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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2 : 마탑요시1-1

"올빼미의 맞인사" 뒤 이야깁니다. 올빼미~는 서관쪽에 정리해서 올려놓겠습니다.


자, 이제 상자 뚜껑을 덮자.
그 여자의 눈이 우리를 보지 못하게 하자.
흐르는 것이 처리하도록 기다리자.
- 오래된 구전동요 NO 2124번


회색의 시에 (※ 원래는 승려들이 하는 가슴띠 장식을 일컬음. 후에 법복 자체를 의미하는 단어로 바뀜) 를 입은, 키가 훤칠한 청년이 걸어간다. 옆구리에는 포스터임이 분명한 커다란 종이뭉치를 꿰찼다.
장바구니 하나 들고 길을 지나가던 아낙이 존경을 담아 가볍게 묵례했다. 그러다 말고 승려의 다른 손에 쥐어진 풀 깡통과 붓을 눈여겨 바라본다.
선거철인가...
아낙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리가? 마을 읍장 선거는 겨우 6개월 전에나 이루어졌고, 보궐 선거가 실시될 정도의 커다란 정치 스캔들을 들은 기억은 없다. 이번에 새로 선출된 읍장이 안동 간 고등어 세트를 뇌물로 받았다면 정치판이 들썩이기 전에 빨래터부터 시끌벅적했을 것이다. 바람둥이로 유명한 보돔 읍장이 미모의 비서와 바람이 났다고 해도 그렇다.
여자는 호기심 반, 걱정 반, 목적지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승려를 따라갔다.
사원에서 포스터를 붙인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그들 쉬피드의 위대한 대행자들은 인민을 향해 산불 조심, 개 조심, 뉴욕 카바레 2호점 오픈 등등의 하찮은 내용은 외치지 않는다. 보다 더 거국적이며 거시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여자는 기억을 더듬어「사원은 텔리아 국왕 라보도 12세에 반대한다」는 벽보 하나로 250년 역사의 왕조를 문 닫게 만든 일을 떠올렸다. 비록 그것이 지나친 정치 간섭 행위였다고 해도 - 사원은 그것이야말로 정당하다며 하느님(신)의 입장에서 인민의 일을 걱정해왔다.

아낙네처럼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포스터를 쥔 승려를 보고 어느 틈엔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젊은 신관은「모르긴 해도 어디서 큰 난리가 났나 보다」하며 걱정을 담아 웅성거리기 시작한 군중들의 존재는 그리 염두에 두지 않은 채 경쾌한 동작으로 풀이 든 깡통에 붓을 담갔다.
들리지 않는 콧노래가 귀에 걸린다.
광고지 부착 아르바이트생이 형님~ 이라 칭송할 법한 익숙한 태도로 벽에다 풀을 바른다.
『엿차!』
그리고 종이를 붙였다.

- 제피리아의 여자 마법사, 가슴 무지 납작하다

벽보에 본 메시지를 읽어낸 이들의 표정이 다들 괴상해졌다.

리나 인버스는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질러대며 카오스 워드를 빠른 속도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황혼보다 더 어두운 것, 내 몸에 흐르는 피보다 더 붉은 것.
평범한 마을 게시판을 무슨 공룡 마초단인양 송두리채 파괴하고자 하는 리나를 진정시키고저, 제로스는 재빨리 외쳤다.
『이건 암호예요, 암호. 왜 있잖습니까. 왕이 적에게 포위당했다는 걸「사자가 우리 속에 갇혔다」고 은유적으로 말하잖아요. 그러니까 표현은 이렇게 했어도 정작 그 내용은 내일 모레 운동회가 있으니 다들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운동장에 집합하라는...』

벽보에는 신소인(神所印), 신전 마크까지 선명하게 찍혀 있다.「이 벽보는 신전에서 공식적으로 인쇄하여 마을 게시판에 올바른 절차를 밟아 부착한 것입니다」라는 걸 나타내고 있다고 보면 된다.
여기서 놀라움은 시작된다.
세상 어느 천지에 신전에서「이 여자, 가슴 납작하다」라는 내용을 써서 붙이느냔 말이다. 관공서에서 일부러 세금을 들여가며「박돌쇠 바보」라는 인쇄물을 만들어 돌리는 거 봤나. 하물며 신전이다. 비방과 모함은 배척해야 마땅한 부도덕함이라며 일반 대중에게 설교하던 그들이 이런 식으로 누워서 침뱉기 식의 행위를 보란 듯이 해보일 수 있을까.

『정말로 저치들이 리나님더러 가슴 작다고 하겠어요? 진짜로 그랬다면 죽으려고 환장한게지. 아녜요. 그럴 리가 없어요.』
『네 의견은 틀렸어, 제로스.』
『에? 어째서요?』
리나는 울음 섞인 표정으로 벽보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제피리아 출신의 리나 인버스라고 딱부러지게 적어 놓았잖아. 만약 이게 네 생각대로 암호문 같은 거였다면 물레방앗간의 한스, 내지는 빵굽는 베이커 식으로 어중간하게 휘갈겼겠지! 그렇지만 이걸 봐. 제피리아 출신의 마도사 리나 인버스! 각지에 퍼져있을 14만 4천명의 빵굽는 베이커씨와는 얘기가 다르단 말이다. 제피리아 출신의 마도사, 그리고 이름이 리나 인버스인 사람은 어디를 뒤져봐도 나 한 사람밖에는 없어. 암호문을 작성하면서 특정인을 들먹거린다는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남?』
『그렇다는 건?』
『한마디로 쓰벌이라는 거지!』
드디어 참지 못하고 주먹이 날아갔다. 쾅 소리를 내며 게시판이 요동쳤다.

『그렇게 비방은 아니다, 뭐. 그건 어디까지나 사실에 입각한...』
『가우리?』
가슴을 모아쥐는 제스츄어를 하는 소녀를 보고 두려움을 느꼈다. 검사는 움츠러들었다.
『넵. 조용히 있겠습니다.』

그나저나 무슨 영문인지를 모르겠다. 리나는 알레르기 반응과 소화불량, 갑작스런 위경련 및 발열, 생리통이 한꺼번에 버무려진 듯한 찡그린 표정으로 고민에 빠졌다.
문제의 벽보가 붙기 시작한 건 지난 일주일 전이다. 목격자들의 멱살을 잡고 이실직고를 권유(?)한 끝에 알아낸 바에 의하자면 온화한 표정의 사제 둘이서 은화 닷냥을 들고 나타나 게시물 부착을 허가받았다고 한다. 이들은 남동쪽부터 시작해 서북쪽으로 이동하면서 단 사흘 만에 무려 마을 스물 아홉을 방문하여「결코 사실이 아닌 - 과연 그럴까」내용을 성공적으로 유포시켰다.

선전물은 동네마다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결계 밖 동네에선 제피리아가 어딘지도 모른다. 실제로 있는 지명인지조차 확인 불능이다. 제대로 된 대륙 지도는 아직 민간인들 사이로 유통되지 않았다. 이들이 사용하는 지도는 결계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것을 그대로 답습한 골동품이다. 제피리아 공화국이 자리엔 로그웨타 왕국이라는 듣도 보지도 못한 왕국이 표기되어 있을 정도이고, 성왕국 세일룬도 세일루네 평원이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나타나 있기 일수다.
그 와중에 승려가 제피리아 출신의 마도사에 대해 신나게 악담을 퍼부었으니.
주민들 입장에선 이만한 화젯거리도 없다.
 
- 우리는 화룡왕님의 새로운 신탁(농담)이 아닐까 하고 생각도 해봤어요.
- 나라가 멸망한다는 이야긴 아니니까 신경 안 써요. 그치만 왜 여자 가슴 이야길까나.
- 소문으로는 그 마도사가 사원에 거금을 떼먹고 도망쳐서 저주하는 거래요.
- 겉모양에 속으면 안되요. 그 벽보에 불을 비추면 숨겨진 글씨가 나타난대요. 그 글씨는? 드.라.군!
- 요즘 경기가 하도 좋질 않으니까 사람들 보고 웃으라고 그냥 붙인 거래요.

리나는 다시 이앓는 소리를 냈다.
추측은 많았으되 사실로 생각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저번에 오래된 유적터를 단방에 날렸잖습니까. 그래서 화내는 거 아닐까요.』
『그치만 제로스? 증거를 안 남겼다구. 안 들켰어.』
『확실히... 네. 안 들켰죠. 그럼 그거 아닐까요. 일전에 가짜 승려짓 하는 사기꾼들을 잡아선 녀석들이 갖고 있던 현금을 죄다 챙겼잖습니까. 알고 봤더니 가짜가 아니라 진짜 승려이고, 그 돈도 선량한 주민들에게서 갈취한 것이 아닌 진짜 교회 기부금...』
『진짜 중이 도박판에서 포커치고, 술집에서 여자랑 놀아나든? 사기꾼 맞아.』
『허어, 그렇다면 화룡왕이 진짜로 농담했나.』
『화룡왕이 장난했다면 이참에 너희들 마족편에 붙어주지.』
『정말로? 나중에 취소하기 없기~♡』
『붙어, 붙어. 취소 안 해. 그러니까 계약서를 찾는다고 벌써부터 촐랑대지 좀 마라. 그리고 가우리? 지금 뭘 확인하고자 하는 겨?』
그녀는 벽보에 코를 박고「드.라.군」이라는 숨겨진 글씨를 찾고자 애쓰는 가우리의 머리통을 세차게 후려갈긴 뒤, 서북쪽 방향을 향하여 시선을 돌렸다.

승려들의 움직임은 날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어제 10리를 걸었다면 오늘은 20리 길을 걷는 식이다. 어쩐지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군사 작전 같다. 마차나 말을 사용하고 있다? 아마도 그 가정은 맞을 것이다. 거기다 이동하는 방향은 수상쩍을 정도로 일정하다.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 선을 그리면 아마도 일직선이 될 것이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 쫓아가는 사람 쉬우라고 일부러? 하하하... 어서 나 잡아봐라, 이건가.

『좋아. 여기서 서북쪽으로 계속 가면 다음 마을은 어디지.』
『지도를 꺼내 확인을 해보지요. 가만 있자... 음? 마을이라고는 할 수 없겠는데요. 덩치가 커요.』
『도시냐.』
『제미나미스, 일명 탑의 도시랍니다.』
제로스는 언제나처럼 눈웃음치며 지도의 한쪽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도에는 하얀 물감으로 날씬한 원통형의 탑이 그려져 있었다.

탑?
그리고 제로스의 말대로 덩치가 컸다. 축적으로 그려진 사이즈로만 봐선 도시가 아니라 나라 같다 - 라는 것이 리나의 첫 번째 감상이었다. 이상히 여겨 지도를 빼앗아 자세히 들여다 봤다. 그래봤자 중간 생략, 이하 생략을 이념으로 삼은 듯한 싸구려 지도에는 한 줄짜리 설명조차 빠져 있다. 마치 그게 전부라는 듯, 허멀건 땅에 흰색으로 탑만 그려 놓았다.
너마저 수상하기냐. 리나는 인상을 썼다.

『냄새가 나.』
『미안합니다. 머리를 감은지 사흘이라.』
『내 말은 수상한 냄새가 난다는 거다!』

하여 본능은 외쳤다. 왔던 길로 되돌아 가라고.
하지만 게시판 벽보가 발목을 힘껏 움켜잡았다.
제피리아 출신의 여자 마도사, 가슴 납작하다.
그래서 때로는 알면서도 함정에 빠지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다.

Posted by 미야

2006/04/06 15:40 2006/04/06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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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YOUN 2006/04/14 01:45 # M/D Reply Permalink

    가우리가 입각이라는 '어려운' 말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습니다:D

  2. sigy 2006/04/15 14:58 # M/D Reply Permalink

    약점이란 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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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의 테이블」은 세일룬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장소라고 알려진 곳이다.
왕가의 자랑이자 세일룬의 비보(秘寶).
엄청난 너비의 왕실 정원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이 희디 흰 테라스는 전통적으로 세일룬 왕가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여성이 차지하게끔 되어 있는 장소다.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검은 머리카락의 왕세자비가 갓 태어난 아멜리아를 강보에 누이고 자장가를 불러주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지금은 행방을 알 길 없는 첫째 공주 그레이시아의 열 번째 생일 파티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일동 차렷 자세를 취하고 있는 푸른 나무들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지나간다. 코를 간질이는 건 형형색색의 꽃들이 뿜어내는 고운 체취다. 눈을 떠도 꿈을 꾸는 것 같고, 눈을 감고 있어도 꿈을 꾸는 것 같다. 세상의 모든 번민을 씻어버리라는 듯, 정경은 그저 푸르고 또 푸르다.

제로스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붓에다 물감을 찍어 빠렛트에다 잘 섞었다. 10호 남짓의 작은 사이즈의 캔바스를 눈앞에 두고 답지 않게 예술적 행위에 도취된 상태였다. 턱을 만지며 음, 소리를 내었다. 주의해가며 가로 세로 방향으로 붓질을 시작했다. 손목의 스냅을 사용하여 슥슥 물감을 칠해 넣는 일이 빠르고 경쾌하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정원의 모양새를 한참동안 응시한다. 먼 옛날에 세일룬의 여왕이, 그리고 왕비가, 나아가 그녀들의 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눈동자로 초록을 품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붓질을 재차 시작한 마족을 두고 제르가디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이는 나무는 시원한 초록인데.
곁눈질로 보아하니 그가 바르는 색은 주황이다.

『풍경화가 아니었던 거야?』
『실례의 말씀을. 이건 인물화인데요.』
어이, 어이. 그러면서 왜 엄지손가락을 들고 나무의 실제 크기를 어림짐작하고 있는 겨?
『에? 세일룬의 궁정 화가는 늘 이렇게 하던데요.』
엉뚱한 흉내내기를 하고 있다는 건 짐작도 못한 마족은 뭐가 잘못되었느냐 오히려 반문이다.
『아멜리아 씨에게 선물로 줄 그림입니다. 최선을 다할 겁니다.』

최선을 다 하겠단다.
칭찬을 해주어야 할 좋은 자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르가디스는 진심으로 우러나는 격려의 말을 던질 수가 없었다.

대서양 한복판에서 거대 우주선이 떠올랐다.
피카소가 그린 아비뇽의 아씨들이냐.
아님 멋지다 마사루?

마족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농담도. 마사루는 황금색 방울 귀걸이를 하고 있진 않죠.』
『하지만 리나도 이런 얼굴은 하고 있지 않다구. 아니면 네 눈엔 리나가 이런 모습으로 보이는 거야? 그렇다면 너, 필히 안경 써야 해.』
『으음.』

제로스는 붓질을 멈추고 짧은 고민에 잠겼다.
전혀 안 닮은 건가. 측면으로 보면 한 14% 정도는 비슷한 거 같기도 하다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정면에서 보면 그림 속의 인물은 비비 원숭이와도 닮아 있다.
이제 제로스는 머리를 긁어대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좋다. 문제를 인식했으니 어떻게 해서라도 고쳐놓아야 할 것이다. 최소한 짝짝이로 그려진 좌우 눈동자와 옆으로 길게 휘어진 코라도 바로 잡도록 하자. 그러면 살구색 물감을 잔뜩 풀어서...

『틀려. 그래선 더 이상해질 뿐이다. 하여간 네놈의 미적 센스라는 건 엽기와 사촌이군.』
『이게 뭐가 어때서요. 내가 보기엔 하나도 나쁘지 않구먼.』
『저리 비켜. 내가 시범을 보여주지. 자고로 예술이라는 건 말이다...』

제르가디스는 마족으로부터 붓을 빼앗아 붓질 다섯 번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검은 먹구름의 강림을 깨달았다.

『아, 아, 그, 리, 리나. 이, 이것은...』
『내가 마사루냣!』

저편에서 제로스는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홍차를 홀짝였다. 그리고 리나에게 멱살을 잡힌 소년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Posted by 미야

2006/03/25 10:37 2006/03/25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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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una 2006/03/26 08:54 # M/D Reply Permalink

    맨날 스토킹만 하다가 이렇게 글을 남기네요..
    정말 미야님 글 센스는 경지에 오르셨다고 할 수 밖에. 이번 습작 역시 너무 마음에 듭니다.

  2. 비밀방문자 2006/04/18 02:45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1. 미야 2006/04/18 16:55 # M/D Permalink

      모르니까 내버려 두는 거예요. (웃음 <- 웃음이 나오냣?!) 수정했습니다. 지적에 감사드려요. 고백하자면 제 맞춤법 및 띄어쓰기 점수는 낙제점이랍니다. 인터넷으로 테스트에 응했다가 믿어지지 않는 점수에 절망했었죠. 초등학교 3학년 시절까지 받아쓰기를 잘 못했던 과거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할까, 지금도 화- 한 얼굴로 [옳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여 주시네] 라고 적으려다 움찔. [올바른] 이 맞는 표기법이지만 버릇처럼 틀리게 적는 말들이 많아요.

모든 여성들에게 있어 선망의 대상인 직업 - 그게 직업이 맞긴 맞느냐 심각하게 반문하면 할 말이 없다만 - 어쨌거나 모든 여성들이 홍조 띈 뺨으로 환호하는 그 이름은「공주」다.
수십 겹의 비단보 아래 속에 숨겨진 작은 강낭콩 때문에 잠을 설치는 이, 그 이름은 공주.
숟가락보다 무거운 건 들지 않는다.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을 적에 자기 손으로 단추를 채우는 일 없다. 화사한 꽃을 가득 장식한 방에서, 보석이 달린 왕관을 쓰고 웃기만 하면 된다. 편안한 비단 의자에 퍼질러 앉아, 남들이 가져다 주는 과자와 꿀만 먹으면 된다.

『지금 농담해요? 쟁반 가득히 과자와 꿀? 편안한 비단 의자에 퍼질러 앉아?』
아멜리아의 눈썹이 송충이의 그것으로 변해갔다.
『아침 6시부터 눈 부비고 일어나, 하루에 8시간씩 꼬박꼬박 많은 사람들을 만나가며, 산더미처럼 쌓인 결재 서류에 하나하나 싸인을 하고 있건만!』
잉크가 묻은 손바닥으로 책상을 탕- 하고 때렸다.
『그거 어느 나라 공주 이야긴가요. 혹시 돼지 나라 공주 아닌가요.』

구석에 앉아「왕실 업무 보조」를 무보수로 자처하고 있는 우리의 키메라 군은 신임 대사 임명장의 덜 마른 잉크자국을 섬세하게 닦아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제피리아에서는 꽤나 유명한 집구석이라지만, 그래도 평민이잖아. 리나가 가진 왕족에 대한 판타지는 그래서 일반 서민들의 유치찬란한 그것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지.』
그깟 일로 흥분하면 젊은 나이에 혈압약을 상복해야 한다. 릴렉스. 이 모든 건 무지에서 비롯된 오해다. 제르가디스는 씩씩대는 아멜리아 공주더러 (싯 다운, 플리즈) 어서 앉으라는 시늉을 해보이며 다시금 잉크자국 닦는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뭔 놈의 신임 대사 임명장이 예순 다섯 장이나 된다. 그는 이제 막 마무리 작업을 끝마친 서른 한 번째 임명장을 왼편으로 옮겨놓고는 서른 두 번째 임명장을 집어 들었다.
이거 봤냐. 그대를 로레나 왕국의 신임 대사로 임명하노라.

『뭐시여? 그래도~ 펴엉~민.』
소년으로부터 서른 한 번째 임명장을 건네받아 준비된 봉인함에 넣고 풀을 바르려던 리나의 눈이 도끼눈으로 변해갔다. 눈초리만 살벌해졌던가, 목소리도 고압적으로 낮아졌다.
『이봐, 제르. 우리 아버지가 제피리아 고액 납세자 리스트 랭킹 8위라는 건 알고 있는 겨? 그것도 - 이건 순전히 집안 비밀이지만 - 유능한 세무사와 공모하여 탈세를 한 탓에 그놈의 랭킹이 2단계 내려가 있는 거라고. 자랑하는 것 같아 좀 그렇지만, 나는 한다면 하는 대단한 집안의 딸이야!』
『그러십니까. 그런데 그 대단하다는 집 여식이 고작 생각한다는게「공주 = 놀고 먹는다」라니까 하는 얘기야. 네 녀석의 공주에 대한 사고 방식은 한참 잘못 되었어. 이 세상엔 백마를 탄 왕자가 없는 것처럼, 공주는 솜사탕만 먹고 살진 않아. 아멜리아처럼 일이 너무나 바쁜 나머지 오랜만에 같이 놀자 찾아온 친우더러「죄송하지만 이웃 나라 장관에게 보낼 이 편지 봉투에 풀 발라 주는 걸로 제 일을 도와주세요」라고 하는 공주가 진짜 공주인 거야.』

하앙. 그러신가요. 리나는 고개를 까딱했다.
『그래. 납득했어. 줄줄이 늘어진 예산 집행 목록 확인은 나 몰라라 하고 달아나 뜨뜻한 온천물에 몸을 담궈서는 장래 희망이「정의의 여왕」일 수는 없겠지.』
허나 말이다.
『제르가디스? 그래도 이거 하나는 확실히 하자. 피리오넬 왕자님의 애마는 흰색이야.』
『그랬던가. 허나 피리오넬 전하는 왕자가 아니라 산적이라고 네 입으로 그랬잖아.』
『산적이라고는 안 했어. 오크라고 그랬지.』

아멜리아가 듣다 듣다 펜대를 힘차게 부러뜨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자, 자꾸 이러시면.』
『...』
『점심 없어욧!』
무서운 협박성 발언에 쫄은 키메라군과 악덕 상인의 딸은 잠자코 봉투에 풀 바르는 일에 열중했다.

어쨌거나 오랜만에 세일룬 왕궁을 방문한 손님들은 아멜리아 공주가 비단 의자에 앉아 하루 종일 서류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뿔딱지가 제법 났던 것 같다.
바쁜 업무는 잠시 미루고 물 좋은 온천에서 물장구를 치고 놀면 안 되는 건가.

- 원래 온천에선 물장구를 치면 안됩니다 -

에이, 표준 도덕 규정은 잠시 옆으로 치우고.
마침 온천으로 유명한 미레시보로부터 20% 요금 할인 티켓까지 날아왔다. 리나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풀 바르는 손동작을 느리게 했다.
그곳 관광 진흥 협회에서 인쇄한 광고지에는 세 명의 선녀가 손가락으로 승리의 V자를 그리며「거칠거칠한 피부를 백옥으로~」라고 호언장담 하고 있었다. 악성 피부 건조증 환자마저 비단 뱀으로 변신을 시켜줄 거라나 뭐라나. 결혼을 앞둔 처녀들의 피부 에스테 코스로 전격 추천! 물론 온 가족들이 함께 와서 다 같이 몸을 풀고 가도 좋다. 5인 이상 단체가 되면 요금 할인율은 더욱 커진다. 거기다 특색 가득한 31종 온천이 골라 먹는 재미까지 제공한다.

『황금으로 탕 내부 전부를 치장한 골드 라운드 온천. 당신의 눈이 부시다. 썬글래스 착용 의무화...』
리나의 혼잣말 아닌 혼잣말에 다시금 서류 결재에 열중하던 아멜리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아저씨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건 알콜 도수 23도 곡주가 들어간 청주탕. 자랑 섞인 주인의 변에 의하자면 탕에 앉아 뜨거운 증기를 지나치게 많이 들이키면 어지럼증 = 취기가 돌 수 있으니 넘어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할 것...』
리나는 이제 거의 외우다시피한 내용을 줄줄 꿰기 시작했다.
『체질에 따라 맞춤 서비스, 각종 약초 구비. 웰빙 허브 써비스...』
「오오」내지는「하아」라는 의미불명의 짧은 호흡 소리가 뒤를 따랐다.
『핫 터보에서 사랑을 속삭여요. 낭만에 죽고 낭만에 사는 러브리 2인 전용 온천. 먹으면서 즐기자. 둥둥 쟁반 로마식 온천... 후식으로 칵테일 무료 서비스! 유황 성분 함량이 월등히 높아 잘 낫지 않는 피부병도 박멸 가능한 안티 아토피크 탕~탕~탕~!』
광고에서의 에코 효과음까지 카피한다.

『그거 좋군! 박멸 피부병!』
제르가디스의 탄성에 같이 자리한 여성들의 표정이 확 나빠졌다.
『기다려. 골렘과의 합성은 피부병이 아니지 않았어?』
『물론 키메라 합성 자체는 피부병이 아니지, 리나. 하지만 바위에서 이끼가 자라나면 그건 꽤나 가렵다구. 나도 사람이라서 겨드랑이에 땀이 차는데 말이야. 한번 생긴 이끼는 핀셋으로 뽑는다고 쉽게 해결이 되지 않아.』
『겨, 겨드랑이... 이, 이끼...』
옆에 앉아있던 리나는 순식간에 10미터 이상을 달아났다.
덕분에 소년은 대단히 상처를 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다. 소녀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파괴력이 막강한 핵폭탄이 아닌 조그마한 크기의 바퀴벌레니까 말이다.

『더러운 병이 아니라구!』
벌겋게 달아올라 소년은 주장하였다.
『이끼란 말이야!』
그러면서 다리까지 동동 굴러가며 분개하였다.
『그 정의롭지 못한 행태가 다 뭐냔 말이다, 너!』

그치만 그것은 정의로운 행동이었다.
아멜리아는 산더미 같은 결재 서류를 냅두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자! 왕녀를 따르라!
『안티 아토피크 탕을 서둘러 예약하세요, 리나 씨!』
그리고는 허리춤에서 지갑을 꺼내 반짝이는 금화를 리나의 손에 쥐어줬다.
『여드름 및 각종 트러블에 좋은 천연 비누를 목욕용품 전문 가게에서 취급하고 있을 거예요.』
『오렌지 향으로?』
『박하 향.』
『맡겨만 주쇼!』
리나는 매우 기뻐하며 서둘러 자리를 정돈했다.
부끄러움으로 기다란 두 귀가 땅바닥에 출렁 떨어진 키메라 소년의 어깨를 두어번 툭툭 치고.
『거 봐. 내가 뭐랬어. 이게 직효라니까.』
라고 작게 속삭였다.

Posted by 미야

2006/03/18 11:25 2006/03/18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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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elsra 2006/03/20 09:57 # M/D Reply Permalink

    재미있어요~~ 골렘과 합성된 몸에 땀이... 날 거 같지 않은데... 리나와 제르 합작으로 아멜리아를 속여먹은 모양이네요 ^^ 제르 노력했구나~

  2. 시나 2006/03/22 18:19 # M/D Reply Permalink

    미야님께서 블로그로 축소하시면 앞으로 미야님 작품의 구경은 하늘에 별 따기가 되는 것인가라는 제 안이한 걱정은 기우라는 생각이 들어 무척 기쁩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미야님 특유의 글체는 입속에서 달짝지근한 꿀차를 음미하는 느낌이에요. 아, 왠지 기쁜 하루입니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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