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뵙겠습니다, 후작님.』
아들 역할도 오케이, 딸 역할도 오케이.

이제 그들은「아들도 인버스, 딸도 인버스」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깨달았다.
한쪽 무릎을 살짝 굽혔다 일어선 그녀는 평상복에 가까운 단순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나풀거리는 레이스 장식과 갖은 꽃장식으로 치장한 귀족 처녀들과는 거리가 멀다. 색상은 단아한 감청색. 치맛단과 허리 부위로 금색의 선이 들어간 걸 제외하고는 장식이라는게 아예 붙어있질 않다. 옷차림만 봐서는 슬레진 제국에서도 손가락을 꼽는 부잣집 딸네미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소매 모양새조차 대도시 유행 스타일이 아니다. 아니, 아니. 그 이전에... 죠르프는 무의식중에 턱수염을 어루만졌다. 뭐랄까, 치마는 치마인데 치마로 안 보인다. 소녀라기 보다는 소년의 느낌이다. 작지만 무지 단단해 보인다. 선이 분명한 얼굴, 대단히 총명해 보이는 두 눈동자. 끝내준다.
그러다 퍼득 느꼈다.
여자라고? 아니다. 저건 남자다. 사랑에 울고 사랑에 죽는 연약한 온실의 꽃이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저런 식의 눈빛은 가질 수 없다. 선술집에서 술도 마셔봤고, 한량답게 계집을 껴안고 농탕질도 해본 얼굴이다. 돈 맛을 알고 권력의 맛을 안다. 자긍심으로 심장을 단단하게 하고 간계로 적들을 우롱한다. 화관으로 머리를 장식한게 아니라 튼튼한 철로 관을 만들어 썼다. 사자를 단칼에 찔러 죽이고 온 몸에 뜨거운 짐승의 피를 뒤집어 썼다.
그런데도 호적상으로 열 여섯의 소녀라는 건가. 이건 실수가 분명하다. 뭔가 잘못되었다.

후작도 비슷한 감상을 느꼈던 것 같다.
무어라 말 한마디 없이 덥썩 손부터 올리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말이다.

죠르프와 로머디스는 숨을 멈춘 채 기절했다.
잠깐만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구애도 생략한 채 가슴부터 만지깁니까?!

『이봐요!』
반응은 리나 인버스가 더 빨랐다.
가슴을 향해 올라오던 후작의 손을 찰싹 소리내어 후려쳤다.
『댁의 조카분처럼 실수하려는 거라면 진작에 정신 차리세요.』
『하?』
『정말이지 한 핏줄 아니랠까봐.「신이 정해놓은 운명을 부정하고 남자가 치마를 입어, 보는 이들을 타락의 길로 인도하며, 남의 마음을 농락하는 은밀한 즐거움에 빠져들어 스스로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건가」우짠가 식의 이상한 대사를 늘어놓는 것으로도 모자라, 정말로 여자인지 아닌지를 확인한답시고 남의 가슴을 막 주물러대는 건 이제 사절이라고요. 척 보면 몰라요? 도대체 세상의 어느 남자가 나처럼 아름답고, 우아하며, 사랑스럽냐고. 새삼 깨닫는 거지만 당신네 가문 사람들은 시력이 나빠요.』
반론의 여지가 없다. 후작은 얼얼한 통증을 호소하고 있는 손을 도로 거둬들였다.
하지만 여전히 헷갈린다. 저 연령대의 소년이라는 건 때로 소녀들보다 더 섹시한 법이다. 세이렌들은 높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바다 저 깊은 곳으로 배를 침몰시킨다. 본인은 고약한 취미라고 생각하지만 미령의 소년에게 홀려 스캔들을 일으키는 작자도 없지 않다. 뺨에 분칠을 하고, 수컷을 함락시키는 페로몬을 발산하는, 이른바 소년 꿀벌에게 당해 패가망신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무료함에 어쩔 줄 몰라하는 귀부인들의 단골 입방아 주제다. 실제로 여장을 한 유명한 남창으로는 마젠다라는 이도 있다. 슬레진 제국의 왕족 중 하나가 마젠다에게 홀려 가산을 탕진했다는 이야기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다들 쉬쉬하고 있어도 후작은 그 문제의 멍청이가 크리스토퍼 왕자의 아들 알프레드라는 걸 진작에 눈치챘다. 알프레드는 분노한 아버지에게 의절당하고 지금은 빈털터리 신세로 외국으로 쫓겨난 상태다.
『아앗?!』
그러니 최후까지 확인하는 것이다.
한 번 실패했다고 뒷짐 지고 퇴각할까보냐. 오른손이 아니면 왼손이 있다.

커다란 손으로 가슴을 덮었다.
이건가 싶자 후작의 표정이 답지 않게 살짝 흔들렸다.
『가슴이... 저런. 작군요.』
『이게 뭔 짓이야~!!』

- 찰싹.

로머디스는 깨달았다. 그네들 얼음 도련님이 뺨 맞은 사연이라는게 과연 무엇인지를.
그 숙부라는 자가 거짓말처럼 고스란히 그 실수라는 걸 반복하고 있는데야, 뭐.

『이이이이이잇~! 다시 말해두지만 지위의 높고 낮음을 떠나 그쪽이 잘못한 거예요!』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뭐예요! 잘못을 인정한다면서 왜 그놈의 손은 아직도 원위치로 돌아가지 않는 거죠.』
확실히 원위치로 안 돌아가고 있다. 손가락 끝이 아슬아슬하게 가슴섶에 닿아 있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가슴 굴곡을 스치게 된다. 아니, 이미 스치고 있다. 그 당연한 결과로 리나 인버스의 얼굴색은 불타는 석탄 비슷하게 되었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화가 치밀어 새빨간 색이다.
그런데도 얄미운 아저씨는 뭐가 그리 좋은지 희희락락.
『꽃이 피어난 곳에서 나비는 잠시 날개를 접고 쉬어가는 법이지요.』
『하지만 꽃도 징그러운 송충이는 질색할 겁니다. 자! 장난은 그만하시지요. 할 일이 산더미입니다.』

저 두 사람은 서로 제대로 된 통성명도 안 했다는 걸 알고는 있나.
뭐, 둘 다 그런 세세한 곳엔 신경을 쓰고 있지 않으니 감히 지적할 의무감을 못 느낀다.
리나는 능구렁이 표정을 짓고 있는 그레이워즈 후작을 힘 주어 노려본 뒤에 테이블 위로 지도 하나를 펼쳤다. 그리고는 정확히 한 지점을 향해 검지손가락을 찍었다.

- 제피리아

바퀴벌레라도 일시에 압사시킬 박력이었으나 그녀의 손가락 끝을 쳐다보는 남자들의 눈초리는 변함이 없다. 아무튼 그들은 통나무 군인, 더러는 그 기질이 풍부한 사람들이었다.
『이곳이 제피리아입니다.』
『그렇군요.』
이어 앙증맞은 손가락은「버닛사 대로」라고 적혀진 길다란 선을 따라 움직였다. 산 밑둥을 돌고, 나지막한 언덕을 두어 개 넘어, 다리를 세 개 지나면 저 반대편으로는 후작의 영지인 사일라그가 있다. 다만 그녀가 가져온 지도는 그렇게 큰 면적을 한 면에 담을 수 있을 정도로는 크지 않아 사일라그의 이름은 사일- 에서 썽둥 잘려나갔다. 하지만 테이블에 모인 사람들은 그리 신경을 쓰는 눈치가 아니다. 어디가 어디인지만 알아볼 수만 있으면 족하다. 거기다 지금 그들이 주목할 곳은 사일라그가 아닌, 그곳으로 이르는 길목이니까.

버닛사 대로.

『여기는 치안 상태가 괜찮아요. 최근까지 도적이 나타났다는 이야긴 듣지 못했어요.』
당연하다. 일직선의 모양을 갖춘 버닛사 대로는 그 별명이「민둥 대머리」이다. 쉽게 말해 길게 뻗어나간 길 가장자리로 몸을 숨길만한 바위라던가, 큰 나무 숲이라던가, 깊은 동굴이라던가 하는 것들이 일절 없다. 강도짓을 하려면 어딘가로 매복하고 있다가 근처로 굴러들어온 먹잇감을 공격해야 하는데 200미터 떨어진 저만치에서도 사람 머리가 뚜렷하게 잘 보여서야 원... 날씨가 화창하면 가시거리는 그 곱절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칼 들고 어험 헛기침을 하면 그걸로 장사 끝. 알아서 죄다 도망을 쳐버린다. 산적떼 입장에선 주머니 불리기엔 최악의 장소인 셈이다.

그녀는 다시금 손가락을 들어 대로에서 약간 벗어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샛길인 이곳 덤블 길은 길이 외진데다 주변이 모두 숲이라서 매복이 가능하지만...』

- 곰이 산다.

고로 패스. 살인 곰 제이슨 앞에선 산적도 그 위상을 잃는다.

리나는 귀찮게 흘러내린 옆머리를 정리하며 지도의 한 부분을 다시 지적했다.
『이쪽 위킬스로 내려가는 길은 좁아서 마차가 지나가긴 힘들죠.』
그런 연유로 마차를 즐겨 애용하는 부자들은 당연히 그 길을 기피한다. 돈줄이 기피하니 산적들도 기피한다. 위킬스로 내려가는 길은 보따리가 가벼운 농민들이나 나무꾼들, 더러는 사냥꾼들의 한가로운 산책로나 마찬가지다. 그녀는 두고 볼 것도 없다며 시선을 돌렸다.
『문제는 바로 이곳. 물레방앗간 위쪽으로 이어지는 흙외담 길입니다.』
손가락이 강조의 의미를 담아 둥글게 원을 그렸다.
『3년 전까지만 해도 산적들이 득시글거렸던 장소이죠.』
그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카타트 산맥에까지 이른다.
카타트 산맥이 어떤 곳이더냐. 모험가들의 천국, 검술 수련의 백미, 아울러 저승 사자들의 대기소다. 듣기로는 살벌한 날짐승들의 천국이랜다. 그래서 슬레진의 초대 국왕은 카타트 산맥에서 사람을 잡아먹으러 내려올 야생 동물들을 차단하고자 길고도 지루한 토담을 쌓아 국민을 보호하려 했다.
높이는 약 1미터, 길이는 측량 불가. 오늘날에 이르러 간혹 무너진 곳이 없잖아 있지만 30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문제는 토담 저 건녀편으로 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숨으면 감쪽같이 안 보인다는 것.
거기다 높이가 겨우 1미터이니 날쌘돌이들은 한 걸음에 뛰어 넘는다.
그 결과 여차하면 나타나는게 도둑놈들, 내지는 엄마 찌찌를 밝히는 치한, 더러는 강도가 되어 버렸다. 산적들은 밥그릇의 은총을 베푼 격이 되어버린 슬레진 초대 국왕에게 기쁜 마음으로 헌화했다.

『우린 그걸 진작에 헐어버렸지요, 로머디스? 그게 한 4년 전이었던가...』
『물론입니다, 후작님.』
골머리를 썩힌 일부 영주들은 문제의 토담을 곡괭이로 헐어버렸다. 그러나 그놈의 토담이라는 것이 유서 깊은 문화유적지 - 그것도 자신들의 초대 국왕이 만든 - 이고 보니 그 짓도 쉽지만은 않다. 왕실에 밉보여서 좋을 건 없다.
『음? 황태자는 내가 그걸 부셨다고 했을 때도 아무 말 안 하던데.』
『당연하죠!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닌 후작님이니까요.』
고개를 갸우뚱하는 주인을 뒤로 하고 로머디스는 땀에 젖은 수건을 비틀어 짰다.

『그래서 말인데요.』
여기서 리나 인버스가 의미하는 건 다음과 같다.
산적 토벌을 하러 나왔다면 구체적인 정보가 있을 거 아닌가.
토담길 최후 토벌의 기억은 정확히 1년 8개월 전이다. 바퀴벌레의 완벽 박멸이 사실상 불가능하듯 토벌대가 도적들을 쓸어버려도 잔당은 매번 남는다. 외눈박이 스미스 일당이 궤멸되면 다음은 다리 털은 면도기로 밀자 형제들이 주름을 잡는 식이다.
이번엔 어떤 놈들일까.
하여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로머디스를 응시했다.

그런데 어랍쇼.
꽃사슴이 뛰어갑니다 하며 로머디스가 고개를 획- 돌렸다.
리나는 다소 어리둥절해 하며 이번엔 죠르프를 바라봤다.
사내는 구두에 뭐가 묻었나보다 식으로 땅만 쳐다보았다.
이봐요들?

Posted by 미야

2008/03/20 16:39 2008/03/20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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