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엔 왜 왔니, 왜 왔니~♪」
「위에 빵꾸내러 왔단다, 왔단다~♬」

당연히 인버스 저택은 뒤집어졌다.
평복이라고는 해도 말을 탄 기사가 서른 여섯 명이나 되고, 그 중의 하나는 슬레진 굴지의 명문가인 그레이워즈 가문의 당주이다. 버선발로 현관에서 뛰어나온 인버스 남작은 아, 하고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가 다시 아, 소리를 내곤 땅을 가리켰다. 정리하자면「이게 뭔 일이랍니까?」아무리 명문의 귀족이라고 해도 예고도 없이 남의 영지를 습격 - 아니, 방문하는 일은 흔치 않다. 도대체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 있길래 그간 멀쩡하게 움직이던 남의 심장을 덜컥 주저앉게 만드는 건지. 평소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작 얼굴이 당장 죽을 병에 걸린 환자처럼 창백해졌다.

『무, 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후작님.』
제일 먼저 떠올린 건 산적이나 도적떼의 습격이었다. 이동 중 예기치 않은 공격을 받아 부상자가 발생하면 누구든지 가까운 마을로 내려가 도움을 구하게끔 되어 있다. 그래서 인버스 남작은 혹시 일행 중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는 사람이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쓱 돌아보니.
어랍쇼. 땟국에 절긴 하였으나 전원 얼굴과 의복이 멀쩡하다.
그렇다는 건 도적떼의 습격설은 물 건너갔다는 것.
남작은 다시 아, 하고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가 다시 아, 소리를 내곤 땅을 가리켰다. 해석하자면「도대체 어찌된 영문이랍니까?」라는 거였다.

후작이 홀가분하다는 투로 말에서 껑충 내려섰다.
『실례합니다, 남작. 미안하지만 도움을 좀 받아야겠소이다.』
『도움이라면... 저기, 도움이라뇨? 무슨 도움? 이게 대체.... 후작님?』
무슨 꿍꿍이로 이러는 거냐고? 그렇게 쳐다봐도 안 가르쳐주지.
대답은 뒤로 미뤘다. 일부러 뜸을 들이면서 바지에 묻은 먼지를 탁 소리내어 털었다.
어쩐지 공격적인 그 제스츄어에 남작이 움찔거렸다. 후작의 개 같은 성품에 대해선 그도 귓동냥으로 들은 구절이 있었다. 듣자하니 왕도 쩔쩔매며 어떻게 손을 대질 못한다고... 그러니 안절부절이다.

『후작님?』
꼬리에 불 붙은 고양이 같은 그 반응이 꽤나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레이워즈 후작은 안면 가득히 미소를 띄고 이렇게 말했다.
『사냥을 한답시고 사일라그의 제 영지로부터 출발했다가 보시다시피 길을 잃었습니다. 영지로 서둘러 돌아가고자 했지만 부하들이 도중에 지쳐버렸지 뭡니까. 이곳에서 하룻밤 쉬면서 식량과 물을 조달했으면 합니다만. 괜찮겠지요?』
듣고 있던 로머디스가 쿨럭 기침을 터뜨렸다.
지금 뭐시라. 사냥하러 나왔다 길을 잃어버려?
무려 제피리아에서 사일라그이다. 전속력으로 쉬지 않고 이틀을 달려 도착했지만 느긋하게 가자면 원래 나흘은 족히 걸리는 먼 거리다. 나흘동안 길을 잃고 같은 장소를 뱅뱅 돌았다고? 그것도 정규 훈련을 받은 기사들이? 차라리 고양이가 달걀을 품었다고 해라. 그걸 누가 있는 그대로 믿어주냐! 봐라, 인버스 자작의 뺨이 가볍게 경련을 일으켰다. 속보여, 거짓말 하지마, 누굴 물 먹이려는 거냐 등등의 속마음이 빨랫줄에 걸렸다. 내색을 못할 뿐이지 어이 없다는 반응이다. 남작의 사람 좋아뵈는 갈색의 눈동자로 한줄기 의심의 비가 내렸다.

『사냥... 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개는 어디에 있지요.』
거봐, 내가 뭐랬어. 개가 없으면 안 된다고 했잖아! 당황한 로머디스는 다시 기침했다.
물론 후작은 여전히 태연자약이었지만.
『개 말입니까. 사정이 있어 데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까. 하긴, 후작님 말씀대로 사냥에 꼭 개가 필요하다고는 할 수 없죠. 짖으면 시끄럽고, 뭐니뭐니해도 다 잡은 짐승을 이로 물어뜯으니 기껏 손에 넣은 멋진 모피가 망가지고...』
인버스 남작은 계속해서 횡설수설해하며 손바닥을 비볐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후작의 안색이 달라져 있었다. 고개도 삐딱하다!
『인버스 남작. 반복하여 말하게 되는 것 같아 민망합니다만, 도와줄 수 있는 겁니까, 아님 없다는 겁니까?』
직격탄이다. 인버스 남작은 예를 다해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다.
진실로 그들이 사냥을 나온 것이든 아니든, 이 상황에선 그 점이 중요한게 아니다. 요점은 그레이워즈 후작이 물과 식량, 그리고 하룻밤의 잠자리를 요구했다는 것이며, 남작의 입장에선 그걸 거절하기가 쉽지 않다는 거였다. 포박하여 죽이겠다는 것도 아니고 곤경에 처한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청하는데 냉정하게 거절해봐라. 옛말에도 있지 않던가. 거지가 밥 달라 대문을 두둘겨도 찬 밥을 챙겨주는 법인데 하물며 귀인이 와서 문을 두드린다면... 안방을 내줘야 한다.
판단이 서자 남작은 서둘러 하인들을 불렀다. 앞으로의 일이 많다. 준비도 하지 않은 서른 여섯명 분의 식사도 그러하고, 말들에게 먹일 건초들도 그러하다.
그리고 후작, 후작... 하여간에 후작. 입술을 깨물었다. 귀인을 뙤약볕에 세워두고 있으니 이런 무례가 또 없다.
『안으로 드십시오.』
사나운 맹수에게「날 잡수십시오」간청하는 기분.
인버스 남작의 위장에 스트레스성 구멍을 뚫어주겠다는 그레이워즈 후작의 결심은 그 시점에서 이미 어느 정도의 결실을 맺고 있었다. 남작의 위장이 쓰린 위산과다 증상을 호소했으니 말이다.

죠르프가 작게 귓속말로 공작에게 물었다.
「정말로 남작의 집에서 무작정 하룻밤 묵어가는 겁니까? 각하.」
그레이워즈 후작이 이것 봐라? 식으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 같아선 일주일도 좋고, 한 달도 좋고... 어차피 인버스 가는 부자잖습니까.」
역시나 꿍얼쟁이. 속 좁은 복수의 귀재.
「거덜날 때까지 해보자는 거죠?」
「설마.」
설마는 무슨. 차라리 지나가는 개가 웃는다면 믿겠습니다.
죠르프는 무겁게 한숨 쉬었다.

차라리 개가 웃는다는 걸 믿겠다며 죠르프는 한숨지었지만, 인버스 남작 입장에서는 개가 웃느냐 마느냐는 관심 밖이었다. 남작은 하인을 데리고 나가 비상 시를 대비하여 잠궈놓은 곳간을 열었다. 무거운 자물쇠가 덜걱거리며 풀려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남작은 하느님 맙소사 푸념했다.
곳간에 보리 한 톨을 더 얹기 위해 그간 얼마나 노력했던가. 가뭄이 든 것도 아닌데 이 피 같은 걸 풀어? 내가 워째 잘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이 과연 비상 시기가 맞기는 맞는 거요, 하느님. 남작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눈시울을 적혔다.
이런 아버지를 향해 딸이 훈계했다.
『정신 차리세요, 아빠. 서른 여섯명의 식사 준비예요. 그것도 보통의 입맛이 아니라고요. 느긋하게 있다간 저녁 시간에 맞출 수 없어요. 보아하니 그 작자, 무슨 빈틈이라도 발견하면 올타꾸나 해가면서 우릴 골탕먹일 심보인 것 같던데, 아차하다간 코가 베여요.』
코가 베인다는 표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직은 안녕한 코를 만지며 남작이 딸을 쳐다봤다.
『말도 안돼. 후작 각하가 우리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코를 베고 그러겠니.』
『하.하.하. 억하심정이 있지요. 저번에 우리가 팔아버린 포도원이라는게 있잖아요. 잊으셨어요?』
남작의 딸인 리나 인버스는 그렇게 대꾸하곤 땅바닥에 늘어진 쇠사슬을 서둘러 치웠다. 창고에서 밀가루 포대와 보릿가루, 그리고 감자를 있는대로 끄집어내야 했다. 게으름 피울 시간이라는 건 없다.

젠장, 젠장, 젠장×구우골 플럭스.
알고 있었다. 저 후작이 제피리아 포도밭을 얼마나 간절히 소원했는지는.
놀랍게도 그는 친서까지 보내「나에게 파시오」설득했다. 신분 높은 귀족은 경제적 거래에 직접 나서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생각하자면 이건 놀랄 노자다. 보통은 대행자를 보내 점잖게 분위기만 잡는다. 그런데 이 자는 얼마나 몸이 달았으면 무려 친서를 발송했다.
얼룩 한점 없는 새하얀 편지지를 기억해낸 리나는 신음소리를 흘렸다.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묘하게 매력적이었던 글씨체. 다음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지독하게 정중한 나머지 되려 우스웠던 어투다. 요즘 같은 시대에 그 어느 누가「나로 하여금 그 포도원의 새 주인이 되게 하시고, 태양 아래서 신의 은총을 찬미하게 하십시오」라고 표현하느냔 말이다. 평민 취향인 리나는 곰팡내 나는 문장에 깔깔거렸고, 배가 아픈 나머지 눈물도 흘렸다. 보면 볼수록 그 편지는 웃겼다. 외간 남자로부터 날아든 러브레터도 이보단 산뜻하지 않았다. 얼마나 마음에 들었으면 그녀는 남몰래 아버지의 서재에서 편지를 꺼내와 자기 화장대 속에 숨겨놨다. 그리고 심심할 적마다 펼쳐서 읽어댔다. 혹시나 리나의 방에서 자지러져라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면 편지는 분명 화장대 서랍에서 책상 위로 외출을 감행했다.
물론~ 편지는 편지이고, 거래는 거래다.
리나는 상인의 딸답게「거래의 제1조건은 신분이 아니라 무조건 금전이다」라고 못을 박았다. 상대가 왕후이든 아니든 상관 안 했다. 단돈 1원이라도 더 많이 내겠다며 콜을 부르는 자가 승자다. 그래서 많은 귀족들이 침을 삼켜대던 포도원은 21,500 갈리나를 제시한 제라스 백작 부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앗싸를 외쳤던 백작 부인, 그리고 그녀의 외동 아들... 커튼 뒤에선 리나가 묵묵히 주판알을 튕겼다. 철저한 외부 공개 입찰. 그 공정성엔 자신한다.

『그런데 왜 우리가 원망을 들어야 하는데? 그쪽에서 돈을 더 많이 내겠다고 했으면 됐잖아!』
이래서 대 귀족이라는 종족의 사고 회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엉뚱한 화풀이다. 부하들을 잔뜩 끌고 나타나 인상을 쓰는 걸로 우릴 책망하다니. 나쁜 놈.
『인상은 쓰고 있지 않았단다, 얘야. 화사하고 아름답더구나.』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아빠.』
그녀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하여간 참 특이한 사람이다. 웃는게 더 무서운 사람이라니.
쯧쯧 혀를 차며 감자 푸대를 들어 올렸다.
『이걸 모두 주방으로 옮겨야겠어요. 숫자가 제법 많군요. 그나저나 바깥으로 텐트를 치라는 건 지시하셨나요.』
『텐트? 얘야. 텐트라니?』
『아빠-』
소녀는「나는 순진해서 아무것도 모르거든요」라는 표정의 부친을 향해 쓴웃음을 흘렸다. 남작은 눈을 크게 떴고, 그 딸은 기사의 용맹함을 본받아 품속에서 주판을 꺼내들었다.

Posted by 미야

2008/03/19 10:10 2008/03/19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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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immie 2008/03/19 12:49 # M/D Reply Permalink

    "앗싸를 외쳤던 백작 부인, 그리고 그녀의 외동 아들..." 왠지 심상치 않은 문구네요. 제로스가 등장해 준다면 전 첨에 앗싸를 외쳤던 데에서 덩실덩실 어깨춤까지 추렵니다.
    그나저나 대단한 스피드세요. 벌써 3편째인데...물론 올리시는 족족 기쁘게 낚여 춤추는 물고기 한 마리 신고합니다 (파닥파닥)

  2. 미야 2008/03/19 12:54 # M/D Reply Permalink

    유감이지만 제로스는 안 나옵니다. ^^ 이거, <레죠*리나 커플링> 글이거든요. 부제는 <아저씨는 그만 사랑에 빠졌다> 였어요.
    예전에 썼던 분량은 수정만 하는 거라 중간까지는 휙휙 나갈 거예요.

  3. 엘리바스 2008/03/19 23:12 # M/D Reply Permalink

    으헉! 레죠&리나 커플링이라고요? 이거이거 더욱 더 기대되는걸요~~룰루랄라~

  4. 비밀방문자 2009/06/23 03:37 # M/D Reply Permalink

    후장님?

    1. 미야 2009/06/25 13:22 # M/D Permalink

      아무렴 그게 お-かま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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