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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조사] 풀피리 20

제4장 뜬소문과 재화욕심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곰이 앞발을 휘둘렀을 뿐인데 광풍이 불었다.
나무 위에 올라간 나조차 솟구친 먼지로 눈이 따끔거렸으니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엉거주춤 서있던 수사들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화살을 다시 재장전하고 활시위를 잡아당길 준비를 마쳤던 어린 소년도 풍압에 휩쓸려 속수무책으로 굴렀다. 힘을 잃고 따라 빨려가는 화살들이 여기선 꼭 이쑤시개처럼 보였다.

완전 미쳤다. 턱을 힘껏 벌려 포효하는 짐승은 어쩐지 곰이 아닌 다른 생명체 같았다. 플루토늄으로 오염된 땅에서 태어나 유전자 변이를 일으킨 거대한 악의였다.

“도련님이 위험하다. 빨리 신, 신호탄을 쏴!”
수사 한 명이 허리 근처를 뒤적거렸다. 신호탄을 찾는 눈치인데 감정이 격해진 탓에 손을 떨어 간단한 동작조차 제대로 해내질 못하고 있었다.
그걸 놓칠 곰이 아니었다. 거대한 체구를 움직여 수사의 몸통을 앞발로 찍어 눌렀다.
모양새가 좋지 않은 죽음이었다. 흉부가 납작하게 찌그러진 수사는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신호탄을 올리라니까!”
“제길, 다리가 풀렸어!”
“그러니까 여기에 오지 말자고 내가 누누이 말했... 허억!”
곰이 웃는 걸 본 적 있는가. 순식간에 사람을 죽인 곰은 진심으로 재밌어 했다.

“정신 차려! 그러고도 너희들이 현문 세가의 수행자냐!”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애가 보기와 다르게 참 독했다. 어느 새 몸을 추스른 소년이 나무에 어깨를 기댄 자세로 다시 활시위를 당겼다.
솜씨가 출중하여 이번에도 화살은 곰의 몸을 맞췄다.
억울한 부분이라면 아직 나이가 어려 힘이 약했다는 점이랄까, 화살은 단단한 곰의 피부를 약간만 뚫었을 뿐이었다. 깊게 박히지도 않은 화살은 곰이 몸을 털자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제 끝이었다. 결말을 예상한 나는 진심으로 속이 상했다. 이런 식으로 죽기엔 아이가 너무 어렸다. 아직은 부모 아래서 어리광을 피워도 괜찮을 나이인데 뭐가 그리 급하다고 일부러 위험한 곳까지 와서... 곰이 두 다리로 걸었다. 이족보행 종족도 아니면서 거짓말처럼 속도가 매우 빨랐다. 성큼 걸음으로 소년에게로 접근한 괴수는 주둥이를 벌려 넋이 완전히 나간 아이의 머리를 물어뜯으려 했다.
“야, 이 개 자식아! 어린애는 건드리는 거 아니야!”
내뱉고 보니 저건 개가 아니라 곰이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뭐, 괜찮겠지. 뜻만 통하면 - 중얼거리며 근처에 있던 바위를 들어 냅다 던졌다.
왕년에 배추 250근을 혼자 들어 운반하던 나다. 힘쓰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기에 바위는 빙글빙글 돌며 곰의 머리 위로 정확히 떨어졌다.
깨진 것이 곰의 머리가 아니라 바위라는 점은 심히 유감스러웠지만 - 그래도 명중이었다.

돌에 맞은 곰의 눈이 벌겋게 변했다.
이 거리에서 고작 시선이 마주쳤을 뿐인데 등골이 오싹했다.
녀석은 분노로 완전히 꼭지가 돌아버린 듯했다. 발광하여 발을 굴렀고,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집어 내가 있는 방향을 향해 던지기 시작했다. 깨진 바위조각에 뽑힌 사람의 팔, 그리고 불운한 소년의 몸뚱이가 대포처럼 날아들었다.

‘씨발, 결계...!!’
날아오는 물체가 뿌리 채 뽑힌 나무라면 괜찮다. 결계는 오직 사람에게만 반응한다.
그래서 진법 위를 통과하는 물체가 사람이면 문제가 엄청 심각해진다.
나는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제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순간 귀가 먹먹해졌다. 벼락이 계속 같은 자리로 반복하여 내리꽂히는 기분이었고, 정전기가 오른 것처럼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콰르르 우르르 땅이 울렸다. 발아래 떨림이 꼭 대규모 산사태가 발생해 산중턱이 그대로 쓸려나간 것 같았다. 뭔가가 무너졌고, 다시 치솟았다가, 격렬하게 요동치며 주저앉았다.
‘씨발, 이래선 반물질 폭탄이라도 터진 것 같잖아!’
하늘이 갈라지고 있었다.

이미 기절한지 오래여서 팔이 축 늘어진 소년의 몸이 허공에서 둥실 떠올랐다. 그러더니 나침반 바늘처럼 몸이 저절로 회전했다.
동시에 손목에 찬 팔찌에서 자색의 불꽃이 솟구쳤고, 이내 소년을 에워싸고 무서운 기세로 타올랐다.
눈치껏 보아하니 주인을 보호하는 진귀한 아티팩트인 모양이었다.
불꽃은 소년의 육신을 통째로 튀기려 드는 결계의 힘에 맞서 맹렬하게 저항했다.
팽팽한 대결이었다. 먹느냐, 먹히느냐, 막상막하의 대결은 위력적인 폭풍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냈다.
폭풍에 휩쓸린 주변 나무가 쩍 소리를 내며 터졌다.

고개를 계속 들고 있다간 내 머리도 터져 나갈 지경이었다.
쪼그리고 앉았던 자세를 바꿔 아예 개구리처럼 납작 엎드렸다.
적절한 판단이었다. 토네이도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음 소들과 같이 오즈의 나라로 빨려갈 뿐이다.
뭔가가 코앞에서 와지끈 부서졌고, 간발의 차이로 머리 꼭대기 한 가운데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의 정체는 금이 가고 깨진 팔찌의 구슬이었다.

소란이 멎어 사위가 고요해지자 시야에 대자로 누운 소년의 몸이 가득 찼다.
마침내 결계를 깨고 진법 안으로 살아있는 사람이 들어왔다.

이걸 기뻐해야 할지, 아님 슬퍼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건 뒤로 미루기로 했다.
퍼득 깨달음이 왔다. 지금 이 순간의 고요는 단지 폭풍의 눈 속에 들어와서 그런 거지 아직 태풍은 지나가지 않았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허공으로 여덟 개의 기둥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미리 예정되어 있던 순서대로 나타난 그것은 구름을 뚫을 기세였다.
문제는 일곱 개는 튼튼했고, 하나는 깨지고 절반이 부러진 상태였다는 거다.
좋지 않았다. 수직으로 선 기둥 꼭대기로 빛나는 거대 문양이 떠올랐다. 동시에 건물 외곽 철근이 구부러지다 못해 뚝뚝 끊기는 굉음이 들렸고, 문양이 거대한 쟁반처럼 기둥 위에 올라갔다.
상상력을 동원할 필요도 없었다. 그 다음은 규모가 남다른 쟁반 노래방의 재현이었다.

기절한 소년을 등에 업었다. 초보자 아이템으로 주어졌던 곤선삭을 꺼내 나와 아이의 허리를 같이 동여맸다.
시간이 촉박했다. 기둥이 온전하지 않으니 문양은 곧 균형을 잃고 아래로 곤두박질할 것이고, 그 아래에 있는 모든 걸 공평하게 깔아뭉갤 터였다. 그 전에 파괴 범위에서 무조건 탈출해야 했다.
“효성진 이 미친 양반이 자폭 장치를 숨겨놨어!”
도를 숭상하는 인간이 결계를 억지로 깨고 안으로 사람이 들어오면 진법이 붕괴되어 침입자를 공격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것도 보통의 붕괴가 아니다. 일종의 폭파공법을 사용해서 엄청난 무게를 가진 철판을 사람들 머리위로 수직낙하 시킨다고 상상해보자. 댁이 무슨 알 카에다냐고!
하여간 이 세계 사람들이 가진 선악의 가치관은 현대의 기억을 가진 내 입장에선 따라가기가 벅찼다.
재판과정 없이 은원을 갚는 일이 일상이라 그런지 사람 헤치는 일에 손속이 매웠다.

“으으...”
“아파도 지금은 일단 참아!”
등 뒤 업힌 어린애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영험한 아티팩트가 지켜줬다고 해도 몇 년에 걸쳐 억압되어 있던 에너지와 정면충돌을 했으니 찰과상만 입고 끝나지는 않았을 거다.
이런 경우 함부로 만지지 않는 것이 정석이긴 하다.
목이나 허리처럼 안 좋은 부위로 금이 간 경우 몸을 흔들면 신경이 어긋나 영구히 망가질 수도 있다.
그런데 존재하지도 않는 119가 출동할 것도 아니고, 조금이라도 시간을 지체하면 납작 쥐치포 결말뿐인데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잖아.
미끄러져 흘러내리는 아이의 엉덩이를 받쳐 들고 정신없이 뛰었다.
그 와중에도 나중에 이 아이의 부모로부터 고발을 당하겠구나 싶었다.
제법 부자이고, 제법 잘 나가는 집안일 거 같은데 이거 어쩌냐.

“엄마.”
아이가 엄마를 찾았다.
“아빠.”
아빠도 찾았다.
“외숙부.”
부르는 순서가 많이 이상하다. 엄마랑 아빠 다음엔 형이나 누나를 찾아야 하는 거 아니야?

바로 그때 평생 들어본 적 없는 불길하고 기이한 소리가 천지를 찢었다.
큰 바람에 휩쓸려 튕겨져 나가면서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수직낙하 한 진법이 지표면과 충돌했다. 대략 반경 200간 정도의 땅이 트랙터로 뒤엎은 모양새로 일제히 주저앉았다. 관음보살이 현신하여 대륙 크기의 손바닥으로 큰 거북 등짝을 후려갈긴 모양새였다. 오싹할 정도의 파괴력이어서 나무는 물론이고 새와 짐승들까지 전부 형태를 잃었다.
“여기가 무슨 퉁구스카냐......”
뜨겁게 타오르지만 않았을 뿐이지 이 참상은 대형 운석이 공중에서 폭발을 일으킨 퉁구스카 그 자체였다.

‘때마침 결계 가장자리에 있었기에 망정이지 빠져나오지 못했으면 말 그대로 가루가 될 뻔했네. 효성진 이 인간... 선 넘었잖아! 만나기만 해봐. 너무 한 거 아니냐고 따질 테야. 그리고 주먹으로 날려줄 테다.’

아이와 같이 곤선삭으로 묶여 있다는 걸 잊고 자리에서 엉금엉금 일어났다.
운이 좋았다. 머리에서 피가 흘렀지만 이 정도면 곧 아물 것이다. 팔과 다리도 잘 붙어 있었다.
아, 방금 만진 팔은 내 것이 아니었다만. 상관없겠지. 아이의 팔도 제자리에 든든하게 잘 붙어 있었다.
어쩐지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실제로도 푸흐흣 이러고 실성한 듯 웃었다.
기쁜 것이 아니라 미칠 것 같은데 사람은 웃을 수가 있는 거였나, 그러고 보니 미친 곰에게 발목을 물어 뜯겼을 때도 이렇게 웃었던 것 같다. 눈물이 나오지 않으니 웃어버리자 생각했던 게 얼핏 기억이 난다.
아니면 이런 게 인생 처세술인 건지도.
라면 다 끓여놓고 상 엎었을 적에도, 계약종료 통보서 받았을 적에도, 여자 친구와 헤어졌을 때도 웃었다. 웃으면 복이 온다고... 누나가 말했다.

“아, 환장하겠네~”
배를 잡고 웃으며 머리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충격으로 날아오른 흙먼지가 검은 방사능 비처럼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Posted by 미야

2021/11/10 13:20 2021/11/10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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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조사] 풀피리 19

제4장 뜬소문과 재화욕심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멀리서 누군가 7,000루멘 밝기의 초강력 손전등 두 개를 켜고 사방을 비추는 것 같았다.
아니, 그럴 리 없다. 여기는 건전지 없는 세상이다.
사방은 쥐 죽은 적막 속에 감겨 있었다. 심상치 않은 침묵이었다.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조차 안 들린다. 밤 사냥을 하는 새들도 오늘만큼은 공쳤다고 여기기로 했는지 꿈쩍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바닥에 최대한 납작 엎드린 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손전등 불빛으로 여겨지는 건 짐승의 눈이다.
곰, 그것도 덩치가 큰 그리즐리 베어가 어느 때보다 가까이 접근했다.

숨을 쉬지 않아도 되는 몸이라 소리 부분에선 내가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반대로 곰은 밤눈이 밝은 편이었다. 간혹 발을 헛디디고 비틀거릴 때도 있으나 내가 설치해둔 함정을 피해 다닐 정도는 되었다. 그러니까 뾰족하게 나무를 다듬어 숨긴 걸 알아본다는 뜻이다.
문제는 시력은 그렇다 치고 무엇보다 비교 불가능으로 저놈의 후각이 뛰어나다는 거다. 지금과 다르게 바람을 등지고 서면 그냥 망했다고 봐야 했다.

‘저 새끼, 어제 멧돼지 잡아먹었으면서. 아직 배가 안 고플 텐데 순전히 오기로 날 건드려볼 생각이군.’
곰은 느리게 움직이며 콧김을 뿜었다.
저 여유로움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단서를 잡았다고 알리는 거다.
그러니 어서 도망치라고, 낙엽을 밟아 소리를 내라고 떡밥을 던지는 거다. 참으로 사악한 사냥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둘의 기 싸움은 제법 길어졌다. 녀석의 의도를 읽은 나는 결코 움직이지 않았고, 곰은 캐나다 주택가 쓰레기통에서 먹다 버린 캔을 낚아 올린다는 식으로 주변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녀석은 제일 먼저 내가 꿍쳐놓은 견과류에 관심을 보였고, 다음으로는 노루, 어쩌면 사슴, 아니면 고라니로 만든 가죽 깔개에 코를 들이댔다.
다리가 부러져 죽어가는 걸 숨통을 끊고 껍데기를 벗겨내어 만든 깔개는 내가 요긴히 쓰는 물건이었다.
그걸 녀석이 입안에 넣고 내 살가죽이라도 되는 양 질겅질겅 씹었다.

‘가라, 제발. 이렇게 빈다.’
저놈의 미친 곰이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 진법 안까지 들어온 게 올해로 세 번째다.
세력권을 확장하려는 의도도 있고, 나를 기어코 조져버리겠다는 의도도 있다.
아무래도 나란 존재로 인해 음기가 오랜 시간동안 한 곳에 집중되어버려 서식지 환경이 망가진 탓이다. 생존경쟁이 치열해지다보니 번식도 녹록치 않아 저 암컷 곰은 재작년에 이어 작년에도 낳은 새끼 전부를 잃었다.
그 부분은 나도 미안하게 여기고 있기는 한데... 어린 새끼가 음기에 중독되어 시름시름 앓다 죽은 걸 나더러 어쩌라고. 날 죽여 봤자 새끼가 살아나는 것도 아니잖니. 제발 적당히 하자.

효성진 도장이 편지를 묶어 날려 보낸 새가 독이 묻은 걸로 추정되는 화살에 상처를 입고 떨어져 목이 부러진 게 벌써 5년 전.

구축된 진법의 효과는 여전히 효력을 유지하여 가끔씩 천지가 요동치며 흔들리곤 했다.
사람 - 죽었든 살았든 사람이면 결계는 무조건 반응했다. 사람이 접근하면 벼락이라도 내리꽂히는 것 같았다. 진짜로 천둥번개가 쳤다는 건 아니고, 그만큼 공기가 격하게 요동쳤다. 온몸의 털이 쭈뼛 곤두서는 건 덤이고.
일종의 마이크로파가 발생하여 재 정렬된 분자를 진동시키는 원리인 듯하다. 정확하진 않다. 나는 문과다.

결계를 건드린 게 방향감각을 상실한 주시일 때도 있었다. 이놈의 세계는 사방팔방 좀비 투성이라 원시림 같은 깊은 숲속까지 주시가 활개 쳤다.
때로는 대박을 기원하며 높은 산을 오르는 약초꾼일 때도 있었다.
애초에 아니다 싶으면 좀 돌아갈 것이지, 뭐 대단한 걸 찾겠다고 경고를 무시한 채 발을 억지로 들이밀어 1년에 한 두어 번 꼴로 사달을 냈다.
그래도 효성진 도장이 사람을 죽일 의도로 만든 결계는 아니라서 두 다리로 걸어 접근했다가 온몸으로 하얀 김을 풀풀 풍기며 엉금엉금 기어나가곤 했다.
큰 교훈을 얻었으면 다시는 접근 안 하면 좋으련만... 사람은 ‘출입금지’ 글자를 보면 청개구리처럼 반드시 들어가고야 말겠다는 전의를 불태우는 법이라 잊을 만하면 돌아와 진법을 건드렸다.

쿠웅-
큰 고목이 뿌리째 뽑혔다가 거꾸로 처박힌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땅에서 두 다리가 둥실 떠올랐다.
이번에도 약초꾼인가?
내 전용 깔개를 씹어대던 곰이 기색을 달리하고 결계가 흔들린 방향을 향해 몸을 돌렸다.
사람이 아니라 주시? 무릎을 꿇고 넘어질 뻔한 자세를 바로잡은 나도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해가 떠오르려면 아직 반 시진 정도 남은 시각인데 공기의 흐름이 범상치 않았다.
쿠웅-
연속으로 결계가 흔들렸다. 나는 일단 안전한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런 나를 쓱 한 번 쳐다본 곰이 ‘재웅신(災熊神)’이라는 칭호에 어울리는 늠름한 자태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녀석의 눈빛은 잔인했고, 살벌했다. 그도 그럴 것이 놈은 식인 습성을 가진 곰이었다. 언젠가 내 발목을 뜯어먹고 난 뒤부터 사람 고기 맛에 눈을 떴다.

“이거 오늘 무슨 날인가.”
결계를 건드린 건 주시도, 약초꾼이 아니었다. 약초꾼이 등에 화살 통을 메고 있을 리가 없다.
나무줄기를 껴안은 자세로 눈을 가늘게 접어 더 자세히 보고자 했다.
숲속이 왁자지껄 시끄러웠다. 한 무리의 인영이 저마다 횃불을 들고 한 사람을 에워싸고 있었다.
가운데 드러누운 사내는 뜨거운 욕조에 들어갔다 막 밖으로 나온 사람처럼 김을 모락모락 피우고 있었다. 모양새로 보아 진법을 건드린 당사자인 것 같았다. 마이크로파에 얼마나 혼쭐이 났음 땅에 등을 대고 누워 죽는 소리를 내는 중이었고, 보다 못한 일행이 부축하여 일으켜 세우려 하자 당장은 못 일어난다며 아우성을 쳤다.
그거 많이 아프지. 내가 여러 번 당해봐서 잘 알지.

“엄살은 그만 피워! 썩 일어나!”
“아이고오오, 도련님. 이거 계편으로 얻어맞은 것만큼 아프다고요. 아이고오...”
“계편으로 맞아본 적도 없잖아! 그리고 종알종알 떠들 힘이 있음 안 아픈 거야!”

씩씩거리며 큰소리를 내는 쪽은 나이가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이제 고작 열두 살이나 되었을까,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하대하여 부리는 태도가 잘 잡혀 있는 모양새로 보아 제법 잘 사는 집 자제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옷도 반짝반짝하고 외모도 예쁘장했다.
단, 버르장머리가 없어 주둥이는 안 예뻤다.

“하여간 쓸모없는 것들! 노닥거릴 틈이 있음 진법을 풀 궁리부터 하라고! 너! 그리고 너! 어렵게 여기까지 와서 이대로 주저앉을 생각이야? 어떻게 되는지 확인해보고 싶으니 여기에 영력을 주입해봐.”
“저요?”
“너 맞아. 왜 딴 곳을 쳐다보고 있어.”
“하지만 도련님. 제 영력은 볼품이 없어서...”
“수행자가 영력 작다는 게 자랑이냐?! 혼쭐을 내기 전에 하라는 대로 해! 아님 외숙부에게 전부 이를 거야!”
“알았어요, 도련님. 할게요. 한다고요! 그러니 이르지만 말아주세요!”

하이고... 콩나물 대가리가 싹수 누렇네.
코를 파고 나온 내용물을 둥글게 뭉쳐 가볍게 튕기면서 쯧, 혀를 찼다.
아무래도 오냐오냐 귀하게 자란 좋은 집안의 도련님이 롯데월드 놀러가는 기분으로 집안 하인들과 수사 몇을 동원하여 진법을 깨러 온 눈치였다. 결계 안에 희귀한 보물이 있을 지도 모른다 기대를 한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저 흥미본위였을 수도 있다.

의욕 넘치는 도련님과 달리 대다수는 억지로 끌려왔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일부는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내색이었다. 굽실거려도 그때 뿐, 표정들이 다들 좋지 않았다.
특정 바위에 영력을 주입하라고 명령을 받은 수사도 그래서 하는 짓이 대충이었다.
“그거밖에 못 하겠어?!”
“말씀드린 대로 제 영력이 그다지 볼품이 없어...”
전력을 다하지도 않고 수사는 몸을 뒤로 뺐다.

그래. 몸을 사리는 것이 현명하다. 진법 깨기가 지금 문제가 아니다.
식인 취미가 있는 곰이 입맛을 다시는 중이다. 영리한 녀석은 뒤로 돌아 은밀히 무리에게 접근을 시도했다.
때로 어떤 이들은 곰의 펑퍼짐하고 푸짐한 외형을 보고 바보스럽다느니, 멍청하다느니, 느리다느니 평가를 내리는데 곰의 한 끼 식사로 전락해보면 전부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최강의 사냥꾼은 매우 능숙하게 앞발을 뻗어 맨 뒷줄에 자리한 하인을 손쉽게 잡아챘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히이이익~!!!”
희생자는 끌려가면서 비명 비슷한 소리를 냈지만 이내 뼈 부러지는 불쾌한 소리로 바뀌었다.
저 망할 암컷 곰에게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두터운 앞발로 사람 목을 툭 치면 척수에서 머리가 분리되어 버린다. 그 뒤에 두 손으로 잘 잡고 꿀통에서 꿀을 핥아먹듯 깨진 대가리에 혀를 넣어 뇌수를 쪽쪽 빨아먹었다.

“산 요괴다!”
응. 아냐. 저건 곰이야.
“방어 태세를 갖춰!”
이미 늦었어.
“끄아아악!!”
어쩌냐. 한 사람 더 끌려갔네.
“모여 있지 말고 흩어져!”
허튼 소리.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어요.

오합지졸이라 단합이 쉽지 않았다. 저마다 비명을 지르더니 부리나케 도망가기 시작했다. 더러는 자기들끼리 몸을 부딪치고 자빠졌다.
우두머리 격 소년이 모두를 향해 도망치지 말라 외쳤으나 씨알도 안 먹히는 명령이었다.
“제기랄, 당장 돌아와! 저건 요괴도 아니고, 기껏해야 산짐승이라고!”
기껏해야 산짐승이라고? 너, 그 발언 취소하는 것이 좋을 거다. 저건 몇 년에 걸쳐 음기를 잔뜩 취하고, 심지어 내 발목도 삼킨 놈이라 예사롭지가 않거든.
“날 보조해!”
수사들이 저만 살 궁리를 하고 있는데 소년은 눈치도 없이 전통에서 꺼낸 화살을 활에 끼웠다.
“명중이다!”
끝까지 봐야지. 가죽이 두꺼워 스친 상처만 냈어.

곰이 두 다리로 벌떡 일어섰다. 압도적인 크기의 몸집이었다.

Posted by 미야

2021/11/09 13:13 2021/11/09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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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조사] 풀피리 18

제3장 노잣돈 없음 저승에 가질 못한다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이후 설양이 뭐라고 떠들어댔는지 효성진은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다.
뭐, 대충 짐작은 갔다. 속이 뒤틀린 놈은 고매한 분위기의 효성진이 아니꼬웠을 테니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음담패설을 잔뜩 늘어놓았을 거다. 삐---에 삐---를 해서, 삐---를 한 다음, 삐---를 보여주마, 대략 그런 내용으로 떠들면서 손을 가랑이에 대고 자위하는 시늉을 했겠지. 마무리로는 ‘어차피 너나 나나 엄마가 음탕한 그 짓을 해서 태어난 거잖아. 다 똑같다고. 뭘 아닌 척하고 그래!’ 신나게 조롱했을 거다.
그 정신 나간 짓거리에 한 번 휘말리면 귀가 벌개 지고, 심장이 뛰고, 주먹질이 고파진다.
원효대사도 꼭지가 돌 거다. 설양은 사람 미치게 만드는데 도가 튼 녀석이었다.

“도장님도 대단하네요. 때리고 싶은 걸 어떻게 참았어요?”
내 질문에 효성진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꼬리를 돌렸다.
“송자침이 나서 모든 걸 4대 현문 종주들 앞에서 지금까지의 일을 설명해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더구나. 음호부로 흉시를 만들어 상씨 세가를 공격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를 보기 전까지 신중하게 접근하겠다고... 설양이 소산 지역에 소음기를 설치한 일이나, 고소 남씨의 문하생을 살해한 뒤 시변하게 만들어 약양 상씨가 야렵에 나서게 유인했다는 것도 일방적인 주장 아니냐고...”

문하생을 잃은 고소 남씨는 어떤 사건에든 매번 신중한 입장을 취한 탓에 이번에도 한 발 물러섰다고 했다.
시변한 시신은 이미 수습에 들어갔고, 자체적으로 조사에 들어갔으니 그동안 말을 삼가겠다며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렇게 일정 선을 긋더니 고아하게 고소로 돌아가 버렸다.

운몽 강씨 종주는 설양이 이릉노조가 탈사한 것일 수도 있다는 송자침의 주장에 밥 먹다 젓가락을 쥔 채로 어검하여 날아왔다고 한다. 젊고, 성격 급하고, 입이 험한 강씨 종주는 이릉노조에게 원한이 매우 깊었는지 말 그대로 앞뒤 가리지 않은 채 설양이 갇힌 감옥으로 곧장 쳐들어갔다.
순서를 밟아 감옥 문을 열어야 한다며 말리는 수사를 채찍으로 갈기고 기어코 설양을 꺼냈다.
‘염병할. 뭐야 이 쓰레기는.’
소동 끝에 자리로 돌아온 강 종주는 송자침과 효성진 두 사람을 향해 ‘댁들 눈깔은 옹이구멍이오?’ 쏘아붙였다.
송자침은 당황하여 얼굴을 붉혔는데 그게 강씨 종주의 심기를 더 긁었던 것 같다.
‘젊은 나이에 노안이 왔다니, 안타깝구려. 앞으로 눈에 좋은 견과류를 많이 까 잡수시게들.’ 조롱까지 하더니 흥, 콧소리를 내고 옷자락을 털었다. 재수 옴 붙은 걸 털어낸다는 뜻이었다.

금릉 난씨의 종주는 가문의 객원이 술을 먹고 기물을 파손하는 등 추태를 부렸으니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다며 모두에게 사과했다. 피해보상도 약속하며 앞으로 난릉 금씨의 이름을 팔아 폭력을 휘두르는 수행자를 단속하겠노라 했다. 이미 아들 광요에게 지시했으니 곧 일이 바로잡힐 거라 하였다.
사실상 상씨 세가의 참변에 설양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넌지시 돌려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음호부는 세상에 없소이다. 이릉노조가 죽기 전 자신이 만든 음호부를 파괴하였지요. 그것이 그 배덕자가 행한 유일한 덕행이었소. 망가진 조각을 전부 모아도 이릉노조의 술법 없이는 복구가 되지 않소. 그리고 젊은 강 종주께서 친히 설양은 이릉노조 위무선이 아니라고 확인을 해주셨지요.
명월청풍 효성진 도장은 포산산인의 제자로서 창생을 위해 하산한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아 이릉노조의 술법을 얘기로만 접했지 직접 본 것은 아니오. 그러니 이쯤 합시다.’

유일하게 효성진과 송자침 주장에 손을 들어준 청하 섭씨는 ‘죽여라! 사악한 것들을 모두 죽여라! 목숨으로 대가를 치루게 하라!’ 이러고 기운을 폭발시켰다.
음호부와 음호부로 만들었다는 흉시를 굳이 눈으로 볼 필요도 없다며 죽여라 일갈했다.
앞뒤 맥락도 없이 무조건 죽이자고 덤비니 반대로 효성진이 나서 말려야 할 지경이었다.
‘효성진! 그대의 주장은 무엇이오!’
‘정의 실현입니다.’
‘그렇담 사법을 쓴 범인을 찢어 죽여야지! 뭣들 하는 거냐. 나를 감옥으로 안내하라. 내가 직접 처단하겠다!’
‘지나치게 흥분하셨습니다. 진정하십시오, 섭 종주.’
‘왜 그러오, 효성진. 왜 나를 말리는 거요. 설마, 거짓이오? 지금까지 한 이야기가 거짓이란 말이오? 그게 아니라면 썩 비키시오!’
살기가 지나쳐 탁자가 둘로 쪼개졌다.
이러한 섭 종주의 성마르고 과격한 태도는 일 처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설양은 난릉 금씨의 이름을 팔아 술 먹고 행패를 부린 협잡꾼이 되어 있었고, 음호부 이야기는 쏙 들어갔다. 송자침은 성급하여 엉뚱한 사람을 잘못 고발한 수행자가, 효성진은 능력은 좋으나 경험이 부족한 탓에 일을 그르친 자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결국 설양은 무전취식으로 감옥에 갇힌 거예요? 와아, 망한 거네요.”
나는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애초에 송자침과 효성진이 ‘부정할 수 없는 증거’인 날 이곳에 떼어두고 간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동시에 나쁘지 않은 결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전설급 범죄자 알 카포네도 300명 이상을 살해한 죄로 체포당한 게 아니었다. 그의 죄명은 탈세였다.

“뭐, 긍정적으로 생각하도록 하죠. 죄명이야 어쨌든 감옥에 갇혔으니 그것으로 충분...”
“난릉 금씨가 음식 값과 망가진 집기 값을 모두 보상하면 설양은 곧 풀려날 거다.”
“와아, 진짜... 이건 정말.”
이래서야 젊은 혈기에 대기업 비리를 고발하려다 물 먹고 지방 좌천한 신임 검사 꼬라지잖아.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혹독히 배웠구먼. 정의를 외쳐봤자 옳고 그름으로 딱 떨어지지 않지.

턱을 괸 자세로 질문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예정인데요.”
“설득해야지.”
이 양반이 여전히 정신을 못 차렸네. 나는 짜게 식은 눈으로 효성진을 쳐다봤다.

“그러지 말고 날 데려가 세워요. 그럼 설양도 자신의 행위를 인정할 거고, 깔끔하게 잘 해결될 거예요.”
“네 말대로 하는 건 그건 그리 좋은 수가 아닐 거다.”
“왜요?”
“설양이 계속 모르는 척하고, 금씨 종주가 널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깊은 곳에 감춰버리면 그만이야.”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대안이 없잖아요. 뭘로 사람들을 설득할 건데요.”
“설양이 썼다는 음호부를 찾으면 된다.”
옳거니. 물증 부족이니 살인도구를 찾자는 거군. 나는 고개를 끄떡거렸다.

“감옥에 갇혔을 적에 이미 소지품을 검사했을 거고, 물건이 여태 발견되지 않았다면 설양이 근거지 어딘가에 숨겨뒀을 거라는 얘기군요.”
“네가 설명한 버려진 도둑산채 같은 장소에 대한 지식이 그래서 필요하다.”
“아... 제가 죽었다 깨어난 장소 말씀이군요. 그런데 음호부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아세요? 저도 그게 어떻게 생긴 건지 모르는데요.”
“나도 직접 본 적이 없으니 확실하게는 모른다. 허나 보면 알 수 있을 거다.”

영 못 미더운데.
그래도 나름 최선을 다해 내가 깨어난 장소에 대해 묘사했다. 입구 밖으로 달려 나왔을 적의 해의 모양과 눈에 들어온 구릉의 모습을 최대한 자세히 설명했다. 흡사 동굴 같았던 내부의 모습, 피로 그려진 문양과 밧줄, 주렁주렁 달린 부적들, 무너진 도량 같은 겉모습에 대해 손짓발짓을 섞어 전달했다.
그러다 어째서인지 작은 소반에 올라가 있던 술잔이 뇌리에 떠올랐다. 장소에는 어울리지 않는 술잔이었다.
금박이 화려했고 모란 문양이 있었다.
‘정신 나간 놈. 죽었다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 나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려 했지.’
어쩌면 나에게 건 주술의 완성은 술을 먹임으로 끝나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금박을 입힌 모란 무늬 술잔이라고 하였느냐?”
“무척 화려한 모양새여서 기억이 나요. 비싸 보였으니 분명 어디서 훔쳤을 거예요.”
“......”
“왜요? 갑자기. 사람 궁금하게.”

효성진 도장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할 말이 남았다는 눈치였으나 깊은 숨을 한 번 몰아쉬더니 그대로 침묵했다.
“아, 뭔데요. 중간에 똥 끊고 나온 표정으로 왜 그러는 건데요.”
“별 거 아니니 신경 쓰지 말거라. 것보다 다음엔 옷을 가져오마. 넝마 차림새로 스승님에게 보일 수는 없지.”
“응?”
“송자침과 상의해본 끝에 내린 결정이다. 널 내 스승인 포산산인께 데려갈 거다. 지금 네 처지에 갈 수 있는 곳이라곤 딱히 거기밖에 떠오르지 않더구나. 하지만 근심하지 말거라. 포산산인은 속세의 이치를 뛰어넘은 분이니 네가 사람이 아닌 시체라고 해도 그리 박해하진 않으실 거야. 분명 널 거둬 제자로 삼아주실 거다.”
“뭐라고요?”
포산산인은 신선이라며. 지금 날 신선에게 데려갈 테니 제자 되라고 말한 거야?! 제정신이야?!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가 없던지 손보고 있던 돌칼로 하마터면 효성진을 찌를 뻔했다.
“얌전히 있거라. 도중에 척한(※상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글로 적음)할테니.”
“척한? 도장님, 저는 아직 글을 몰...... 아아악!”

바람처럼 와 구름처럼 떠나니 진정한 신선이로다.

“저런 식이니 설양이 범인이라고 설득 못 시킨 거잖아!!!”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넣어 마구 헝클어뜨리며 욕과 비난을 바가지로 퍼부었다.
그래도 주먹밥 은혜를 생각해 머리카락 빠지라는 저주는 관뒀다.
송자침과 둘이서 잘 해낼 거라 믿어보자.

꽤 여러 날이 지났을 때, 새가 하늘에서 둥글게 같은 자리를 세 번 날고는 종이를 떨어뜨렸다.
세 번 접은 종이를 펴자 한석봉이 쓴 정갈한 서체가 보였다.
‘잘 썼군.’ 칭찬하고 종이를 품에 넣었다.
이 양반들은 이 세계의 평민 아이들이 글을 익힐 짬도 없거니와 배움의 기회도 없다는 걸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나야 전생 시절에 한문을 접하긴 하였지만 영어단어 외우는 걸 주로 한 탓에 획이 많은 어려운 글자는 음독하는 법도 몰랐다. 그런 까닭에 효성진이 보낸 편지는 불쏘시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음호부를 찾았다는 얘기겠지? 앞으로 일이 잘 진행되어야 할 텐데. 두 사람이 고생이 참 많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하고 그동안 어렵게 만든 토굴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흙을 파내고 위로 나뭇가지를 가득 덮어 지은 토굴은 박물관에서 본 선사시대 움집을 따라 만들었다.
비가 오면 무너질 확률이 높았고 땅을 파서 만든 자리는 벌레가 많아 안락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일단 내게는 최선이었다.
이름 모를 벌레를 밖으로 내쫓으며 두 다리를 뻗었다.
좁았지만 익숙했다. 채소 가게 송씨네 창고에서 신세를 졌을 때보다 환경이 더 나쁜 것도 아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 움집이 무너지기 전에 효성진 도장님과 여기를 떠날 테니.’
그게 얼마나 방만한 생각이었는지는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뭐라고 적혀진 건지 모를 편지가 두 번 더 날아들었고, 나는 근심에 빠졌다.
매우 안 좋은 일이 생겼다는 건 마지막 편지의 모양새로 알 수 있었다.
새를 배달하던 새가 고꾸라져 죽어버렸고, 몸통에 화살이 스친 흔적이 있었다.

이후 소식이 뚝 끊겼고, 몇 번의 봄과 겨울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제3장 노잣돈 없음 저승에 가질 못한다, 끝.

Posted by 미야

2021/11/08 14:27 2021/11/08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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