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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남이 등장하지 않는 오남 이야기... ※


각이 진 벽에서 천천히 솟아오른 그것은 처음엔 회색의 안개처럼 흐릿했다.
전형적인 유령 목격담과 판박이라 속으로 이게 뭐냐 했는데 그 형태가 점차 뚜렷해지는 걸 보자니 마냥 넋 놓고 있을 수만도 없게 되었다. 안개는 점차 위아래로 당겨져 늘어났고, 간수에 닿은 두부처럼 고형화되면서, 매우 느린 속도로 사람의 형상을 취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와 몸통, 그리고 다리의 모습까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늙은 여자?』
틀렸다. 린청이 여자라고 생각한 건 두건과 흡사한 모양새의 학건이 피와 오물로 범벅이어서 감지 않아 떡진 머리처럼 보였기 때문인데 꾸밈을 중시하기에 여자는 저런 식의 귀를 덮는 학건은 착용하지 않는다. 저건 원래 수도승들이나 쓰던 종류다.
가슴까지 내려온 학건의 천은 피로 젖어 원래의 색이 무엇이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몸은 새카만 검댕으로 뒤덮였고 머리의 절반은 몽둥이로 맞았는지 송두리째 날아가고 없었다. 덕분에 눈과 코도 제자리를 잃고 뒤틀려 악몽 같은 형상이었다. 아직 사람 시체를 봤을 리 없는 린청은 그 충격적인 외모를 보고 놀라 크게 숨을 들이켰다.
이때 유령의 턱이 약간만 벌어졌다. 그리고 그 비스듬히 벌려진 입으로 농도 짙고, 점성 높은 검은 액체가 꿀렁꿀렁 흘러내렸다.
다행이라면 썩는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는 점이랄까.
그래도 유황의 냄새가 상상되어 코를 막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제기랄, 저것과 눈이 마주쳤어.』
겁을 집어 먹은 자신에게 린청은 수치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허나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칭찬받아 마땅하다. 어쨌든 주박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이가 딱딱 부딪치는 건 자제가 되지 않는 듯했다. 차가운 땀도 콧잔등에 송송 맺혔다.
위험하다, 위험해. 나 또한 이미 엉덩이를 뒤로 잔뜩 내민 자세로 뒷걸음질을 하고 있었다.
그럼 이대로 계단 있는 곳까지 재빨리 튀도록 하자.
말쑥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귀신도 성가신 노릇인데 저쪽은 완전히 코 찢어먹은 악령이다.

달각.
아, 미치겠네. 그런데 도대체 아까부터 반복하여 들리고 있는 이 해괴한 기척의 정체는 뭐란 말이냐.

거슬리는 소음만으로도 충분히 환장할 노릇인데 유령의 얼굴마저 계속해서 그 형태를 바꿔갔다. 피부가 늘어지고... 구멍이 났다. 입술이 줄줄 녹아내려 치아와 턱뼈가 드러났다. 참담하여 똑바로 쳐다보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눈꺼풀도 물미역처럼 흐느적거리며 탈락되어 어느 틈에 귀 아래로 걸렸다. 그런데도 눈구멍에 자리를 잡은 눈동자는 생전 모습 그대로 맑고 투명하여 그 느낌이 상당히 기괴했다. 게다가 그 시선에는 무슨 까닭에선지 악의가 없었다. 슬프다거나, 분하다거나, 억울하다는 식의 감정이 없고 대신 자리를 잡은 것은 끝도 없는 피로감이다.

『똑바로 보지 마, 안즈.』
하지만 이런 식으로 눈싸움이라도 하지 않으면 바로 공격당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걸.
나는 계속해서 앞을 주시하며 신중하게 네 발로 기었다.
그렇게 왼쪽 다리를 뒤로 쭈욱 물리는데 신발을 벗은 발바닥에 단단한 물체가 닿았다.
『아후힌ㄹ~~!!』
기겁하고 얼른 돌아보니 책더미다. 사방팔방 쌓아올린 책들이 그만 퇴로를 가로막은 것이다.
『에.베.부.바.러.부.너.베!』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뱉은 말이니 굳이 해석할 필요는 없다.
바퀴벌레의 움직임을 모방하여 두 팔과 두 다리를 현란하게 버둥거려 측면으로 이동했다. 계단! 계단은 어디에 있나! 혼비백산한 상태에서 어떻게든 뛰려는데 아뿔싸, 최단거리로 가로질러 가기엔 장애물이 지나치게 많았다. 린청은 별 어려움 없이 2단, 3단 높이로 쌓아올린 궤짝들을 뛰어넘을 수 있었지만 나에겐 그와 유사한 발군의 운동 실력 같은 건 손톱만치도 없다. 덮쳐오는 순서대로 손으로 밀고, 몸통 박치기를 해서 찍어 넘기는게 고작, 책들이 쓰러지자 거치적거리는 건 더욱 늘어 육지에서 헤엄치기에 이르렀다.
『서둘러! 그렇게 빙 돌아오지 말고!』
나와 달리 이미 계단 앞까지 이른 린청이 재촉했지만 내가 뭐 일부러 느리게 뛰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성과 지능을 그릇에 담아 물 말아먹은 뒤에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던 나는 여전히 양손에 신발을 쥔 채 숨을 헐떡거렸다. 아니다, 정신을 차리니 오른손에만 신을 들었고 왼손은 텅 비어 있다. 칠칠맞게 그 와중에 어딘가에 흘린 모양이다.
『그냥 와!』
『그럼 나중에 또 찾으러 와야 하잖아!』
『새로 사!』
『그럴 돈이 어디에 있다고!』
걸죽한 욕을 한바탕 퍼부으며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신발을 찾아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도는데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며 머리가 무거워졌다. 동시에 상한 음식을 먹고 체하기라도 한 것처럼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이거 안 좋다... 못 견디고 욱욱 입덧하며 눈동자만 굴려 위를 보자 어느새 자리를 옮긴 유령이 길을 가로막고 서있었다.

그거 참 재빠르십니다. 나는 딱할 정도로 허둥거렸다. 그래서 말투도 많이 괴상해졌다.
『이, 이러시면... 소인은 그저 지나가는 과객으로... 뭐랄까, 벌칙으로 청소를 좀. 결코 화생(化生)의 기분을 상하게 할 생각은 실 터럭만큼도...』
유령이 스륵 양팔을 내밀었다. 불에 탄 손가락은 하얗게 뼈가 일부 드러났다.
닿고 싶지도 않고, 보고 싶지도 않다. 질겁하며 수중에 든 외짝 신발을 마구 휘둘렀다.
『저리로 물러나시오! 내게 무슨 죄가 있다고!』
뼈가 드러난 남자의 손이 무언가를 호소하듯 공중에서 위아래 방향으로 흔들렸다. 그 동작은 무언가를 자기에게 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외로움에 지친 나머지 친구가 되어달라고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도저도 아니고 그저 고통에 처한 자신을 도와달라는 단순한 구조 요청이었을 수도 있다. 그래봤자 모습이 너무 끔찍해서 나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살과 근육이 벗겨져내려 아래턱이 극히 일부만 머리에 붙어 있는 형상이다. 불에 그슬린 붉은 혀는 목구멍을 통해 삐져나왔다.
나는 진심으로 이 유령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싶었다. 그 생각밖엔 나지 않았다.
『이러지 마소! 제게는 원대한 포부가 있소. 그것은 평범한 노인네가 되어 슬퍼하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후회는 없구나」읊조리며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오. 그렇기에 여기서 당신과 더 이상 어울리고 싶지 않구려. 그러니 내 앞에서 퍼뜩 물러서시오!』

아무렇게나 휘둘러대던 신발이 유령의 가슴에 닿았다.
그런데 살을 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방금 나는 허깨비가 아니고 실존하는 묵직한 것을 때렸다.
과연 그럴 수 있는 건가. 상대는 귀신일텐데?
《아파.》
놀라서 위아래 방향으로 훑어봤다. 설마, 그럴 리가?
《제법 매운 손이네.》
안 어울리게 툴툴거리기까지 했다.

『안즈! 이리 와!』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건 얻어맞은 그것이 뒤로 주춤거리고 물러났다는 점이다.
바로 지금이다. 나는 끝까지 차오른 숨을 일시에 토해내며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고, 린청이 그런 내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우리 둘은 미친 사람처럼 계단을 쿵쾅거리며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발판이 빠진다 해도 상관없었다. 무너지는 굉음이 났지만 알게 뭐람.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눈도 질끈 감았다.

『어이~, 그 위에서 뭐하는 거야? 시끄럽잖아.』
아래층에서 한가롭게 저 혼자 놀고 있던 송주가 찡그린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그것도 열 받게 걸레를 높게 들어 좌우로 왔다갔다 흔들기까지 했다.
『왜들 수선이야. 지네라도 나왔어?』
그것과 비교하면 지네는 무척 귀여운 곤충이에요, 송주.
린청이 도깨비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나도 옆에서 한 수 거들었다.
『비켜!』
『나왔어! 나왔다고!』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발판을 헛디뎠다. 주룩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아픔도 몰랐다.

Posted by 미야

2015/06/17 14:49 2015/06/17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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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즈! 재빨리 손을 빼서 다행이지. 갑자기 왜 그래, 너.』
『기분이 안 좋아졌어.』
『뒤에서 누가 내 눈알 돌려줘, 이러고 속삭이기라도 했어?』
『비슷해.』
린청은 다소 짜증이 난 듯했다. 그 눈빛이「너도 저기서 북어포를 흔들고 있는 누구처럼 겁을 집어먹은 거니?」라고 묻고 있었다. 하지만 핏기가 완전히 가신 내 얼굴을 보고는 곧 누구러져 이렇다 할 잔소리 없이 걸레를 들었다. 요컨대 해야 할 일을 빨리 해치우고 밖으로 나가자는 거였다.
『하긴 기분 나쁜 편지긴 했어. 아무리 남자가 매몰차게 찼다고 해도 여자가 그런 식으로 밤새 술 먹고「나 말고 다른 마누라 꿰차고 어디 행복하게 잘 사나 두고 보자!」이러면 안 되지.』
그게... 저기 말입니다. 남자입니다.
『그리고 여자라면 글씨도 동글동글 예쁘게 써야지. 남자의 마음을 되돌리려면 눈물을 찍어야 하거늘, 박력 넘치게 휘갈겨서 어쩌겠다는 거야. 저건 한눈에 봐도 부대 재배치 명령장 글씨체잖아.』
제대로 보신 겁니다, 린청 님. 그건 남자 필체입니다.
『에이, 모르겠다. 청소하자.』
『내 말이 그거야.』
송주도 여기에 동의하고 빗자루를 들었다. 그리고 청소라고 하기엔 민망한 동작으로 바닥에 쌓인 먼지를 밖으로 끄집어내는 대신 구석으로 요리조리 밀어 넣기 시작했다. 더러운게 눈에 보이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궤짝이니 바구니 같은 물건이 나타나면 정리는 뒷전으로 미룬 채 멀리 피해서 돌아갔다.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비에 젖은 구렁이가 비늘로 쓸며 바닥을 기어간 듯한 독특한 무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위층은 어쩌지.』
『때려죽인다 해도 난 올라가지 않을 거야.』송주는 완강했다.
『알았어. 그럼 나와 안즈만 올라가볼게.』
『날 혼자 두고?!』
『그럼 어쩌라고.』

내가 밟았을 적엔 끼기긱 요란한 소리를 내던 계단은 린청의 움직임엔 아무런 소음도 내지 않았다. 빌어먹을 무생물이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움직임이 우리와 근본부터가 달라 체중을 실을 적에 무게점을 고르게 분산시켜 발판이 거의 휘지 않았다. 이쪽에서 요령이 무엇이냐 물으면 린청 본인도 아마 답을 모를 것이다. 그냥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 대답하지 않을까.
부끄럽게도 내가 올라서자 계단은 아까처럼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소리를 내지 않고 걷는 재주가 없다. 콧잔등을 잔뜩 찌푸린 린청이 뒤를 돌아보기에 눈치가 보여 동작을 더욱 조심했지만... 죄를 지은 마음에 곁눈질하니 좀처럼 그 인상이 펴지지 않았다.
『가운데 말고 가장자리를 밟아.』
그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보다도 약해진 부위가 부러질까 염려스럽다고 말했다.
내려다보니 색이 좀 변한 것처럼 보였는데 안쪽에서부터 벌레가 먹어치웠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벌레 탓이 아니라고 해도 관리를 못한 나무는 결을 따라 점차 쪼개지는 습성이 있다. 그곳으로 한 방울이라도 물이 들어가면 이내 썩게 된다. 난간을 잡은 나는 조언대로 측면으로 이동하여 살금살금 다리를 움직였다. 틈새를 통해 아래를 내려다보자 그렇게 높게 올라온 것도 아니면서 간이 오그라들었다.

『책이다.』
2층에는 내가 맡았던 냄새의 주인공이 사방에 깔려 있었다.
다만 그게 정돈된 서가가 아니라... 말 그대로 그냥 무턱대고 쌓아올렸다. 질리도록 엉망진창이라 주문하여 배달된 물품 그대로를 아무렇게나 옮겨놓은 인상이다. 일부는 포장지도 그대로 남았다. 더러는 가나다 순서대로 분류하려 시도했다가 도중에 손을 털고 그대로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린 것 같았다. 반쯤 부서진 궤짝도 보였다. 물론 그 내용물은 전부가 책이다.
『어느 나라 말이지? 글자를 읽을 수 없는데.』
린청은 동대륙 언어에 대해 아는 바가 없나 보다. 지금 그가 보고 있는 책의 제목은「수선화가 필 적에」였고 작가는 레이몬드 월렛, 그 내용은 정혼자인 아내와 결혼하고도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남자에 대한 소설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거꾸로 들었다.
『너도 볼래?』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 다른 책을 집어 들었다. 작은 글자가 빽빽하게 인쇄되어 시력을 나쁘게 만드는 종류였다. 강력범죄의 증가와 관료의 부정부패와의 상관관계에 대해 고발한 연구 논문으로 아까와 마찬가지로 동대륙 언어로 적혀 있었다. 서정적인 소설과 딱딱한 사회과학 논문이 같은 자리에 있다? 저자를 보니 윌리엄 라즈 블리스. 몇 권을 더 뒤적거리니 맨 밑으로 실용서 - 뜨개질에 대한 책이 나왔다.
『왜 이런 곳에 책들을 모아뒀지? 읽으면 큰일 나는 금서 종류라도 되나.』
『뜨개질 해법서인데?』
나는 린청이 볼 수 있도록 책을 잘 펼쳐서 들어보였다. 코바늘이 지나가는 순서를 표시한 커다란 흑백 그림은 글자를 몰라도 어떤 내용을 담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면 버리기 아까워서 여기다 모아뒀나 보군.』
소년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는 걸레로 표지의 먼지를 휙휙 닦아냈다.

그때 무슨 소리가 들렸다. 쇠로 만든 고리가 달각, 풀리는 듯한.
린청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덩달아 나도 바짝 긴장하고 말았다.
우리들은 사이좋게 허리를 구부려 자세를 낮춘 후 귀를 쫑긋 세웠다.
「들었어?」
피부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하고서 린청이 소곤거렸다.
「들었어. 안쪽에서 났어.」
「쥐라도 돌아다니는 건가?」
「쉬잇. 더 들어보자.」
다시 달각, 하고 뭔가가 움직이는 기척이 들렸다.
모르겠다. 내 귀로는 사람이 내는 소리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나는 가장 합리적인 이유를 골라 서생원에게 한 표를 던졌고 린청은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판단을 유보하겠다고 했다.
「쥐라면 다다다닥 이러고 달려야 하지 않나?」
검지와 중지를 번갈아 움직여 부산하게 달려가는 모습을 흉내 낸 그는 걸레니 빗자루니 하는 것들을 전부 바닥에 내려놓았다. 무언가 눈에 띄면 그 즉시 아구창을 날려버리겠다는 투다. 귀신 어쩌고의 가능성은 일말의 재고도 하지 않은 그 모습에 나는 살짝 당혹스러워지려 했다.
겁이 나서가 아니다. 걱정이 돼서다.
「그냥 아래로 내려가는 건 어때, 린청.」
「물건을 훔치러 들어온 도둑일 수도 있잖아.」
「설령 도둑이라고 해도 우리가 잡아야 할 까닭은 없어.」
이때 다시 달각 소리가 났다. 나는 흠칫해서 린청의 소매를 힘주어 움켜잡았다. 그 소리는 마치 이리로 가까이 오라는 듯 전보다 더 크고 확실하게 들렸다.
「반드시 그렇지도 않아. 여기서 귀중품이 없어지면 청소를 하러 온 우리가 욕을 보게 된다고.」

그는 나더러 가만히 기다리라는 손동작을 해보이곤 자세를 낮춘 채 빠른 속도로 앉은걸음을 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가더니 궤짝 틈새로 몸을 숨기고 나 있는 쪽을 돌아봤다. 근심에 젖어 입만 뻥긋뻥긋하자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조용히 하라고 꾸중했다. 다시 앞을 본 그는 네 다리로 기다시피 해서 소리가 들린 곳까지 빠르게 전진했다.
「린청, 린청!」
나는 신발을 벗어 양손에 들고 맨발로 그를 따라갔다. 어느새 목소리도 커졌다.
『린청!』
『아무도 없어.』
『쥐는?』
『사람이고 동물이고 발자국도 안 찍혔어. 아래를 봐. 먼지가 가득한데 여기에 있는 건 우리들 발자국뿐이잖아? 아마 나무가 뒤틀려서 그런 소리를 냈었나봐.』
그런데 또 달각, 소음이 들렸다.
쇠붙이가 움직이는 소리다. 나는 확신했다. 이건 나무가 뒤틀려서 나는 자연음이 아니다.
달각. 달각.
우리 둘은 사이좋게 얼어붙었다.

Posted by 미야

2015/06/15 15:10 2015/06/15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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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5/06/15 16:24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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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유, 제기랄. 눈 딱 감고 왔던 길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우리가 보고 있는 건 5층 높이의 건물이었다. 특정 양식을 따른 것이 아니고 전반적으로 팔각형으로 각이 진 길죽한 생김새의 목조 건물이었다. 도둑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3층 높이까지는 환기를 위한 용도로의 작은 덧창만 나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4층과 5층에는 사람 몸이 그대로 빠져나올 수 있는 큼직한 통유리창이 달렸는데 아래에 달린 창은 작고 위에 붙은 창의 크기는 매우 커서 그 탓에 착시효과를 일으켜 건물 자체가 시각적으로 매우 불안정하게 보였다. 뭐랄까, 지나치게 작은 신발을 신은 덩치 큰 사람처럼 보였다. 본인은 편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보는 입장에선 아장아장 걷다 못해 쓰러질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손바닥을 눈가로 가져가 꼭대기의 모양을 관찰하던 린청은 건축가의 무지를 탓했다.
『어차피 밧줄을 걸어 4층으로 침입하면 그만이잖아.』
그렇기는 하다만, 그런 수고를 일부러 하게끔 만들었다는 점에서「보물창고」어쩌고의 단어가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다. 게다가 사람이 벽을 타고 오르면 다른 사람들 눈에 쉽게 띄게 되는 법이다. 은밀히, 남들 모르게, 눈에 띄지 않도록 - 이라는 절도 수작의 기본 규칙이 깨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대해 뭐 들은 건 없어? 하수들이나, 주변에서 떠든 얘기가 없느냐고.』
열쇠를 두 손으로 쥐고 있던 송주는 필사적이다 싶을 정도로 고개를 흔들어댔다.
그러더니 모른다, 혹은 안다, 답을 하는 대신 영 신통치 않게 말했다.
『아마도... 아닐 거야.』
밑도 끝도 없이 뭐가 아니라는 건가.
입술이 달짝달짝 움직이는 걸 봐선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머릿속에 떠오른 이야기를 괘념치 않고 입 밖으로 꺼내면 재수가 단단히 없을 거라 믿는 눈치다. 절박한 눈빛이 우리에게로 쏟아졌다. 하지만 그렇게 입을 조가비처럼 닫고 있어선 그렇다, 아니다, 어느쪽으로도 맞장구를 쳐줄 수가 없었다.
소년은 내부의 불온한 공기를 미리 읽으려는 듯 손을 내밀어 자물쇠 부분을 더듬었다. 왼손에 든 열쇠를 열쇠구멍에 꽂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보다는 오른손에 쥔 북어포에 더 신경을 썼다.
『있잖아... 열쇠가 녹슬어 움직이지 않았다고 거짓말 하자.』
『숙희 님이 한 말을 기억 못하는구나, 송주. 우리가 제대로 청소를 했는지 나중에 자기가 직접 와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잖아. 그러면 자물쇠가 움직이지 않았다는 그런 거짓말, 그 자리에서 금방 들통 날 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거라면 일찍 들어가는 편이 나아. 이런 말도 있잖아. 매도 먼저 맞는게 낫다.』
『시끄러, 변방인. 내가 아는 상식은「매는 가급적 안 맞는 편이 좋다」이다.』

드디어 열쇠를 꽂긴 했는데 그게 왼손이었다. 덜걱덜걱 흔들었지만 이래선 가위를 왼손에 쥐고 천을 자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소리만 요란했지 일정 부분에 이르면 뭔가에 걸린 것처럼 둔탁한 소음을 냈다. 그런데도 송주는 손목에 힘을 주고 억지로 비틀려고만 했다. 보다 못해 내가 나서 열쇠를 오른쪽으로 회전시켰다. 뻑뻑한 느낌이었지만 반회전 하자 찰칵, 소리가 제대로 났다.
『아직 열지 마! 준비 좀 하고.』
네, 네. 영험하신 북어포를 챙기셔야죠. 알다마다요.
손잡이를 잡고 하나부터 열까지 숫자를 천천히 세었다. 그리고 문고리를 힘을 주어 잡아당겼는데...
투웅
격렬하게 부딪치는 감각에 소스라쳤다. 생뚱맞게 밖에서 미는 문이었다.

『창문이 좁아서 그런가. 안이 많이 어둡군.』
『물통을 여기에 놓아서 문이 도로 닫기지 않도록 하자.』
『아직 내부로 들어가지 마. 눈을 감고 있다가 시야가 어둠에 익숙해진 뒤에 들어가.』
아이들이 이것저것을 말하는 동안 나는 코를 킁킁거려 태어나기 이전부터 세포에 각인된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오래되어 낡은 것들의 냄새... 곰팡이... 그리고 좀약의 냄새... 환의로 몸이 떨리려 했다. 신룡님, 감사합니다. 이 안쪽에는 책들이 잔뜩 쌓여 있는 것이 분명했다. 책이다. 다른 것들도 아닌, 책들이다! 그것도 책장 하나를 채운 분량이 아니라 엄청나게 많았다!

신 난다, 외쳤던 것 같다. 아니면 끝내준다, 그렇게 말한 것도 같다.
서둘지 말라 만류하는 린청을 나도 모르게 뿌리치고 그 안으로 뛰어들어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책! 분명히 이것은 책! 발을 구르자 발치에서 무수히 많은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래도 상관하지 않고 벽면 가장자리부터 시작해 내부를 한 바퀴 죽 훑었다. 어디냐, 분명 가까운 곳에 서가가! 회색으로 덩어리진 거미줄을 양손으로 치우며 보물을 찾아 진격했다.
『야! 이 미친놈아! 저게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분류되지 않은 잡동사니가 좀 보였지만 내 흥미를 잡아끌만한 종류는 아니다. 나는 옷에 옮겨 붙은 거미줄을 털어낼 상각도 하지 못한 채 오래되어 케케묵은 책의 향기를 음미했다. 어디지? 위쪽인가?

송주의 욕설은 한 귀로 흘린 채 종종걸음으로 정 중앙으로 난 계단으로 향했다. 이때 나는 이미 눈에 보이는게 없는 상태였다. 한 걸음 내딛자 끼익 울리는 소음이 장난이 아니었지만 썩지는 않았으니 괜찮다고 여겼다. 어린아이의 몸무게조차 견디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 염려는 일찌감치 접고 신이 나서 한꺼번에 세 계단을 연거푸 밟아 올라갔다. 끼익, 끼익, 끼익, 체중을 실을 적마다 소름끼치는 음색이 귀를 찢었다.
『야, 인마.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 기다리라고 했잖아!』
송주는 내가 귀신에게 홀렸다고 믿은 것 같다. 득달같이 목덜미를 움켜잡더니 냄새 지독한 북어포로 내 머리를 찰싹 후려갈겼다.
『아니면 보물을 강탈할 생각에 정신이 나갔냐?! 엉?!』
그리고는 잔뜩 굳은 얼굴로 나를 다시 1층 바닥으로 내려서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뜻 모를 소리를 작게 중얼거렸다.
『홀렸다면 눈을 감고, 아니라면 입을 다물어라.』
잘은 몰라도 여기선 입을 다무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건은 함부로 만지지 마.』
언제부터 대장이었다고 송주는 우리들에게 명령했다.
『혹시라도 안 좋은게 닿을 수 있을 수 있으니까 주의해서 바닥 먼지만 쓸... 야~~!』
그래봤자 린청과 나는 다른 나라 사람이라서 이사실의 백성이 내리는 지시에는 따르지 않아도 되었다. 선반에서 굴러 떨어진 상자에서 요괴의 말린 눈알이 튀어나왔다는 괴담은 까마득히 잊어버린 린청이 눈앞에 놓인 장식 상자를 벌컥 열었다. 놀란 송주가 기함했지만... 내눈에도 그건 그렇게 위험한 종류가 아니었다.
『편지함인데? 이거.』
『어디 보자... 오늘은 눈을 뜨니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습니다. 당신께서 여전히 옆에 누우신 것 같아 옆자리를 더듬었지만 새벽 이슬비를 맞은 듯 싸늘하였습니다. 밤새 마신 술이 깨지 않은 오전, 두통에 괴로워하며 여전히 나는 내 곁에서 멀리 도망친 그대를 생각하였습니다. 이 지겨운 감각은 분명 취기 탓이 아니겠지요. 하여 그대는 나를 항상 괴롭게 만듭니다. 그대가 밉습니다, 그대를 증오합니다. 왜 이런 나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 건가요. 왜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 건가요... 뭐야, 이거. 연애편지?』
「연애편지」라는 단어에 반응, 송주의 고개가 타조의 머리처럼 불쑥 튀어나왔다. 아직 나이는 어려도 그런 쪽으로 관심이 아주 없는 건 아닌지라 호기심이 생긴 것이다. 물론 귀신이 두려운 탓에 직접 만지려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꺼리는 건 아니라서 기꺼이 코를 박아가며 글자를 읽으려 했다.
『어디보자... 식욕도 잃었습니다. 만사가 귀찮아졌습니다. 나는 이대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신은 이렇게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는데, 나는 말라가고 있는데, 먼 이국에서 상냥하고 착한 아내를 맞이하여 행복한 미래를 맞이할 당신이 원망스럽습니다... 내용이 연애편지 치고는 영 산뜻하진 않네.』
송주는 내 의견을 구하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하지만 나는 빳빳하게 굳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저 연애편지의 뒷내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받아봤던 입장에서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증오스럽고도 사랑스러운 이여, 미움 받아 마땅한 자여.
그대는 내 영혼을 말려 죽이고 있어.
그러니 나 또한 그대를 죽이려 드는 것이 공정하지 않겠는가.
나의 벗, 그리고 나의 안식처.
그대의 이름을... 시오재. 조용히 입술에 담아 감히 애원하노니
이 번뇌의 화염을 그대에게 고스란히 보여줄테니
네가 그렇게나 좋아하던 책들에게 둘러싸여 타 죽어버리렴.

외마디 비명이 터지려 했다.
더 읽어선 안 된다. 계속 엿봐서는 안 된다.
나는 린청의 손가락이 자칫 끼일 뻔했다는 걸 알면서도 호되게 편지함의 뚜껑을 닫았다.

Posted by 미야

2015/06/14 21:08 2015/06/14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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