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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11/30 [마도조사] 풀피리 35 by 미야

[마도조사] 풀피리 35

제6장 구름 위의 무간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운심부지처에서의 일정은 쳇바퀴처럼 돌아갔다.
정해진 시간에 기상하여 정해진 장소로 이동, 군대식 식사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업무에 들어갔다. 내가 맡은 일은 청소로 도서관인 장서각과 기숙사인 도심실을 돌며 일을 했다.
접객용으로 쓰는 아실이나 초혼을 하는 장소인 명실과 같은 곳에는 원천적으로 하인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이동 경로가 짧은 편이었다.
오후부터는 짬을 내어 글공부를 했다. 베껴 쓰기가 끝나면 다시 청소를 해야 했고, 일주일에 한 번 꼴로 택무군에게 불려가 개인적으로 숙제검사를 받았다.
해가 지면 휴식시간이 주어지고, 저녁식사를 끝마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취침 시간이었다.

원래 하인들은 네 명이서 한 방을 사용했다.
나는 별도로 준비된 작은 방에서 혼자 잤는데 몸에 흉터가 많다며 다른 이들이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피부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고작 흉터일 뿐인데 엄청 질색했다.
‘저렇게 맞은 자국이 많은 걸 보면 분명 큰 잘못을 저질렀을 거야. 도둑질을 하다 걸렸겠지.’
의심이 많은 자들은 내가 비싼 물건을 훔치지 않는지 뒤에서 감시했다. 참 피곤하게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든 말든 글자 외우는 일이 벅차 그 사람들이 날 뭐라고 모함하든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그렇게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어서 신라면의 매울 신(辛)과 행복할 행(幸) 구분도 어려워했다.
뒤돌아서면 잊어버리기까지 하니 짧은 시간 내 생활한자 3천개를 달달 외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노력하고 있잖니. 응용력은 없지만 암기력은 그만하면 뛰어난 편이다.”
숙제검사를 하던 택무군이 아정집 필사는 이제 그만해도 되겠다며 빙긋 웃었다.
쓰는 건 여전히 어려워해도 읽는 건 그럭저럭 잘 맞추는 편이라면서 칭찬 아닌 칭찬도 해줬다.
그러면서 다시 내민 건 남씨 자제들에게 내려오는 선조들의 귀한 가르침을 적은 예측편이었다.

정말로 내켜하지 않아하며 구름무늬로 덮인 표지를 넘겼다.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정과 의를 바로 세워라.’
‘검을 들어 악을 벌해도 마음이 거울 같지 않다면 세상 이치를 모두 놓친 것이다.’
‘도의를 밝히는 것이 군자이고, 이득을 계산하는 것은 소인이다.’
좋은 말씀이다. 좋은 말씀이기는 한데... 표정이 절로 소태 씹은 모양이 되었다. 내가 원하는 건 ‘만화보다 재밌는 초등학생 문장 독해’ 이런 거라고 꼭 말하고 싶다.

“다른 제자들도 걸람처럼 공부에 열심을 다한다면 오죽 좋으련만.“
이걸 베낀다는 말은 아직 입에 담지도 않았습니다, 택무군.
“다들 글은 멀리하고 흐트러진 마음으로 작은 악을 지인에게 권하고들 있으니 정말 큰일이야.”
언제부터 연애편지가 작은 악이 된 건가요.
일련의 돌아가는 걸 꿰고 있던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그러니까 구자씨 집에서 공부하러 온 한 여학생이 연애소설을 가져와 안서각에 숨겨두고 읽다 들켰다는 건 이미 알려진 이야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계인 선생님이 뒷목을 잡을 일이 후속으로 터졌는데 어디서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선자들 사이에서 연서를 쓰자고 서로를 부추겼다는 거다.
남녀가 유별하니 줄리엣이 로미오에게 편지를 써도 배달이 될 일이 없건만.
가랑잎 굴러가는 모습에 까르르 웃는 소녀들은 가상의 로미오에게 열렬하게 마음을 고백하는 글을 적어 누가 더 애절하게 표현했는지를 겨루었다.
그렇게 있지도 않은 로미오와의 포옹을 상상하며 푹 빠져버리는 것만으로도 골치가 아파 죽겠건만 그들 중 한 명이 함광군을 상대로 절절하게 연서를 썼다.
선자들 중 함광군을 사모하는 이들이 많았기에 그걸 또 꺅꺅 소리를 질러가며 만장하신 가운데 소리 내어 읽어댄다. 좋은 시절이다.

“어쩌겠어요. 한창 그쪽으로 관심이 많을 때죠. 하지 말라고 하면 몰래 숨어서 더 할 걸요?”
“이미 다 해본 사람처럼 말하는군.”
“다 해봤죠. 고백하고 차여본 게 몇 번인데요. 진지한 관계까지 가본 건 딱 한 번이지만 결혼 고민은 해보지 않았으니 잘 헤어진 것도 같고...”
“자네, 올해 몇 살인가?”
“......!”
가끔 이런 식으로 실수를 해서 난처해 죽겠다.
택무군은 표정에 그다지 큰 변화가 없는 상태로 내가 대답하기를 기다려 주었다. 어딘지 무관심해 보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말로 꾸며내는 건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럴 적마다 나는 입을 그냥 다물어버리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솔직히 털어놓는다는 두 가지 선택지를 두고 갈등했다.

에라, 모르겠다.
“서른넷에 다시 스물하나를 더하는 건 많이 이상하죠?”
“일단 자네는 쉰다섯의 나이로는 보이지 않아.”
“그래도 열셋은 진짜 아니거든요?”
“좋게 생각하자. 예측편을 배움에 있어 부족함이 없는 나이다. 그럼 오늘부터 옮겨 적기를 시작하고... 다음번에 올 적에 여기까지 외워오게.”
“택무군. 분량이 너무 많습니다.”
“배움은 벼를 길러 쌀을 얻는 것과 같지. 많이 수확하면 수확할수록 좋은 것이야.”
“많이 수확을 해봤자 어차피 가규로 내세워 밥 세 그릇 이상은 못 먹게 하면서!”
내 항의를 들은 택무군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래도 분량이 줄어드는 일은 없었다.
그래, 내가 이거 다 떼고 조만간 산을 내려가고야 만다.

고소의 등불은 일찍 꺼진다.
취침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모두가 일사불란에게 잠자리에 든다.
하인들은 문하생과 달리 취침시간에 크게 구애받진 않았으나 불을 켜는 초가 귀한 탓에 어차피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게다가 기상 시간이 꼭두새벽이니 늦게 잠들면 잠들수록 다음날이 고되었기에 해시가 되면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초를 끄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이불 속으로 베개를 꾸셔 넣어 사람이 누운 모양을 만든 뒤, 장서각에서 훔쳐낸 초를 쥐고 으슥한 뒷길로 들어갔다. 귀가 예민한 사람들이 많아 행동을 조심스럽게 해야 했다. 들키면 배가 아파 뒷간에 가는 거라고 거짓말을 할 생각이었는데 긴장을 해서 그런지 진짜로 배가 살살 쓰라렸다. 아랫배에 힘을 줘도 똥이 안 나오는 몸인데 장이 왜 아픈 건지 모르겠다.
실수로 나뭇잎을 밟았는지 바스락 소리가 났다. 지뢰라도 밟았다는 투로 발을 아주 조심스럽게 떼었다.
이러다 순찰 도는 사람을 만나면 잣 되는 거다. 부대 탈영병이 된 기분을 만끽하며 몸의 자세를 더 낮췄다. 밤눈이 밝았음 좀 좋으련만, 낮에 몇 번을 찾아오고 시뮬레이션을 돌려봤음에도 방향을 짐작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문하생들이 평소에도 걸음을 하지 않는 장소로 ‘냉탕’이라 했다.
얼음처럼 차가운 계곡물에 들어가 정신수양을 하는 곳인데 나 같은 하인은 물을 더럽히면 안 되는 까닭에 입수가 전면 금지되어 있었고, 오직 신분이 높은 분들만 이용을 했다. 그 높은 분들이 옷을 벗고 들어가기에 모두가 접근을 꺼렸다. 혹시라도 명사의 벗은 몸을 눈에 담게 되는 날엔 운심부지처 전체가 뒤집어지기에 자연히 접근금지 지역이 되었다.

미친 것도 아닌데 뼛속까지 아릴 물속에 몸을 담굴 생각은 없다.
대신 사방을 더듬거리며 이동하면서 초를 켜도 들키지 않을 장소를 몰색했다.
바람을 등지고 서서 준비한 부싯돌을 당겼다.
느낌이 워째 축각참배 비슷해서 내가 다 소름끼쳤다. 나무에 대고 못을 박을 짚 인형을 준비해온 것도 아닌데 괜히 으스스했다. 영업시간 끝난 불 꺼진 남탕에 혼자 들어와 분신사바 하는 그런 느낌?
서두르는 게 좋겠다 생각하고 품에 손을 넣어 오래되어 삭아 문드러진 종이를 꺼냈다.

효성진 도장은 나를 결계에 가둔 뒤, 새를 이용하여 모두 세 번 서찰을 보냈다.
처음 보낸 글은 내용이 길었다. 순전히 안부를 묻는 내용이지 않을까 짐작했는데 예상이 크게 빗나가지 않아 나를 자신의 스승인 포산산인에게 데려가겠다던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무서운 분이 아니니 근심하지 말라고 했고, 자신도 고아의 신분으로 포산산인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고 고백하고 있었다.
포산산인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나를 어떻게 데려가겠다는 설명은 없었다.
대신 포산산인 앞으로 나아갈 때 입고 있어야 할 옷차림새에 대해 장황하게 언급했다.
맨발이어선 안 되고, 무릎이나 겨드랑이에 찢어진 곳이 있어선 안 되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화려해서도 안 되고, 분 냄새가 나거나 향수를 뿌려도 안 되었다. 피가 묻어서도 안 된다. 이나 벼룩이 있어서도 안 되었다. 아...... 진짜. 아정집 2탄도 아니고.
더듬더듬 읽어나가던 나는 도중에 멈추고 하늘을 한 번 쳐다보았다.

두 번째 글에선 심각한 이야기가 나왔다. 송자침에게 일이 생겼다고 했다.
“백설관, 공격당하다, 사람이 죽다, 눈을 잃다, 독...”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송자침이 언젠가 말하길,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백설관의 막내가 열셋이라고 했다. 눈이 흐려지는 이유로 어둠을 탓하며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한자를 읽어냈어도 해석이 매끄럽지 않아 내가 착각한 건 아닐까.
“공격받다, 백설관, 모두, 죽다, 독, 눈을 잃다, 설양... 싸우다, 장례, 송자침 소식불명...”

정신을 차리고 보니 흙바닥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이 감정을 뭐라고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울고 싶다? 화가 난다? 슬프다? 어이가 없다?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내가 품고 받아들이기엔 그건 너무나 거대한 감정이었다.
눈을 깜빡이며 종이를 쓰다듬었다. 누가 눈을 잃었다는 거지? 효성진 도장? 아니면 송자침?
백설관 사람이 모두 죽었다. 독을 풀어 공격했다. 매우 비겁한 술수였다. 독에 중독되어 반격도 못해보고 죽기까지 매우 고통 받은 듯하다. 무려 5년도 더 지난 옛날에.
나는 멍하니 넋을 잃고 계곡 물 흐르는 소리를 들었다.
5년 전에 이 글을 읽었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마지막 글은 대단히 짧아 외마디 비명처럼 느껴졌다.
“난릉 금씨와 고소 남씨. 동패(同牌). 신의. 아닐 부. 세가. 서머하다.”

신발을 벗고 계곡으로 들어가 세 장의 종이를 차례대로 물에 담갔다.
가뜩이나 약해진 종이였다. 물을 먹자 얼마 지나지 않아 휴지처럼 물렁거렸다. 그걸 손으로 하나하나 잘게 풀어 흐르는 물에 떠내려 보냈다. 혹시라도 가라앉는 것이 있을까봐 한참을 첨벙거리기도 했다.
차가운 물에 젖은 몸이 떨려왔다. 신음을 목구멍 깊이 삼키고 한참만에야 기슭으로 올라왔다.
물에 들어올 적엔 몰랐는데 바닥 돌이 제법 매끄러워 여러 번 넘어질 뻔했다.
“됐어, 뙜어. 괜찮아.”
그렇게 균형을 잡고 다 올라와선 다시 흙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아니야. 하나도 안 아파.”
미친 사람처럼 혼잣말을 하고 벗어두었던 신발을 찾았다.
생각해보니 진짜 미친 짓이었다. 불빛 하나 없는 계곡에서 물에 들어갔다 나왔다. 걸람이 자랐던 소산은 물이 귀해서 헤엄이라는 걸 쳐본 적이 없었고, 전생에서도 나는 고무튜브 없인 수영을 못했었다. 발을 헛디뎌 깊은 곳에 빠졌더라면 물에 둥둥 떴을 거였다.
물론 죽는 일은 없다. 나는 이미 죽은 몸이다.
차라리 물에 빠져 다시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언뜻 하며 진흙투성이의 발에 신발을 움켜 넣었다.

Posted by 미야

2021/11/30 17:02 2021/11/30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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