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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2 : 마탑요시 2-4

글자를 읽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설마하니 이렇게나 두꺼운 책에 그림 한 점 없을 리는 만무하고... 요컨대 글자보단 그림이 보다 많은 걸 설명하는 법이다. 친절하게 인어 공주의 진주 목걸이 갯수마저 설명하는 동화책 삽화를 바라는 건 아니다만, 돌아가는 이야기의 전말을 적절하게 묘사했을 한 점의 그림을 찾아 리나의 손가락은 바쁘게 움직였다.
다섯, 여섯, 열 다섯... 뭉텅그려 서른 장을 한꺼번에 넘겼다.

쓸데없는 짓이라며 요세이가 그런 리나의 노력을 폄하했다.
『역사책에 친절하게 삽화를 그려넣었을 리가 없잖소. 이것은 역사책이오. 읽다보면 지루하고, 졸립고, 짜증나고... 말 그대로 글자 범벅이라 나중에 눈이 쏘는 듯 아파지지.』
졸다가 화냈던 당사자다. 요세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나오는 책들은 그렇죠. 하지만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각박하지만은 않았거든요. 뭐랄까, 낭만이 있었다고나 할까. 아니면 배려라는게 있었다고나 할까.』
『낭만? 배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소.』
배려라는게 있었다면 애당초 책의 두께부터 어떻게든 조절을 해두었을 것이다. 서가에서 꺼내는데 팔뚝이 저려 죽는 줄 알았다. 열 권의 분량을 무식하게 하나로 묶어서 어쩌자는 건가. 실수로 발잔등 위로 떨어뜨리는 날엔 식은 땀을 흘리는 수준으론 안 끝난다. 최소한 발가락 뼈가 산산조각 난다던가, 아니면 발잔등이 무너져 내리던가... 남의 발을 불구로 만드는게 낭만이라면 할 말이 없다만, 그는 옛날 사람들이 배려라는 걸 할 줄 알았다는 리나의 말에 선뜻 동의를 할 수 없었다.

『먼저 읽어본 사람의 말이니 믿어도 됩니다. 책에는 그림이 없어요.』
『오로지 글자와 마침표만?』
『그 마침표도 가끔씩 빼먹었다오. 대신... 옳커니. 거기라면 좀 볼만한게 있을지도.』
그렇게 중얼거린 요세이는 벽돌 같은 책은 냅두고 따라 오라는 손짓을 했다.
『초와 부싯돌을 챙겨요.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니 다녀오도록 합시다.』
『어디를』
『저 아래.』
『아래?』
『시원~한 곳이오.』

참으로 시원하겠다.
이 경우엔 어두컴컴하다, 내지는 음침하다, 그것도 아니면 박쥐와 함께 샬랄라라고 해야 맞다.
책은 관두자는 말에 신나서 요세이의 뒤를 헐레벌레 따라나선 리나는 그가 가리킨「아래」가 어딘지를 깨닫자마자 윽 소리를 내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돌 계단 앞으로 저승으로 인도하는 정령들이 절반은 눈을 감고 돌로 만든 꽃을 들고 있다. 그 앞에서 리나는 목을 빳빳하게 세웠다. 15분만에 도착한 그곳은「납골묘」입구였다.

『뭡니까, 이건!』
보고도 모르나. 요세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구(舊) 제미나미스 왕실 납골묘요. 지금은 사용하는 일 없어서 이 지경이지만 예전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매우 신성한 장소였소. 일단 신발의 먼지를 털고 잠시 묵념을 할까요.』
『...』

리나의 긴 침묵을「싫은데요」라고 해석한 요세이는 난감하다는 식의 표정을 지었다. 그치만 묵념을 하지 않는다고 야단을 칠 입장이 아니다. 리나에게는 오래 전에 죽은, 누군지도 모르는 멸망한 왕족들을 향해 고개를 숙일 까닭이 없었다. 단순히「죽은 사람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적인 공경을 보내야 한다면 사람들은 고개가 무거워져 두 번 다시 하늘을 쳐다보지 못할 것이다.
하여 요세이는 묵념은 깔끔이 생략, 오래 전에 자물쇠가 부셔져나간 출입문을 잡아당겼다.
문짝 자체가 열리고 닫긴 일이 최근엔 없었는지 먼지가 덩어리째 떨어져 내렸다.
- 더럽다.
덕분에 리나의 표정이 한층 더 구겨졌다.
열려진 문 저편에서부터 싸안 기운이 불어왔다.
그 느낌이 해골이 내뿜는 최후의 숨결 같아서 리나는 진저리쳤다.

『시원하지 않소?』
『잘도 시원하겠다.』
이를 갈며 라이팅 주문이 걸린 단도를 꺼내들었다. 요세이가 미리 준비한 양초는 눈짓으로 사양했다. 뜨거운 촛농이 손잔등 위로 떨어지는 건 질색이었다. 앗, 뜨거 - 하고 쥐고 있던 양초를 놓치기라도 하는 날엔 대 재앙으로 확대될 수 있다. 하여 주문을 걸어둔 칼날을 세우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순간 파앗, 하고 푸른 불빛이 어둠을 물리쳤다.
좋은지고. 요세이는 빛나는 단도를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역시 마법은 최고다. 남자는 자신의 양초를 한심한 듯 쳐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뭐. 미국은 우주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볼펜을 개발하기 위해 비싼 개발비를 투자하지만 러시아에선 맘 편하게 하고 연필을 사용한다. 연필이 뭐가 어때서. 종이에 글자만 적을 수 있으면 된다.

『철의 황제에게 멸망당한 이후 제미나미스엔 왕조가 들어서지 않았습니다.』
귀찮은 거미줄을 손끝으로 걷어내며 앞장서던 요세이가 설명했다.
『알 투아에서 보낸 섭정관이 대신 제미나미스를 통치했습니다. 그러길 한 200년 정도 계속했죠. 나름대로 평화로운 시대였습니다.』
『평화로웠다? 그거 무지 특이하네요.』
엄지손톱만한 작은 왕국도 남의 나라 식민지가 되면 10년에 한 번 꼴로 반란을 일으키는 법이다. 그런데 200년동안 타국에서 보낸 섭정관이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고 다들 생업에만 열중했다? 곡괭이 들고「독립 만세」를 외치는 농부들이 단 한 명도 없어 들판은 평화? 이해가 안 간다.

『왕조 재건의 의지는 뿌리조차 남아있지 않았군요.』
차갑게 비난하는 뉘앙스를 읽어냈음이다. 앞편에서 요세이가 고개를 흘끔 돌려 리나를 쳐다봤다.
『뭐랄까, 재건을 하고 말고 건덕지가 없었어요. 말 그대로 한 시대가 종언을 고한 겁니다. 죽은 시체를 되살려 옷을 갈아입힐 생각은 그래서 아무도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 몰라라 했다? 더 이해가 안 가네. 남들은 꺼진 불씨도 되살리려 애쓰는데.』

검게 변색된 2중의 철문이 나타났다. 그걸 손으로 밀자 끼이- 하는 불쾌한 소음이 납골묘 전체를 긁어댔다. 철렁 소리내어 철문을 도로 닫자 다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리나는 불안감을 느끼고 걷는 속도를 느리게 했다. 칠흑의 어둠은 라이팅 주술을 건 단검을 보고도 달아날 생각을 하려 하지 않는다. 축축하고 무거운 공기가 등줄기를 압박한다. 위축되어 곁눈질로 어두운 벽감을 쳐다봤다. 벌레가 있지는 않을까, 행여 해골을 밟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해하며 손에 쥔 단검을 한층 더 높게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벽감 구멍으로 사람의 넙적다리뼈가 볼록 튀어나오기라도 하는 날엔 심장에 제법 무리가 갈 거다.

『사람 뼈가 고스란히 드러나게끔 안치하는 건 일반인들이나 그렇게 합니다.』
『나도 알아요. 하지만 도굴꾼이라는게 있잖아요.』

일반인들과 달리 귀족 이상의 신분을 가진 자들은 돌로 뚜껑을 덮어 밀봉한다. 살점을 벗어던진 깨끗한 뼈를 석고로 튼튼히 고정시킨 뒤에 그 위로 두께 5cm 이상의 대리석으로 누르는게 일반적이다. 허나 봉납된 귀인들의 귀중품들을 노리는 도굴꾼들은 대리석을 하나하나 망치로 깨부순다. 이 과정에서 작은 뼈가 고스란히 들러붙은 석고 조각이 바닥을 뒹굴기도 한다. 심하면 두개골이 석관에서 송두리째 빠져 나가는 일도 있다. 그걸 실수로 밟았다간「재수 옮 붙었네」수준으론 안 끝난다. 짐짐한 마음에 며칠은 잠을 설친다.

『게다가 이곳은 출입에 제한이 그리 많은 것 같지도 않고요. 봐요. 자물쇠 하나 없잖아.』
『괜찮아요, 인버스 씨. 자물쇠보다 더 무서운게 있으니까 함부로 안 들어와요.』
『자물쇠보다 더 무서운 것?』
『저주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도 꽤나 강력한.』

촛불을 높게 들었다.
오래된 조각이 불빛을 받고 죽음에서 되살아났다.
여자다.
크고... 희고...
『날개?』
굳은 표정을 한 아름다운 천사가 천장에서부터 바닥에까지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Posted by 미야

2006/06/07 14:56 2006/06/07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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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2 : 마탑요시 2-3

당장 안 죽게 생겼으니 다행?
상대가 마족임을 전혀 모르는 발란틴은 뜨악한 표정이 되어 입을 벌렸다.
거기다 기운을 잃고 쓰러졌던 사람의 뒷통수를 사정 안 봐주고 찰싹 후려갈겨?
탕약을 가져와 입에다 떠 넣어주지는 못할 망정, 내일 모레까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으니 괜찮은 거 아니냐며 막 말을 한다.
당사자인 가우리는 그런 제로스의 행동거지가 익숙한지 별 반응이 없었으나 제3자에게 있어 그 장면은 적응 불가능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하지만 납득 불가 행동에 쇼크를 먹은 건 결계 밖 사람이나 안 사람이나 거기서 거기.
그 옆방에 자리하고 리나 또한 이놈의 결계 밖 사제들의 행동거지를 머리로 납득할 수 없었다.
머리에서 찌잉- 소리를 내며 스팀 올라온다.

『최대한 간결하게 설명을 해달라고 하지 않았소, 인버스씨.』
『맞아요. 최대한 간결하게 30초 안에 설명을 해달라 요구했어요. 하지만 난 바짓가랭이 사이에 달린 물건을 만지라는 말은 안 했다구!』
야, 이 X자식아 - 라는 욕말을 가까스로 삼키고 리나는 눈을 부릅떴다.
엘프가 족족 죽어 나가는 사태에 대한 설명을 최대한 짧게 해달라 요구했더니 미친 놈의 사제 자식은 자신의「거시기」를 잡고「이것 때문이오」라고 퉁명스레 말했다.
성희롱이냐! 음란한 저 제스츄어가 다 뭐라냐. 덕분에 어투가 자동 함악해졌다.
『거기서 당장 손 떼지 못하겠나!』
『저어, 30초로 설명하려면 이 재주 밖엔...』
불 같이 화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여성 앞에서 요세이는 잡았던「물건」을 슬그머니 놓았다.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니다. 뺨이 붉지도 않았고, 겸연쩍은 표정과도 거리가 멀었다. 되려 깨끗하게 반문한다.
『이만하면 설명이 되지 않았나요.』
『뭘 반문하는 거얏! 당연히 되지 않았지!』

의자를 통째로 집어 던지려던 걸 가까스로 참고 자리에 다시 앉았다.
자, 그럼 천천히 숫자를 1부터 100까지 세어보도록 하자. 리나는 후우, 하고 숨을 불었다.
이 모든 건 문화적 차이다, 문화적 차이.

『알았습니다. 30초는 좀 그런 것 같으니까 3분으로 설명해봐요.』
『무리요! 그게 가능할 리 없잖소.』
『어허! 노력해봐요. 혹시 또 알아요? 될련지.』
요세이는 불만스런 표정을 했다. 이게 무슨 3분 카레 만들기라도 되나.

입술을 삐죽 내밀고 킁 소리를 냈다.
『좋소. 시도는 해보지. 알 투아의 국왕이 홀딱 반한 신족에게 구애하다 딱지를 먹었소. 이에 포기 않고 강간을 시도했는데 일이 잘 안됐지. 덕분에 홀딱 망했소.』
건너뛰는 내용이 너무 많다보니 과격 수준을 넘어 대포동 미사일 발사 수준이 되어버렸다.
당연히 리나는 절규했다.
『그게 뭐야아아~!』
『왜 목 놓아 울고 그러오. 내 미리 말 했잖소. 3분 카레는 안 된다고.』

그러면서 요세이는 구운 벽돌을 나란히 세 개를 포개어 놓은 듯한 분량의 대형 서적을 책상에 올려 놓았다. 무게 때문에 책상이 다 휘어지려 한다. 팔뚝에 힘 주고 양쪽으로 펼치니 책상 다리가 우직 소리를 내었다. 그 막대한 크기와 무게에 리나는 목이 졸린 표정을 지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요세이는 책의 낱장을 넘겨가며 강의를 시작하려 했다.
『지금으로부터 638년 전, 신 세르베라 왕이 둘째 공주 조나스의 열 다섯 생일을 기념하여 궁중 무투회를 열었는데 모두 49명의 용사가 이에 응하여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고자...』
『우왁!』
『아직 시작도 안 했습니다만?』
『그 책을 처음부터 읽으려는 거예요?! 안돼. 제발 부탁이니 최대한 간결하게...』
최대한 간결하게?
그렇담 이 방법 밖에는 없다니까.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만 다시금 생식기를 만지작대는 요세이를 보며 리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안 되겠다. 날리고 보자.

연속 펀치를 휘둘러 못 말리는 성희롱자의 양쪽 눈자위를 시퍼런 너구리 가면으로 만든 뒤에야 리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신족을... 강간할 수 있나?
일단 신족도 여성과 남성이 있는 듯하다. 여기서 추측성 문장을 사용하는 까닭은 그게 정말인지 아닌지 본인들에게서 직접 전해들은 이야기가 없어서 그렇다. 그치만 뭐, 이쪽 기준으로 봐도 여자 남자 구분은 쉽게 되니까 이 점에 대해선 그리 많이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단, 여기서의 문제는 성별이 아니다.
얘기를 바꿔 상대가 마족이라고 해보자.
아무리 꼭지가 돌았다고 해도 말이다... 마족을 쓰러뜨려 옷을 벗기곤... 응응응을 시도한다?
그게 가능은 할 것 같니.

옷이 찢긴 채 바닥에 깔.린. 제로스를 상상하자 머리에 과부하가 걸리려 한다.
어린애처럼 촐싹거리고 돌아다녀도 마왕 다음 랭킹이다. 쓰러뜨리면 쓰러뜨렸지, 깔리진 않을 거다.
등이 추워져 그 상상의 대상을 급히 피리아로 바꿔보았다.
피리아의 옷을 벗기고 강제로... 머리를 흔들었다. 이것도 안된다. 그놈의 모닝스타가 먼저 머리를 두쪽내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피리아는 외칠 것이다. 이 썩은 부엌 쓰레기 같은 놈아.
『하아.』
그 대상을 닭 마족까지 확대해봐도 강간의 대상은 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선... 대단한 사람이었네, 그 알투아의 국왕이었다는 남자.』
『실제로도 대단했던 사람이었소.』
멍이 든 눈자위를 어루만지며 요세이가 긍정했다.
『알 투아의 다섯 번째 왕자로 태어나 내란을 진압하고 자기 스스로 왕위에 올랐소. 그것만으론 성이 차지 않았던지 14년만에 레 진크부터 요모, 보이라, 젠티부토라까지 점령했소. 신 세르베라 왕의 목도 이「철의 황제님」께서 잘라 가셨지. 알 투아에선 지금도「최강」이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아요.』
『이상한 여성편력만 빼고 말이지. 세상에... 신족 강간이라니.』
그리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강간이... 가능한 거예요?』

요세이는 하아 -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시도해보지 않아 모르겠소.』
시도를 하지 않아도 그런 거야 제꺽 판단이 서는 일이지!
리나는 고추 범벅 수준으로 눈을 야리고는 벽돌 같은 커다란 책으로 손을 가져갔다.

Posted by 미야

2006/06/02 11:59 2006/06/02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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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2 : 마탑요시 2-2

엘프에게 치명적이랜다.
그렇다면 서둘러 자리를 뜨도록 하자.
리나는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해가며 가우리를 부축하여 옮기려는 사제들을 옆으로 밀었다.
그리고 그 작은 몸으로 금발의 키큰 검사를 손수 등에 엎으려 했다.
자, 기절한 개구리를 봄날의 따스한 언덕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아이고, 리나 인버스님.』
『왜. 내가 댁들을 도와야 한다고 법으로 정해놓기라도 했어? 싫어. 난 빠질테야. 다른 사람을 알아 보슈. 우리는 우리의 갈 길을 갈 것이고, 다시는 이 동네로는 오지 않을 거야.』
『그게 아니라... 사내를 엎고 갈 거라면서 정작은 깔린 형상이 되어 길바닥에 드러누우면 어쩌자는 거요.』
『어.』

마음은 굴뚝인데 생각대로 몸이 따라주질 않는다. 사람의 몸은 - 그것도 축 처진 성인 남자의 몸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대단히 무거웠다. 리나는 포로타스의 불타는 산적 소굴에서 거대 황금 염소상을 억지로 들고 나왔을 적에 맛보았던 끔찍한 고통에 허리를 펴지 못했다.
기를 쓰고 팔뚝에 힘을 주면 질질 끌려오기는 한다. 한 5cm 정도.
이를 악물고 힘이여 솟아라 기합을 넣으면 조금은 더 끌려 온다. 한 10cm 정도.
이럴 리는 없다 싶어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즉시 기분 나쁜 우둑 소리가 들린다.
하여 판단한다.
가우리, 너 살쪘구나.

당황해서 눈으로 제로스를 찾았다. 안 되겠다. 100원을 줄터니 도와달라고 하자.
『예전부터 죽 이랬던 건 아니겠지요?』
『그야 당연하죠.』
하지만 배반자는 탑에 온통 정신이 팔려 SOS 신호를 보내는 존재를 망각했다.
수첩만 쥐었으면 목격자 진술을 받는 경찰이다. 연필에 침만 바르지 않았을 뿐이지 꼬치꼬치 깨묻는 폼이 골백번 해본 전문가다. 최대한 그 어투는 단조롭게, 그러면서도 허튼 거짓말은 안 통한다는 기백으로 무장하고 제로스는 질문을 계속했다.

『그럼 언제부터 이런 증상이?』
『최초의 시작은 추정하기론 18년 전부터라고 생각됩니다.』
『생각됩니다? 지금 (이 마당에) 그럴 거라 추측한다는 겁니까?』
『아. 그게 말이죠.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깨달은 시점이 꽤나 늦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겐 아직 뚜렷한 영향을 끼치고 있지 않아요. 엘프, 아니면 그 혼혈자는 사정이 다르지만요. 그런데 이곳은 사람이 모여 사는 동네이지 엘프가 사는 마을이 아니잖습니까. 주변에서 엘프는 보기 힘들죠. 그러니 어쩌다 여행길에 들린 엘프가 병들어 쓰러져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겁니다. 단순히 어제 저녁에 먹은 음식이 대단히 나빴나 보다~, 하고 고개만 흔든 거죠.』
『알겠습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깨달으려면 발생한 사건의 빈도수가 뒷받침을 해주어야 하는데 여건이 그렇질 못 했다는 거죠? 엘프는 습성상 여행을 잘 하지 않으니까요.』
『예, 예. 18년 동안 이곳을 방문한 엘프의 수는 겨우 열 다섯입니다. 그래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는데 시간이 제법 걸렸습니다.』
『열 다섯... 그 열 다섯의 엘프가 마을로 오는 족족 황천길로 떠났다?』
『일부는 갔고... 더러는 황천까지는 안 갔더라도 그 옆 동네까지는 갔죠. 하여 전날 먹은 전복죽이 상했다는 가설은 당장 기각되었습니다.』

이래서는 썩은 전복죽이 아니라 카오스풍 만도라고라 스프잖아 - 라고 생각한 리나는 한쪽 눈썹을 활처럼 구부렸다.
눈치는 삼단이다. 단발머리씨가 손을 흔들어가며 황급히 주장했다.

『그 전복죽, 제가 안 만들었습니다!』
『뒤로 느낌표까지 안 달아도 돼.』
아무렴, 죽과 스프는 물크덩한 것이 비슷은 해도 완전히 같지는 않음이다.
『그러니까 긴장 풀어. 그 어느 누구도 너를 범인으로 지적하지 않아요.』
라고 놀리며 좀전까지 발란틴이 어깻짓으로 가리킨 하얀 탑을 손가락질 했다.
『잊었어? 사람들 말이 저게 웬수라잖아.』

그렇다 해도 수수께기다.
뭔 놈의 탑이 사람을 - 엘프를 잡냐.
귀신 붙었나?

하지만 귀신 붙은 탑 치고는 모양이 곧다. 거미줄과 형님 아우님 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 반대로 위풍당당 행진곡의 대명사다. 곧장 올려다 보니 눈부시게 하얀 몸체가 하늘을 날카롭게 찌르고 있다. 벽돌을 굽고 역청을 발라 신의 위엄에 한 걸음 다가서고자 했다던 옛 바벨인들의 오만함까지 느껴진다. 자존심이 드세 하찮은 귀신 같은 건 되려 탑으로부터 내쫓김을 당할 것 같다.
리나는 가만히 턱을 쓰다듬었다.
『암만 봐도 귀신 붙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잠깐, 잠깐! 지금 뭐 하는 겨?』
하늘로부터 땅으로 시선을 내린 리나는 황급히 워워~ 소리를 냈다.
부적임이 분명한 노란색 종이를 품에서 꺼낸 요세이가 왜 그러슈- 눈초리를 했다.
『동작 그만. 지금 가우리를 갖고 강시 만드나.』
길다랗게 오려낸 노란 종이를 가우리의 이마에 붙이려다 말고 요세이는 잠시 머뭇거렸다.
노란 바탕에 빨간색 문양. 그것도 정 중앙에 태극의 무늬가 있다.
길이가 제법 있어 후- 하고 코와 입으로 숨을 쉬면 종이가 팔락거린다.
으음, 느낌이 좀 그런가. 그럼 분홍색 종이로 붙여보자. 소매춤에 손을 넣어 다른 부적을 골랐다.
『그런 자잘한 문제가 아니잖아!』
『분홍도 싫소? 그거 참 까다롭네. 그럼 이건 어떻소? 심플한 검정인데.』

가우리가 희미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심플한 검정이고 분홍이고간에 일단 땅바닥에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세워주면 안 되겠니.
기운이 다해 다시 코를 흙바닥에 박았다.

원망에 사무쳐 기절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번엔 지붕이 있는 반듯한 건물 안이었다.
만져보니 이마엔 분홍의 부적이 붙었고 발 아래로는 다섯 권의 책을 괴어 놓았다. 아무래도 다리의 높이를 머리보다 높게 하기 위해 그런 것 같다.
그런 관계로 폭신한 베개는 생략. 덕분에 목덜미가 뻣뻣했다.
굳은 몸을 어렵게 뒤척이며 인상을 썼다.
리나는 어디에 갔을까.

『내가 뭐랬나, 발란틴 형제. 풀 깡통을 챙기라고 했잖는가. 아직 라벨도 떼지 않은 물건이니 철물점에 가 영수증을 제시하면 현금으로 환불받을 수 있었는데 말이야.』
『저어, 영감님. 저에겐 붓만 챙기라 그러셨지 깡통 이야긴 하지 않으셨습니다.』
『깡통과 붓은 세트잖는가. 이게 토를 막 달아요.』
『토를 다는 것이 아니고요, 깡통은 처음부터 요세이님이 들고 계셨잖습니까. 마지막까지 요세이님이 깡통을 들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요. 그걸 길바닥에 흘렸을 거라 누가 알았남요.』

깡통, 깡통, 깡통...
들리는 건 말싸움 뿐이다. 그것도 리나가 아니라 예의 포스터를 붙인다고 설쳐대던 사제들이다.
실눈을 뜨고 쳐다봤다.
나이가 어린 쪽이 세숫대야를 들고 있다.
그 옆에서 할아버지가 물 주전자를 옆구리에 꿰고 무어라 툴툴대고 있다.

『이제야 깨어나셨습니까.』
가우리의 움직임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제로스가 차가운 손바닥으로 가우리의 이마를 철썩 때렸다.
『아야!』
『반응이 괜찮은 걸 보니 당장 죽진 않겠네요.』
그러면서 마족은 리나가 안 보인다며 불안해하는 쿼터 엘프를 향해 싱긋 웃어주었다.

Posted by 미야

2006/05/23 15:00 2006/05/23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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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List

  1. Yuri 2006/05/28 21:56 # M/D Reply Permalink

    질문이요!

    서관에서 소설 읽는데요-
    시즌 0부터 시즌 4까지 전부 연결되는 건가요??
    (어디다가 글올려야될지 몰라서 여기다 댓글 달아요 ㅠ)

  2. 미야 2006/05/29 00:39 # M/D Reply Permalink

    연결... 잘 안됩니다. (웃음) 간혹 이어지는 내용들이 꽤 됩니다만, 본인의 머리가 상당히 안 되는 관계로 아귀가 종종 안 맞는 사건도 벌어집니다. 단, 큰 줄거리를 갖는 전체 흐름은 있습니다. 참고하실 정도는 아니니 신경 안 쓰시고 읽으셔도 무관할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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