구나...」
이 세계의 평균수명은 결코 길지 않다. 청룡의 용주(龍珠)이자 용선인(龍仙人)인 김 가(家) 태영의 말로는 자기가 원래 살았던 세계에선 평균수명이 80세가 넘었다던데 나로선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얘기고...
그래도 용신의 수호를 받는 이사실의 황족들은 누구랄 것 없이 신체 건강하고 보기 드문 장수 체질이다. 선황께서도 백수(99세)를 넘어 중수(100세)를 누리셨으니 녀석도 분명 칠순(70세)을 무사히 맞이하였을 것이다. 빈사국의 외진 골방에선 제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접할 수는 없었다만, 이사실의 황제가 붕어했다면 화산폭발이나 지진에 버금가는 큰일이니 분명 내 귀에도 소식이 들어왔을 거다.

어지러운 상념에 빠져 가만히 손가락을 입에 넣고 지분거렸다.
아직 살아있을 것이다, 그럴 것이다... 그는 하얗게 샌 백발을 자랑하며 건강하게 잘 있을 것이다.
『갑자기 왜 그래, 안즈. 식은땀을 흘리고.』
『배가 너무 고파서.』
『그거 큰일이군! 그런데 손톱을 씹는다고 허기가 가시겠어?』
그의 지적에 얼른 입에서 손가락을 빼내었지만 정체 모를 초조함은 쉬이 가시질 않았다.
지리가 안즈로 다시 태어난 이상 이제는 완전 남남인 관계가 되어버렸지만.
그렇게 끊어진 관계에도 불구하고 나의 일부분은 여전히 과거 어느 지점에 묶여 있다.

소원대로 네가 그토록 좋아하던 책들과 같이 불살라 죽여주지.

떠올리자 현기증이 일었다.
『이봐!』
『조금 어지러워서.』
『낭패군. 그럼 그늘에서 조금 쉴까?』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조금 숨을 고르면 괜찮아질 거야.』
시간은 누가 뭐래도 흘러간다. 가로막는다고 멈추는 일 없고, 흔든다고 제 길 아닌 곳으로 돌아가는 일 없다.

때마침 의전관이 타를 울려 모두를 환기시켰다. 무시할 수 없는 큼직한 탕, 하는 소리를 듣고 우리처럼 줄에서 벗어난 자들이 묵묵히 신을 고쳐 신고 자리로 돌아왔다.
잡담하는 이 없이 일순간 모두 입을 다물자 주변은 매우 엄숙해졌다.
그 고요함을 제물로 삼아 선두에 선 의전관이 다시 타를 들어 탕 탕, 간격을 길게 두 번 울렸다.
《각오~!》
저건 그저 준비하라는 뜻인데 나의 귀에는 다른 의미로 들렸다.
전장에 나가는 것처럼 각오해야 하나? 그럴 리 없지. 우스워. 이런 적 없었잖아. 겁먹을 필요 없어.
어느새 중천에 뜬 해가 뉘엿뉘엿 기울기 시작했다. 약해지는 햇빛에 나는 약간 안도했다. 앞 사람의 그림자에 가리워질 내 얼굴 같은 건 저 위에선 먹으로 검게 물들인 종이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니... 이 안타까움은 쓸데없다.
《입장~!》
나는 안즈. 내 이름은 안즈.
제 명에 죽지 못한 책벌레 부서고서리의 팔자가 이제 와 서럽다한들 나와 무슨 상관이리.

하늘에 감사하시오, 무량의 은혜를 입었음이니... 땅에 감사하시오, 무량의 은혜를 입었음이니.
예식이 시작되어도 황제는 나서지 않는다. 칠배례가 황제 개인에게 바치는 의례가 아닌 탓이다. 황제의 육신 자체가 신룡을 대신하는 입장이지만 절까지 대신 받는 건 도에 지나치다.
은하와 별들의 운행함에 감사하시오, 무량의 은혜를 입었음이니.
이 순간엔 배고픔과 목마름도 잊는다. 분위기에 압도되어 숙연한 기분마저 든다.
부모님에게 감사하시오, 생명 있음에 감사하시오, 무량의 은혜를 입었음이니.
모든 조화와 섭리에 수긍하며 이에 한 목소리로 화답한다.
감사하오, 감사하오. 무량의 은혜에 감사하오.

《위전~!!》
황제가 위용을 뽐내며 제보전으로 입장하는 건 이 무렵이다.
적손의 은덕에 감사하시오, 무량의 은혜를 입었음이니.
의전관들의 봉납 노래가 끝남과 같이하여 춤추던 이들이 저마다 허리를 절반으로 구부렸다.

마음속에 무엇이 자라났는가, 이것은 풀인가 아니면 꽃인가
그것도 아니면 그저 이기심인가
그대는 분명 나라는 존재를 잊었는데
밤중에 이슬이 내려 마치 비라도 내린 듯 젖은 속눈썹 무거워
눈을 질끈 감고 사랑하는 이여 오랜만이군요, 말을 걸어보고 싶어라

참을 수 없는 충동이 일어 무언가에 홀린 듯 고개를 들었다. 아니, 들려고 했다.
「보면 안 돼!」
옆으로 자리한 린청이 재빨리 손을 뻗어 무지막지한 힘으로 내 머리통을 찍어 눌렀다.
다시 타가 세 번 울리자 모두가 손등으로 눈을 가렸고 높으신 이 또한 준비된 가림막 뒤로 자리를 옮겼다.

Posted by 미야

2015/05/17 01:55 2015/05/17 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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