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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조사] 풀피리 29

제5장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되, 사람은 사람이 아니로다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동물을 싫어하진 않는다. 직접 키워본 적은 없어도 개는 귀엽고, 고양이는 예뻤다.
그런데 이렇게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남의 종아리를 잘근잘근 씹고 있는 개는 하나도 안 귀엽고 하나도 안 예뻤다.
“......!!!”
나는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고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았다. 그런데 그것도 어느 정도 것이어야지.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괴성을 목구멍 안으로 삼키며 고꾸라졌다.
아직 어린 강아지라고 해도 이빨은 날카로웠다.
문제는 얘가 사람을 물고도 그저 재밌는 장난으로 여기고 있다는 거였다. 검은 갈기를 가진 강아지는 흡사 간식을 조르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살기는 요만큼도 없었다. 그런데 왜 잘근잘근 물어뜯는 거냐곳! 내 종아리는 간식용 닭가슴살이 아니얏!

다리를 질질 끌고 몇 걸음 걸었다. 강아지도 질질 끌려왔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바닥에 누웠다. 강아지도 따라 누웠다.
아니 진짜 얘가 왜 이러는 건지 알려줄 사람?
나는 입안으로 주먹을 쑤셔 넣었다. 저 수상한 저택에서 집 지키는 용도랍시고 이 어린 강아지를 풀어 키우며 ‘맹견 조심’ 안내 문구를 붙였을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비명을 지르면 필연적으로 사람이 밖으로 나오게 되어있었다. 그럼 우르르 몰려나온 사람들에게 뭐라고 할 건가. 한 푼만 줍쇼?

갑자기 개의 무는 힘이 달라졌다. 열심, 열심, 열심, 이러면서 나를 어디론가 끌고 가려 했다.
덩치는 조랭이떡 같은 게 고집은 또 대단해서 싫다고 했더니 더 꽉 물었다.
“살살, 제발 살살! 따라갈 테니 제발!”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리 멀리 가진 않았다는 점이다. 높은 담장을 따라 모서리를 돌고 나자 씹고 있던 나를 퉤! 뱉고, 제 주인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향해 꼬리를 흔들며 앙앙 짖었다.

“꼬마 선자야, 조용히 해. 쟤는 똑똑한 것 같으면서도 가끔씩 이상하게 굴더라.”
높은 담벼락을 절반쯤 기어 올라간 소년이 짖지 말라며 손가락을 하나 세워 입에 가져갔다.
“쉬, 쉬! 것보다 뭘 끌고 온 거야. 그건 요괴가 아니잖아. 식살귀를 찾으라니까 거지를 물고 왔네.”
날 보고 거지라고 하는 건 괜찮지만 일단 담벼락에서 내려온 뒤에 뭐라고 했음 좋겠다.
이제 나는 근심에 젖었다. 개가 짖고 있고, 개 주인으로 보이는 이는 도둑처럼 담을 넘는 중이다. 발을 딛은 부분의 회석이 떨어져 증거도 충분했다. 소란을 알아차리고 집안에서 사람이 나온다면 뭐라고 해야 할까. 개와 놀다 실수로 공이 안으로 넘어갔는데 죄송하지만 주워다 주시겠어요?

“무슨 소리야. 도둑질이라니. 여긴 사람 사는 집도 아닌데. 말투가 괘씸하군.”
소년이 발끈하더니 올라타던 담벼락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러더니 적반하장 격으로 화를 냈다.
아니, 지금 화를 낼 사람이 누구인데. 댁의 개가 날 물었다고.
손으로 종아리를 쓸어보니 작게 구멍이 뚫렸다. 살짝 검붉은 피도 베어 나왔다. 나는 손을 들어 소년에게 피를 보여주었다. 피라고 하기엔 색이 지나치게 검어 흡사 연필 검댕처럼 보이긴 했지만... 어쨌든 구멍 났다.
“네 강아지가 날 물었어.”
“아직 훈련이 덜 되어서 그래.”
소년은 별 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그 태도가 몹시 못마땅했다.
“훈련이 덜 된 개를 데리고 도둑질을 하려 하다니. 미친 거 아냐?”
“너 바보냐? 여긴 집이 아니라 기산 온씨가 오래전에 세운 감찰소잖아. 저기 걸린 간판 안 보여? 폐쇄되어 문 걸어잠군 감찰소에 뭐 훔쳐갈 물건이 있다고 도둑질을 하겠... 어라.”
달빛에 비친 내 얼굴을 알아보고 개 주인이 펄쩍 뛰었다.
“이게 누구야. ‘구린내’잖아? 약양에 간다던 놈이 왜 여기에 있어?”
부잣집 귀한 도련님 금릉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삿대질했다.

시간과 장소가 매우 적절치 않았다. 강아지가 둘이서만 놀지 말라며 앙앙 짖었다. 금방이라도 뒷문을 열고 사람이 나올 것만 같아 가슴이 쫄깃거렸다. 얼굴을 쓸어내린 나는 일단 장소를 옮기자고 했다.
천만다행으로 금릉도 새벽부터 짖는 강아지가 부담스러웠는지 그러자 하고 내 뒤를 따라왔다.

“어떻게 된 거야?”
적당히 떨어진 골목길에서 우리 둘이 동시에 말했다.
좋다. 레이디 퍼스트. 나는 질끈 눈을 감고 금릉을 향해 먼저 말해보라고 했다.

“소문에 이 부근으로 식살귀가 나온다고 해서 잡으러 왔어.”
열 세 살짜리가 공덕을 쌓겠다고 아주 몸이 달았다.
선부의 가정에선 어디까지를 상식으로 여기는 건지 모르겠으나 주변에 정신이 제대로 박힌 어른이 있다면 말려야 하는 거 아닐까. 지금은 10대 아이들이 밖을 돌아다니기엔 매우 늦은 시간이었다.
애초에 10대 아이가 귀신을 잡겠다고 날뛰는 것부터가 나에겐 이해 불가능이긴 하다.

“식살귀? 그럼 산으로 올라갔어야지. 다른 수행자들은 무리를 지어 다 산으로 올라가던데?”
팔짱을 낀 자세로 내가 그 부분을 지적하자 금릉이 심통이 난 표정을 지으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얼굴만 봐도 대충 견적이 그려졌다. 의욕 하나는 드높았으나 막상 현장에 도착해보니 식살귀를 잡는 도사들끼리 경쟁이 치열해서 일찌감치 흥이 깨진 거다, 이 녀석은.
“흥! 실력도 없는 어중이떠중이들만 잔뜩 몰려 있더라고.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다는 말도 있잖아? 이 귀하신 몸이 그런 놈들과 같이 뛰어야 할 이유를 못 느끼겠더라고.”
말은 저렇게 했지만 정작 산에서 내려온 이유는 어른들이 아직 어려 보이는 이 소년을 사냥에 끼워주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날 더러 방해하지 말고 저리로 가라 고함치던 머리 허연 수사를 떠올리자 의심은 곧 확신으로 바뀌었다. 고지식한 수사는 그저 자기 나이가 많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금릉을 깐봤을 거다. 때로 어떤 자들은 재산이나 실력 이전에 나이를 권력으로 따지는 법이다.

“아항, 어른들에게 밀려났구나.”
“아니거든?! 산에 있어봤자 얻을 소득이 없을 거라는 걸 알아서 내려온 거야!”
주인이 목소리를 높이자 검은 갈기의 강아지가 덩달아 장단을 맞춰가며 옆에서 깡깡 울었다.
주인더러 힘을 내라는 건지, 아니면 약을 올리려는 건지, 개의 표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내 시선이 개에 꽂힌 걸 알아차린 금릉이 코를 으쓱였다. 비싼 개인가 보다.
“결정적으로 개가 산속에서 짖지 않았어. 이 개는 작은아버지가 주셨는데 아직 새끼지만 매우 영험한 영견이야. 아무나 키울 수 없는 매우 귀한 개지. 얘는 귀신을 보고 요괴를 물어. 꼬마 선자가 짖지 않았으니 산 위에는 아무 것도 없는 거야. 그래서 다른 선사들은 허탕 치라 하고 나 혼자서 내려왔어.”
“영견? 날 향해선 짖던데? 물기도 했고.”
“아직 새끼라서 그래. 어리니까 실수도 하고 그러는 거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금릉이 무릇 사내라면 사소한 건 가볍게 넘겨야 하는 법이라며 타박했다.
결국 이놈은 개가 날 물었다는 점에 대해 사과할 마음이 일도 없는 거구먼. 캬아...

“그러는 너는. 내 하인이 되기 싫다며 약양으로 간다고 했잖아. 어떻게 된 거야?”
네 하인이 되기 싫다는 말을 한 기억은 없다만.
애가 엄한 현실 왜곡을 하며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도 잘 씻지 않아 구린내가 난다며 코를 쥐었다.
살짝 억울했다. 씻는 걸 열심히 하지 않은 건 맞는데 얼마 전 묘지를 파는 바람에 더러운 걸 묻혀 와서 악취가 좀 나는 것뿐이다. 그 전까지는 사흘에 한 번 꼴로 개울가에서 세수도 하고 찬물로 사타구니와 겨드랑이도 잘 닦았다.

“사람 일이라는 게 항상 잘 풀리는 법은 아니지.”
“그럼 지금까지 구걸을 하고 다녔어?”
“구걸은 무슨... 세상 구경을 하고 다니는 거지. 그러다 친절한 분들에게 밥도 얻어먹고.”
“그게 구걸이지! 그런데 구린내 너도 참 요령이 없다. 밥을 얻어먹으려면 부뚜막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집을 골랐어야지. 보다보다 문 닫은 감찰소 앞을 기웃거리며 밥 얻어먹을 궁리를 하는 놈은 처음 봐.”
감찰소가 뭐 하는 장소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사람 없는 폐가라는 금릉의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두 눈으로 똑바로 보았거든. 뒷문이 열리고 시체를 몰래 운반하던 사람이 들어갔다 사례비를 받고 도로 나왔다.

“뒷문이 열렸었다고? 구린내 네가 잘못 봤겠지.”
감찰소는 일종의 파출소 역할을 하던 장소였던 것 같다.
예전에는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을 잡아와서 벌을 주던 곳이라고 했다.
그러다 수사들이 점차 타락해 나쁜 짓을 하지 않은 사람들도 잡아와 제멋대로 처벌했기에 지금은 감찰소에 머물던 기산 온씨들을 모두 ‘죽.이.고.’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도록 술법을 써서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고 한다.
‘하여간 이 세계는 뭐든지 극단적이야. 감찰소에서 일하던 사람을 파면하는 게 아니라 전부 죽였다고?’
내가 아는 상식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경지다.
거기다 몰살한 수사들을 제대로 장례를 치룬 것도 아니고 감찰소 내 너른 부지에 합장하여 개개인의 구별 없이 묻었다는 거다. 그게 벌써 십년도 더 지난 옛날 이야기란다.

“그래서 안에 뭐가 있을지 살펴본답시고 문 닫힌 건물의 담을 올라갔어?”
“소문만 무성한 산속보단 이쪽이 훨씬 더 그럴듯하잖아. 악령이 나와도 하나도 안 이상하지.”
언젠가 금릉의 부모님들을 한 번 만나 면담을 해봐야 할 것 같다. 아무래도 아이를 잘못 키웠다.
공덕을 쌓겠다는 욕심도 이해를 하고, 본인 실력에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진 것도 다 이해하겠다.
10대니까.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게 담을 넘는 건 진짜 아니거든.
아무리 오냐오냐 자란 도련님이라서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르고 보는 스타일이라고 해도 무단침입은 좀 그렇잖아. 얘는 진짜 어른이 확실히 잡아주지 않음 커서도 사고뭉치가 되고도 남겠어.
무엇보다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담을 넘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했을 수도 있다는 걸 얘는 모르나?

“지금 내가 잘못했다는 거야?!”
“당연히 잘못했지. 금릉, 넌 조심성을 키울 필요가 있어.”
“뭐?! 조심성을 키워?!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어?!”
“그래, 너 잘났다. 그래도 조심성 없다는 말은 사실이야. 일단 내 말을 하나도 안 믿는 눈치니까 저 건물 안에 진짜로 사람이 있다는 걸 보여주지. 단, 가까이 있지 말고 멀리서 숨어서 보고 있어. 개가 소리 내지 않도록 잘 지키고. 그럼 잘 봐.”

그렇게 말하고 조심해가며 뒷문으로 다시 접근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무 장대로 문을 통통 건드렸다.
그리고 ‘나리, 잠시만 나와 보세요. 제가 의장지기 아래서 막일을 하는 심부름꾼인데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요.’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이틀밖에 되지 않아 신선해요.’ 남이 들어도 뜻 모를 말도 덧붙였다.
그래도 인기척이 없자 장대로 다시 문을 통통 건드렸다.

“뭐야 너는. 무슨 헛수작인데.”
포기할까 싶을 즈음에 뒷문의 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한 뼘 정도 열렸다. 빙고.

Posted by 미야

2021/11/22 12:33 2021/11/22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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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조사] 풀피리 28

제5장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되, 사람은 사람이 아니로다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같은 자리를 더 맞으면 바보가 될 지경이었다. 나는 울상을 지으며 빌었다.
“성장기 청소년은 잠자리에 들 시간이에요. 왜 밖에 나와 계시는 거예요, 공자님들. 밤에 잠을 충분히 자지 않으면 키가 크지 않습니다.”
“이 낯짝 두꺼운 거 보라지. 그러는 너는 다 큰 어른이라서 멋대로 돌아다니고 있고?”
야무지게 찰싹 소리가 또 한 번 났다.
남경의의 손바닥 맛은 상당히 매워서 맞은 자리가 후끈후끈했다.

의외였다면 착한 경찰, 나쁜 경찰 역할 중 착한 경찰 쪽을 맡은 남사추가 불쌍하니 때리지 말라며 말릴 생각을 전혀 안 했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는 속눈썹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얻어맞고 있는 나를 빤히 관찰했다. 그러고 보니 시장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에도 이릉노조의 초상화와 부적을 사고 있던 나를 저런 식으로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더랬다.
괜히 찔렸다. 그래요! 자백할게요! 저 사람인 척하는 흉시예요!

“누구와 닮았다는 느낌인데 잘 모르겠어. 저번에도 그러더니 생각이 날 듯 말 듯 안 나네.”
입속으로 혼잣말을 굴린 남사추는 계속해서 인상을 쓰며 나와 눈을 맞췄다.
하지만 비루먹던 고아인 나와 구름 위에서 사는 현문 세가의 자제 사이에 무슨 접합점이 있을 리가 없었다. 기억도 흐릿한 걸람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어쩌다 높으신 분들 집에서 하인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고 쳐도 저들 남가 소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걸람의 부모가 죽었으니 시간상으로도 맞지 않았다.
남사추가 내 얼굴을 보고 도대체 누굴 떠올린 건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거울이 귀한 관계로 나도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르니 막연한 건 나도 마찬가지다.

“좋습니다. 그건 그렇고 도령, 이 늦은 시간에 무슨 까닭으로 무덤가를 어슬렁거린 겁니까.”
어조는 부드러웠지만 따져 묻는 남사추의 표정은 상냥한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별 거 아닙니다. 낮에 떨어뜨린 물건을 찾고 있었어요.”
“해가 없어 어두운데 어떻게 찾으려고요.”
“손으로 더듬어서요.”
“그렇게까지 해서 급히 찾아야 했던 물건이 무엇이었지요?”
“돈주머니요.”
거짓말은 디테일에서 나오는 법이다. 나는 급히 허리춤을 뒤져 예전에 노잣돈으로 쓰라며 받은 보라색 돈주머니를 꺼내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동전 하나 안 들어가 있었지만 지금 수중에 있는 물건 중 핑계로 써먹을 값나갈 종류라곤 그거 하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이 돈주머니를 본 몇은 자기에게 팔 생각이 있느냐 물어본 적도 있다.

“양심도 없는 놈! 입만 열면 그냥 술술 거짓말이 나오는구나. 누가 속을 줄 알아?!”
제법 그럴 듯한 변명이라 여겼건만 남경의가 욕을 하며 또 내 머리를 때렸다.
“어검을 하여 진작부터 따라와 전부 보고 있었다! 그냥 머리통에 ‘수상한 짓을 할 겁니다, 앞으로 사고를 또 치겠습니다.’ 써 붙이고 있는데 두고만 있을 거라 생각했나! 이래서 애들이 제일 싫다니까!”
저 어린애 아닙니다만. 댁들보다 나이를 더 먹었습니다만.
어쨌든 머리 꼭대기에서 전부 보고 있었다는데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치지 않고 남사추가 한숨을 푹 내쉬며 굳은 표정으로 훈계했다.
“도령. 사술을 익히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근골 없는 몸으로 태어나 영력을 가질 수 없다고 사마외도로 관심을 돌려봤자 결과가 좋게 끝나지 않아요. 효과가 빠르고 자질의 제한이 없어 유혹적으로 보이는 건 압니다. 하지만 이릉노조의 최후가 어떠했는지를 떠올려 보세요. 수련자 정신과 신체의 근본이 망가집니다.”
그 양반 최후가 어땠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완전 오해를 샀다. 이릉노조에게 관심을 보이고, 가짜 부적에 환장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사술에 집착하여 도사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난 걸로 완전 찍힌 모양이다.
그럼 한밤중에 내가 이리로 몰래 와 무덤을 뒤진 것도... 아이구야.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묘지에서 사술에 쓸 원기를 박박 긁어모으는 중이라고 착각하고 저리 화를 내는 거였다.

억울하다는 생각 이전에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수진계 사람들은 진짜지 내 인생에서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닙니다만.” 절로 말투가 딱딱해졌다.
“현장에서 걸렸는데 뭐가 아니라는 거야. 너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을 우리가 한 두 번 봤는 줄 알아?”
“목소리 높이지 마. 내가 분명히 아니라고 했다.”
“어쭈?! 애기 도사가 이젠 대놓고 반말을 하네?”
남경의가 또다시 주먹을 들어 때리려는 자세를 취했다.
그런다고 쫄 거 같아?! 나는 까치발을 들고 언성을 높였다.
“애기 도사라고 하지 마! 분명히 말해두는데 나는 마법이나 도술 이런 거에 관심이 없어! 선입관을 가지고 멋대로 판단하지 마! 내 소원은 전국제패가 아니라 극락왕생이고, 무엇보다 나는 이릉노조의 추종자가 아니라 피해자다! 그러니 주제도 모르고 떠들지 말고 내 앞에서 썩 꺼져!”

남사추와 남경의가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저거 간이 배 밖으로 나왔어?”
그러더니 발끈하고 진짜로 해보자며 남경의가 소매를 걷어 올렸다.
멋대로 하라지. 무덤가에서 패싸움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체면 때문에 개싸움을 못하는 건 그들이지 내가 아니다. 나는 경멸의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며 흙먼지를 털고 돌아섰다.

해가 밝아오자 동네는 어수선했다.
식살귀를 잡겠다며 밤새 산속에서 날뛰던 선사들은 피곤에 지친 모습으로 내려와 뜨끈한 국물에 만 국수를 먹으며 배를 채우는 중이었고, 나와 다퉜던 남가 소년들은 그새 동네를 떴는지 아예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저 사람들 헛다리 짚은 거라니까. 있지도 않은 식살귀를 잡겠다니. 쯧쯧.”
부지런히 찐빵을 찌며 음식을 만들고 있는 가게 옆에서 어제까지도 이릉노조의 초상화와 부적을 팔던 가짜 도사가 당분간 업종을 바꾼답시고 나무를 깎아 만든 구슬장식을 가지고 좌판을 펼치고 있었다.
옷도 바꿔 입었다. 오늘은 콘셉트는 고도로 숙련된 조각 장인이어서 스님 비슷한 느낌을 내고 있었다.
그래봤자 초상화에 코를 안 그려 넣는 실력이 어디로 갈 리가 없어 팔 물건이라고 가져온 나무 구슬은 어린애도 안 쳐다볼 정도로 죄다 조잡하기 그지없었다. 심지어 그건 둥글게 다듬어지지도 않았다.

“도사님 나오셨어요?” 
“입 조심해라. 누가 도사라는 거니. 선사님들이 듣고 오해하실라.”
야단을 치며 나무구슬을 색실로 묶어 진열했다.
장난감인가? 아님 열쇠고리? 용도를 물어보니 쓰고 싶은 사람 마음이란다. 내키면 방문 손잡이에 걸어두라나. 손에 쥐고 굴리면 지압이 되어서 좋다는 말도 했다.
“하나 살 겨?”
“지금은 돈이 없어서요.”
“그럼 남의 장사 방해하지 말고 비켜.”
“예이, 예이. 하나만 알려주심 얼른 비켜드리죠. 혹시 요 근래 야밤에 수레를 쓰는 사람은 없었나요?”
“응? 어느 미친놈이 수레를 밤에 써.”
“모른다는 말씀으로 듣죠. 그럼 많이 파세요, 저는 갈게요.”
수레자국이 있었다.
들기면 곤란한 걸 싣고서. 그러니 사람의 시선이 닿는 낮에는 움직이지 못했을 거다.

배고픔을 알아도 배고파 죽을 일 없고, 수면부족이 고통스럽다는 걸 알아도 뇌가 망가져 죽을 일 없는 몸으로 한적한 길가에 자리를 잡았다.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이런 외진 곳에서 구걸을 하면 소득이 없어 곧 굶어 죽을 거라고 걱정을 해주는 사람도 간혹 만났다.
대다수는 무심하게 내가 있는 곳을 지나쳐 각자의 용무를 보러 갔다.
나는 가끔씩 ‘한 푼만 주세요, 나리.’ 운을 떼며 나무장대로 흙바닥을 툭툭 치곤 했다.
하품이 나올 정도로 한가로웠다.
우마차가 지나갔다. 여행길에 오른 과년한 여성이었는지 뒤로 덩치 큰 하인들도 붙어갔다.
행상인 무리도 지나갔다. 그들이 쓰는 수레는 크기가 컸고 바퀴의 폭도 넓었다.
밤이 되자 인적이 끊겼다. 나는 나무장대로 다시 바닥을 툭툭 쳤다.
다음날이 지나고, 다시 그 다음날이 지났다.
좀이 쑤셔 미칠 것 같아 장소를 바꿔볼까 고민하던 찰나, 하현달이 뜨던 날의 축시(※밤1시~3시)에 내가 기다리던 수레가 지나갔다.

두건을 눌러 쓴 두 명의 사내가 조를 이뤄 작은 수레를 끌며 바삐 갈 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한 명은 수레를 끌고 가고, 다른 한 명은 등불을 들었는데 특이하게도 등불 한 면에 어두운 색의 종이를 덧붙여 빛이 사방으로 퍼지지 않게 세심하게 조절을 했다는 점이다.
싣고 가는 물건은 부피도 크지 않고 무게도 그리 심하게 나가는 종류가 아니어서 가끔씩 바퀴가 달각달각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이들이 들고 가는 등에는 ‘질(疾)’ 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제법 그럴 듯하네.”
저러면 눈에 띄지 않는다. 설령 눈에 띈다고 해도 다들 보지 못한 척할 것이다.
사람들이 거지 행세를 하는 나를 눈에 담지 않은 척하며 지나간 것과 마찬가지다.
감탄하며 몰래 수레 뒤를 따라갔다.
병자의 시신을 구분하여 묻으러 가는 길이라고 하기엔 방향이 이상했고, 갈림길에 이르자 야산으로 올라가는 길 대신 교외로 방향을 틀었다.
마침내 그들이 도착한 건물은 담장이 엄청 높았고, 크기만 컸지 외관이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한창 때의 약양 상씨 저택과 비교했을 적에 급이 많이 떨어지는 건물이었다.
남자들은 정문이 아닌 뒷문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여전히 달빛이 어두운 시간이었음에도 톡톡 문을 치는 소리에 빠르게 반응하여 뒷문이 열렸다. 이미 안쪽에서 사람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얘기다.

어둠에 숨어 주위에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는 걸 확인한 후, 뒷문으로 다가가 귀를 대어보았다.
틀렸다. 내 귀로는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다.
높이가 있는 담 안쪽을 기웃거릴 방도를 궁리하며 둘레를 조금 걸었다.
그때 뒷문이 다시 열렸고, 용무를 다 마친 건지 후련한 얼굴을 한 두건을 쓴 두 사람이 등불과 빈 수레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등불을 든 자가 수건으로 싼 걸 꺼내더니 즉석에서 둘로 나눠 수레를 끄는 자에게 건넸다. 받은 돈을 나눠가지는 듯했다.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그러더니 왔을 때와는 다르게 등 돌리고 헤어져 각자 자기 갈 길로 떠났다.
“버크와 헤어 맞네.”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는 걸 지켜보고 다시 뒷문으로 접근했다.
온 신경을 집중하여 귀를 문에 대고 안에서 들리는 소리가 있는지 잘 들어보려 했다.
누구는 이렇게 해서 옆집 사는 여자들 옷 벗는 소리까지 엿들었다는데 내 귀는 영 성능이 떨어지는지 아무런 소음도 포착을 못했다.
답답한 마음에 머리카락을 귀 옆으로 잘 빗어 넘기고 다시 귀를 가져갔다.
돌연 묵직한 통증이 종아리를 강타하지만 않았어도 계속 귀를 대고 있었을 거다.

와앙.
어디서 굴러온 건지 모를 강아지 한 마리가 내 종아리를 콱 물었다.

Posted by 미야

2021/11/19 14:05 2021/11/19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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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조사] 풀피리 27

제5장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되, 사람은 사람이 아니로다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난 어린애가 싫어.”
그럼 보내주던가.
“일지 쓰는 건 더 싫어 죽겠어.”
투덜이 스머프가 빙의했냐. 이것도 싫어, 저것도 싫어, 남경의는 악의는 없는 편인데 생각 없이 말을 툭툭 뱉는 성격인 것 같았다. 객잔의 방이 덥다고 투덜거렸고, 창문을 열자니 술주정뱅이들이 떠들어 시끄럽다고 투덜거렸고, 밥이 맛이 없었다고 투덜거렸으며, 하루 종일 수고하였으나 식살귀는커녕 급 낮은 주시도 못 봤다며 투덜거렸다.
정자세로 앉아 마찬가지로 일지를 쓰고 있는 동료가 아무런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이쪽은 이제 막 사춘기가 온 10대처럼 시끄러웠다.
실제로도 여드름 짜느라 정신없을 연령대이긴 한데... 훔쳐보는 시선을 느낀 남경의가 퍼뜩 고개를 들더니 먹물 묻은 붓으로 날 가리키며 질책했다.
“으이그! 어떻게 박선망에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걸려가지고는!”
그러니까 그게 내 잘못이냐고.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억울하다. 팔 높게 들고 반성할 까닭이 과연 있는 거야?

사연인 즉 이러하다.
마을로 돌아가라는 남사추에 말에 나는 얌전히 그 말에 따랐다. 수행자들이 몰려들어 식살귀를 잡는다며 법석을 떨고 있는데 함부로 숲속을 어슬렁거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도중에 바쁜데 방해하지 말라며 다그치는 수사들과 마주쳤다.
공을 쌓을 욕심에 마음이 급해진 그들은 나무로 만들어진 나침반처럼 생긴 희한한 물건을 들고 이리저리 움직이다 날 밀쳤다.
그래서 넘어져 박선망에 걸렸냐고? 아니. 그건 아니고.
넘어지면서 가지고 있던 이릉노조 초상화를 흘렸는데 그게 한 수사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놈이 감히 내 앞에서 위무선의 더러운 낯짝을 들이밀어?!”
이릉노조에게 묵은 원한이라도 가진 사람이었는지 그가 검을 뽑아들고 버럭 화를 냈다.
나는 진정하라는 몸짓을 해보이며 뒷걸음질을 쳤고, 거기에 비탈길이 있는 지는 꿈에도 몰랐고, 실수로 발목을 접질렀고, 굴렀다.
그래서 구르다가 박선망에 걸렸냐고? 아니. 그건 아니고.

“뭘 빙빙 돌려 변명을 하고 있는 거야. 넌 그저 눈앞에 박선망이 보이니까 그게 뭔지 궁금했던 거잖아! 일부러 건드려놓고 왜 아닌 척하는 건데.”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 투명하게 빛나고 있어 신기한 마음에 손으로 살짝 건드려 봤...”
“고의로 저지른 게 맞잖아! 그게 한두 푼짜리인 줄 알아?!”
비싼 물건이었나 보다. 하긴, 비싼 물건이니 수사들이 두 번이나 박선망을 망가뜨린 날 죽이려 든 거겠지. 말리던 남가 소년들과 드잡이도 하고.

“경의. 목소리를 낮춰. 객잔 사람들이 놀라서 다 몰려오겠어.”
“몰려오라고 그래! 내가 억울하고 분해서라도 계속 소리를 지를 거다. 장래희망이 도사인 철부지 어린애 때문에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우리가 부순 것도 아닌데 박선망 값도 물어주게 생겼잖아!”
“경의, 진정하라니까.”
“못해! 덕분에 써야 할 일지 분량이 곱절로 늘었어! 여기엔 식살귀 소문만 무성할 뿐이지 실제로는 아무 것도 없었는데! 이건 완전 멍청한 짓이야!”
으르렁거리던 소년은 먹물이 튀어 서안이 엉망이 되는 걸 개의치 않으며 붓을 탁 소리가 나게끔 내려놓았다.
“저기... 이 근처 무덤이 파헤쳐진 건 사실인가요?”
“넌 궁금해 하지 마! 팔이나 똑바로 올려. 거기서 더 내려오면 벌 받는 시간을 늘릴 테다.”
야무지게 벌서게 만들면서 남경의가 눈을 부라렸다.

“기분을 풀어, 경의. 소문에 불과한 거면 어찌 보면 잘 된 일이지.”
남사추가 그리 말하며 붓 놀리던 걸 멈췄다. 도중에 딴짓을 하던 동료와 달리 쉬지 않고 적었기에 분량을 다 채운 듯했다.
“늙고 이가 빠진 짐승이 사냥을 하지 못하게 되자 인가로 내려와 무덤을 훼손한 건지도 몰라. 생각지 못한 우연의 일이 부풀려져 그게 식살귀 소문으로 변한 거 아닐까.”
납득할만한 추론이었다. 남경의가 그럴듯하다며 맞장구를 쳤다.
“사추, 넌 일지에 그렇게 적었어?”
“아니. 선생님이 추측은 일지에 적지 말라고 해서 적지 않았어.”
“선생님은 짧게 쓰는 걸 좋아하시지. 그런데 또 택무군은 판단은 본인이 하신다며 뭐라도 좋으니 일단 적으라고 하시잖아. 아... 어쩌지. 그런데 사추 넌 저 애기 도사 이야기는 적었어?”
“간단하게만 썼어. 마을 아이가 다른 수사가 설치한 박선망에 걸렸기에 너랑 내가 도와줬다고만 했어.”
거기까지 말한 남사추는 손짓을 하여 나더러 가까이 오라고 했다.
상냥한 부름이었지만 나는 결코 다섯 걸음 이상 가까이 가려 하지 않았다. 앞서 말했지만 난 그들이 입은 흰옷이 너무 싫었다.

“저, 저 망할 똥고집 봐라! 표정이 왜 저래!”
“경의, 너무 뭐라 하지 말고... 아직 어린애잖아.”
“그래봤자 우리랑 그렇게 차이도 안 나. 사추, 넌 너무 물러 터졌어!”
어쨌거나 손들고 벌 서는 건 그만하면 되었다며 드디어 축객령이 떨어졌다. 밤이 깊었다는 거였다.

그런데 나에게 달리 돌아갈 집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말이지.
머리카락을 앞으로 내려 얼굴을 가리고 나무로 만든 장대를 들었다. 확인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이제 이야기를 돌려 내가 실수로 발목을 접질르고 비탈길을 굴렀던 때로 되돌아가자.
심하게 구른 건 아니었다. 깎아지른 낭떠러지도 아니었고, 풀이 많이 자란 경사 진 언덕이라서 몇 번 몸을 뒤집는 정도로 그쳤다.
그런데 마침 머리를 아래로 향한 상태로 처박혔기에 바닥에 남은 묘한 흔적을 가까이 볼 수 있었다.
나란히 고랑이 패인 두 개의 줄이 길게 이어졌는데 내게는 그게 꼭 의식이 없는 사람을 질질 끌고 간 것처럼 보였다. 한 사람은 겨드랑이에 팔을 넣어 상체를 들었고, 한 사람은 다리를 들었는데 길이 평탄하지가 않아 다리를 든 사람이 도중에 놓아버린 거다.
이상했다. 마을에서 크게 다쳐 산을 내려왔다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은 없었다.
자국을 더듬어 따라가자 외발바퀴 수레자국으로 바뀌었고, 드문드문 잡풀을 꺾은 자국을 남겼을 뿐, 이내 사라졌다. 경험이 부족한 나로서는 이후 추적이 곤란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수사들은 저마다 귀신을 잡을 생각만 했지 고개를 숙여 땅을 보지 않아 사람이 남긴 흔적을 죄다 놓쳤다. 식살귀와 외발수레는 서로 상관이 없으니 이쪽에 대한 건 그냥 놓아버린 거다.
이후 이곳저곳을 뒤지다가 박선망을 건드려 망가뜨린 건 순전히 우연이고.
따지고 보면 우연 70%에 본인과실 30% 되겠지만.
아니 진짜로 뭔가 반짝거린다 싶었는데 순식간에 확 움직이더라고, 그게. 맹세코 살짝만 만졌거든.

‘아무튼 구울 같은 건 결코 아니야.’
벌레가 새카맣게 꼬인 걸 장대로 건드리니 머리만 남은 작은 짐승이었다.
맹금류는 덩치가 작은 개나 고양이를 사냥하여 잡아먹으면 머리는 안 먹고 버린다던데 이 숲에도 매나 올빼미가 살고 있는 눈치다. 잘려나간 단면이 제법 깨끗했다.
‘무덤을 파는 수고를 해서 시체를 먹는 애들이 이런 공짜 진수성찬을 마다하겠어? 식살귀가 아니야.’
짐승의 머리를 장대로 툭툭 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쨌든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잖아.’
그런데 왜 굳이 오지랖을 부려가며 공동묘지까지 살펴보려 하는 건지는 하느님도 모를 것이다.

이 세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평장을 한다.
땅을 깊게 파서 관을 묻은 뒤에 평평하게 다진다는 얘기다.
재물이 있는 사람들은 수고를 더 들여 봉분을 쌓기도 했는데 일반적이진 않았다. 무덤지기를 따로 두지 않는 이상 봉분 자체로도 부장품을 노리는 사람들의 표적이 되었기에 부자들은 위로 올리는 대신 아래로 더 내려갔다. 심하면 핵미사일에도 끄떡없을 방공호처럼 굴을 파서 관을 안치했다.
그렇다면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가게 되는 공동묘지의 모양새는 어떠할까.
뻔 한 거 아닐까. 상대적으로 얇게 묻힌다.

바닥에 납작하게 깔린 판자를 발로 밟고 올라섰다.
판자 아래 묻혀있을 망자를 모욕하려는 의도는 결코 아니었다.
‘나무에 두께가 있어. 내 몸무게가 올라가도 끄떡 하지 않을 정도야.’
최근에 뜯어낸 적이 있는지를 확인해보고자 더듬더듬 가장자리를 만져봤다. 글쎄다. 만지는 것만으로는 확실하지 않았다. 덮개로 쓰인 널빤지는 오래되었고 여러 번 재활용되었다.
‘시취는 나지 않아. 이 무덤은 오래되었고 최근에 사람을 묻은 것 같지는 않아.’
뚜껑을 여는 일엔 적절한 도구가 필요해 보였다. 아무리 허술하다고 해도 사람 손으로 뜯어낼 정도로 대충 만들지는 않았다.
‘여기 말고 다른 곳을 더 볼까.’

늦은 밤이라 움직임에 어려움을 느꼈지만 수 곳의 무덤을 살펴봤다.
그렇게 해서 알아낸 건, 오래된 무덤은 상대적으로 멀쩡했고 새로 만든 무덤 몇이 땅을 판 흔적이 남았다. 여자가 묻힌 관은 안 건드렸다. 어떤 표식을 남겨 구분하는 건지 나로서는 짐작이 가지 않았는데 열린 관의 크기로 보아 파헤쳐진 건 전부 남자다.
부자들은 안 건드렸다. 파내는 일에 수고를 더 해야 할 테니 가난한 탓에 얇게 묻힌 사람만 골라내어 팠다.
“버크와 헤어인가.”
이쪽 세계에서도 시신이 돈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저쪽 세계에서는 오래전부터 시신을 팔아 돈을 챙기는 무리들이 있었고, 심지어 무덤에서 파낼 시체가 없자 여관에서 사람을 죽여 팔아치운 살인자도 나왔는데 그게 버크와 헤어다.

“법해어가 뭐야?”
“아니. 버크와 헤어.”
“그러니까 법해어가 뭐냐고.”
순간 몸이 공중으로 번쩍 들렸다.
소스라치게 놀라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는데 멱살이 잡혔다는 사실 보다는 상대가 하얀 소복을 입고 있었다는 점에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공동묘지에 하연 소복이면 딱 그거잖아.
“처녀귀신이다~! 처녀귀신! 히이익!”
“누구더러 처녀귀신이라는 거야! 이놈이 눈이 삐어서!”
따악, 하고 매운 주먹이 앞 통수에 날아들었다. 부리부리하게 눈을 치켜 뜬 남경의가 한 번 치는 걸로는 부족하다며 같은 자리를 또 때렸다. 눈앞으로 별이 번쩍였다.

Posted by 미야

2021/11/18 12:35 2021/11/18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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