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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조사] 풀피리 14

제3장 노잣돈 없음 저승에 가질 못한다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같이 뒹굴고 음먀리 하는 장면은 없을 겁니다만... 일단 BL입니다.)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이러다 하얀 옷에 트라우마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백로가 사람으로 변신한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효성진 도장이 다소곳이 볏짚에 앉았다.
“가슴을 만졌지만 희롱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네.”
“예.”
“천지신명께 맹세할 수 있다.”
“예.”
“그럼 가까이 와서 앉아보게.”
나는 그의 눈부신 흰옷에 더러운 얼룩이라도 묻을까봐 전전긍긍해 하며 맞은편으로 무릎을 꿇었다.
도장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다양한 경로로 더러워진 옷을 빨아본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비누와 표백제 없이 흰옷의 얼룩을 빼는 일은 대단히 힘들다.
나는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볏짚 거적을 툭툭 건드렸다. 어쩐지 세탁비를 내가 물어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망인(亡人)의 이름은 어찌되는가.”
“걸람입니다. 빌 걸에 누더기 람 글자를 씁니다. 소산 사람입니다.”
“본명이냐.”
“아니오.”
“본 도장이 이름을 물었는데 왜 가명을 대는 건가.”
“그야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을 모르니까요. 사람들이 걸람이라 불러 지금은 그게 제 이름입니다.”

사납던 기세가 약간 누그러졌다.
어리벙벙한 내 얼굴을 보아 의도적으로 거짓을 꾸며내려 한 건 아니라고 판단한 듯했다.
그러다 다시 효성진 도장의 표정이 살벌해졌다.
나는 그때 이 사내가 근본부터 매우 선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사람을 누더기 거지라고 부르면 안 된다며 진심으로 화를 내다니, 그 마음 씀씀이가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앞으로 그 이름은 쓰지 않는 게 좋겠다. 사람은 나쁜 뜻으로 이름을 지어선 안 된다. 빌 걸에 누더기 람 글자 말고 뛰어날 걸에 산바람 람을 써서 걸람(傑嵐)이라고 하자꾸나. 적는 법을 모르면 이 도장이 가르쳐주마.”
앞으로 내 이름을 써봤자 묘비에 적을 일밖에 안 남았는데도 효성진은 정색하고 당장 바꾸라 했다.
나는 난처해서 의미 불명으로 예, 예, 소리만 냈다.

분위기를 다잡고자 한 건지 그가 흐트러진 적도 없는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그건 그렇고, 이곳이 어딘지 알겠느냐.”
“여긴 의장이잖습니까. 관과 장례용품을 보관하는 곳이오.”
“그걸 묻고자 한 게 아니다. 여기가 약양이라는 걸 아느냐?”
“약양입니까?”
꽤 멀리도 왔다. 나는 속으로 소산 주변 마을의 위치를 떠올리며 시내버스로 몇 정거장 거리인지를 짐작했다. 내 걸음으로 버스 정류장 하나를 걸어가면 20분이 걸렸고, 악양은 열 다섯 정거장 거리다. 두 시진 반 거리라는 얘기다.
그나저나 기준이 자꾸 이쪽이 아니라 저쪽으로 치우치는데.
현생의 나와 전생의 내가 동시에 믹서기에 갈려 어중간하게 뭉친 기분이다.

“소산에서 이곳까지 어떻게 당도했는지 기억은 나느냐.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악당에게 죽임을 당하고, 납치를 당하고, 머리에 못이 박힌 채 끌려 다녔습니다.
머리로는 내용 정리가 잘 되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효성진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롭고 냉정했다. 그래도 목소리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온화했다.
“한 달 전 약양의 선문세가인 상씨 가문의 집에 흉사가 있었다. 가주가 야렵을 나간 사이에 식솔이 전부 몰살당했는데 죽은 이들의 몸에 상처가 없고, 진법이 파괴되었고, 현장에 사기가 충만한 걸 보아 재물을 노린 도적의 짓이 아니었다. 허나 선문의 짓이라고 단정하기엔 상씨에게 큰 원한을 품은 가문이 없고, 약세한 상씨를 멸문시킨들 아무런 이득을 볼 자가 없다는 점에서 설명이 되지 않지.”
“......”
“이에 대해 아는 바 있느냐.”

나는 여전히 어색해 하며 입을 오물거렸다.
‘난 아무 것도 몰라요, 정말 몰라요’ 모르쇠 변명을 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사람을 다치게 하면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하고, 사람을 죽이면 사형당해야 마땅하다 생각하는 사람이다.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도 법망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소인배들을 보며 주먹을 말아 쥐었던 적이 한두 번도 아니고, 사형제도 찬성자에 함무라비 법전 찬미자란 말이다.
술을 잔뜩 먹고 인사불성이 되어 뻗었는데 아침이 되어 눈을 떠보니 주변은 피투성이이고 식칼이 복부에 꽂힌 친구가 거실에 뻗어있음 사람이 잘못한 거지 술이 잘못한 건 아니잖는가. 정황상 내가 저지른 일이면 내가 책임을 지는 것이 옳았다.
다만 내가 효성진 도장 앞에서 지금처럼 머뭇거리는 건 모자란 지식으로 인해 설명이 불가능한 부분이 많아서다.
일단 내 상식으로는 시체가 된 사람이 자연스럽게 움직인다는 것부터 말이 되지 않는 거였고, 마법이나 도술에 대해선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머리에 대못을 박아 시체의 의지를 조정한다는 것도 비상식적이었고, 사람들로부터 무슨 생명 에너지 같은 걸 빨아들인 것도 납득이 어려운데 그걸 남에게 무슨 재주로 설명을 하느냐고. 머글이 윙가디움 레비오사 주문에 대해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다.

속이 답답해 물을 좀 마실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효성진 도장은 폭 넓은 소매 춤에서 흔쾌히 대나무 죽통을 꺼내주었다.
신기하다. 기회가 있음 언젠가 신선들 소매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꼭 알아낼 테다. 도를 배우면 게임 인벤토리처럼 확장하여 쓸 수 있는 건지 매우 궁금했다.

물은 달고 시원했다.
“그거 아세요? 배고픔보다 갈증이 훨씬 더 고통스러워요.”
“그거 아느냐? 죽었다 깨어난 망인은 물을 마시지 않는다.”
바닥을 드러낸 죽통을 돌려받은 그가 괴이쩍은 걸 보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너 같은 망인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스스로 사고하고 자연스럽게 말을 하는 망인은...”
그러더니 채 말을 잇지 않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상하군. 그는 이미 불야천성에서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고 들었는데.”
“누가요?”
“온녕.”
“그게 누군데요.”
“귀장군.”
“들어본 것도 같고...”
“네가 귀장군인 건 아니고?”
“도장님 눈엔 제가 장군으로 보이나요?”
얇아서 똑 부러질 것 같은 손목을 흔들어 보여주자 효성진은 대놓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얼마나 못 먹고 자랐기에 몸이 그 지경인 거냐!”
“그래도 병치레를 한 적은 없는데요.”
소매를 내려 손목을 덮으며 입을 삐죽거렸다. 뚱뚱한 사람더러 뚱뚱하다고 해도 상처받지만, 마른 사람에게 말랐다고 해도 상처받는다.

“되었고... 그러니까 네 말은 넌 이릉노조가 만든 귀장군이 아니라는 거지?”
“이릉노조가 아니라 설양이 절 이렇게 만들었는데요.
저를 검으로 찔러 죽인 것도 설양이고, 술법으로 절 부활시킨 자도 설양이고.”
나는 배추배달을 갔다가 숲속 한 가운데서 봉황기 전국청소년야구대회 깃발을 발견한 것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검에 가슴부위를 찔려 숨이 끊어졌던 일, 야적들이 버리고 간 버려진 도적산채 같은 곳에서 눈을 뜬 일, 해의 기울기를 보며 도망쳤으나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던 일, 머리에 못이 박힌 일, 귀신들에게 붙잡혀 어느 부잣집 청당으로 내던져진 일을 더듬더듬 묘사했다.
효성진은 도중에 말을 끊는 법 없이 참을성 있게 내 얘기를 들어주었다.
그게 정말이냐 되묻는 법도 없었다.
다만 중간 중간 심각한 얼굴로 아래턱을 문질렀는데, 설양이 풀피리를 불었을 적에 주시가 그의 의도대로 움직였다는 부분과 ‘음호부’ 라는 명칭을 언급했을 적엔 분위기가 진짜 살벌해졌다.

“진짜로 음호부라고 들었느냐.”
“설양이 말하길, 이릉노조가 만든 음호부가 아니라서 실패했다고 했어요.”

이제 그는 고민이 매우 많아 보였다.
불가능에 가까운 판매 목표를 접한 부장님처럼 침묵했고, 애들 성적표가 바닥을 기었다는 말을 들었을 적의 아빠처럼 동요했다.
그 와중에 나는 여전히 맹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은 지 오래되어 슬슬 저려오기 시작하는 종아리에 몰래 침을 바를 궁리나 했다.
훗날 나는 이때 ‘음호부’ 이야기는 뺐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일단은 범인인 설양을 추적할 것이다. 그리고 너는...”
효성진은 곤선삭으로 내 손목을 묶었다. 곤선삭은 마법의 밧줄 같은 종류로 어지간한 검으로도 잘리지 않을 정도로 튼튼하다 하였다. 그 상태에서 도장은 날 시체 담는 자루에 다시 넣었다.
자루 안에서 불편한 몸을 꿈틀거리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고 묻자 그는 음호부 때문이라고 말했다.
“음호부가 있으면 널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
“조정이 되지 않아 실패작이라고 했는데요.”
“그러니 더욱 묶어둬야겠지.”
그 의견에는 동의한다. 사물을 분별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을 잃고 멋대로 날뛸 가능성이 있음 묶어두는 것이 좋지, 암.
“그럴 바엔 차라리 목을 베어두는 것이 낫지 않나요?”
“베어지는 것이 네 목이라는 개념은 없는 거냐.”
“아니, 뭐... 일단 전 죽었고.”
“자신의 몸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 그 몸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니 불효다.”
도장은 무게 개념이 없는 사람인 듯했다. 한손으로 자루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무슨 종량제 봉투 버리러 나가는 사람처럼 사뿐사뿐 걸어 나갔다.


※ 효성진이 다시 지어준 걸람의 이름은 "뛰어난 람" 이 됩니다. 송자침, 친구 이름이 송람이지요.

Posted by 미야

2021/11/03 10:02 2021/11/03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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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조사] 풀피리 13

제3장 노잣돈 없음 저승에 가질 못한다

※ 오리캐 주인공, BL 요소 존재하는 호러물입니다.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의장은 장례용품을 보관하는 장소다.
관과 상여, 음력사(※ 저승에서 망자 대신 악귀와 싸워주고 지전을 귀신들에게 빼앗기지 말라고 장례식에서 사용하는 종이인형) 같은 걸 넣어두는 창고 역할을 한다.
때로 연고 없는 시신이나 집안에 두기엔 불길한 시신이 나왔을 적엔 임시로 놓아두는 장소로 쓰기도 한다.

소산의 의장과는 달리 이곳의 의장은 크기가 컸다.
미리 만들어든 장례용 종이인형도 무슨 메주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빈 관은 여섯 개나 있었다. 이곳의 인구가 소산보다 많다는 뜻이다.

창문은 없었다. 대신 밖에서 내부를 들여다보는 용도로 뚫은 작은 구멍만 있었다.
뒤편에는 허리를 구부리고 들어가야 하는 작은 쪽문이 나있었는데 짐작과 달리 출관하는 구멍이 아니라 의장지기가 휴식의 용도로 쓰는 방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출입구 높이를 낮게 만든 이유는 혹시라도 시체가 시변하더라도 허리를 쉽게 굽히지 못해 머리를 벽에 턱턱 박고 방으로 들어가지 못할 거라는 계산을 해서다. 낮은 단계의 시변자는 몸이 뻣뻣하게 굳어있어 잘 걷지 못하니까.
낮은 단계의 시변자가 아닌 나는 당연히 허리를 접어 쉽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불을 밝힐 수 있는 등롱과 지전 같은 잡동사니가 들어간 서랍장이 전부인 별 거 아닌 장소였다. 청소도 잘 되어있지 않아 천장에 거미줄이 가득했다. 나라도 이런 곳에 들어와 쉬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것 같았기에 의장지기의 게으름에 뭐라 하진 않았다.

그래도 이건 한 마디 해야겠다.
이 사람들아, 자루에 시체 담아 던져놓고 까마득히 잊고 있음 어쩌라고?!

빛이 들지 않는 의장에서, 그것도 자루에 넣어진 상태에서 얼마나 버텼는지는 신만이 아실 일이다.
처음에는 시체의 본분을 어기지 않고 얌전히 기다렸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껏이어야지. 이 게으른 인간들은 시체를 넣어두고 의장 문도 안 열어봤다. 느낌 같아선 거의 한 달 족히 들여다보지 않았다.

썩는 냄새가 나지 않아서일까? 흔히 미역국 데운다고 냄비 올려놓곤 타는 냄새 나기 전까지 잊어먹지 않던가. 냄새가 없으니 의장지기가 깜빡한 것일 수도 있다.
나는 팔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봤다. 썩기는커녕 미약하게나마 온기도 느껴졌다. 탄력도 그대로여서 손가락으로 눌렀다 떼자 자국 없이 복원되었다. 화학 방부제 팍팍 뿌려 앞으로 몇 년 지나도 안 썩을 기세다.
아니면 참변을 당한 저택의 일이 쉽게 수습이 되지 않은 탓일 수도 있다.
죽은 사람 숫자가 많은데다 기둥 굵은 집이었으니 인력이 전부 그쪽으로 쏠렸을 거다.
밥 동냥 하러 갔다가 죽은 거지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내일 들여다봐야지, 모레 들여다봐야지, 글피 들여다봐야지, 이러다가 아예 나라는 존재 자체를 잊어버렸을 수도 있다.
사람은 정신없이 바빠지면 얼굴에 쓴 안경을 찾는답시고 가방을 뒤지는 법이다. 이건 의장지기의 잘못이 아니다.

너무 심심해 장례용 지전 뒷면에 일천만원(一千萬圓), 일억원(一億圓) 이러고 글을 썼다.
내가 가지고 갈 노잣돈이었다. 설마, 단위가 달라도 환전되겠지.
그나마 종이도 금방 다 떨어져 이마저도 할 게 없어졌다.

낮에는 의장지기의 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밤에는 빈 관에 들어가 눕기를 반복하기를 그렇게 여러 번, 동네에서 장례 치룰 일이 생겼는지 드디어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발자국 소리로 파악하자면 다가오는 사람들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의관을 정리하고 착한 시체가 되어 누웠다.
구석에 들어가 있으면 혹시라도 발견을 못할 수도 있으니 관 말고 그럭저럭 눈에 띄는 곳에 두 다리를 뻗었다.

“이곳이오?”
의장지기가 문을 열었다. 그는 문만 열었을 뿐, 다섯 걸음 떨어져 안에는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예, 나리. 이곳에 가져다 두었습니다.”
“나리라고 하지 말고 도장이라 부르시오. 그나저나 시취가 나질 않는데 이미 매장을 한 건 아니오?”
“그렇진 않을 겁니다. 확실하진 않으나... 저기. 워낙 경황이 없어...”
“표정을 보아하니 그게 전부인 게 아닌 듯한데. 혹여 다른 이유가 있소?”
“무서워서요. 상씨 세가에서 가져온 시신인데 아무래도... 시변했겠죠? 그런 일이 있었는데 멀쩡할 리 없잖아요. 다들 겁이 나 지금껏 문을 잠가두고 감히 접근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담 저 안에서 수상한 소리가 난 적이 있는지는 아오?”
“저어. 그게...”
“괜찮소. 눈치볼 것 없소. 함부로 확인하려 했다가 주시가 달려 나오면 그것도 나름대로 곤란한 일이지. 이해하오.”
의장지기가 과하다 싶을 정도로 굽실거렸고, 도장 나리라고 높여 불린 사람은 괜찮다고 말해줬다.

도장 나리는 성격이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나 같으면 방임행위 아니냐 야단했을 거다.
“정면 말고 혹시 다른 출구는 없소?”
“없는데요.”
“그거 다행이군. 뒷문이 없음 되었소. 그럼 나 혼자 안에 들어가 보겠소.”
“조심하세요, 나리!”

높은 문턱을 넘는 동작은 간결했다. 몸이 가벼워서인지 발소리도 거의 나지 않았다.
도장은 한 3초 정도 가만히 제자리에 서서 눈으로 내부를 본 뒤에 텅 비어있는 관 가장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 두드리는 소리에 밖에 서있던 의장지기가 ‘뭡니까? 뭔데요? 뭐가 있습니까?’ 물어왔다.
도장은 질문에 일절 대답하지 않고 내가 구석으로 잘 개켜놓은 자루로 시선을 주었다.
생각해보니 잘못한 거 같다. 그간 접근한 사람이 없다는데 시신자루에서 죽은 몸뚱이가 빠져나오고, 자루가 네모반듯하게 접혀 있으면 누가 봐도 그건 퍽이나 수상쩍어 보였을 거다.

그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동시에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았다.
의장 안을 한 바퀴 돌고, 바닥에 깔린 볏짚의 색을 확인하고, 공양한 물건을 올려놓는 공대와 그 앞에 자리한 의자를 주의 깊게 살폈다.
“볏짚이 깨끗한 걸 보아 안에 썩어가는 것이 없었고, 먼지를 보니 의자를 옮긴 흔적이 있구나.”
마지막으로 팔을 가지런히 하고 누운 내 곁으로 다가와 단서를 추적하는 셜록 홈즈처럼 행동했다.
손가락과 손톱을 보고, 소매를 걷어 팔을 보았다. 찢어진 옷가지 틈으로 드러난 흉터에 주목하고, 입을 벌리게 해 입속을 보았다. 짐작하자면 살을 뜯어먹은 흔적이 있는지 살펴보려 한 것 같았다.

“의장지기. 혹여 이 아이가 어떻게 죽었다는 말을 들어보았소?”
“자세한 건 모릅니다, 도장 나리. 하지만 일꾼 말로는 시변해도 뛰어다니지 말라고 다리의 힘줄을 미리 끊었다고 했습니다.”
“잘려 있지 않소.”
“그럴 리가요.”
“원하면 직접 봐도 좋소.”
“아뇨, 아뇨, 아뇨! 도장 나리 말씀대로겠죠.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됩니다!”

의장지기가 질겁하며 손사래를 치는 와중에 도장이 인상을 찡그리며 내 옷의 앞섶을 열었다.
그 부분은 나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바이다. 다른 심각한 상처는 잘 붙고 제자리로 돌아왔는데 설양이 찌른 자국만 그대로였다.
도장은 별 말없이 더듬더듬 가슴의 상처 자국을 만졌다. CSI 요원들은 시신에 남은 상처를 보고 범인과 피해자의 위치라던가, 자세라던가, 범행도구 종류를 추정하던데 그와 비슷한 작업에 들어간 눈치였다. 조사에 임하는 그의 손길은 매우 조심스러웠고, 침착했다.
그리고 대단히 간지러웠다.

“......”
“......”

어쩔 수 없었다고요! 그리고 남자여도 젖꼭지는 부끄럽단 말예요!

챙, 맑은 소리와 함께 순백색의 차가운 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와 허공에 둥둥 뜬 채 날 겨눴다.
나는 황급히 가슴을 여미고 뒷걸음질부터 쳤다.
세상에, 해리 포터에 나오는 님부스 2000도 아니면서 저게 막 날아다녀!
검은 무슨 자아라도 가진 것 같았다. 뒷걸음질을 하는 내 움직임을 보며 미간 정 중앙을 노리고 계속해서 따라붙었다. 성격이 급한지 확 찌를 것처럼 시늉하다 약간의 간격을 두고 멈추기를 반복했다. 목소리를 낼 줄 아는 검이라면 양아치처럼 욕을 했을 지도 모른다. 확! 이걸 그냥 확!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최대한 정중하게 검날을 옆으로 밀었다.
그래봤자 약간만 밀려났을 뿐, 하얗게 빛나는 검은 미간을 노리며 고집스럽게 제 위치로 돌아왔다.

“선생님, 우리 말로 합시다!”
“도장이라고 불러라.”
“도장님!”
“효성진 도장이다.”
“효성진 도장님! 이러지 말고 말로 합시다!!”

효성진 도장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있잖아요... 도장님이 보기엔 한심해 보인다는 거 잘 압니다만. 저는 지금 대단히 심각하거든요?
걔 좀 치워주심 안 되겠어요? 찔려봐서 아는데 그거 많이 아프거든요?

에고 소드는 성격은 급해도 주인의 말은 잘 듣는 것 같았다.
도장이 돌아오라는 의미로 검집을 앞으로 내밀자 순백의 검이 빨려들 듯 그 안으로 들어갔다.

Posted by 미야

2021/11/01 15:36 2021/11/01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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