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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히 말해 슬레이어즈는 아닙니다만. 재미 붙였쪄요. 어떠케요.


오랜만에 폭신한 침대에서 죽은 듯이 푹 잤다.
기지개를 켜고 눈을 부비니 오전 9시. 아뿔싸, 늦잠 잤다.
버릇대로 눈을 돌려 이웃 침대부터 확인했다.
짐작했던 그대로 시트에 주름살 하나 없이 정돈이 되어 있다. 간밤에 베개에 머리를 깃들인 흔적 자체를 말살했다. 한켠에 얌전히 놓여진, 여관 주인이 손질한 모양새 그대로 정리된 실내용 슬리퍼가 어쩐지 쓸쓸한 느낌을 준다.
그라바스는 머리를 긁었다.
이 나이에 예쁜 마누라가 야밤에 도망간 홀애비의 심정을 고스란히 맛보고 있다. 불합리하다.
일찌감치 일어나 피곤함에 골아 떨어진 제자는 냅두고 지 멋대로 개인 행동에 들어간 남자를 멋대로 원망하며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여독이 풀린 반질반질한 얼굴로 식당으로 내려가니 반가운 얼굴이 하나 보였다.
「요한슨... 혼자군.」
신문을 무릎에 펼치고 설탕을 넣지 않은 커피와 후렌치 토스트를 먹고 있다. 곁들인 계란은 반숙.
돗수 낮은 위장용 검정테 안경이 낯설다. 거기다 반듯하게 빗어 뒤로 정리하여 묶은 머리 탓에 전혀 모르는 사람 같다.
아니, 실제로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요한슨은 계단을 내려오는 소년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간장 국물처럼 생긴 어른의 커피를 홀짝거렸다. 스치고 지나가는 인기척에 반응, 잠시 고개를 들었으나 이내 신문 활자를 향해 다시 돌아간다.

오늘의 주요 뉴스.
친선 축구 게임에서 1-2로 승리. 코삭 마을, 붉은 기를 흔들며 흥분의 도가니.

야단법썩으로 형광색 잉크까지 덧바른 신문의 헤드라인을 곁눈질하며 이웃 테이블에 가 앉았다.
요한슨을 향해 아는 척 하는 바보 짓은 하지 않는다.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엔 다 까닭이 있다.
그라바스는 무심하게 메뉴판을 들었고, 금방 구운 크로와상 둘, 우유, 그리고 야채 치즈 샐러드를 주문했다.
아침 치고는 제법 되는 양이지만 성장기 어린애 밥통은 꼬르륵 소리를 내며 지독하게 아우성을 치는 중이었다.

 『저기요? 커피 리필 부탁합니다.』
저편에서 요한슨이 식당 종업원을 잡았다. 그라바스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신문을 읽으면서 커피 마시는 일을 계속하려는 것 같다. 종이의 낱장을 넘기는 바스락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신문 기사는 그다지 그의 흥미를 끌지 못했던지 후우 - 하는 한숨 소리가 이어졌다. 그의 앞으로 계란 반숙은 오래 전에 차갑게 식어 있었다.

「로우드와 막스는 어디에 있지. 사부는? 다들 같이 있나.」
건강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한참이 지났는데도 스승은 여관으로 돌아오려 하지 않았다.
행선지를 밝히지 않은 채 떠난 것치고는 시간이 늦고 있다.
검술 실력만 따져도 일류. 거기다 마법 클래스 또한 톱. 둘을 합쳐 IQ 100. 이 아니라... 아무튼 이쪽에서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슬슬 불안해지려 한다. 혹시라도 실수로 발을 접질러 계단에서 구르는 바람에 허리를 삐긋...

「점심 식사는 같이 하고 싶은데.」
낡아서 옆구리가 터진 신발을 들고 여관을 빠져 나왔다. 방 열쇠는 호주머니에 잘 넣어 두었다.
「도중에 돌아와서 방문이 잠겼다고 화내는 건 아니겠지.」
들고 있는 신발에선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러댔다. 탈취제의 사치를 누리지 못한 탓에 아주 죽여준다. 쓰레기통에 버릴까 하는 생각을 그래서 잠시나마 가져 보았다. 이 정도면 새 신발을 구입해도 사치가 아닐 것이다. 헤어진 부분에 손가락을 집어 넣어 보았다. 검지와 중지가 동시에 들어간다.

그래도 그라바스는 수선집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무도회장에 나갈 적에 새 구두를 신으면 나중에 피 범벅이 된다는 걸 어렸을 적에 시종장으로부터 들은 기억이 있다. 뭘 모르는 새내기 아가씨들이 곧잘 그런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도 같이.
살갗이 짓무르고 벗겨져 거의 고문 수준이 되었음에도 그걸 필사적으로 감추고 웃음을 짓는다. 그래서 무도회장에 깔린 카페트는 반드시 빨강. 새하얀 카페트를 깔았다간 왈츠와 함께 뿌려진 핏방울로 무시무시한 광경을 연출하게 된다.
구멍에 집어넣은 손가락을 도로 뺐다.
새 신발을 신으면 걷는 동작이 며칠은 굼뜨게 된다. 길 한복판에서 닌자 거북이를 만났을 적에「새 신발 탓에 발이 아파 잘 움직이지 못 했습니다」라고 하면 개그다.
그러니 새 신발 구입은 나중으로 미루고「아이구, 구려~!」라고 비명을 지를 구두 수선공에게 두둑한 팁을 쥐어 주자. 단, 신발 밑창은 새 것으로 교환해야 한다.

맑은 날씨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다. 2층 창가로 널린 빨랫감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이야, 좋다~ 라고 환호하며 손바닥으로 햇살을 가렸다. 반짝반짝 빛나는 가루가 공기 속에 녹아들어가 있다. 기분이 한층 더 좋아져서 팔을 위로 쭈욱 뻗으면서 멋지게 기지개를 켰다.
『잡화점에 들리는 김에 팬티라도 살까...』
요한슨 일행이 빌려 입었던 스승의 팬티는 일찌감치「소각-말살-그딴 거 없애버려-화이어볼」주문에 맞아 재가 되었다.
갈아 입을 팬티의 숫자가 부족하다.
현재 행방이 묘연한 스승이 잡화점에 들려 부인들 틈바구니에서 자신이 입을 팬티를 손수 고르고 있을 거라는 상상은 되지 않았다. 제르가디스는 부끄럼쟁이다. 속옷 가게에 걸린 여성용 브래지어에 뺨이 굳어자기 멋대로「뒤 돌아~ 갓」구령을 붙였을 거다. 그러니 제자가 대신 고생을 하도록 하자.

그리 생각하며 골목을 빙글 돌았을 때였다.
쨍그랑 하고 어디선가 유리창이 깨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뒤를 돌아보려고 했다.
그 전에 대단히 힘찬 손길이 왕자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우앗?!』
『쉿. 이리로.』
어느 틈에 나타난 건지 긴장한 요한슨이 건너편을 주시하며 그라바스의 등을 재빨리 떠밀었다. 유리로 만든 안경 알이 희번득 빛을 반사했다.
『요, 요한슨?』
『이대로 계속 걸어가십시오. 서두르되, 뛰지는 말고.』
『적인가.』
『아마도.』
낮게 삭이는 요한슨에 말에 그라바스 또한 긴장했다.
『알겠네. 시키는 대로 하겠네.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도움이 되겠는가.』
말투가 덕분에 괴상해졌다.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궁중 어투라니.
개의치 않고 요한슨은 잘라 말했다.
『검을 소지하여 주십시오.』

- 그건 곤란해!

칼은 싫다. 아니, 쇠붙이라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금속으로 만든 숟가락이 싫어 일부러 나무 젓가락을 사용할 정도다. 제르가디스가「네가 정녕 내 제자냐」라고 한심스러워 해도 싫은 건 싫은 거다. 어쩌다 금속이 닿으면 몸 어딘가에서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찢어져라 비명을 지르는 듯한 묘한 감각을 느꼈다. 그 감각이 싫어 옷에다 다는 쇠붙이 단추마저 없애 버렸다.
「이건 병인가요, 사부.」
「아니. 네 몸은 정상이다. 단지 네 몸을 에워싸고 있는 정령들이 호들갑을 떠는 것뿐이야.」
「정령?」
「아님 자의식을 가진 에테르라고 할까. 아님 민폐나 끼치는 바보들이라고 할까.」
그리고 사부는 싫은 표정으로 정령들이「오버」하고 있는 것에 휘둘려선 안된다고 충고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금속은 매우 요긴하게, 그리고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다. 금속을 전혀 접하지 않으려면 무인도에서「윌슨」이라는 이름의 야자 나무 열매 하나 곁에 두고 외로운 생을 살아야 한다. 정 뭐하면 돌 화살로 물고기를 잡고, 나무 그릇으로 밥을 지어다 먹으라지 - 하고 스승은 넌더리를 냈다. 그러면서 검 한 자루를 손수 제자의 손에 쥐어주고 도깨비 같은 얼굴로...

화가 난 스승의 파란 눈동자를 떠올린 그라바스는 땀이 난 얼굴을 쓸어내렸다.
『검을 소지하지 않아도 충분히 내 몸 하나는 지킬 수 있다, 요한슨.』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어?』
『당신은 당신의 몸 하나만이 아닌, 세일룬을 지켜야 합니다. 자, 검을 소지하여 주십시오.』

다시 유리창 하나가 더 깨졌다.
놀란 아낙네들이 꺄아 비명을 질러댔다.
그라바스의 얼굴이 초조감에 젖어 무섭게 일그러졌다.
검을.
검을 잡아야 한다.
그래서 세일룬을...
의지와는 달리 앞으로 내어밀 팔이 경련을 일으킨다.
이를 악 다물었다.
조금만 더 손을 뻗어라.
잡아라.

.......... 젠장, 못 하겠다.

소년은 스스로가 환멸스럽다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미안하다... 실망시켜 정말 미안하다. 요한슨, 나는...』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요한슨은 고개를 숙인 왕자님을 그대로 두고 다른 방향의 골목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갔다.
망연자실한 그라바스가 금방에라도 울 것처럼 울상을 지었어도 뒤를 돌아다 보거나 하지 않았다. 감정이라는 걸 얼굴 근육에서 깨끗하게 몰아내고 대신 크게 심호흡만 했다.

『어랍쇼. 분위기만 타고 안 넘어가네요.』
『그러게.』
『기왕에 암살자들과 한판 붙게 되었으니 이참에 왕자님에게 검을 쥐게 하자는 우리의 원대한 계획이 첫판부터 삐긋하는데요. 어쩌죠? 조금 더 압박을 해볼까요, 아님 일단 뒤로 물러날까요.』
작대기로 헛간 유리창을 깨뜨린 막스밀리엄이 제르가디스를 향해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깨어진 유리창과 막스밀리엄의 작대기를 번갈아 쳐다보던 제르가디스의 눈동자로 당혹감이 떠올랐다.
『누굴 닮아서 황소 고집인 건지. 어휴.』
불평하며 손가락을 따악 하고 튕겼다.
저건 그만 물러나자는 신호다. 막스밀리엄은 재빨리 작대기를 치우고 헛간 속으로 은화 세 개를 던졌다. 은화 세 개면 갈아 끼울 유리를 사고도 대다수가 남는 금액이다. 이 정도면 부랴부랴 달려나온 헛간 주인도 큰 불평은 하지 않을 것이다.

『왕자님 설득 작전은 나중에 계속하자. 그나저나 내가 적은 메모지는 잘 전달했고? 막스밀리엄.』
『그걸 두고 두말하면 잔소리라고 하는 겁니다. 그럼 가시지요. 미리 저편에 연락을 취했습니다.』

요한슨이 왕자를 그림자처럼 지키고 있다.
그렇담 별 걱정은 없을 터.
훌쩍 훌쩍 우느라 바빴던 그라바스가 잡화점에 들려선 스포티한 면 팬티 대신 엉뚱한 걸 집어 장바구니에 넣었다는 걸 모르는 스승은 서둘러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빨간색 하트가 그려진 무시무시한 걸 저녁에 당장 입게 생겼다는 걸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Posted by 미야

2006/06/14 13:26 2006/06/14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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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척을 죽이고 따라다닌지 닷새.
엿새가 되자 수풀에서 시커먼 얼굴 셋이 부스스 떠올랐다. 그리곤 머슥한 표정으로「감자 구운 거 남은 거 있음 우리에게도 주세요」라고 말했다.

『네놈들이 그러고도 세일룬의 군인이냐.』
스승은 우릉 우릉 울어대는 먹구름의 형상이 되어 밥그릇에 밥을 담았다. 그리고 도리질했다.
아무리 배고픔에 장사 없다지만 임무는 내치고 따끈한 밥 - 그것도 그릇에 꾹꾹 담겨진 밥을 감격해서 먹어치우면 어쩌자는 거냐. 정체를 드러내지 말라는 명령은 국에다 말아 먹고 참 잘 하는 짓이다. 제르가디스는 화가 나서 - 애들을 잘못 가르쳤다 - 노릿하게 구운 토끼를 식칼로 토막쳤다.
그 기백이 어찌나 무시무시했던지 막스밀리엄이 거북이처럼 등을 움추렸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5인분의 밥을 미리 지어놓고 뭘 화내는 거야, 사부.』
접시를 정리하면서 그라바스가 막스밀리엄 편을 들어주었다.
왕자의 말에 스승이 뒤를 휙 돌아다 보았다.
『누가 5인분의 밥을 지었다는 거냐.』
『그럼 이게 사부의 눈엔 2인분으로 보인다는 거요? 나랑 사부가 이 많은 밥을 죄다 먹어치운다고? 그게 가능하려면 사부의 위장이 거인의 밥통이어야 할텐데.』
거기다 들판에서 직접 잡아온 토끼가 세 마리나 된다. 성장기 어린애가 앉을 식탁이라 해도 이 정도면 충분히 영양소 과잉이다. 먹다 먹다 배 터져 죽을 일 있나. 그라바스는 확신하며 숟가락으로 그릇을 탕탕 쳤다.
자자, 먹고 봅시다. 속 보이는 쇼는 그만 하고.

잘 익은 고기에서 뼈를 발라내다 말고 요한슨이 쓰게 웃었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개구리를 날로 먹는 일엔 제법 지쳤거든요.』
불을 피우면 위치가 발각된다. 임무 수행 중 취사는 그래서 할 수가 없다. 생으로 버텨야 한다.
이것은 수도자들이 하는 고행과 많이 닮아 있다 - 요한슨은 그렇게 생각했다.
말린 육포와 견과류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다. 준비한 비상식량은 사흘째 되던 날에 바닥을 쳤다. 속수무책으로 날 생선과 개구리를 삼켰다. 맛은 그렇다치고 기생충 감염 때문에라도 내키지 않는 일이다. 갈아 입지 못한 팬티 사정보다 이쪽이 더 고약하다.
요한슨은 다시 한 번 쓰게 웃으며 발라낸 토끼 뼈를 접시 한켠에 얌전히 올려놓았다.

『일주일 내내 황야에서 노숙을 할 거라곤 짐작을 못했는데...』
이쯤해서 원망의 눈초리를 살짝 던졌다.
『설마하니 마을로 가는 길을 잃어버리신 건가요.』

밥풀이 붙은 주걱을 쥔 채로 제르가디스가 흐응 소리를 냈다.
『그런 바보 짓을 저지를 리 없잖아.』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밥 더 먹을 사람? 아직 많이 있다.』

일반인이 우굴거리는 마을 한복판에서「프로급 암살자와 딱 마주치다」경험은 하기 싫었다. 그래서 가나안 평원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이리로 갔다, 저리로 갔다 황야를 계속 걸었다. 표적이 되고자 일부러 뻐엉 뚫린 들판 한 가운데 서서 가만히 있었던 적도 있다. 쉽게 말해 멍석을 깔았다.

그때까지도 소리도 내지 않고 감자 스프를 삼키던 로우드가 한 마디 했다.
『작전은 나쁘지 않았는데 너무 눈에 띄게 멍석을 깔았어요.』
함정이라 깨닫자 적들은 곧바로 다음 포인트로 넘어갔다.
『조심성 있는 놈들이예요. 참을성도 있고요.』
그러니까 유혹해도 쉽게 응하지 않는다. 이쪽에서 준비한 판이라는 걸 알자 훌훌 손을 털고 사라졌다. 혹시라는게 있으니까 일단 건드려보자 - 라는 건 알지 못한다는 식이다.

『그거, 골치 아픈데.』
『충분히 골치 아프죠.』
수긍하며 구운 감자를 입에 넣었다.
눈물이 왈칵 솟구치려 한다. 이 문명의 냄새와 맛이라니. 살짝 넣은 카레 가루 냄새가 환상적이다. 그들의 스승 제르가디스는 요리 솜씨가 괜찮다. 신부로 삼고 싶어 진다 - 그 전에 목이 달아날 거라는 문제가 있지만.

모닥불을 막대기로 찔러대며 제르가디스가 질문했다.
『암살자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없나, 요한슨.』
『본국에서 조사한 바로는「질풍」의 일원이라고 합니다. 그 외에는 아직 이렇다 할... 여자인지 남자인지조차 몰라요.』
『질풍?』
『14년 전에 세레겐 울프가 만든 암살 조직이죠. 이념 없이 오로지 돈으로만 움직이는데 최대 조직원 수는 항상 여덟을 넘지 않습니다.』
『흐응. 돈, 인가...』

그들이 돈 맛을 안다는 건 이쪽 입장에서도 나쁜 소식은 아니다. 이념이 없다면 충분히 실을 조정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쪽엔 막강 재력의 세일룬이 등뒤에 있다.
실을 조정하지 못할지라도 최소한 흔들어볼 수는 있을 터.
제르가디스는 주저 않고 메모지를 꺼내 몇 개의 글을 적었다. 그리고 그걸 우걱우걱 먹느라 바쁜 막스밀리엄에게 건냈다.

『우?』
『받아, 막스. 네가 해야 할 일이다.』
메모지를 받으라는 말에 허겁지겁 기름 묻은 손가락을 셔츠에 문질러 닦았다.
『뭐, 뭔대요?』
『하여간 받아.』
그리고는 싱긋 웃으며 덩치의 어깨를 툭툭 쳤다.

볼에다 음식을 하나 가득 넣은 채 막스밀리엄은 질겁했다.
저 사내가 갑자기 다정해지면 후환이 늘 두려웠다.
웃으면서 안녕. 지옥으로 가는 티켓을 끊어주고 상냥히 손을 흔든다.

『이, 이상한 거 시키려는 거죠!』
『발가벗고 동네 한 바퀴 돌으라는 건 아니니까 안심해.』

막스밀리엄의 안색이 당장 창백해졌다.
안심은 하라는데 워째 더 겁이 나고 있다.
도움을 찾아 막스밀리엄은 허겁지겁 동료를 찾았다.

『저기요, 요한슨 대장...』
그러다 얼어붙었다.
일주일동안 속옷을 못 갈아입었다는 요한슨의 한숨에 그라바스가 가방을 뒤지고 있다. 세탁하여 정리해둔 심플한 검정색 삼각 팬티가 왕자님 손에 쥐어져 있다.
『급하신 것 같으니 이거라도 빌려드릴까요?』
친절한 제자의 말에 스승의 안색도 달라졌다.
잘 먹던 감자 스프 접시를 그래서 세 명이 동시에 뒤엎었다.
안돼 - 라는 절규가 잠시 드넓은 황야를 뒤덮었다.

Posted by 미야

2006/06/13 16:41 2006/06/13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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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r 2006/06/19 23:48 # M/D Reply Permalink

    와오; 죄반 후반부의 소년은 어른이 되었다, 이부분이 생각나요. 보는 저야 언제까지나 소년의 이미지였지만 글속에서 이렇게 시간이 흘러 아들?(;)도 두고 제자들께 스승이라고 불리우는걸 보면 참.. 그치만 속옷가게에 쑥스러워서 못들어간다니 여전히 제르가디스답고 귀엽기도 하고. 5인분은 너무 적은거 아니에요?^^ 죄반에서 파편들로 보여진 이야기들이 조금씩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니 저로써는 기쁘기가 짝이 없습니다. 미야님. 미야님의 글이 제 성향과 완전히 맞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나중에 캐릭들이 너무 가엾고 안타깝고.. 그점이 매력이긴 하지만요) 지금 하고 계시는 팬픽 작가분들중에서는 단연 최고라고 여겨집니다. 항상 글 기다립니다. 정말로 잘쓰십니다. 개그면 개그, 잔혹이면 잔혹. 그 방대한 양이나 세계관이나, 마치 새로 창조된 슬레이어즈를 보는 느낌이에요.더 써주세요! 재미붙여주셔요! >_< 아 그라바스.. 그 정령사 제자였군요. 이렇게 살벌하지만 나름 즐거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걸 보니 또 안구에 습기가--; 이제 저는 속지 않아요! 이 잠깐의 단비같은 개그는 후일 더 큰 비극을 위한 시초일뿐이라는걸!ㅠㅜ 늘 느끼지만 미야님의 묘사는 실제 모험을 연상케 합니다. 굉장히 사실 같아요. 주정을 가장한 비밀대화라던가, 새 신발과 붉은 카펫의 이야기라던가. 카펫이 붉은 이유는 처음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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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4 : 화톳불의 노래

오리지널틱한 글일 수밖에 없습니다. (웃음)


검이 싫어 검술 공부는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주 바보(문외한)인 건 아니다.
그라바스는 한 눈에 알아챘다.
저들 3인조는 군인이다. 그것도 높은 계급장 달고 부하들을 향해 호령만 하는 장군님 스타일이 아닌, 여차하면 한 걸음에 달려나가 적군의 머리를 베는 실전 실무자들이다. 가다듬지 않은 수염이라던가, 털털해 보이는 옷차림이라던가, 껄껄 웃음짓는 소리는 둘째다. 눈빛이 호랑이니 가까이 가고픈 맘이 싹 달아났다. 닥치면 생으로 살무사 머리를 씹어먹고도 남을 인간들이다. 코 앞에서 렛셔 데몬이 떼를 지어 나타나도 얼굴색 하나 달라지지 않을 거다. 옆구리에 찬 검은 얼마나 날카로울까. 검집에서 뽑으면 짙게 피 냄새가 날지도 모른다.

쇠붙이는 물론이거니와 피라면 더더욱 질색이다.
그라바스는 뒤돌아 가게를 뛰쳐나가고 싶다는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그렇다고 해도 낭패다. 존경하옵는 스승이 의자에 엉덩이를 착실하게 붙이고 앉아 이들 3인조와 즐겁게 잡담을 나누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슬그머니 자기 혼자서만 뒤로 뺄 수도 없는 노릇.
주책바가지 영감탱이. 지금이 앉아서 수다를 떨 때냐. 그라바스는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그래서 마차 바퀴가 굴러갔다?』
『아하하하! 아~주 곤란했지요. 멧돼지 놈이 마차 옆구리를 박아댈 거라곤 생각 못했는데 그것으로도 모자라 바퀴까지 빠졌으니까요.』
『고생 좀 했겠군. 그래도 그만하길 다행이지. 성격 나쁜 곰은 아니었잖아?』
『뭐, 말씀 그대로 곰은 아니었지요. 허나 미친 멧돼지라는 것도 무시할만한 건 아니더군요.』

객관적으로 말해 맛이 살짝 간 야생 멧돼지가 마차를 습격한 사건 얘기는 하나도 재미 없었다. 그런데도 스승과 3인조는 덤불 속으로 굴러간 마차 바퀴 부분에 이르러 박장대소를 했다. 술에 취해 감정이 격앙된 걸까. 배꼽을 잡을 이야기가 결코 아닌데 저렇게들 웃고 있으니 그거 참 요상타. 어쩌면 가게 주인이 집에서 직접 만들었다는 흑맥주가 뿌리부터 상한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다들 제정신이 아닌 것이다.「막스밀리엄이 2개의 바퀴살을 따라가다 엉덩방아를 찧고 도랑을 굴렀다」부분에 이르자 스승은 아예 죽으려 했다.

『막스밀리엄이 굴렀어? 핫핫핫! 그거 볼만했겠군.』
『볼만했죠. 하필이면 바지에 구멍까지 뚫렸다니까요. 꿰매고 싶어도 반짓고리는 없지, 바지는 너덜거리지. 아픈 건 나중이고 보는 저까지 창피해서 혼났습니다.』
『바지를 손질해줄 여인네의 손길도 없으니 서러움은 더욱 컸겠군, 요한슨.』
『당연하죠. 하여간 저놈의 덩치 막스밀리엄이 쭈그리고 앉아 새색시처럼 바느질에 도전하는 광경을 직접 보셨어야 했는데. 얼마나 한심하던지... 으하하!』
그리 말하면서 짧게 머리를 자른 남자가 자기 몫의 맥주를 입가로 가져갔다.

조금 떨어져 앉아 얌전히 있던 그라바스는 순간 눈빛을 반짝였다.
스승에게서 배운 관찰력이다. 틀리게 보지 않았다. 저 인간, 마시는 척만 하고 있다.
목젖이 깔딱깔딱 움직이고는 있는데 액체가 목구멍 속을 넘어가는 특유의 소리가 안 들린다.

『하하하, 그거 참 안 됐군. 울지는 말고... 마셔, 마셔!』
스승은 기분이 좋은지 눈을 가늘게 하고 3인조를 따라 잔을 높게 들었다.
어랍쇼. 여기서 그라바스는 다시 한 번 더 눈빛을 반짝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영감탱이도 마시는 척만 한다.
숨도 안 쉬고 잔에 든 액체를 쭈욱 들이킨다. 허나 죄다 옆으로 흘러내리고 입안으로 들어가는 양은 맹세코 거의 없다. 카아- 소리를 내고 손등으로 입가를 훔쳐도 순전히 공갈이다. 혀만 살짝 닿았다고 보면 된다.

『손이 흔들리니 죄다 넘치네. 그래도 이거 무지 맛이 좋네요. 어떻습니까. 한 잔 더 시키죠?』
『얼쑤? 한 잔 더? 음... 어쩌지. 슬슬 취하는 거 같은데.』
『술이야 취하려 마시는 거잖습니까. 하하하, 이보쇼? 주인장. 여기 한 잔 더 추가~!!』
『아냐, 로우드. 난 이제 됐어.』
『에이. 그렇게 빼면 원망할테야요. 그러지 말고 따악 한 잔만 더. 괜찮죠?』
이러면서 취한 척, 마시는 척. 부어라, 잡아라.

흘끔흘끔 곁눈질하는 이쪽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얼굴이 벌겋게 달은 막스밀리엄이라는 이름의 자가 그라바스를 향해 싱긋 웃어주었다.
그러더니 착한 어린이에게 주는 상이라며 예쁜 포장지로 싼 콩사탕 몇 개를 꺼내어 손에 쥐어주었다.

『힘 내야 한다. 알았지?』
엉겹결에 사탕을 받은 그라바스의 눈이 점이 되었다.
콩사탕. 파란 점이 찍힌 노란 포장지.
어릴 적에 할마마마가 귀여운 손주에게 쥐어주던 바로 그 사탕이다.
거기다 할마마마의 대사까지 판박이.

눈치가 삼단인 그라바스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정중히「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막스밀리엄은 그때만큼은 군인의 시커먼 때를 벗고 민간인의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 가지고 뭘.』
이 대사가『꺄악~ 왕자님, 알라뷰♡』으로 들리니 사람 마음이라는 건 참 간사하다.

취했다는 걸 강조하듯 스승의 발걸음은 어지러운 갈짓자였다.
『어, 화장실. 화장실.』
그러길 한 15분. 인기척이 드문 곳으로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예의 고양이 발걸음으로 돌아왔다. 거기다 걷는 속도가 무지하게 빨라 따라 걷는 입장에선 다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역시나 마시는 척만 한 거야. 사기꾼.
종종 걸음에 그라바스는 숨을 헐떡였다.
『사부, 조금만 천천히...』
힘들어하는 걸 눈치 챈 스승이 손을 내밀었다. 제르가디스의 손바닥은 뜨거웠다.

『그라바스? 오른쪽으로 돌자.』
『왼쪽이 아니고?』
야밤에 샛길로 가자며 손을 끌어 당긴다.
내 소원은 당장 늑대 밥이 되는 겁니다. 뼈까지 꽉꽉 씹혀 먹혔음 합니다.
그라바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지금처럼 큰 길을 놔두고 일부러 힘든 길을 골라 가는 까닭은 딱 하나밖엔 없다.

『야밤도주까지 해야 하는 분위기인 건가요.』
걱정하는 제자의 말에 어둠 속에서 스승이 뒤를 살짝 돌아다 보았다.
데몬과 사요정이 믹스된 그의 눈동자는 들짐승처럼 선명한 파란 불꽃을 내었다. 섬짓한 느낌이다. 따뜻하게 쥔 손의 감촉이 없었더라면 귀신으로 착각했었을 수도 있다. 몇 년에 걸쳐 익숙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라바스는 내심 당혹감을 느꼈다. 그것도 하필이면 들판에서 요괴를 만났을 적의 당혹감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스승이 슬그머니 눈을 돌렸다.
『하여간 말이야. 너희 집안에선「알프레드」라는 이름은 악운이야.』
『에.』
『널 죽이려 암살자를 고용했다더군.』
『어라. 알프레드 고모부가?』
『다섯 중 셋은 잡았고 나머지 둘은 놓쳤다.』

아까 3인조가 말하던「마차에서 빠진 바퀴살 둘」은 이걸 가리켰던 것 같다. 그렇게 이해를 하고 나자 그렇게나 호들갑스러웠던 대화 내용이 새롭게 다가왔다.
미친 멧돼지가 마차를 향해 돌진해왔다 - 고모부가 뒷 공작을 시도했다는 얘기일 거다. 멋진 비유다. 그렇지만 멧돼지라니. 살집이 제법 된다고 대놓고 돼지라고 하면 슬퍼진다.
두 개의 바퀴살이 빠졌다 - 고용된 프로 암살자 중 두 명이 포위를 뚫고 달아났다.
막스밀리엄이 바퀴살을 찾으러 가다 도랑에 굴렀다. 보너스로 바지 엉덩이에 구멍 - 추격하던 암살자들에게 반격까지 당해 칼에 찔리고 참 잘 하는 짓이다. 당신, 실력이 부족하군.
눈을 뒤집고 어이구야 소리를 냈다.

이를 곡해한 스승이 제자의 손을 더욱 꽉 붙잡았다.
『무서워할 것 없다. 내가 있잖아. 아멜리아와 약속했다. 넌 나의 대자다.』
어린 제자는 에- 소리를 냈다. 커다란 덩치 막스밀리엄이 코를 훌쩍거리며 상관을 향해「죄송혀요, 요한슨 대장. 놓쳤어요」라고 말했을 장면을 상상했던 것뿐이다. 그런데 스승은 엉뚱한 방향으로 오해했다.
『사부? 오해예요. 암살자가 무서워 한숨 쉰 거 아니...』
채 듣지 않고 스승이 굳은 목소리로 재차 강조했다.
『내가 있다.』
그리곤 살기등등한 기세로 으르렁댔다.
『감히 내 대자를 건드리려 하다니. 100년은 빨라.』

표현은 대자라고 했다. 허나「배 앓아 낳지 않았지만 눈에 넣어도 하나도 안 아픈 내 새끼」다.
이때의「내 새끼」라는 단어가 갖는 무게라는게 어떠한지 세일룬 관계자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터. 쉽게 말하면 팔불출이고 심각하게 말하면「마족이 날뛰는」수준이다.
그게 무서워서라도 - 누구라도 잠결에 목이 잘려 나뭇가지에 걸리고 싶지는 않을 거다 - 다들 어깨를 움츠리고 얌전히 있을 법도 하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급 암살자를 고용, 음식에 독을 타고, 사냥터에서 화살을 날리는 등의 음모가 멈추지 않고 있다.
뭐가 평화의 왕국이라는 거냐. 세일룬도 내부를 해부해보면 썩은 냄새 진동하는 만신창이다.
『나 같은 어린애 목숨까지 노릴 정도로 말이지...』
그라바스는 쓴 웃음을 지었다.

여왕 아멜리아는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다.
그런데 슬프게도 왕세자는 몸이 많이 약했다. 애시당초 허약체질이었는데다 스물 두 살이 되던 해에 독약을 먹고 몸이 단단히 상한 탓이다.
여드레동안 피를 토하고 고열을 냈다. 백약이 무효라 다들 왕세자가 죽을 거라 했다. 그걸 제르가디스가 카타트 용족의 해독약을 구해다 먹여 겨우 고비를 넘겼다.
그렇다. 고비만 넘겼다. 목숨은 건졌으되 이후 왕세자는 병석에 눕는 일이 잦았다.
외출도 하지 못했다. 피곤하면 금방 쓰러졌다. 코피를 흘리며 기절하는 일이 다반사. 국정을 돌보는 일은 사실상 무리였다.
하여 자동적으로 후계자 논의는 왕녀 그레이스에게로 향해졌다.
세일룬에서는 여자라고 차별하는 일이 없다. 게다가 그레이스는 행방불명된 그레이시아 왕녀를 닮아 대단히 활달한 성격이었다. 귀족들은 죽 한 사발 못 먹은 낯빛의 왕자 대신 씩씩한 그레이스 왕녀를 차기 여왕으로 추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 마당에 사내 구실도 못할 것 같던 왕세자가 득남, 왕가의 적손 윌리엄- 그라바스의 아버지가 태어났다.
이때부터 세일룬은 왕손과 왕녀를 두고 두 파로 갈려 두고두고 싸움을 시작했다.
이것이 세간에서 쑥덕대는 속칭 왕자파와 왕녀파 다툼이다.

실수로 밟은 나뭇가지가 따악 하고 부러졌다. 그라바스는 목을 움츠리고 이크 소리를 냈다.
『사실 누가 왕위에 오르든 상관 없는 일이라 생각하는데.』
그레이스도 좋은 왕이 될 거다. 그라바스는 부채를 흔들며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던 그녀를 떠올렸다. 비록「솔직히 말하자면 정의 따윈 무지무지 질색이야~」라는 말이 입버릇이라 해도「장래 희망은 정의의 용사」라던 아멜리아의 딸이다. 피는 못 속인다. 세일룬을 부강하게 만들고 백성을 풍요롭게 할 거다. 입이 거칠고 다혈질이라는 점만 빼면 나무랄 곳 없는 대장부다. 높은 곳에 올라가 호령하다 실수로 굴러떨어져 목뼈를 분지르지만 않는다면 100년동안 만세 만세 만만세다.
『그렇다고 우리 아버지가 바보라는 건 아니야.』
윌리엄은 온화하고 말이 없는 사내다. 책을 좋아하고 사색이 취미인, 병약했던 전 왕세자와 국화빵이란 소리를 그래서 자주 듣는다. 그래서 때로 윌리엄을 두고「가랑잎과 동류」라며 깔보는 귀족들도 있는 듯 하다만, 온화한 미소 속에 냉소가 깃들어 있다는 걸 깨닫고 나면 생각이 달라진다.
손바닥 위에 원로회를 올려다 놓고 주물럭대는 것이 그의 장기.
머리가 비상해 두뇌 플레이에서 진 역사가 없다.
윌리엄이 세일룬의 왕위에 오른다면 코가 꿰이는 귀족들이 하나 둘이 아닐 것이다. 싫든 좋든 딴 짓은 전혀 못 한다. 다시 말해 정권은 안정될 것이다.

『가위바위보 해서 이긴 사람더러 왕위에 오르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라구.』
그런데도 두 파로 나뉘어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현실이라니.
『완전 바보 짓이야. 이쯤되면 세일룬의 이름을 집어 던지고 훌훌 도망가고 싶다고.』

제자의 혼잣말에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제르가디스가 우뚝 멈춰섰다.
『그라바스.』
네 이놈- 하는 서슬 퍼런 어투에 제자는 얼른 용서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무시해주세요. 말이 헛 나왔습니다.』
매운 주먹이 왕자의 정수리를 쳤다.
『아얏!』
『암살 모의가 있었습니다 - 라는 것 때문에 도망을 치겠다? 사내답지 못하잖아. 아니, 그것보단 한심하다고 할까. 어이 없다고 할까. 아니면 세가지 전부라고 할까.』
그러면서 스승은 눈빛을 번득였다.
『좋아하는 여성에게 실연당해서 도저히 왕위를 잇지 못 하겠습니다 - 라면 또 모를까. 백성들은 어떻게 하고 도망을 치겠다는 거냐!』
『저어, 사부? 여자에게 차여서 왕 노릇 못 하겠습니다 - 라는 것도 엄청 한심할 것 같은데...』
듣지 않고 스승은 언성을 높였다.
『도망치지 말아. 용감히 맞서 싸워. 나는 널 그런 한심한 놈으로 낳은 기억이 없다!』
『낳지 않았잖아...』
『알겠냐, 그라바스. 여자가 싫다고 해도 끝까지 따라가는 거다. 속담에도 있잖니. 열 번 찍으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얘기가 옆으로 샜어.』
『열심히 꼬시는 거야. 그리고 되었다 싶을 적에 그냥 쓰러뜨려!』
『그, 그래선 범죄지!』

발끈 - 하는 제자 앞에서 스승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착한 아이다.

하아, 하고 숨쉬고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뒤쪽에서 3인조가 기척을 죽이고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뭐,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었지만「맛이 간 멧돼지」다음으로「야생 곰」까지 협공하는 날엔 저들도 제법 도움이 되어줄 것은 분명하다. 하여 당분간 그대로 내버려두기로 했다.

『그라바스?』
『네.』
『내가 여자 아이에게 인기 끄는 법 가르쳐 주랴? 그 첫 번째, 살짝 눈웃음 치며 윙크라는 것을...』
『되었수! 그런 곰팡내 나는 수법일랑 땅에다 파 묻어 버리쇼!』
『에이, 그러지 말고...』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졸음마저 잊은 채 그렇게 인기척 없는 언덕을 넘고 있었다.

Posted by 미야

2006/06/11 18:39 2006/06/11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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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aya 2006/06/13 19:47 # M/D Reply Permalink

    오우 멋집니다. 마탑요시에서 그만 넘어갈 뻔 했지만 (웃음 참느라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리나 이야기보다 미야님의 오리지널 가득한 이야기에 더욱 끌리는 건 역시 미야님 센스와 필력 탓일까요. ^^ 게다 미야님 소설 속 제르가디스는 너무나 매력이 있어요.

    1. 미야 2006/06/14 12:37 # M/D Permalink

      에헷- 가야님 응원에 한편 더~ 즐겁게 쓰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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