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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급자족용 습작입니다. 완제품이 아니라서 부분적으로 내용이 수정되고 있습니다. 카테고리는 오남 이야기로 되어 있지만 이 글에서「오남 - 저주하는 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


그날 새벽, 악몽을 꾸었다.
나는 다시 차가운 우물 아래로 떨어져 쉰 목소리로 살려 달라 외치고 있었다. 몸은 이미 얼음장처럼 굳었고 물에 불어 주름진 피부는 새파랗다 못해 보라색에 가까웠다. 부러진 것이 확실한 복사뼈는 냉기에 압도된 탓에 더 이상 아프지도 않았다. 그저 춥고 또 추워서... 형님들의 이름을 불렀고, 어머니의 이름을 불렀다.
『도와줘! 구해줘! 날 여기서 꺼내줘! 부탁합니다, 부탁할게요, 흐으윽! 살려주세요!』
내가 빠진 마을 우물은 그다지 깊지 않은 편으로 수량이 부족한 탓에 이용하려는 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두레박을 한 번만 올리면 될 걸 여기서는 적은 양으로 세 번씩 끌어올려야 했기에 어른들은 사용을 기피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곳은 공동 우물이었고, 줄을 일부러 서지 않을 정도로 한적했기 때문에 나처럼 힘이 약한 아이에겐 요긴한 장소였다. 이를 고쳐 말하면 인적이 아예 끊기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도 내가 외치는 비명은 아무에게도 닿지 않았다.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다.
『어째서야?!』
허리까지 차오른 물을 힘겹게 참방대며 나는 울부짖었다.
『왜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거야?! 나는 이 안에 있어!』

그 까닭을 이해한 건 다른 육신으로 태어나고 난 뒤였다.
나는 막내였다. 위로 여덟 명이나 되는 형제자매가 있었다. 가난했던 부모는 먹는 입의 수를 줄일 필요가 있었다. 즉, 실족하여 우물에 빠졌다는 걸 알았음에도 일부러 무시했다.
그들이 나를 위해 해줬던 일은 그렇게 죽는 것도 운명이겠거니 체념하고 우물 밖에서 손을 모으고 합장한게 전부. 제대로 된 장례조차 치러주지 않고 우물 뚜껑을 닫아 봉인했다.

「도와달라 말을 해본들 달라지는 건...」
차가운 물로 세수를 했음에도 얼굴에서 멍한 표정이 지워지지 않았다.
어쩌면 나의 일부는 여전히 그 우물 안에서 참방대고 있나 보다.

오늘도 날씨는 좋았다.
고민을 해봐도 이렇다 할 수업 일정도 없다.
그렇다면 오늘 하루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
부러진 창틀을 고쳐볼까.
가만 생각했다가 도리질하고 머리를 단정하게 빗었다.

『부서고를 이용하고 싶다고요.』
『예.』
『그럼 이 숙희가 안즈 님이 쓰실 출입증을 하나 만들어 드리지요.』
어제와 마찬가지로 엄청나게 많은 양의 서류뭉치와 씨름하고 있던 숙희는 서랍 안에서 아무 글도 안 적힌 보통의 나무패를 꺼내 굉장한 달필로 빠르게 내 이름을 손수 적어 넣었다. 옛날에 보던 것과 모양이 상이하고 출입증이라기보다는「오늘의 숙직 당번 - 지리가 안즈」를 적는 것 같아 묘하게 신경 쓰였지만 명색이 숙사감대부라는 자가 일을 허투루 할 리는 없으니 일단은 그게 출입증일 거라 믿었다.
『그럼 또 궁금한 건?』
이미 학습된 바 있어 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이리 말했다.
『오늘 석식 반찬은 무엇입니까.』
『개구리 반찬.』
『에?』
『놀라긴. 농담이오. 그럼 잘 가시오.』
나무패를 어떻게 이용해야 된다던가, 부서고의 위치는 어디라던가, 출입 가능 시간은 어떠하다는 안내는 깡그리 무시되었다. 숙희는 책상에서 눈조차 들지 않았다. 각각의 장부에 글씨를 적어나가는 붓은 신들린 듯하여 일부러 말을 걸어 그 흐름을 끊기도 민망하였다.
나는 얌전히 허리를 구부려 절을 올리는 것으로 용무를 마쳤다.

왕궁 도서관은 내가 알기로는 총 여덟이다. 물론 이건 내 기억 속의 정보이고 어쩌면 현재의 모습은 많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내가 아는 이야기대로라면 그 중 셋은 황실의 영역이고... 셋은 관료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라서 급제를 하지 않은 자가 함부로 기웃거리면 경을 친다. 하여 남는 것은 두 곳인데 가운데 중(中)자를 쓰는 중부고가 일반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이다. 나눌 분(分)자가 들어간 분고는 중부고와 이웃하여 건물이 섰는데 그 외관은 매우 작다. 이곳은 책을 진열하거나 열람하기 위한 장소가 아니고 왕궁 도서를 총괄하여 관리하는 직원들이 상주를 하는 곳이다. 새벽에 술병을 들고 부어라 마셔라 할 정도로 보안은 널럴했으나 어디까지나 관리라서 살짝 그 만행을 눈감아주는 것이고, 일반인은 그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
나는 자석이 끌어당기는 것처럼 중부고가 있었던 장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현선당 앞에서는 샛길도 사용했다. 부지런히 풀을 옮겨 심었음에도 어찌나 다들 애용을 해주셨던지 흙이 드러난 부분으로 눈치껏 내려가면서 나는 큭큭 웃었다. 그토록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변치 않는 것도 있었다. 이 샛길을 이용하지 않으면 명각루와 그 주변 연못을 따라 먼 길을 한 바퀴 빙 돌아야 한다. 나처럼 귀찮음을 느낀 이들은 기꺼이「개구멍」으로 질러갔다.
의외였다면 바지춤을 잡고 아래 돌담을 기어 내려갔을 적에 귀신이 노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갑자기 등줄기가 오싹했는데 도대체 이 오한을 느끼게 만드는 것의 정체는 뭐지 이러고 주변을 둘러봤을 적엔 시야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는 거다. 나는 팔뚝을 문지르며 목을 움츠렸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나쁜 감정을 가지고 나를 쳐다보고 있는 건 아니라는 거였다. 따라붙는 시선은 그저 나를 관찰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호기심이 많은 귀신이거나 그와 비슷한 종류일 거다. 아니면 적룡신을 모시는, 인간 아닌 부류의 시종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그쪽의 기분이 나빠지기 전 허겁지겁 풀밭에서 빠져나갔다.
「아이고, 무서워라. 다음엔 아무리 귀찮아도 먼 길을 돌아가야 하겠군.」
다시 길 위로 돌아와 먼지를 털며 그렇게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버릇처럼 지름길을 이용한 건 그다지 현명한 행동은 아니었다.
「나는 그렇지 않지만 안즈는 처음 와보는 곳이잖아.」
익숙해도 그 익숙한 티를 내는 건 좋지 않다.
그래도...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심호흡을 했다. 오랜만에 글자를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좋아서 미칠 지경이었다. 종류는 뭐라도 상관없었다. 오래되어 낡은 이야기책이 취향이지만 지루한 연보감이라고 해도 기꺼이 읽어줄 작정이었다.
「그게 아니지.」
이쯤해서 가만히 턱을 문질렀다. 그게 아니라 중부고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연보감을 찾는게 좋을 듯했다. 연보감이라는 건 1년 동안의 일어난 일이나 사업을 보고하는 정기 간행물이다. 내가 모르는 사이 이 세상에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알고 싶다면 이보다 더 좋은 자료는 없다.
「옳거니. 바로 그거야.」
그러자 엉덩이에 날개라도 돋아난 기분이 되었다.
스스로의 얕은 지혜에 감탄하며 신이 잔뜩 나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Posted by 미야

2015/05/30 10:18 2015/05/30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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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직접 버들고리짝을 옮겨준 것에 대해선 매우 고맙고 송구하다 생각한다.
기꺼이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도 장도리를 들고 창문을 막은 널빤지 앞을 서성거리는 건 앞의 것과 얘기가 틀리지.」
귀하게 자란 소년은 목수들의 밥줄 도구인 장도리가 신기한 눈치였다. 그 생김새를 요모조모 살펴보더니 노루발처럼 갈라진 부분을 엄지로 튕겼다. 단단한 철의 형태를 인식하자 다음으로는 검을 다루는 요령으로(망할) 자루 끝부분을 잡고 좌우로 허공 베기를 했다.
흉기처럼 붕붕 소리를 내는 장도리의 운동 궤적을 눈으로 쫓으며 서둘러 그를 만류했다.
『그건 그렇게 사용하는 물건이 아니야. 못 뽑기는 내가 할테니... 으악!』
못을 뽑는 일은 힘으로만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아이는 이해 못했다. 지렛대의 원리를 미리 설명해줬어야 했던 걸까, 소년은 널빤지를 박살내면 된다는 단순한 목표의식 아래서 정 가운데를 조준해 장도리를 휘둘렀다. 아니, 휘둘렀다기보다는 기합으로 찍어 넘겼다.

그려, 내 이럴 줄 알았어.
가늘게 새어나온 눈물을 닦고 - 슬퍼서가 아니라 숨을 죽여 웃다보니 눈물이 나왔다 - 튕겨 나온 나무 파편과 근사하게 짜부라진 창틀에 삼가 묵념하였다. 장도리로 찍어 널빤지를 참살한 린청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린 눈치다. 장렬하게 사망한 널빤지는 저 혼자 죽기는 억울하다며 동료를 데리고 먼 저승길을 떠났다. 창틀만 박살난게 아니다. 툭, 하고 깨진 벽돌 조각이 아래로 굴렀다. 게다가 그 파편 덩어리는 그 크기가 결코 작지 않았다.

으허어억 이상한 소리를 내더니 이윽고 파랗게 질려 내 눈치를 살폈다.
『있잖아, 안즈.』
『말해보시게.』
『네가 허락한다면 나는「내 방을 같이 써도 좋아」라고 말하겠어. 하지만 그게 네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거라면 나는 침묵할 거야.』
『너는 창문을 망가뜨린 사과를 참으로 별난 방식으로 하는구먼. 미안하다는 말은 됐고, 장도리는 그만 내려놔. 한 번 더 휘둘렀다간 벽 자체가 무너지겠다.』
『잘못했어.』
『사과는 됐다니까.』

평소와 마찬가지인 내 모습에 크게 안도해하며 소년이 다시 질문했다.
『저어, 그런데 제안은...?』
『마음을 써줘서 고마워, 린청. 하지만 난 괜찮아.』
『역시 사양하는구나.』
녀석은 내가 긍지 높은 귀족으로서의 자존심을 내세워 타인의 도움을 거절하는 거라 착각했다.
그러나 여기서의 문제는 안즈의 성별이 여자이고 그가 남자라는 거였다. 머지않아 육신의 2차 성징이 시작될 터인데 머리냄새가 진해지면서 나도 가슴이 붕긋하게 나올 것이고, 그 또한 울대뼈가 도드라지고 고환이 커질 것이다. 이후로는 민망한 일들의 연속이다. 솔직히 말해보랴, 감당할 용기가 없었다.

아니, 이게 아니지. 그렇게나 한참 나중 일을 걱정할게 아니라.
살이 없어 안으로 움푹 꺼진 가슴을 쓰다듬다 말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린청, 나는 여자야.』
『그래, 이것은 빗자루다.』
그러니까 왜! 어째서! 무슨 까닭으로! 아무도 귀 기울여 내 말을 듣질 않아!
원인 제공자니까 자신이 바닥을 치우겠다며 직접 빗자루를 쥔 린청은 머리털 나고 생전 처음 해보는 청소에 진땀을 빼는 중이었다. 살인 곰을 잡으라면 잡겠지만 빗자루로 바닥을 쓰는 건 은근 어렵다?
바닥에 떨어진 벽돌 조각의 위치를 잘 봐두고 신중한 자세로 비로 밀어냈더니 이 발칙한 것들이 한 곳으로 모이지 않고 사방으로 굴러갔다. 당황하여 빗자루로 찍어 눌러 도망가는 움직임을 급히 차단했는데 아뿔싸, 기세 좋게 휘두른 빗자루의 움직임에 바람을 타고 먼지가 일어나 그만 재채기가 터졌다.
『린청, 나는 여자라니까.』
버럭 대마왕은 재채기 탓에 흘러나온 콧물을 닦다 말고 짜증을 냈다.
『알았다니까! 인정할게! 이건 분명 빗자루 질이 아니다! 하지만 노력하고 있다고. 맙소사, 청소라는 건 보기와는 달리 쉬운 일이 아니군. 이런 젠장!』
그러니까 녀석은「네가 지금 하고 있는 짓거리는 청소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그런 건 감히 빗자루 질이라 할 수 없다. 양심도 없는 놈!」라는 의미로 남성인 내가 비꼬아 여자라고 말했다 여기는 듯했다.

똑같은 말을 세 번 반복하여 말하는 건 고래부터 있어 온 저주의 행위.
먼지를 들이켜서 그런지 나 또한 콜록 기침이 나왔다.
『부탁이니 창문이나 열어. 아유, 먼지...』
「나는 여자다」세 번 말하기는 그런 까닭으로 포기다.

『있잖아, 안즈.』
『응.』
『본가에서도 대략 이런 식이었어? 항상 혼자서... 그러니까. 음.』
탁자 위에 걸터앉아 다리를 번갈아 흔들어대던 나는 간장에서 소금기가 전부 빠져나간 말간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것이 대답이 되었을까, 소년은 나로부터 짐짓 시선을 돌렸다.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그는 햇빛 아래서 너울 춤추는 먼지들의 움직임을 구경했다.
나는 티끌을 잔뜩 뒤집어 쓴 그의 긴 머리카락을 힐끗 쳐다보았다.

망할 빗자루를 손에 쥔 채 의자에 앉은 소년은 번민에 휩싸여 엉덩이의 무게 중심을 좌우로 왔다갔다 이동시켰다.
다리가 부실하여 사람이 앉으면 원래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던 의자다.
여기에 산만한 동작까지 더해지자 의자는 마치 고깃간 저울처럼 좌우로 흔들렸다.
암호처럼 모호하고 그 뜻이 명확하지 않았던 질문도 덩달아 흐지부지 사라졌다.

기지개를 켜는 요령으로 상체를 뒤로 젖힌 나는 무거워진 공기에 질색하여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뭐랄까... 익숙해져 있으니까.』
『하지만 익숙해져서 될게 있고 익숙해지면 안 되는 것이 있어, 안즈.』
소년의 투명하고도 맑은 눈동자가 온전히 나에게로 향했다.
순간 나는 그 반듯하고 순진한 눈동자가 미워지려 했다.
『너는 모른다. 익숙해지지 않으면 더 괴로워져.』
그렇다고 익숙해지면 과연 편안해지던가. 나는 슬그머니 입술을 깨물었다.
이 세상에 오로지 나 혼자서.
이것은 이형(異形)에게로 내려진 형벌, 섭리를 거슬렀으니 그 대가는 치러야겠지.

『청소나 계속 하자.』
어쩐지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소년으로부터 등을 돌리며 탁자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Posted by 미야

2015/05/28 11:25 2015/05/28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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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로 돌아와 닥치는대로 버들고리짝 뚜껑을 열고 그 내용물을 확인해 보았다.
대략 이럴 것이다 미리 짐작했던 것처럼 물품구매 청구서니 기안서 따위의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잡다한 서류들이 고리짝 안에서 잔뜩 쏟아져 나왔다.
다만 대략 10년 전 무렵부터 쌓아올린 자료일 거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 무려 30년 전의 야간순찰기록까지 손에 잡혔다. 년도 순차로 정리된 것도 아니어서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표지와 모서리 부근으로 비에 젖은 흔적이 남은 것으로 보아 다른 곳에서 보관하다가 여름철 장마비에 갑작스런 날벼락을 맞고 허겁지겁 옮긴 듯했다. 그래서 어떤 고리짝은 그 날짜가 위에서부터 아래 방향이었고, 일부는 반대로 아래에서 위 방향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정리 순서가 아니고... 이런 서류들이 창고에 처박혔다는 걸 아무도 기억을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규정으로 정한 폐기 순차를 까먹고 무심하게 버들고리짝에 넣어두기만 한 것 같다. 표지 제목을 쓴 필체 역시 각각 달라 언뜻 보기에도 담당자가 8명이 넘어갔고 결국 처치곤란으로 창고까지 흘러와 오랜 낮잠을 자게 되었다고 보면 되었다.

종이뭉치 가장자리를 한손으로 잡고 낱장을 파라락 넘겨보았다.
먼지와 좀벌레들이 기세 좋게 쏟아졌다.
『다들 게을러 빠졌구먼.』
죄다 불쏘시개로 써먹어야 할 것이다.

끈으로 묶어 하나 둘 마당으로 옮기는데 힐끔거리는 눈들이 따가웠다.
《귀족이라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고 원래 천출인가. 허드레 일을 직접 하네.》
《그러게나 말이야. 게다가 쓰레기를 나르는 모습이 어쩐지 익숙해 보이는 걸.》
익숙하긴! 이미 손가락은 잡다한 상처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익숙하다면 피부를 베일 리 없다.
저 밑바닥에서 정제되지 않은 여러 감정이 울컥 올라오는 걸 참으며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무거운 걸 옮기자 몸이 비명을 지르려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리가 아파왔다.

『그러고 보면 안즈도 제법 편한 삶을 살았네.』
전생의 기억 탓에 끈 매듭을 묶는 법을 알아도 손가락은 영 말을 듣지 않았다.
이 어린 몸은 육체노동이라는 걸 모른다.
정서적으로는 학대를 받은 건 맞지만 힘든 일을 한 기억은 없다.
겨우 그 정도의 노동으로 껍질이 벗겨져 쓰라림을 호소하는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쓰게 웃었다.
일반 농민의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일곱 살 무렵부터 물을 길고 밭에 나가 잡초를 뽑는다. 여자아이라면 부엌으로 내려가 요리를 돕거나 마른 땔감을 준비해야 한다. 일은 고되어 그 작은 고사리 손은 이윽고 온통 굳은살로 덮인다. 겨울에는 얼음을 깨가며 빨래를 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피부가 터서 갈라진 틈으로 누런 빛깔의 체액이 흘러내린다. 덤으로 동상에도 걸린다.
『아아, 늦을 가을 날 마을 우물에서 물을 퍼다 실족하여 빠져 죽은 적도 있었지.』
그건 언제였을까.
꽤나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흐릿하다. 단지 아홉 형제 중 막내였었다는 것만 생각난다.
집중하면 더 많은 걸 떠올릴 수 있겠지만 진이 빠진 지금은 그러기가 귀찮다.
아울러 우물에 빠지고도 나는 금방 죽지 않았다. 사흘 정도는 구조를 기대하며 분명 살아 있었다.

통증을 호소하는 허리를 펴보았다. 거짓말처럼 뿌득 소리가 났다.
『삽시간에 나이 든 아저씨가 된 것 같구나... 오늘도 날씨 참 좋다.』

4할 정도 꺼내놓으니 발 디딜 틈도 없던 창고 안으로 그럭저럭 공간이 생겼다.
뿐만 아니라 처박힌 고물들 속에서 탁자와 의자도 나왔다. 바로 세워두고 일부러 흔들어보니 다리가 아주 망가진 건 아니어서 먼지만 닦으면 요긴히 써먹을 듯했다. 칠이 벗겨진 낡은 물건이어도 나 혼자 사용할 가구를 얻었다 생각하니 기뻤다.
반색하며 의자에 앉아보았다. 오른쪽으로 기울어진다는 점만 빼면 만족스러웠다.
『헤에~ 괜찮네.』
흡족해하며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괜찮긴 뭐가 괜찮다는 거냐, 이런 쓰레기장에서.』
『여어, 린청. 수업은 어쩌고 여기까지?』
여어, 린청 - 이런 한가한 말을 할 때가 아니지! 넌 배알도 없냐!』
지금 같아선 느긋하게 인사를 할 처지가 아니지 않느냐며 그는 진심으로 화를 냈다.
하여간 처음 봤을 적에도 벌컥 화를 내더니 지금도 여전히 벌컥 화를 내고 있다. 그러지 말고 저 녀석 별명을 벌컥 대마왕이라고 지어줄까, 나는 웃으면서「너, 화났구나?」의미로 검지를 귀 옆으로 나란히 세워 뿔 모양을 만들어 보았다.

장난 비슷하게 보였을 그 동작이 그를 더욱 기막히게 했나 보다.
『이 바보야! 당연히 화가 났지. 이런 건 아랫것들이 할 일이잖아. 네가 직접 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그리고 이 쓰레기장은 또 뭐냐. 우와, 이 먼지. 지독해. 여기서 진짜로 기거할 생각이야? 미쳤어?!』
『안 미쳤어.』
『그럼 숙사감에게 가서 따져야지!』
허리에 손을 얹은 자세로 고함을 질러대는데 이거 정말 누구와 판박이다. 자세히 보니 코 모양도 오똑하게 솟은 모습이 비슷하게 생겼다. 같은 핏줄도 아니면서 저럴 수도 있나, 은근 신기하다.
『숙사감대부에게 얘기는 해뒀어, 린청.』
『아이고, 안 봐도 뻔하군. 얌전하게 손 모으고 앉아「그럼 좋은 소식 기다릴게요~」이러고 말았겠군. 이 바보야, 그러니까 제국 놈들에게 얕보인 거라고. 거기선 치를 떨며 책상이라도 내리쳤어야지.』
『싫어. 책상을 치면 손이 아파.』
『으이그! 말을 말자! 너와 입씨름을 하자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니니까.』

훌쩍 뒤돌아 서기에 나는 린청이 이대로 돌아가려나 보다 생각했다.
잘 가라 인사를 하려는데 엉뚱하게도 그는 크기가 제법 되는 버들고리짝을 번쩍 들어 밖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상당히 무거울텐데 걷는 보폭이 평상시와 똑같다.
아니, 것보다. 나는 크게 당황했다.
『자, 잠깐 기다려! 린청!』
그래봤자 남의 말을 한쪽 귀로 흘리는 성큼 대마왕이었다. 창고 밖으로 나온 마왕은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이건 어디로 가져가면 되는 거냐. 저쪽이냐.』
『그게 아니라...!! 기다려! 왜 네가 옮기는 거야. 아까는 하수들이 할 일이라고 화를 냈으면서.』
『그냥 보고 있기엔 갑갑해서 그런다. 이래야 빨리 끝날 거 아니야.』
『저어, 일부러 도와주지 않아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쳐다봐.』
하찮은, 쓰레기, 천한, 등등의 단어가 가슴을 콕콕 찔러댔다.
나 때문에 린청까지 비웃음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 나는 버들고리짝을 어서 바닥에 내려놓으라며 그를 다그쳤다.
『흥! 그 잘난 제국놈들이 힐끔거리면 하고 싶다 생각한 일도 도중에 멈추고 관둬야 할까? 그건 내 성격에 맞지 않아. 차라리 나는 그 녀석들 눈깔을 뽑아버릴 거야.』
『그건 곤란해!』
『나도 곤란하다, 안즈. 슬슬 팔이 저리는데 이걸 어디다 버리면 좋을지 가르쳐줬음 좋겠는데.』
소년은 막무가내였다.

Posted by 미야

2015/05/26 15:43 2015/05/26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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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5/05/27 01:24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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