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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리여리한 팔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매일 붓만 쥐고 있으니 살이 더 마르는구나.》
상냥하여 듣기 좋은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굳은살이 박혔는데 손가락만 그렇구나. 팔뚝의 모양은 이리 봐도 여인네가 아닌데 비쩍 골아 이 또한 사내답지 않으니 이것으로 무얼 할꼬. 장작 대신 써먹을까, 내 침실로 들여 목침(木枕)으로 대신할까. 옳거니, 그게 좋겠군. 오늘부터 이걸 베고 잠자리에 들어야지.》
친구는 한참을 껄껄거리다 별안간 연료가 소진이라도 된 것처럼 웃음을 멈추고 정색했다.
그리고는 날아가는 새가 땅바닥에 떨어질 정도로 언성을 높였는데 아무래도 무술을 연마한 자가 아랫배를 관통하여 울리는 소리라는 건 큰 북처럼 크게 들리는 법이라 주변에선 천둥이 쳤다 착각했다.

《근육이 없잖아, 근육이! 평소 운동을 전혀 안 하니까 근육 비슷한 것도 안 만져져! 흔적도 안 남았어! 이래가지고는 긴급한 상황이 되면 제대로 팔을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그냥 당하겠다!》
나는 언제나처럼 고서를 필사하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어 그의 참견이 달갑지가 않다.
《그만 좀 주물럭거리세요. 게다가 그렇게 흔들어대니 제 팔이 많이 아픕니다.》
《너는 팔이 아프겠지만 나는 가슴이 아프다. 괘씸하다. 어찌 하려느냐, 날 이리 아프게 해서.》
《무슨 말씀이세요. 벌겋게 부어오를 제 팔과 달리 아픈 가슴 쯤이야.》
《매정한 놈! 너야말로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부어오른 팔은 금방 치료가 되지만 아픈 내 마음엔 연고를 바를 수 없으니 쉽게 낫지도 않는다. 하여 그대는 천하에 둘도 없는 불충한 자다.》
불충이란 단어에 발끈하여 대드는 나의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모기처럼 가냘팠다.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불충이라뇨. 저는 제국 이사실의 백성도 아닌 걸요. 그러니 신하가 될 수 없고, 신하가 아닌지라 불충도 저지를 수 없사옵니다.》
따박따박 반박하자 그는 어린애처럼 발로 바닥을 걷어차며 짜증을 냈다.
《에잇. 하여간 말대꾸는... 지는 법이 없어요, 저놈의 얄미운 주둥이는.》
《아이고.., 팔뚝만 미운게 아니고 이젠 제 입도 얄미운 겁니까.》
《당연하지. 밉다. 미워서 못 살겠다. 그러니 그만 붓을 내려놓고 나와 어울려줘야겠다.》
《시러요. 바빠요. 관심 없으요.》
《불충이다!》

그렇게 밉다, 밉다,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으면서도 그는 나름 싸우는 법을 가르쳐주고자 노력했다.
돌이켜보면 그게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골리는 재미로 그랬는지 판단이 서지 않지만.
어쨌거나 가르친 사람이 무능해서가 아니고 게으른 글쟁이 나부랭이의 팔은 주먹질 용도로 써먹기엔 아무래도 효율이 많이 떨어졌다.
『운동을 좀 할 걸.』
양팔을 어루만져 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근육 같은 건 안 붙어 있다.
더하여 영양 상태가 고르지 않아 뼈가 앙상한 팔이다.

『안즈 님, 잘 생각하셨소.』
가슴팍에 피가 튀어 더욱 으스스한 느낌을 자아내던 사내가 짧은 숨을 내뿜으며 내가 서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손잡이가 단풍나무로 만들어진 단검을 오른손으로 쥔 채였는데 날이 위로 향해 있었다. 그러고도「죽이지는 않을 겁니다」라는 말로 감히 날 설득했다 생각하는 눈치다.
물론 나는 설득당하지 않았고, 어른의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도 않다. 반대로 내 뱃속은 먹물처럼 시커멓고 진흙탕처럼 지저분하다.

오늘에 이르러 다시 재생되기를 허락한 목소리가 잡동사니로 가득찬 심연으로부터 둥실 떠올랐다.
《요령을 알려주마. 그러니 잘 기억해두렴. 싸움에 임하기에 앞서 가장 먼저 할 일은 기선 제압이다. 그러니 있는 힘을 다해 쩌렁쩌렁 질러라. 내 친히 시범을 보여주지. 네 이놈, 감히 누구 안전이라고 이러느냐. 내가 누군지 알고 까부는 것이냐~!!》
가만 생각해보니 그건 좀 뭐랄까... 쑥스럽다.
풍채 좋던 친구가 말 위에 올라타서 그 대사를 꺼냈을 적엔 위풍당당하고 참 멋이 있었는데 내가 하면 그야말로 익살스러운 대사가 될 터, 깔끔하게 포기하자. 나에게도 자존심은 있다.
『옳지, 바로 그겁니다. 안즈 님. 이리 더 가까이 오시오.』
생략된 말은「이리로 오면 멱을 따드리겠소」겠지.
고함은 못 질러도 기선제압은 할 수 있다.
나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어 파랗게 벼려진 눈빛으로 상대를 쏘아보며 선전포고를 했다.

그대는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이 산중에서 무엇과 마주쳤는지 아직도 깨닫지 못 하였느냐.
어금니를 꽉 다문 상태에서 숨겨놓은 본성을 까발리며 한껏 표독스런 표정을 짓자 이를 본 타평의 낯가죽에서도 미소 비슷하던 것이 한 꺼풀 벗겨져 내렸다. 독이 닿으니 표면이 망가져 녹아내린 것이다.
그 뒤를 대신한 건 당혹감. 동시에 이해가 가질 않는 이질적인 것에 대한 원초적인 거부감이었다.
사내가 마른침을 삼켰다. 이 거리에서도 목젖이 위아래로 크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너, 뭐... 뭐냐.』
말을 더듬으며 아래로 내렸던 팔을 번쩍 들었다. 여전히 핏물이 마르지 않은 칼날이 똑바로 겨누어졌다.
그는 겁에 질린 듯 보이기도 했고, 흥분한 것처럼 보이기도 같았다. 이마의 주름이 무시무시했다. 배다른 동생 리세리가, 아버지가, 할멈이 나를 볼 적마다 드러내 보이던 찡그림이었다.
『글쎄다, 나는 무엇일까.』
마당에 드러누워 숨이 끊어져가는 개에게 달라붙어 항문부터 그 안쪽 내장까지 뜯어먹던 벌레를 목도하였을 적에 리세리는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동생은 문간방 너머로 정좌하고 앉은 나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적에도 똑같이 비명을 질러댔다. 그렇다면 나는 구더기인가. 불길함의 원형인가. 아직 죽지도 않은 동물의 살을 파먹는 벌레와 비슷하다 할 수 있는가.
이성을 직관적으로 마비시키며 잠식해 들어오는 그것의 정체는 혐오... 싫은 것, 참을 수 없이 싫은 것, 외면하고 싶은 것, 거칠게 꿰맨 흉터처럼 자국을 남기고 빗물처럼 침식하여 깊고 큰 고랑을 만든다.
자, 이제 나는 여기서 다시 질문한다.
너는 지금 무엇과 만났는가. 그대는 내가 누구인지 아는가.

가장 절박한 충동에 의거하여 보름달에 정신줄 놓은 날짐승인양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도망칠 수 없다면 차라리 선제공격.
물기 하나 없이 바싹 말라 오히려 붉게 달아오른 타평의 눈동자로 돌격하여 날아드는 내 모습이 반사되어 비쳤다. 그리고 나는 망설임 없이 내 모습을 비춰주던 반사막을 나뭇가지로 곧장 뚫어버리려 했다.
『오, 오지 마! 히이익! 히익!』
압력이 더해져 공기가 갑절로 무거워졌다.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환한 햇빛이 있었음에도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진득한 어둠을 느꼈다. 그 어둠 한 가운데서 입을 벌리고 있는 건 인간이 가까이 해서 좋을 거 하나 없는, 그야말로 풍기는 냄새 그대로 구역질나게 역겹고 해로운 종류다.

그의 칼이 내 가슴을 찌르는게 먼저일까, 아님 타평의 눈이 뭉개지는게 먼저일까.
「성인인 저 자의 팔이 훨씬 길다. 아마도 내가 먼저 찔리게 되겠지.」
고통을 예감한 심장이 엇박자로 뛰었다. 그러나 나는 주저하지 않았고, 곧 형태를 잃고 깨져버릴 남자의 왼쪽 눈알에만 오로지 집중하였다.

Posted by 미야

2015/05/06 21:17 2015/05/06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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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은 의외로 늦게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나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것도 아니었다.

『이 자식아. 네 녀석 눈깔은 장식품이냐, 아님 썩은 붕어 눈깔이냐. 어떻게 애새끼가 사람 살려 이러고 달아나는데 그걸 까마득히 모를 수가 있냐. 설마, 대낮부터 술을 훔쳐 마신 건 아니겠지.』
『아, 아니어요, 타평 아저씨. 맹세코 술은 한 방울도 안 마셨어요! 진짜에요!』
『야! 그러면서 왜 자기 입 냄새를 맡아보는 거야!』
얼굴이 빨개진 미리노가 허둥댔다.
『아, 아뇨. 이건 그냥 콧물이 나와서... 그, 어쨌든 어린애가 빈 몸뚱이로 사라졌을 거라 생각도 못 했고... 멀리 가진 못 했을 테니까... 걸음이 빨라봐야 얼마나 빠르겠어요. 흔적으로 봐선 이리로 계속 올라간 것 같...』
『제기랄, 아까부터 짜증나게 뭘 그렇게 중얼거리는 거야, 미리노! 정신 사납게 굴지 말고 빨리 앞장 서.』
『알았다고요, 알았어. 이쪽이에요! 이쪽으로 간게 분명해요.』
『인마! 너 진짜지 술 먹었지! 그쪽이 아니잖아.』

지척까지 따라붙은 목소리는 아까보다 곱절은 더 가깝게 들려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나는 아직 어린아이고 폐활량도 아담했다. 게다가 다리 근육은 또래에 비해 형편없었다. 전생에서도 제대로 활 한 번 쏴보지 못한 허약남으로 늘 놀림의 대상이었고, 몸 쓰는 일은 아무래도 체질이 아니어서 전력으로 달리기라던가 밭일, 농삿일에는 젬병이었다. 지금이라고 뭐 다르겠는가, 악착같이 가파른 언덕을 기어 올라갔지만 잠시 숨을 고르며 아래를 내려다보면 출발한 곳에서 멀리 떨어지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다리는 힘이 빠져 휘청거렸고, 머리로는 피가 몰려 귓속이 윙윙 울렸다.
이 상태라면 조만간 붙잡히고도 남겠다.

『하아! 이놈의 자식이 수작을 부리고 있구먼.』타평이 이를 갈았다.
『그게 무슨 소리요, 아저씨?』
『이건 일부러 꺽은 가지야. 교묘하게 우릴 속이려고 손으로 가지를 꺾은 뒤에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움직였어. 이걸 봐. 부러진 가지는 이쪽인데 발자국은 저쪽으로 이어지지? 이 녀석이 우릴 반대 방향으로 따돌리려 했어.』
『설마 그럴 리가. 천치라 하지 않았소?』
『흥! 소문대로 천치 바보라면 우리 계획을 눈치 채고 도망을 칠 일도 없었다.』

마음의 눈으로 바위에 달라붙은 조그만 육신을 그려보았다.
손을 뻗어 더 높을 곳을 향하여 자신의 몸을 끌어올리고, 다시 손을 뻗는다.
문제는 그게 상상에서만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두 사람의 흥분에 찬 목소리는 이제 코 닿을 거리까지 다가왔고, 나는 이대로 산을 오르는 것보단 차라리 몸을 숨기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뻗어 나온 나뭇가지를 손으로 붙잡고 그쪽으로 체중을 실어 잠시 매달린 다음, 다리를 두어 번 흔들어 수풀로 뛰어들었다. 돋아난 덩굴의 가시가 옷과 머리카락을 할퀴고 잡아 당겼다. 끔찍하게 쓰라려 눈물이 나왔지만 애써 참으며 안쪽으로 더 몸을 밀어 넣으려 노력했다. 다행히 가뭄에 나무뿌리가 드러나면서 흙이 움푹 파인 부분이 있어 무릎을 접고 앉자 그럭저럭 숨을 만했다.
몸을 접기가 무섭게 손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틀어막은 입에서 거칠어진 단내가 가느다랗게 새어나왔다.

이윽고 눈가가 벌개진 두 사람이 숨을 헐떡이며 바위 언덕에 이르렀다. 나는 더욱 숨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오라... 어딘가 이 부근에 있겠군. 녀석을 느낄 수 있어.』
『그 느껴지는게 설마 멧돼지는 아니겠지요?』
『쉿!』
타평이 그렇게 근처를 두리번거리는 동안 미리노는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수풀을 아무렇게나 들쑤시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아무렇게나 여서 숨어있는 나를 찾기 위함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발을 뻗어 풀을 밟고 흔드는데 당연히 그렇게 해서 튀어나오는 건 각다귀와 벌레들뿐이다.
그런 무신경함이 타평의 신경을 자극한 모양이다.
『병신아! 토끼도 그런 식으론 못 잡는다!』
『아아, 뭐여. 나더러 더 이상 어쩌라고요.』
두 사람의 각자의 불만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미리노는 징징댔고, 타평은 화가 난 말투로 말했다.
『이 썩을 놈아. 지금 뭐라고 떠들었냐.』
『그르니까 걍 가자니까요, 타평 아저씨. 어차피 이런 곳에선 짐승에게 잡아먹혀 오래 못 가요. 일부러 안 잡아 죽여도 되는데... 쳇, 귀찮아 죽겠구먼.』
『이 바보 같은 놈! 이게 단순히 귀찮은 일인 줄 알아?! 네 녀석은 그렇게밖에 생각이 안 되냐?! 엉?!』

그리고 그 다음으로 작은 우격다짐이 벌어진 것 같다. 머리 위로 흙을 뿌려가며 엎드려 있는 내 귀로 땀내와 흐트러진 발소리가 겹쳐서 들려왔다. 팔로 사람을 떠밀었는지 그중 한 명은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졌다.
『애초에 네 녀석이 실수해서 일이 이렇게 된 거잖아!』
『아이고, 아파 죽갔네. 솔직히 내가 실수한 건 맞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말로 해요, 말로!』
주먹으로 사람 머리를 치는 둔탁한 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이 우둔한 놈! 만의 하나라는게 가장 무서운 거야. 혹시라도 애새끼가 무사히 빠져나가면 너나 나나 죽은 목숨이야. 종놈이 주인을 죽이려 했다며 저자거리에 목이 걸려. 알아?!』
『그게 무슨 황당한 소리에요! 이게 전부 나리가 시켜서 하는 일인데!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목이 달아납니까?!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나는 종놈이라 시키는대로 할 뿐이라고요!』
『이놈이 정신을 못 차리네... 너, 진짜 바보냐?!』
미리노가 발을 굴러가며 악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왜 바봅니까! 누가 바보라는 거에요!』
『이놈아. 아직도 우리가 처한 상황을 모르겠어?!』
『알 게 뭐에요!』
『야! 너, 말 하다 말고 어디 가! 야!』
『이젠 다 지겨워. 난 돌아갈 겁니다.』
『거기 못 서?! 야! 미리노!』
『시끄러, 망할 늙은이! 애는 죽었다고 쳐! 돌아가서 그렇게 보고하면 되잖아. 누가 본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까지 와서 우리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을 할 사람도 없어. 그냥 우리끼리 비밀로 하자고. 그러면 되잖아? 배고 고프고 목도 말라. 내가 왜 여기서 땀을 빼야 하냐고. 그 애새끼가 절벽에서 굴러먹든, 산속에서 굶어죽든, 알 바 아니야. 엿이나 먹으라고 해. 난 그냥 말을 타고 내려가 술이나 진창 마실 거야. 쳇!』

순간 공기가 차가워졌다.·아니, 찌르는 듯 아파왔다. 살기(殺氣)다.
『맙소사. 입만 가벼운게 아니고 하는 짓거리도 가벼워서 못 쓰겠군. 안 되겠다. 네놈부터 처리하지.』
타평이 마리노의 목을 움켜쥐고는 어마어마한 악력으로 그의 머리를 나무기둥에 세게 찧었다.
쾅 하는 굉음을 들은 것과 같이하여 몸을 더욱 안으로 말았다.
이어 무거운 보릿자루가 쓰러지는 기척이 들렸고, 더하여 예민해진 코로 비릿한 냄새가 흘러 들어왔다.
사람이 칼에 찔렸다! 타평이 쓰러진 미리노를 칼로 찔렀다!

숲속은 다시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람을 죽인 사내가 자신이 숨통을 끊은 시체로부터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안즈~!! 이 못난 계집아! 네 녀석의 숨소리가 들려. 거기서 우릴 보고 있다는 걸 안다. 나는 알 수 있어! 넌 여기서 못 빠져나간다. 그러니 얌전히 나오는게 좋을 거다. 나오면 죽이진 않아. 목숨만은 살려주마.』
등줄기로 오한이 흐르면서 온몸이 와들와들 떨려왔다.
피가 뚝뚝 흐르는 칼을 쥔 채로 목숨만은 살려주겠단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구제불능의 머저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구덩이에서 빠져나와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두 다리로 꼿꼿하게 섰다.

Posted by 미야

2015/05/05 21:04 2015/05/05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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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5/05/05 22:57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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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급자족용 오리지널 습작입니다. 큰 카테고리로 "오남 이야기" 라 했지만 이야기의 주인공은 오남이 아니라는게 함정...


『죄송합니다, 바퀴살을 연결하는 부품이 손상을 입고 부러졌습니다. 험한 산길을 계속 다니다보니 아무래도 충격을 받은 모양입니다요. 사전에 미리 알아차리지 못한게 불찰입니다.』
『어쩌죠, 다시 고쳐서 움직이게 하려면 시간이 좀 들겠는데요.』

본가에서 여행길에 붙여준 하인은 푼돈으로 계약한 뜨내기가 아니라 반대로 그 신분이 명확해서 그중 머리가 희끗희끗한 쪽은 모르는 얼굴도 아니었다. 본당과 내당을 오가며 잔일을 하던 자로 아마 이름이... 티아평, 아니면 타평이다. 배다른 동생 리세리의 어머니가 시집을 올 때 친가에서 데려온 자로 묵직한 느낌의 사내다. 리세리와 같이 놀다 동생이 넘어져 무릎을 다쳤을 적에 호통을 치며 내 뺨을 호되게 친 적이 있다.
나는 눈을 가늘게 하고 서른 중반에 접어든 사내와 쉰이 넘은 사내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젊은 쪽 이름은 미리노이고, 농짓거리를 하며 관자놀이에 대고 손가락을 빙빙 돌리는 것으로 나를 천치바보로 묘사한 사람이 바로 그다. 술을 매우 좋아하고 말투와 행동이 다소 천박한 편인데... 뭐, 지금은 그런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마차에서 내려「그만 똑 부러지고 말았습니다요」라고 지적당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왔다. 어쩌다보니 부러진 거라고?
「젠장맞을, 날붙이로 찍은 흔적이잖아, 이건.」
코를 대고 가까이 보면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얕은 깊이로 가늘게 흠집을 내었으니 눈으로도 잘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당장은 마차를 운행하기에 큰 무리가 없다. 잘 포장된 도로를 얌전하게 달렸으면 한 달은 족히 무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돌 뿌리에 걸려 좌우로 크게 흔들리는 식으로 충격이 반복되면 상처가 곪아 벌어지듯 서서히 뒤틀리다가 결국 한계점에 이르러선 반으로 쩍 쪼개진다.
나는 쉬는 시간마다 미리노가 바퀴를 툭툭 걷어차던 걸 떠올렸다.
그건 단순한 버릇도, 바퀴에 달라붙은 진흙을 털어내기 위한 동작도 아니었던 거다.

작은 상자 속의 구슬이 핑핑 소리를 내며 튕겼다. 오만가지 생각 또한 핑핑 부딪치기 시작했다.
「황제에게 바칠 공물은 내가 가지고 있지 않아. 그건 이미 두 달 전에 따로 출발했지. 횡재를 했다 싶을 정도의 큰돈은 여기엔 없다.」
그리고 나는 누구처럼 화려한 옷이나 장신구로 치장하지도 않았다. 출발하기 전 머리를 짧게 깎였고, 입은 옷은 평상복이나 마찬가지인 수준으로 조각이 된 옥 단추가 달려있는게 전부다. 반지나 팔찌, 귀걸이는 안 차고 있다.
「이런 단추를 강제로 빼앗아 팔아치우기엔 배보다 배꼽이 더 크지 않을까 싶은데.」
뒤를 돌아보니 두 사람은 마차가 망가졌다는데도 태평스런 표정이다. 타평은 그렇다치고 미리노는 능글능글 웃고 있기까지 하다. 원래 저런 인상이었던가, 소름이 끼쳐 두 팔의 털이 곤두섰다.
「이 앞은 단가고한이다.」
예전부터 요마에 대한 소문과 전설이 무성하게 전해지는 곳이다.
「피투성이 옷을 가져다가 리리마쿠나 로쿠리의 짓이었다고 둘러대면 제법 그럴 듯하게 들리겠지.」
물건을 노리기 위한 행동이라기 보다는 나를 노린다고 봐야 한다.
「처음부터... 아버지의 계획이었을지도.」
사고로 위장하여 사친으로 가는 딸 아이를 시체로 만들고 그 몸에 값을 붙인다. 모르긴 해도 제국에서는 기꺼이 위로의 의미로 장례비를 지급할 것이다.

순간 목이 졸리는 기분이 들었다.
모르겠다. 이렇게 되리라고 짐작했기에 할멈은 나에게 치마를 벗겨내고 강제로 바지를 입혔던 걸까.
혼란스러웠다. 그 집에서 내 편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항상 무뚝뚝했고 때로는 잔인했다. 멍이 들도록 내 팔을 잡아당긴 적도 많고 머리를 빗겨준다며 엉킨 걸 강제로 뜯어버리기도 했다. 손녀딸 대하듯 상냥하게 날 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 안즈 님. 당신은 어머니로부터 천한 핏줄을 이었습니다.

주입하듯 내 귓가에서 읊조렸던 건 멸시의 말들이었다.
얼굴이 일그러지려 했다.
그런 말을 지겹지도 않게 매일 매일 지껄였음에도... 그래도 동정했던 걸까. 속으로 가엾다 여겼던 걸까.
「운이 좋으면 무사히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여겼는가!」
그래서 이런 굽 낮은 신발을 신켜 먼 길을 떠나라 등을 떠밀었던 건가.

미리노가 납작하게 생긴 콧잔등을 손등으로 북북 문질렀다.
『안즈 님, 그럼 저는 다른 분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겠습니다요. 저희 탓에 일정을 지체할 수는 없으니 그냥 먼저 앞장서시라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뭐, 걱정하지 마세요. 나흘 거리에 서남문이 있고 마차를 고쳐 부지런히 따라가면 저희도 그렇게 많이 늦지는 않을 겁니다.』
그럴 가능성은 적었지만 혹시나 싶어 물어봤다.
『혹시 도와줄 사람을 구할 수는 없겠는가.』
사내는 썩어가는 생선냄새를 풍기며 비릿하게 웃기만 했다.
『글쎄요.』
이로서 누군가 동정심에 손을 빌려주겠다 나서도 손사레를 치며 극구 사양할 거라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었다.

그들이 고장난 마차를 길 가장자리로 옮기며 다른 이들에게 처한 상황을 설명하는 동안 나는 옷 보따리를 풀러 쓰지 않는 허리끈을 두 개 꺼내 재빨리 발목을 둘러 감았다.
「늙어서 죽을 거다. 절대로 늙어서 죽고 말테다.」
병으로 죽는 것도 싫지만 살해당하는 건 더더욱 싫다. 이런 삶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내 목표는 어디까지나 하늘이 주신 수명이 다하여 가족들이 슬픔으로 지켜보는 가운데「후회는 없구나」읊조리고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다. 지금 이 몸은 열 살도 되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죽는다면 안즈의 인생이 가엾다.
『후우... 숲속으로 도망친다고 해도 성공할 가능성은 크게 낮지만.』
저체온증에 걸려 죽을 수도 있고, 산짐승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으며, 실족하여 절벽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
수중에는 물도 없으며 몸을 보호할 도구도 없다.
『그래도 발버둥은 한 번 쳐봐야 하지 않겠어?』

가만히 귀를 세운 뒤 눈치를 보며 마차에서 다섯 걸음 멀어졌다. 소피라도 보려는 듯 자연스럽게 움직이려 노력하며 다시 열 걸음 뒤로 걸었다. 타평은 여전히 하급 관리로 보이는 자와 대화 중이라 이런 내 모습을 눈치채지 못했다. 일정을 책임지던 관리가 뭐라고 야단치자 허리를 굽신거리느라 바빴다. 그래도 작은 주머니가 등장하자「도대체 무슨 일을 그따위로!」등등의 소리가 잦아들고 조용해졌다.
미리노는? 좌우를 살피며 큰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세워둔 마차가 시야를 가려 아직까지는 들키지 않은 듯했다.
『용신님, 굽어 살피소서.』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Posted by 미야

2015/05/03 20:20 2015/05/0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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