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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걸음을 사뿐사뿐 옮길 적마다 한 마리 나비가 꽃밭을 날아다는 것 같았다.
나는 두 팔로 턱을 괴고 앉아 나른하고 졸린 표정으로 봄을 만끽했다.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먼 여행길에 오른다며 머리카락부터 잘린 내 입장에선 질투가 나기도 했다.
도대체 할멈은 왜 내 머리를 이런 모양으로 만들었을까.
싹 돋는 모양새의 앞머리를 잡아당기며 한숨을 쉬었다. 원래의 길이로 자라려면 앞으로 몇 년은 걸릴 것이다.
『에휴... 나도 저랬으면 좋겠다.』

그런데 의외로 주변에서의 반응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어서 심지어 나에게 말린 생강을 나눠준 남자는「지나치다」라는 표현을 쓰며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안 좋아요. 왜냐하면 나오거든요. 저러면 너무 눈에 띄어요.』
『뭐가 나오는데. 설마.., 곰?』
『에엑?! 그건 또 뭔 소리랍니까. 제가 말하고자 했던 건 강도에요, 강도!』
농담이겠지. 나는 제법 놀랐다.
인적이 많은 곳도 아니고 주변은 우거진 숲이니 외길 따라 노상강도 출몰은 당연한 거 아니겠느냐 생각하기 쉽지만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하고 빠뜨린 부분이 있다. 바로 요마(妖魔)다.

이 세계에는 다섯의 바다와 여섯의 육지가 존재한다. 그리고 용은 스물한 마리가 있다.
이중에서 사람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사막, 혹은 깊은 바다에 둥지를 틀거나 얼어붙은 동토에서 기나긴 잠이 든 용들을 제외하면 대략 열둘에서 열일곱 정도의 용이 인간과 더불어 자신의 고유 영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용은 그리고 인간들로부터 신으로서 숭배를 받는다.
숭배 받는 용들 중에서 흰색, 검정, 빨강, 파랑, 황금색 다섯은 으뜸이다.
내가 태어난 빈사국 주변은 성격 급하기로 유명한 적룡이 치세하는 곳이고, 적룡은 제국 이사실의 실세이며, 그 영토는 서대륙에서 가장 넓다. 그리고 무지막지하게 넓은 만큼 치룡(緇龍), 녹각용, 오색신, 명라각희(鳴螺珏姬)의 영역과 서로 경계가 맞닿아 있고 더러는 미묘하게 공백이다.
겹치면 겹쳐지지 왜 공백이냐고? 인위적으로 그려놓은 국경선을 두고 전쟁을 밥 먹듯 해대는 인간과 달라 용들은 그런 부분에서만큼은 대인배적이라고나 할까... 이 산은 내 것, 저 호수는 네 것, 이러며 다투는 법 없이 어느 정도 선에서 눈감아 버린다. 실제로 나이가 어린 편에 속하는 치룡에 대한 적룡의 처신은 놀랍도록 관대해서 - 그 지랄 같은 성격에도 불구하고 - 야금야금 치고 올라오는 치룡을 두고도 콧방귀 한 번 뀌지 않았다. 하긴, 그들이 진짜로 싸우겠다며 팔을 걷어붙이면 세계가 수십 번 멸망해버려도 부족할 터이니 우리로선 그 편이 좋다.
아무튼 이런 까닭으로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않아 내버려두는 변경이 생긴다.
하지만 용들이 시선을 두지 않는 땅에서는 전염병이 창궐하듯 요마가 득실거리게 된다.

말린 생강을 입안에 털어넣다 말고 코를 막았다. 우에, 쓸데없이 맵다... 쏙 우러나온 눈물을 닦고 다시 말했다.
『가고한(* 한은 높다는 뜻으로 산이나 언덕을 의미)에서 단가고한까지 요마가 많이 나올텐데.』
『헤에~ 신기하네. 어린 아기님이 용케 그런 걸 다 알고 계시네요. 예전에는 그랬습죠. 한 30년 전까지만 해도 무인의 호위 없이는 단가고한에 쉽사리 들어가질 못했으니까요. 서른 척 크기의 로쿠리가 호랑이를 커다란 발톱으로 잡아다가 이렇게! 요렇게~!』
양손으로 뭔가를 쥐어뜯는 동작을 호들갑스럽게 해가며 남자가 말했다.
아무리 잘 봐도 그 무서운 로쿠리는 아니고 아낙네가 닭 모가지 비트는 것과 비슷은 했다.
『머리부터 댕겅 부러뜨리고 한 입에 꿀꺽 삼켰다는 이야기도 있습지요. 지어낸 얘기 같지요? 하지만 가짜가 아니랍니다. 이 근방으로 전해지는 그런 식의 이야기가 아주 많습니다. 밭일을 하다 사람이 갑자기 없어지는데 어느 날 옷을 뒤집어 입고 집으로 돌아와선 자기 처자식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죽이는 겁니다. 사람들이 놀라서 달려오면 자기 아들의 얼굴을 뜯어먹곤 시뻘개진 얼굴로 와그작 꿀꺽...』
가고한 지방에 잘 나오는 둔갑 요괴다. 둔갑은 감쪽같으나 사람의 옷 입는 법을 몰라 바지를 양팔에 꿰고 나타나기도 한다. 아이를 잡아먹은 뒤에 그 아이의 모습으로 변해 길가를 떠돌면 부모가 길 잃은 자녀를 되찾아 집으로 데려가게 되고 결국 온 집안이 몰살당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아주 악질인 종류다.
『무섭죠? 헤헤헤.』
이쪽에서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자니 손짓발짓 섞어가며 실감나게 애기하던 남자가 저 혼자 좋아라 했다. 애를 겁줘서 잘도 신이 나겠다. 거기다 내가 느끼는 이 뿌리 깊은 혐오의 감정을 다른 종류로 착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안심하세요. 우리 적룡님의 은총을 받는 땅이 되고부터는 사람들이 들어가 자리를 잡고 살고 있으니 참 다행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정보를 더 얻을 요령에 자세를 바로잡고 질문을 해봤다.
『그렇다면 그 가고한에까지 인가가 들어섰다는 건가.』
『숯 만드는 사람들이 몰려들다보니 어느새 마을을 이루었습니다요. 대신 강도가 늘어 거기서 거기지만요. 여전히 치안은 좋지가 않아요.』
그래서 다시 산적 이야기로 돌아왔다.

『하지만 르주실 지역에 적룡군 5단병이 주둔해 있어. 원래는 요마를 토벌하던 병사들이지만 국경 문제도 있으니 토벌할 요마의 씨가 말랐다는 이유로 철수시키진 않았을 거야. 그러니 간 커다란 산적놈들도 함부로 야적질을 하진 못할 터인데?』
머리 속으로 지도를 여러 개 펼쳐놓은 채 그렇게 말하자 몸종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틀렸다. 내가 외우고 있는 지도는 오래되었기도 했거니와 일반인 열람 금지였다. 상상의 두루마리를 갈무리하여 원래의 장소로 치워두고 고개를 똑바로 들자 석연치 않아하는 남자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어, 그런 어려운 이야긴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뭐... 나도 그다지 잘 아는 내용도 아니라서.』
애매하게 말을 얼버무렸으나 이쪽을 보는 남자의 표정은 여전히 의심으로 가득 찬 채였다.
『아, 개구리다!』
작은 돌을 들어 수풀을 향해 아무렇게나 던지는 것으로 사내의 주의를 분산시켰다.
『저기! 바로 저기에!』
쓸데없이 의심을 받을 염려가 크니 다음부터는 말을 조심해야 하겠다.

어쨌거나 싫든 좋든 아무래도 강도 걱정은 해야 할 것 같다.
일부 마차에는 큰 칼을 찬 개별 호위대가 붙었으나 나 같은 사람은 두어 명의 몸종이 전부다.
마차 안에는 시골 촌부가 보면 눈이 휘둥그레 벌어질 비싼 옷가지와 장신구들이 있고, 뭐니뭐니해도 신분이 높은 아이들을 납치하면 그들의 부모로부터 큰돈을 받아낼 수도 있다.
『그러고보니 예전에도 그런 일이 종종 있었지.』
심하면 노예로 팔려나가 행방이 묘연해지기도... 휘사 같은 아리따운 소녀가 납치를 당하면 아마 몸무게만큼의 은값으로 팔려나갈 것이다. 만 11세 여아라고 가정을 하면 대략 33둔... 말이 그렇지 은이 33둔이다. 그 정도의 금액이면 탐심에 눈이 먼 나머지 잘 발려진 낫을 쥐고 마차를 향해 곧장 덤벼들 수도 있다. 계획을 잘 짜는 놈들이라면 계곡 위에서 바위를 굴리거나 하여 소동을 일으킨 뒤에 곧장 길 주변으로 불을 놓아 이쪽의 움직임을 봉쇄할 수도 있고... 화살을 쏘아 말을 맞추면 폭주하여 뒤집히는 마차도 나올 것이다.
덜컹거리는 마차의 움직임에 몸을 맏기며 이러저러 상상을 하고 있자니 쓸데없이 머리만 아파왔다.
『강도라... 이거 예감이 영 안 좋은 걸.』
그리고 진짜로 커다랗게 쿵 소리를 내며 내가 탄 마차의 바퀴가 빠져버렸다.

Posted by 미야

2015/05/01 20:18 2015/05/0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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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급자족용 오리지날 습작입니다.


가지라고 내민 몇 가닥의 솔잎을 쳐다보는 소년의 눈빛은 들개처럼 사나웠다.

가족과 헤어지고 익숙한 환경으로부터 강제로 뜯겨져 나온 아이들은 대다수 겁에 질린다.
겁에 질린 인간이 보이는 반응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숨는 것이고 하나는 공격하는 것이다.
어른과 달리 신체가 덜 발달한 아이들인 만큼 아무래도 공격을 시도하기 보다는 몸을 작게 움츠릴 거라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대기 일쑤다. 판단력이 미숙한 탓도 있고 작은 자극에도 쉽게 흥분하기에 그러하다.
더 가까이 가면 물어뜯길 것 같아 이대로 관둘까 싶었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한 걸음 앞으로 더 다가갔다. 실제로는 나보다 키가 한 뼘은 족히 컸지만 겉모양만 어린애인 나와는 달리 상대는 진짜 어린애다.
쳐다보는 눈빛이 몹시 광망하다 여기는 대신 시범을 보이고자 녹색의 잎을 앞니로 깨물었다.

『무슨 짓이냐.』
그래봤자 미친놈 쳐다보듯 하는 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만.
『멀미가 심하다고 들었어. 이러고 있으면 조금 진정되거든. 자, 이거.』
아이 눈치를 보던 나는 약간 비굴한 자세로 실실 웃었다.
『속는 셈치고 입에 물고 있어봐.』
가만히 손안에 잎사귀를 쥐어주자 소년의 표정이 바람 빠진 가죽공처럼 팍 찌푸려졌다.
글쎄다... 이딴 쓰레기는 필요 없다며 팽개치려나.
하지만 소년은 그럭저럭 예의발랐다. 뭐 씹은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배운 구석은 있어서 시선을 옆으로 돌린 채 썩 내키지 않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떡거렸다. 요컨대 최소한 고개는 끄떡거렸다.
『나는 멀미를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속이 좋지 않았을 뿐이야.』
『그려, 속이 안 좋다 치고 입에 물고 있어봐.』
『괜찮다니까.』
『괜찮지 않다는 걸 아니까 이러지. 자, 멀미는 결코 부끄러운게 아니야. 그러니 입에 넣어봐.』
나의 지적질에 옆으로 치우쳐져 있던 눈동자가 다시 불꽃을 뿜으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어쩌면 천성이 사나운 건지도 모르겠다. 쏘아보는 기세가 반드시 죽여야 할 원수를 바라보는 듯하다. 그 기세가 내가 아는 누구를 꼭 닮아서 나도 모르게 반가움 마음이 들었다.

멀미 탓에 식사도 제대로 못 했으면서 빈정 상해 화가 치솟았던지 소년은 배에 잔뜩 힘을 주어 버럭 외쳤다. 덕분에 발음이 귀에 쏙 잘 들어왔다. 대륙어 표준말이었다.
『너는 생판 모르는 사람이 준 걸 아무렇지도 않게 넙죽 입에 넣고 그러나 보지?』
『그러는 넌 이런 잎사귀에까지 독이 발렸다 생각하는 거냐?』
『뭐?!』
비아냥에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맞받아치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듯하다. 입이 살짝 벌어진 채 이쪽을 쳐다보는데 그 상대방이 말대답은 따박따박 잘하는 주제에 싱글벙글 웃기까지 하고 있어서 더 기가 막히는 눈치다.
자자, 그러니 그만 눈에 힘 풀고 이거 받으셔.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겨요.
『여기 이상한 거 안 묻었어. 진짜야.』
『그런 생각은 안 했어. 다만 네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도 될지 판단이 서지 않았을 뿐이야. 약초도 아닌데 그런게 효과가 있을 것처럼 보이진 않... 그리고 너.』
소년이 넌더리를 내며 쓴웃음을 삼켰다.
『그만 해. 이런 식으로 나와 말을 섞고 친해지려고 해봤자 좋을 거 하나 없다.』
이번에는 내 쪽에서 코웃음을 칠 차례였다.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어. 아무렴 어느 바보가 풀쪼가리 하나로 선심을 사려고 하겠냐.』
손에 쥐어줬던 솔잎을 도로 뺏어다가 입안에 넣고 질겅 씹었다.
『강요하지 않을테니 탐탁치 않음 관둬. 보기와는 달리 가리는게 심하군. 음... 잎사귀 씹는게 싫은 눈치니 생강 말린 걸 추천하지. 효과는 이것과 아마 비슷할텐데... 시종들 중 누군가 양념으로 쓸 종류로 말린 생강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니 가서 물어봐줄까?』
괜한 오지랖이었을까. 소년이 이 앓는 소리를 내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리고 아랫배를 진동시켜「생강따위 알게 뭐야~!!」소리를 버럭 지른 것과 동시였다.

『어머나~ 왜들 난리람. 어느 쪽이 먼저 싸움을 걸었을지 궁금하네.』
모란꽃이 그려진 부채를 오른손에 쥔 소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색동소매 상의에 비단주름 꽃치마로 화려하게 꾸민 아이였다. 심지어 몇 주간의 마차 여행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복잡하게 땋아 진주장식의 값비싼 머리꽂이로 고정을 시켰는데 몇몇 아이들이 피로에 지쳐 세수조차 귀찮아한 걸 떠올리자면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이질감이 엄청났다.
『보나마나 린청 오라버니겠지. 호호.』
맑게 웃자 공기마저 깨끗해지는 느낌이었다. 뽀얀 목덜미에 작고 붉은 입술, 상당히 귀여운 외모를 가지고 있어 인형 같다는 말을 귀가 아프게 듣고 자랐을 것 같다. 또한 스스로가 예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 타인의 시선과 칭송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눈을 동그랗게 해서 쳐다보는 나를 두고도 뺨을 붉히는 법 없이 당당했다. 
『시끄럽다, 추녀.』
물론 눈이 삔 종족도 어딘가에는 존재한다.

서로 잘 아는 사이인 듯했다. 가만 보니 생김새도 비슷했다. 한 집에서 오빠 동생 두 아이를 사친으로 보냈을 리 없으니 두 사람의 관계는 아마도 사촌일 거라 추측했다. 
『너는 왜 항상 내가 먼저 시비를 걸었을 거라 단정하지? 휘사.』
『그거야 린청 오라버니가 산적 놈처럼 지랄맞... 크음! 성격이 나빠서 그렇지요. 이렇게 예쁜 아이를 상대로 언성을 높이고... 쯧쯧, 얼마나 놀랐을꼬. 보세요, 아이가 꿀단지를 먹었네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비유가 약간 엇나갔으나 린청이라고 불린 소년은 별 무리 없이 잘 알아들었다.
『걱정 마. 방금 전까지 멀쩡하게 방언 터졌었다. 지금은 널 보고 혀가 굳은 거야.』
『어머나~ 그거 정말?』
소녀는 손뼉을 치며 눈에 띄게 좋아했다.
『나의 아름다움에 할 말을 잊은 거야? 나이는 어려도 보는 눈이 있구나. 무리도 아니야. 내 자태가 선녀처럼 곱기는 하지. 허락할테니 마음껏 찬양하렴.』

듣다 못해 린청이 꽥 하고 고함을 질러댔다.
『돌았냐?! 이런 산길에서 그런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있음 신기해서라도 누구나 쳐다보게 된다! 도대체 네 녀석 머리속엔 상식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는 거냐?!』
그 말을 듣고서야 시선을 내려 그녀의 발을 쳐다봤다.
용신님이여 굽어 살피소서. 치마 아래로 드러난 건 진짜로 금락 구두였다. 고가 높고 뾰족하여 실내에서 신어도 발이 끔찍하게 아픈 종류다. 굽의 높이가 한 뼘 이상이기에 몸 균형 잡기는 당연 어렵고 그런 걸 신고 자갈밭을 걸어야 한다면 발톱에서 피가 날 거다. 오죽하면 우아한 고문 도구라고 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휘사는 치맛단을 좌우로 펄럭이며「내 신발이 어때서」라고 했다.

『때와 장소를 가려.』
『날 빛나게 하는 일에 때와 장소를 왜 가려. 남자들은 생각하는게 진짜 이상하다니까.』
『네가 비정상이얏!』
『오라버니가 여자 마음을 몰라서 그래. 모래폭풍 지옥에서조차 머리를 빗고 화장을 하는게 바로 여자라고.』
그렇게 대꾸하며 한껏 멋을 부려 올린 머리를 소중하게 어루만졌다.

Posted by 미야

2015/04/27 14:29 2015/04/27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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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급자족용 습작입니다. 일부 써뒀던 부분은 하드 말아먹으면서 전부 날아갔고... 1년 넘게 좌절 삼태기였다가 1인칭으로 바꿔서 처음부터 다시 쓰기 시작했네요.


「제국에선 원래 이렇게 하는 거래요」라면서 그들은 풍성하게 늘어진 내 머리카락을 가위로 잘랐다.
물론 제국인들이 단정하게 보이는게 가장 좋다면서 짧은 머리를 선호한다는 걸 잘 알고 있기는 하다. 용신 다음으로 신성한 존재라고 여겨지는 황제도 긴 머리는 귀찮다고 정색하며 기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거야 어디까지나 남자들 이야기고.
가볍다 못해 허전해진 뒷통수를 매만지며 의아해 하는 표정을 짓자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한가닥씩 줍던 할멈이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머니까요.』
내심 당황했다. 듣고 보니 더 모르겠다. 내 판단으로는 그것과 이것은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데... 내가 몰랐던, 여행 전에 머리를 다듬는 풍습이라도 있는 건가? 멀뚱거리며 설명을 기대했으나 할멈은 줄줄이 얘기하는게 귀찮은 것 같았다. 아니, 그것만으로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 여기는 듯했다.
이봐요? 나는 여자아이라니까요?
마른침을 삼키고 있자니 더하여 굽 낮은 신발과 바지까지 준비하여 내밀었다.
『그럼 입는 것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안즈 님.』
그녀는 손톱자국이 남을 정도로 내 팔을 우악스럽게 꽉 잡더니 소매 속으로 억지로 끼어 넣었다. 팔목이 비틀려 나도 모르게 악 소리를 지를 뻔했다. 눈물을 글썽거리는데 홑겹의 면으로 만든 치마가 벗겨졌다. 단추를 채우는 손길은 야무지고 신속했다.
거울을 보자 어느 틈에 빼빼 마르고 왜소한 몸집의 소년이 이쪽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사친으로 간다 결정이 내려지자 짐을 꾸릴 시간조차 촉박해서 석별의 정을 나누는 과정은 과감히 생략되었다.
대신 아버지는 어떤 상황에서건 가문의 명예를 항상 염두에 두라는 딱딱한 내용으로 글을 적어 내려 보냈고, 어디로 사라지지 않을 그놈의 망할 허례허식에 따라 서찰은 값비싼 나전 장식이 된 검정 상자 속에 정중히 봉인된 채 하달되었다.
두 팔로 상자를 받아들자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려 했다.
내용물은 그렇다치고 자결용 단검이나 목을 매는 용도의 비단 끈이 들어가 있으면 어울릴 법한 상자이지 않은가. 진짜로 죽으라 하는 줄 알고 잠시나마 기겁을 했다.
「허! 상자를 팔면 돈은 되겠구먼. 하지만 왜?」
아무튼 아버지라는 사람은 어디서 잘못 배운 이상한 걸 흉내 내어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이제 그만 마차에 오르시지요, 안즈 님. 일정이 촉박합니다.』
『아.』
리세리를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는데.
손목을 잡힌 채 끌려가며 나는 내 귀여운 이복동생을 생각했다.
짐짓 돌아보니 우리 집 지붕이 궁궐처럼 드높았다. 높게 솟은 처마의 휘어짐이 무시할 수 없는 정도의 위엄을 내뿜었다.

『나 같으면 펑펑 울고 기절했겠구먼. 자기 처지를 알고는 있는 건가?』
『그러게. 완전히 남의 일이라는 식으로 멍한 얼굴이네.』
『단순히 바보인 건지도 몰러. 평소에도 꾸벅꾸벅 잘만 졸았잖아? 코앞에서 빗자루를 쓸며 일부러 먼지를 일으켜도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하긴. 평소에도 불도 안 킨 어두운 방에 움직이지도 않고 오도카니 앉아만 있곤 했지.』
『아유, 소름 돋아. 무슨 어린애가 그렇담.』
『옛날에 약을 잘못 먹어 저렇게 되었다는 말도 있던데? 너 혹시 아니?』
『아, 나도 그 얘기 들은 적 있다. 배앓이 약이랍시고 친모가 쥐약을 먹였다고...』
『쥐약을?! 어머나, 끔찍스러워라.』

이럴 적엔 귀가 좋은게 흉이 되어버린다.
아니, 이 사람들아. 나도 슬프거든요?! 집에서 내쫓겼다는 거 잘 알거든요?!
그리고 내 어머니가 나에게 쥐약을 먹였다는 건 얼토당토않은 유언비어거든요?!
『썩을 것들!』
짐을 싣던 짐꾼이 내뱉은 욕설을 들은 모양이다. 사내는 놀란 눈을 크게 치켜뜨고 입을 헤 벌렸다. 그러나 여전히 내 표정이 무덤덤했기에 이내 다른 이가 투덜거리는 말을 잘못 들었거니 스스로 납득하는 눈치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가 아니고 대략 일곱 살 전후로 원래의 인격과 기억이 돌아오게 되는데 이것에 대한 작동 원리라던가 구조라는 건 알지 못한다.
다만 지금까지 이 각성의 과정을 여러 번 경험해본 당사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젖먹이 시절에 그런 끔찍한 일을 경험하지 않아 그나마 다행스럽다 생각한다.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가 서서히 눈을 뜨고 깨어나는 모습을 상상했다면 그냥 웃겠다. 의외로 상당히 고통스럽고 폭력적인 경험이다. 탈피를 하려면 낡은 등껍질부터 부셔야 함과 마찬가지로 영혼의 외형이 깨져야만 그 속에 든 알맹이가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음이다. 고통은 아마도 그런 면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저녁식사 시간이었고, 하필이면 수저로 밥을 떠서 입안에 넣는 순간 각성의 때가 찾아왔는데 당시의 일을 회상하던 할멈의 표현을 빌리자면「별안간 밥상을 뒤엎더니 바닥에 쓰러져 다리로 벽을 차고,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삼킨 음식을 남김없이 토했으며, 이내 입술이 파랗게 변한 상태에서 두 팔로 자기 머리를 쥐어 몸통에서 뽑으려 하였습니다.」란다. 그거 참... 뭐랄까. 전해들은 이야기만으로도 오싹했다.
반응이 하도 격렬하니 독을 먹었다 착각할 법하다. 눈이 돌아간 상태로 거품까지 뿜는 걸 보곤 대뜸 쥐약을 떠올렸다고 한다.

- 돈을 요구하던 생모가 나리의 금전제공 거절에 불만을 품고 아이에게 약을 먹였다.

일경이 겨우 지났을 뿐인데 불경스런 수근거림이 온 집안에 퍼졌고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아버지는 호랑이 무늬가 조각된 비싼 벼루를 마룻바닥에 팽개치며 대노했다.
「누가 건드렸느냐. 내가 아직 허락하지 않았는데 누가 감히 내 명령 없이 손을 썼느냔 말이다!」
화를 내는 부분이 살짝 엇나가 있었지만, 아무튼.
나중에 듣기로는 개구멍을 통해 은밀히 집안으로 들어온 의원이 바닥에 흘린 반찬과 국을 싸서 조용히 가져갔다고 했다. 주방 일을 하는 여자들은 날벼락을 맞았는데 특히 찬을 만드는 이들이 뒷마당으로 끌려가 호된 매질을 당했다. 조사를 마친 의원이「수상한 점은 없었습니다」보고를 올렸음에도 사흘 내내 경을 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자리를 보전하고 드러누워 열에 들뜬 채 헛소리를 중얼거렸고, 때로는 노래를, 때로는 구애를, 그리고 누군가를 향해 애원과 사죄하기를 반복했다. 몇 백년간 누적된 기억과 이전의 삶의 무게에 말 그대로 깔려죽기 일보직전이었다. 나는 거의 실성한 채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엄청나게 많은 얼굴들을 떠올렸고, 커다란 대못이 머리를 뚫고 지나가는 감각을 생생하게 맛보며 그들의 목소리를 전부 기억해냈다.

아버지, 어머니, 나의 형제, 나의 친구, 나의 아내, 나의 아이.
나의 왕. 그리고 나의 용신...

밑바닥 없는 절망이 일곱 살의 어린아이를 통째로 삼킨 뒤 그 살을 씹어댔고, 그 날카로운 이빨에 곱게 갈리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건 없었다.
저항은 쓸데없어 마침내 눈을 떴을 때 나는 거의 말을 잃었다.
이것이 약을 먹어 천치가 되었다는 소문의 실체다.

『원래 많이 이상해.』
우리 집 하인이 손가락을 자기 이마에 대고 빙빙 돌렸다. 내 이야긴가 보다.
솔잎을 따서 입에 물고 있는 날 봐서 그런지 빙빙 돌리는 동작이 평소보다 배는 컸다.
『큰 나라로 어려운 공부를 하러 가는 거잖아. 그런데 저렇다니까. 큰일이야.』
청색의 두건으로 머리를 감싼 중년의 남자가 우리 집 하인이 내뱉은 흉을 듣곤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렇게 머리가 나쁜 것처럼 보이진 않던데. 게다가 너, 그런 말을 아무렇게나 막 하면 욕 본다. 우리 같은 것들은 자나깨나 입조심을 해야 한다고. 그런 식으로 주둥이 함부로 놀리는 거 아니다.』
『쳇! 같은 종놈이면서 훈계를 하는 거냐.』
『인석아, 그게 훈계냐?! 거기서 왜 눈을 부라려. 진짜지 성격 이상한 놈일세!』
『내가 뭐가 이상해. 나는 정상이라고?』
『아이고, 우리 주인처럼 깐깐한 분을 만나야 정신을 차릴려나. 네가 우리 주인을 모셔봐야 하는데. 우리 아가씨처럼 사흘 내내 신경질을 부려봐. 아주 미치고 펄쩍 뛴다.』
다른 사람이 맞장구를 치며 슬그머니 대화에 끼어들었다.
『신경질은 차라리 괜찮지. 말도 마. 우리 도련님은 멀미가 나서 계속 토하느라 바빠. 그리고는 자기 토사물 냄새에 반응해서 다시 구토하고... 악몽이야.』
보름 가까이 지나자 하인들끼리는 이미 친해진 모양이었다. 서로 말을 섞지 않는 아이들과 달리 그들은 불을 피우고 한곳으로 모여 음식을 나눠먹고 휴식을 취하곤 했다. 통성명을 하고부터는 불알친구라도 되는 양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그 중의 제일은 주인 흉보기였다.
『우웩, 어쩐지 너한테서 냄새 나더라. 아유아유아유아유 썩은 내.』
『뭣이 어째?!』
그 다음이 상대방 흉보며 눈 흘리기.
서로 싸우느라 정신이 없는 틈을 타 멀미로 고생한다는 소년이 있는 곳으로 슬그머니 걸음을 옮겼다.

Posted by 미야

2015/04/23 10:21 2015/04/23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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