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청에게 뭐라도 귀띔을 해주는 편이 좋았으려나. 이 몸에 양심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여전히 남아있었던지 마음이 심란했다. 충동적으로 문손잡이를 쥐고 밖으로 뛰어나가려 했다. 그러다 납덩이처럼 무거운 무기력증이 뒤통수를 잡아당겨 힘없이 돌아섰다. 괜찮을 것이다. 별 일이야 있겠는가. 어린아이를 공격하는 수호령따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런 건 악령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사악한 건 이곳에선 발을 붙이지 못한다. 거기다 린청에게 뭐라고 경고를 하면 좋단 말이냐. 어젯밤 꿈자리에서 네가 다치는 꿈을 꿔서 걱정스러우니 몸조심하라고? 설득력 꽝이다. 흠칫 놀라 깨닫고 보니 엄지손톱을 맹렬하게 씹어대고 있었다.
수중에 읽을 책이 없었기에 버들고리짝을 뒤져 정리하다 만 옛날 물품 구매서와 기안서 같은 서류들을 꺼내다가 글자를 읽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스러웠지만 마음이 심란할 적엔 닥치는 대로 글자를 읽으면 약간씩 진정이 되곤 했다. 침상에 등을 대고 편안하게 누운 채 냄새나는 것들의 낱장을 넘겼다. 15년 전 늦가을, 낙엽을 청소할 빗자루를 다량으로 주문했다. 일주일 뒤 대청소 계획에 따라 먼지를 털었는데 리장면이라는 이름의 쉰 두 살 하수가 3층 높이의 사다리에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덕분에 골반 뼈에 금이 가는 중상을 입어 이 자에게 최대 넉 달의 생계비를 지급해야 한다는 첨부 문서가 붙었다. 금이 간 거나 부러진 거나 사실상 마찬가지일테니 거동을 전혀 못할텐데 넉 달의 급여는 많이 부족한 금액 아닐까 걱정하며 뒷장을 넘겼다. 하지만 이후의 이야기는 알 수가 없고 엉뚱하게 밀가루와 식용유, 각종 채소의 구입 목록이 나왔다. 서류들을 이곳저곳 옮기면서 서로 섞인 모양으로 식품 구입에 대한 기안은 앞서 읽은 보고서보다 날짜가 2년 뒤였다. 『에잇, 재미없어!』 한심한 소리였다. 아마유 다섯 근, 근대 여섯 자루, 홰설초 열 일곱 뿌리, 이런게 재미가 있을 리가 없잖는가. 눈을 감고는 읽던 서류를 머리맡으로 치웠다. 공짜로 얻은 등잔기름을 아끼도록 하자. 아직 일렀지만 서둘러 잠자리에 들기로 결심하고 누워 있던 자세에서 몸을 반쯤 일으켜 곁상에 올려든 등불을 끄려... 『어이쿠.』 제발 이러지 말자! 일곱 줄 현금을 품에 안고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자와 시선이 정면에서 마주쳤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나리.》 중력의 법칙따윈 무시하고 박쥐처럼 매달린 채 그가 넙죽 무릎 절을 올렸다. 『허어억! 이게 누구야. 누... 누박기?! 자네, 성불했다고 들었는데?!』 《번민이 많다보니 아직... 부끄럽사옵니다. 그나저나 기쁘네요, 제가 누구인지 기억해주신 겁니까?》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나는 필사적으로 도리질했다. 나는 저런 자를 모른다. 내 눈엔 유령이 안 보인다. 폐병에 걸려 죽은 탓에 비쩍 여위어 안색 창백한 저 사내가 누구인지 안즈는 알지 못한다. 서둘러 돌아눕고 풀썩거리며 이불을 머리 꼭대기까지 뒤집어썼다. 하나, 둘, 셋, 넷. 나는 잠에 빠졌다. 쿨쿨, 냠냠.
《잠시 일어나 보시지요. 궁전 악사 누박기, 급히 나리께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시간이 얼마 없사옵니다. 제가 여기까지 몰래 들어온 걸 들키면 산 채로 다리가 뜯겨요.》 저 자는 자신이 이미 죽었다는 걸 잊었나 보다. 산 채로 다리가 뜯기다니. 나는 이불 안에서 몸을 둥글게 말았다. 『싫어.』 《진짜 중요한 이야깁니다, 나리.》 『여기엔 나리라고 부를 만한 자가 없소이다. 누굴 찾는 거요, 누굴!』 《시오재 나리가 아니옵니까. 그렇다고 들었는데요.》 『착각하시었소. 내 이름은 안즈라고 하고, 시오재라는 자는 이미 오래 전에 명부에 들었다고 알고 있소. 꺼지쇼.』 웅크리고 누워 퉁명스레 대꾸했음에도 누박기는 완강했다. 《에이, 자꾸 왜 아니라고 그러세요. 그만 우기고 일단 일어나 보시라니까요. 진짜로 시간이 없어요.》 『누가 우긴다는 거냐. 찐빵과 만두는 결코 같지 않다고!』 《짠빵이나 만두나 그 피는 밀가루로 만들어지잖아요. 도대체 뭐가 다르담.》 『이놈이! 맛이 다르잖아, 맛이! 사람이 하는 말이 말 같지 않게 들리더냐!』 화를 내며 벌떡 일어나 앉자 코앞으로 시퍼렇게 색이 죽은 망자의 얼굴이 다가왔다. 그것도 거꾸로 뒤집힌 채다. 이런 거 안 좋다, 염통이 쫄깃거리다 못해 오그라들려 했다. 냉기에 굳은 것처럼 뺨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한참만에야 마른침을 겨우 삼킨 뒤, 조금 거리를 두고 떨어지라는 의미로 손부채질을 해보였다. 다행히 누박기는 말을 잘 들었다. 만족스러울 정도는 아니었어도 코 닿을 거리로 붙어있지 않으니 살 것 같았다. 《어쨌거나 소인의 인사 받으소서. 무사 전생을 축하드리옵니다.》 『그딴 축하를 내가 왜 받아! 안 받아!』 《여하간 오랜만에 뵙습니다. 마지막으로 뵈었던 날부터 서른 해가 족히 흐른 것 같은데 돌이켜보면 시오재 님께 음월애사를 연주해드린 날이 어제처럼 느껴지는군요. 감개가 무량하여... 흑. 이렇게 어린 몸으로 다시 돌아오실 줄이야. 금강벽 곡조가 틀렸다며 책으로 머리를 얻어맞은 적도 있었죠. 고백하자면 그때 사적인 원한을 품고 저주했었습니다. 그런데... 저어, 그때 돌아가신 건 제 저주 탓은 아니겠죠?》 『유령인 주제에 말이 많군. 것보다 너.., 시간 없다 말하지 않았느냐?』 어안이 벙벙하여 가만 쳐다만 보고 있자 누박기는 또 자신의 퍼런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나는 질색했다. 《그렇지! 시간이 없지. 그러니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사옵니다. 진짜로 이사실을 멸망시킬 작정이옵니까.》
높은 산이 반나절만에 무너져 평평한 들판이 되었다는 식의 황당한 얘기였다. 순간적으로 사래가 들려 기침이 터져나왔다. 『차라리 옛날처럼 잠 못자게 실컷 연주나 해라. 뜬금없이 귀신 낯짝을 들이밀면서 뭔 소리야, 그게.』 《실은 오래전부터 저희들 사이로 그런 얘기가 은밀하게 돌았습니다. 나리는 원래 죽지 않는 몸이다. 육신은 죽어도 계속하여 강생하신다. 언젠가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신다. 돌아오셔서 제국 이사실을 멸망으로 이끌 것이다...》 『에엑?!』 나는 이불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흥분한 나머지 목소리도 절로 커졌다. 『누가 그런 말을 퍼뜨리고 다니든. 구안와사에 걸려 입 돌아간 놈이 도대체 누구냐고!』 제대로 죽지 못한 나머지 전생하고 있다는 건 비밀이다. 그 사실을 누군가 알아차렸다는 건가. 도대체 누가?! 아니, 그 이전에. 나는 정색하고 목을 똑바로 세웠다. 『내가 미쳤냐! 내게 무슨 이득이 있다고 뭐 하러 제국을 멸망시켜!』 《소인이 지금 그걸 묻고 있지 않사옵니까. 진짜로 그러실 건가요?》 『어허허... 이보게, 누박기. 그대는 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으로 보이는가? 제국을 멸망시킬 정도로?!』 《음... 그건. 솔직히... 저어.》 누박기는 난처해하며 말 꼬리를 흐렸다. 그리고는 썩어가는 우유처럼 탁해진 눈알을 빙글 돌렸다. 거 봐. 나는 무릎을 소리 나게 때렸다. 『난 그렇게 능력 좋은 녀석이 아니야. 그건 완전 헛소리일세.』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자면 시오재 님 탓에 벽은국이 멸망한 건 사실이잖아요.》 『미친! 내 취미가 나라 말아먹기라도 된다는 거니?! 벽은국이 왜 나 때문에 망해!』 《벽은국에서 이사실 제국으로 망명한 문장학사가 그리 한탄하던데요. 전부 시오재 님 탓이라고...》 『그려, 다 내 잘못이라고 해라. 반찬으로 올라온 두부조림의 맛이 이상한 것도 전부 내 탓이지.』 격분하며 베개를 집어던지려 하자 유령인 주제에 누박기는 눈에 띄게 안도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아니라는 거죠? 그죠? 날조된 헛소문이라는 거죠? 아, 다행이다. 이제야 마음이 놓... 이런.》 도중에 말을 끊더니 허겁지겁 자신의 악기부터 챙겼다. 무엇인가를 두려워하며 북동 방향을 응시하는데 그가 느끼는 초조감이 시큼한 냄새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안 되겠다. 생각보다 훨씬 빨리 갔다 돌아오는군. 그럼 나리, 소인이 오늘 이곳에 왔었던 건 비밀이옵니다. 조만간 허락해주신다면 나리가 좋아하는 음월애사를 또 들려드리겠사옵... 이크!》 얼마나 급한지 누박기는 말도 채 마치지 못하고 하얀 연기 비슷한 형체로 변하여 부리나케 도망쳤다. 그렇게 유령의 머리가 천장으로 쑥 빠져나감과 거의 비슷하게 하여 쿵, 하고 큰 울림이 있었다. 아무래도 린청을 몰래 따라갔던 그것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듯하다.
『헐... 이게 뭐야.』 눕지도 못하고, 일어서지도 못한 채 눈만 꿈뻑거렸다. 결국 밤새도록 뜬눈이었다. 혹시라도 눈을 감으면 천장을 뚫고 이상한 것이 내려와 잠에 빠진 나를 공격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해하며 이불을 입안에 가만 물고 있었다. 이번에는 막대기를 들어 천장을 쿵쿵 찧을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했다.
Posted by 미야
2015/07/04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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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종이들을 정리하다 말고 린청이 가만 물어왔다. 『혹시 들었어? 보름 정도 뒤에 무슨 큰 행사가 있나 보던데.』 들은 바가 없었지만 속으로 가만 날짜를 계산하고 납득했다. 바뀐 환경에 그럭저럭 적응을 마치면 그때부터 슬슬 향수병이 생기기 시작한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학부생들은 가족이 그립다고 몸서리치고, 식욕저하와 불면증을 호소하게 된다. 기름진 진수성찬도 집에서 먹던 마른반찬에 비하면 형편없게 느껴지고, 나이든 유모가 안전을 기원하며 손수 꿰매준 호신부에 눈물자국이 번지는 거다. 그래서 침체된 분위기를 바꾸고 여러 흥을 돋구기 위하여 이 무렵이면 일종의 문화제를 여는게 이사실의 관습. 일명, 사무월 축제다. 『단체로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른데. 자기네들끼리 모여 안무를 연습한다며 시끄럽게 굴더라고.』 그래봤자 그런 방면으로 흥미가 전혀 없는 린청은 번잡하고 성가시다며 불평했다. 다행히 칠배례 의식과 달리 강제성은 없는지라 일찌감치 나는 빼달라고 하고 빠져나온 눈치다. 것보다 쓸데없는 선민의식을 가진 그들이 사친으로 온 우리 같은 변방인에게 노래를 불러봐라, 나와서 춤을 춰봐라 이럴 리가 없으니 우리는 그냥 편하게 뒤에서 구경이나 하고 박수나 치면 된다.
소년은 환한 보름달을 구경하는 듯한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고향에서도 비슷한 걸 하기는 했는데. 해가 지면 어른들이 코가 비뚫어지게 술을 마시곤 했지.』 『술? 그건 아닐텐데.』 나는 빙긋 웃으며 린청을 따라 필기구를 정리하며 어질러진 탁상을 치웠다. 『사무월 축제는 원래 아름다운 소년이나 천하제일의 미소녀를 뽑는 행사야. 매년 했던게 아니라 8년에 한 번 열려서 8년 축제라고도 했지. 일등으로 뽑히면 머리에 화관이 씌워져 모두에게 인사를 받으며 마을 한 바퀴를 돌게 되. 마을 주변을 따라 빙 돈다는 행위에는 요괴나 악령의 침입을 방지한다는 주술적 의미도 함께 있는 거야. 결계를 새로 그리는 중요한 행사를 하면서, 그것도 8년에 한 번 있는 의식인데, 흥청망청 코가 비뚫어지게 술을 마시겠냐. 뭐, 원래의 그 의도와 목적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다면야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만...』 따지고 보면 이사실도 그렇다. 여기선 거대 도시 주변을 빙 돈다는게 사실상 무리라서 온갖 꽃으로 치장한 몸으로 황제 앞에서 인사를 드리는 걸로 끝이 난다. 마을을「제대로 죽지 못한 것」으로부터 방어한다는 원래의 의도는 사라지고 미동을 내세워 재주와 미를 겨룬다는 겉핡기만 남았다.
『천하제일의 미소녀를 뽑는 행사라고? 쳇. 어쩐지 팔뚝이 간지러워지는군... 언젠가 사촌누이가 뽑힌 적이 있지.』 『휘사 님이?』 나는 경사가 진 자갈투성이 산길에서 엄청나게 굽이 높은 신을 신고 발랄하게 움직이던 소녀를 떠올렸다. 어떻게 저렇게 복잡한 방식으로 땋을 수 있을까 감탄했던 색 밝은 머리카락도 생각났다. 화려한 색의 나비를 연상시키는 사람이었다. 가만히 회상에 젖고 있는데 녀석이 불만을 표현했다. 『나는 린청이고, 녀석은 높여 불러 휘사 님이냐. 그거 기분 나빠!』 『그래도...』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구두 굽으로 찍어 남의 뒷통수에 구멍을 내고도 남을 분이라서 - 라는 말은 생략되었지만 우리 둘은 동시에 거의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 주변머리로는 그녀를 감히 휘사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그거 아냐? 여인들 숙사에 방이 하나 남았는데 서로 옷방으로 쓰겠다며 은밀히 다툼이 있었다고 하더군.』 린청 님, 그 방은 원래 제가 쓸 방이었사옵니다. 다리가 푹푹 빠지는 진흙뻘밭이 되어버린 내 심정도 모르고 그는 목소리를 높여가며 계속 얘기했다. 『희망자 중 신분이 가장 높은 사람이 그 방을 쓰도록 하자고 결정했다가 항의가 나왔나봐. 그래서 다시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사람이 방을 차지하자고 의견을 모았는데 내 사촌누이가 벌떡 손을 들고 나서서 운이 아닌 실력으로 승부를 보자고 건의를 한 거야. 그리고는 뭘 하자고 했는지 알아? 꽃꽂이나 수예실력을 겨뤄보자 했음 내가 이렇게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오르지도 않지.』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나조차 그 소문을 들었다. 휘사 님이 제안한 건 정좌 자세로 오래 버티기였다. 그 정도야 별 거 아니잖아 쉽게 생각하기 쉽지만. 앞에 잔칫상을 차려놓고. 그것도 상다리 뽀샤지게 차려놓고. 튀긴 닭과 염소젓탕, 구은 도미, 송이버섯과 어란과 같은 산해진미를 잔뜩 올려두고. 군침을 꼴딱꼴딱 삼켜가며 - 그것도 나중에 귀부인이 될 여자애들이 - 누가 오래 식탐을 참을 수 있을지를 겨루자고 했단다. 그림을 상상하자 나는 그 즉시 뿜었다. 『으이그, 이기기라도 했음 화도 안 나지.』 휘사 님은 3등을 차지했고, 결국 옷방 쟁취에 실패했다. 진짜지 여자애들은 무섭다. 아, 나도 여자애지만. 『그런 녀석이 천하제일의 미녀라고? 흥! 다들 눈이 어떻게 된 게지.』 『하지만 휘사 님은 분명 눈에 띄는 미인이고...』 『믿었던 너마저 눈이 삐었냐.』 『그게 아니라 네 평가가 야박한 거야, 린청. 만약 휘사 님이 미인대회에 나가면 분명...』
여기까지 말하는데 린청이 갑자기 내 입에 손가락을 대며 급히 쉿, 소리를 냈다. 『왜?』 신이 나서 잡담을 떠들던 여운이 남아 나는 계속해서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린청은 헷갈린다며 가만히 천장을 가리켰다. 그리고 목소리를 가만 낮추었다. 『있잖아, 해가 이미 저물었는데 지붕 위로 새가 날아다닐까?』 『올빼미라면 가능하겠지. 무슨 수상한 소리라도 들었어?』 『꼭 그런 건 아닌데... 모르겠어. 어쩐지 몸무게가 엄청 가벼운 사람이 저 위를 빠르게 걷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가만히 일어나 구석에서 기다랗게 생긴 도구를 가져와 천장을 두 번 쿵쿵 찍었다. 『사람이 저 위를 왜 돌아다니겠어. 그럴 리 없잖아, 린청.』 내 주장에 화답하듯 지붕에서 푸드득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소년의 굳었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뭐야, 저 위로 새둥지라도 있는 거야?』 『직접 보진 않았지만 뭐, 그와 비슷한 거겠지.』
실은 전혀 비슷하지도 않았다.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들은 순번을 바꿔가며 내가 사는 창고 지붕 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아마도 잃어버렸던 내 왼쪽 신발을 가져와준「그것」과 주기적으로 교대라도 하는 눈치였다. 녀석들은 숨도 쉬지 않았고, 일절 기척이라는 걸 내지 않았다. 냄새도, 체온도, 심지어 형체조차 없는 주제에 존재감은 의외로 뚜렷해서 나는 창고로 돌아올 적마다 지붕 위를 쳐다보고 싶다는 충동을 강하게 느껴야 했다. 어디 그뿐인가. 날 이대로 내버려둬, 소리도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늘 올려다보고 싶은 걸 꾹 참아가며 문손잡이를 돌리곤 했다. 내가 그것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걸 표현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쳐다보면 더 소란스러워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어느 정도 날짜가 흐르자 나는 견디다 못해 그것을「쥐」라고 여기기로 결심했고, 밖에서 봉처럼 생긴 긴 막대를 가져와 쥐를 쫓듯 천장을 툭툭 건드리기 시작했다. 「오늘처럼 대놓고 왔다갔다 걷는 일은 아예 없었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람.」 아무래도 오늘은 이곳에 나 말고 다른 이가 있어 거기에 반응하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린청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약을 놓아야 하는 거 아냐?』 『그래야할지도. 여러모로 불편한 동거 중이라네.』 나는 호들갑스러운 동작으로 막대기를 들었다 놓았다 해보이며 연극조로 허리를 구부려 절을 했다.
숙소로 돌아가고자 건물 밖을 나서면서 소년은 가만히 고개를 들어 지붕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당연히 눈으로 보이는 건 없었지만 의아심이 들었는지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뭔가를 느낀 걸까, 아니면 감이 좋은 것일까, 작은 자갈을 주워들더니 성가신 까마귀를 내쫓는 요령으로 그걸 지붕 위로 던졌다. 하지 말라는 의미로 린청의 소매를 끌어당겼지만 그는 다시 적당한 돌을 골라 주워 손에 쥐었다. 『안즈, 네 눈에는 보이는게 없어?』 『없어. 저 위에는 아무것도 없어. 절대로 없어.』 제법 단호하게 - 그것도 세 번이나 반복하여 없다 말했지만 듣지 않고 돌을 던졌다.
더 강하게 말려야 했던 걸지도. 숙소로 돌아가는 소년의 등 뒤로 기분 나쁜 검은 아지랑이가 따라붙었다.
Posted by 미야
2015/07/03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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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신이 아니구나! 변방국 출신이라고 하나 엄연히 신분 높은 귀족의 자제인데 거세를 하고 자신을 보좌하는 내관이 되라 했다고?!』 화를 내며 거세를 거-거-거-거-거세로 발음했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하다 할 수 없고. 나는 지긋이 실눈을 뜨고 공책의 한 부분을 지적했다. 『린청, 그 단어는 태양이지 캐양이 아니야. 틀리게 적었어. 그 옆의 문장은「산골짝의 다람쥐 아기 다람쥐, 도토리 점심가지고 소풍을 간다」이고. 아니, 것보다 교과지문이 왜 이따위야.』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니. 거절은 확실하게 잘 했고?』
요즘 린청은 내가 머무는 창고로 와서 숙제를 곧잘 했다. 일단 손을 봐주겠다며 줄줄 서서 덤벼드는 귀찮은 녀석들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좋았고, 그리고 동대륙 표준어를 전혀 모른다는 점에서 내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뼈대 굵은 무가(武家)에서 자라난 소년은 아무래도 외국 문물에 대한 공부엔 소홀했던지 어머니, 아버지, 산과 바다 따위의 기본적인 단어조차 모르는 실정이었다. 그보다 실전에 써먹을 수 있는 병법을 공부했으면 하는 바람이 커서 가본 적도 없는 남의 나라 말을 배우는데 왜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지에 대한 불만 자체가 컸다. 『바다를 건너갈 것도 아닌데. 젠장.』 뾰로통한 표정으로「캐」라고 적은 부분에 가위표를 그리고 다시 태양이라고 제대로 고쳐서 적었다. 『하긴... 린청은 멀미를 심하게 하니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건 무리.』 『누가 멀미를 한다는 거야! 련 가의 장남인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멀미를 한 적이 없어.』 『하지만 예전에 내가 봤을 적엔...』 『그건 소화불량.』 강하게 주장하며 이번엔 사과가 그려진 그림조각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젠장맞을, 사과를 사과라 부르지도 못하고... 이걸 동대륙 사람들은 뭐라고 하지?』
항해술이 놀랍도록 발달하면서 대륙간 교역이 점진적으로 활발해지고 있는 중이다. 무역에 눈을 뜨면서 상인들은 일찌감치 동대륙 언어를 배웠고, 세금을 걷어야 하는 입장에서 그 다음 순서로 세관원들이 동대륙 언어를 배워야 했다. 지금은 귀족들도 앞 다투어 외국어를 공부하고 있는데 린청 입장에선 초급 동대륙 언어 강좌가 선택이 아닌 필수과목이라서 그저 난감할 뿐이었다. 악마가 떨어뜨린 더러운 발톱이라도 되는 양 사과 그림을 움켜쥐고 그는 분통을 터뜨렸다. 『심지어 교양을 위해 악기도 배워야 한다는 거야. 차라리 활쏘기를 배우라고 할 것이지.』 『그렇군.』 『어이. 남의 집에서 불났다는 투로 시큰둥하게 말할 때가 아니라고?』 나는 난처함을 감추고자 목덜미를 문질렀다. 린청과 달리 나는 악기 연주에 그다지 두려움이 없는 쪽이다. 예전에도 다섯줄 아현을 곧잘 연주했으니 조금만 연습하면 예전과 비슷한 실력 정도는 나올 거라 생각한다. 다만 곤란한 건 수중에 없는 악기를 장에 나가 돈을 주고 사야 한다는 건데... 마침 내가 쓴 협박편지가 본국에 도착할 즈음이라 조만간 그 문제도 해결될 수 있을 거다. 가만히 속으로 셈을 해보았다. 속달로 가면 이십일 정도. 왕복으로 한 달 열흘. 펄펄 뛰며 마당으로 벼루를 집어던질 아버지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좋은 소리를 낼 악기를 상상했다. 아현을 얻으면 제일 먼저 린청 앞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을 연주해볼 작정이다. 악보가 없어도 음률은 여지껏 외우고 있으니 손가락만 풀어지면 그럭저럭 괜찮은 연주를 해보일 수 있을 터다. 『듣고 있어? 사내인데 악기를 배워야 한다니까?』 『괜찮사옵니다. 그야 저는 린청 님과 다르게 교양이 샘솟는 종자라서요. 거기 단어 또 틀렸다.』 소년은 이를 갈아대며 다위라고 쓴 걸 바위라고 고쳐 적었다.
공책에 코를 박은 상태에서 린청이 다시 말했다. 『그런데 너, 내가 아까부터 물어보잖아. 거절은 확실하게 했어?』 『응? 무슨 거절.』 『거세를 하고 내관이 되라는 제안을 들었다며.』 이번에는 거-거-거-거-거세로 발음하지 않고 깔끔하게 딱딱 끊어 거세라고 말했다. 어쨌거나 나는 어깨를 으쓱일 수밖에 없었다. 여자로 태어난 내가 있지도 않은 고환을 떼어내고 내관이 되는 건 애초부터 무리여서 이쪽에서 승낙을 하고 자시고 이전에 불가능한 이야기다. 『불가능하다고 대답했어.』 린청은 고럼 고렇지, 이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했어. 그럴수록 딱 잘라서 거절해야 한다니까.』 모르겠다. 평민의 아이였다면 귀가 솔깃한 제안이었을지도. 허나 여관이 되어 궁궐에 들어간다고 해도 그다지 근무조건이 좋을 것 같지는 않다. 월급은 그럭저럭 받겠으나... 대신 휴가가 일절 없다. 말 그대로 죽을 때가 되어야만 퇴직을 허락받고 들 것에 실려 밖으로 나올 수 있는데 난 그런 건 딱 질색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장례를 치르러 나갈 수가 없다며 몰래 울던 지밀상궁을 봐서 안다. 평생을 안에 갇혀서... 아이고, 끔찍스러워라.
빌린 교과서를 다른 종이에 베껴 쓰기 위해 탁상에 필기구를 펼치고 먹을 가는데 린청이 또 질문했다. 『저... 있잖아. 그런데 제안을 거절하니까 상대방 반응은 어떻든?』 제정신이 아니라는 둥,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분명하다는 둥, 욕을 하긴 했어도 상대가 상대인 만큼 내심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개인적인 경험을 떠올렸던지 그의 표정이 퍽이나 좋지 않았다. 사실 신분 높은 자가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하는 일은 의외로 흔하고, 그걸 단칼에 거절하는 일은 솔직히 쉽지 않은 일이다. 설령 웃는 낯으로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마쳤음에도 나중에 화근이 미치기도 한다. 외동딸을 첩으로 달라고 하여 부드럽게 거절했더니 모반을 꾸몄다 모함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했다는 이야기는 제법 흔하다. 『그 자손이라는 남자, 성격도 보통은 넘는 것 같던데.』 『분명 보통 성격이 아니지. 그래도 일단 화를 내지는 않았고...』 대신 뜬금없게 이상한 질문을 던지고는 거기에 대한 답을 강요했다.
질문. 길도 변변찮은 외진 곳으로 다 쓰러져가는 사당이 하나 있는데 주변으로는 인가도 없어 낮이나 밤이나 그 주변에서 사람을 구경할 수가 없었다. 을씨년스러운 곳이라 대낮에도 귀신이 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인데 여름 더위를 피하고자「나는」해가 질 무렵 사당으로 가보기로 하였다. 힘들게 걸어 도착을 하고보니 노을이 질 무렵이었고, 바람 하나 없어 오히려 땀이 흘렀다. 괜한 헛걸음을 하였구나 실망하여 사당 앞에서 바로 돌아 나오려는데 갑자기 뒤쪽에서 바스락 기척이 들리면서 목덜미로 바람이 닿았다. 소스라치게 놀라 돌아보니「이것」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일까.
소년은 고민하며 자신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음... 그건... 아마도 들개겠지.』 『사람 목덜미에 바람이 닿았는데? 나타난게 개라면 높이가 안 맞지.』 『그럼 강도인가.』 『주변에 인가 자체가 없는데 노상강도짓을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유령?』 사실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없다. 그냥 장면을 연상하고 생각나는 대로 즉석에서 답하면 되는 문제다. 『들개도 아니고, 강도도 아니며, 귀신도 아닐 거다? 그래서 넌 뭐라고 했는데, 안즈.』 『착각.』 『응?』 『어떤 사실이나 사물을 실제와 다르게 느끼거나 자각함. 착각.』 『에이, 그게 뭐야... 진짜로 그렇게 말했어?』
여기서 중요한 건 내 대답이 아니다. 손가락을 가볍게 튕겨 내 콧잔등을 때리며 자손은 이리 말했다. 틀려, 꼬맹아. 흐흐흐. 네 뒤에 서있을 그건 바로 나야.
린청의 안색이 변했다. 『그거... 어쩐지... 자기 제안을 거절했다고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가? 내가 봤을 적엔 웃느라 정신없던데.』 어쨌든 떼어낼 불알 같은 건 내 몸에 안 달렸다. 먹을 다 간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빌린 책을 베껴 적기를 시작했다. 대륙 공론의회란, 제의와 그 심의를 위한 회의체로 그 목적과 권한은 독립적이다. 이사실에서는 종교기구라기 보다는 정치기구에 더 가까운데 왜냐하면 황제와 그 권속들이 적룡신의 강력한 치세를 받기 때문으로... 권력의 공백이 발생한 상황에서 다수의 귀족들과 제후들이 연합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공화(共和)와는 다른 것으로... 붓은 빠르게 움직이며 빈 공간을 채워나갔다.
『당신은 어느 나라에서 오셨습니까.』 『유아 어 뤼스이 일라브리즈 캄?』 『같이 저녁 식사를 하시죠.』 『바란 데 이스 플르 디너.』 『짜증나.』 『강데 잇.』 『아니, 내가 짜증난다고. 어우, 모조리 다 때려치고 싶다.』 옆에서 린청이 뒷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Posted by 미야
2015/07/01 15:50
2015/07/01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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