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벌에 쏘였다며 로머디스가 펄쩍 뛰었다.
「무, 무, 무슨? 어쩌라고요?」
「말하세요.」
「뭘요.」
「아무거나 좋으니까 어서! 구정물에서 녹색 아메바가 튀어나왔다는 식의 우거지상은 치우도록 하세요. 옆에 있는 내가 다 불편합니다. 어디서 당나귀가 장송곡을 켜고 있답니까?」

이게 다 누구 덕분인데!
그래도 지적당하니 얼른 얼굴색을 바꾼다. 식탁은 밝고 건강해야 한다. 헛기침하곤 하늘에서 천사의 깃털이 내려온다며 팔을 움직였다. 평소 시인이 되었더라면 하는 로망을 품고 있는 남자다. 밤새 불을 밝히고 벌개진 눈으로 (연애) 소설을 읽는 남자답게 혓바닥이 매끄러웠다.
『이것은 기적과도 같군요. 영주님께서 실력이 보통이 아닌 좋은 요리장을 데리고 있으시니 이 몸은 견디기 어렵게 부럽습니다. 음음, 이 오리 구이는 환상이군요. 들판의 너그러운 향기가 느껴집니다. 거기다 이 부드러운 육즙은 봄철의 새싹을 연상케 하는군요. 바람을 타는 엘프가 이 음식을 혀로 맛본다면 기쁨의 시를 한 소절 읊을 것입니다.』
어이없게 장황하긴 해도 칭찬이다. 남작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부족한 요리를 훌륭하다 하시니 주방장이 기뻐할 것입니다.』
『저런, 주방장만 기뻐하면 안되지요. 주방이라 함은 애시당초 아녀자의 영역일지니, 이런 식사를 저희들에게 마련해주신 숙녀분들께도 당연히 인사를 올려야겠지요.』

그런데 여보슈. 다른 집에서야 그런 미사어구가 들어먹히겠지. 하지만 뭐 하나 깜빡했수다. 인버스 가문엔 마나님 자리가 공석이라니까. 젊어서 상처한 남작이 대놓고 슬퍼하는 거 안 보여? 안주인을 칭찬하는 당신의 노력은 지금으로선 되려 긁어 부스럼이라구. 죽은 마누라를 생각나게 하는 네 말에 분위기가 칙칙해졌잖아. 죠르프가 매서운 표정으로 친우의 발을 꽉 밟았다.
『크아악! 아, 아니! 그, 그러니까!』
다행히 인버스 남작은 상인의 재치를 발휘, 상대방의 실수를 너그러히 용서하며 구렁이 담 넘어갔다.
『딸 아이를 칭찬하시니 그 아이도 기뻐할 것입니다.』
그렇지! 이 집엔 마님 대신 여식이 있었지! 살았어, 나는 살았어!
로머디스는 죽다가 살아났다며 좋아했다.
아울러 바로 그 순간, 후작도 덩달아 좋아 죽는다 춤을 추고 있었다.
화제가 자연스럽게 남작의 자녀들로 넘어갔군요. 잘 했습니다, 로머디스.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게 보인다. 후작은 급히 포도주 한 모금을 그 입술에 머금었다.
『시장한 뱃통들을 향해 이다지도 훌륭한 구제를 행하셨으니 당연히 칭송받아야지요. 그래서 말입니다, 인버스 남작. 우리를 살려내신 숙녀분을 소개해주지 않으렵니까. 기왕이면 명철하다는 소문의 아드님과 같이 말입니다.』
이 말에 남작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아들? 나에게 아들이 어디가 있어.
그러길 한 3초, 남작은 내 귀가 요즘 영 신통치가 않아 하고 스스로 납득해버렸다. 바닷물이 들어간 것도 아닌데 귀를 탁탁 치는 걸 봐라.
『영광입니다. 내일 오전 무렵에 각하의 일행이 모두 떠나실 때 배웅하며 기쁘게 인사드릴 터이니 두 아이 모두 기대에 가득차 즐거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것입니다.』

이것 봐라? 하고 후작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내일 아침 우리들은 반드시 여기서 떠나야 한다는 걸 돌려서 강조하고 있군. 거기다 그「기쁘다」는게 우리가 떠나서 기쁘다는 거야, 아님 나랑 아이들이 인사할 수 있어 기쁘다는 거야. 당연히 전자겠지? 누가 물으면 후자라고 대답하겠지만.
내심 감탄해 마지 않았다. 역시 상인이라 그런가, 아슬아슬한 공중곡예를 잘도 타고 있다. 거기다 이쪽에서 그 말의 뉘앙스를 곱씹어 볼 짬을 주지 않기 위해 재빨리 화제를 바꾸기까지 하고 있다.

『아! 그러고보니 사냥이라 하시었는데 그래, 무얼 좀 잡으셨습니까.』
레죠 그레이워즈 후작은 내프킨으로 손가락의 얼룩을 닦아내며 다시 웃었다.
허풍은 태풍과 달라 멀쩡하던 남의 집 지붕을 무너뜨리지 않음이니 남발한다고 하느님이 무어라 하진 않으실 터이다.
『그럼요. 좀 잡았지요. 그렇죠? 로머디스, 죠르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남자가 사이좋게 얼어붙었다. 입안에 든 고기가 수직낙하 해버렸다.
그 화살이 왜 우리에게 날아오는건데?
거기다 후작은 괘씸하게도 확인사살까지 감행한다.
『제 부하들의 검술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요. 유능한 인재들입니다. 사냥 또한 당연히 최고입니다. 1년 전에는 사람을 열 다섯이나 잡아먹은 살인 늑대까지 잡았는걸요.』

로머디스는 작정하고 머리털이라도 뽑고 싶었다. 그리고 눈을 반짝거리며 극적인 모험담을 기대하는 남작에게 한 잔의 물을 권하고 싶어졌다.
사냥이 어땠느냐고 묻지 마. 죽어라 말 달린 기억밖에 없다.
참새라도 떨어뜨렸어야 뭐라고 말씀드릴 거 아뇨. 이거 돌겠네.
떨떠름한 표정으로 로머디스와 죠르프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게... 좀 잡았습니다. 그러니까... 에. 이번에도 늑대였죠.』
『요즘 날씨가 보통입니까. 이런 계절엔 그 흔한 토끼도 땅속으로 숨어버리지요.』
그리곤 엑- 했다. 이런! 박자가 안 맞았다. 누구는 잡았다고 하고, 누구는 허탕쳤다고 했다.
죠르프와 로머디스는 눈에 띄게 허둥대기 시작했다.
『마, 맞습니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늑대도 더위를 먹었는지 영 안 보이더라고요. 하하하.』
『물론 잡았죠. 그놈의 토끼들이 하나같이 땅속으로 숨어버리니까 되려 쫓지 않아 그게 더 좋더라고요. 무슨 감자더미처럼 구멍에서 쏙쏙...』
말을 마치자마자 재차 엑- 했다. 또 박자가 안 맞았다!
두 사람은 식은땀으로 죽을 끓여대며 발버둥쳤다.
『어허허허! 그래도 잡았습죠, 늑대.』
『역시 토끼들은 도망을 잘 치니까 그놈의 소득이...』
이쯤되면 엑- 소리도 안 나온다. 엇박자의 귀신 들렸다.

잠자코 경청하던 남작의 눈자위가 의심을 가득 담아 가늘어졌다. 누구는 남쪽으로 바다가 있다고 하고, 누구는 북쪽으로 있다고 한다. 이러면 두 사람이 가진 지도 모두가 십중팔구 가짜다. 정작 바다는 엉뚱한 동쪽으로 있기 쉽다.
가쉽성 신문 기사로 이런 제목이 올라간다.
집중 분석, 과연 사냥에 나서기는 한 건가.
독점 취재, 잡았다는 건가, 못 잡았다는 건가.
합계잔액시산표의 차대변 숫자가 안 맞았을 때처럼 남작이 손톱으로 테이블을 톡톡 건드렸다.

『그러니까 그게 말입니다.』
이제 사냥 설은 아무도 안 믿어주고 있다. 새로운 거짓말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음류시인으로의 전직을 이참에 심각하게 고려하며 멋진 이야기를 하나 꾸며보자.
로머디스는 지은 죄를 자복하는 죄인인양 읍소하며 고꾸라졌다.
『이쯤해서 진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군요, 남작님. 짐작하셨겠지만 사실 저희들은 부근으로 사냥을 하러 나온 것이 아닙니다. 실은...』
『실은?』
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은밀하게 도적떼들을 소탕하러 나온 겁니다.』
『하아?』
『도적들이 눈치를 채고 미리 도망가는 일 없도록 하기 위해 사냥이라 철저히 위장을 하였지요. 옷도 평상복으로 준비하고요. 늑대 잡으러 간다며 소문도 퍼뜨렸습니다. 아시겠지만 요즘 도둑들이 오죽 극성이어야 말이죠. 거기다 머리도 좋습니다. 듣자하니 아틀라스의 새로운 영주 하르시폼 경은 숨박꼭질 놀이라도 하는 듯한 도적놈들에게 되려 놀림을 당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쪽으로 출동하니 저쪽으로 달아나고, 저쪽으로 출동하니 이쪽으로 도주하고... 하여!』
주먹으로 테이블을 쳤다. 아자자자~ 클라이막스다.
『그 망할 도적떼의 뒷통수를 후려치기 위해 몰래 말을 달려 이곳까지 당도한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하여 저희들은 표면상 계속하여 사냥 중인 거지요. 비록 수중에 그 흔한 토끼 한 마리 없을지언정, 곰 발바닥과 혈투 한 번 못해봤을지언정! 꼼짝마라, 못된 도적놈들! 아아, 슬레진 제국 만세. 우리의 필립 오넬 황태자께 영원무궁토록 영광 있으라.』
왜 거기서 만세 삼창이 나오는 건지 묻지 마라. 로머디스는 로스트 치킨이 무슨 도적놈 머리통이라도 되는양 좌우로 비틀어 꺾었다.

『그런 사연이!』
남작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도적이란다, 도적! 남의 돈을 빼앗는 패륜아들! 강도놈! 충격을 받아 손가락이 하애지도록 내프킨을 움켜잡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작은 상인 출신이다. 구름 위에서만 사는 일반 귀족들과는 달리 지금과 같은 도적떼 이야기는 피부에 직접 와닿았다. 거기다 제피리아가 자급자족 시스템이 아닌 외지와의 상업으로 살림을 꾸려가는 곳이라면? 실제로 제피리아는 특산품인 포도주를 팔아 내일의 일용할 양식을 구입하고 있다. 외지인과의 거래는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으며, 때로는 거대 외국 상단이 방문하기도 한다. 이를 다르게 말해보자. 이곳에선 치안 안정이 경제의 밑거름이다. 돈 싸들고 물건을 사러 왔는데 도둑에게 죄다 털렸네~ 해서는 장사가 안 된다. 품질 좋은 포도주는 두 번째다. 장사의 기본은 첫째도 사회적 안정, 둘째도 사회적 안정이다. 강도가 창궐하는 곳으로 가난도 창궐한다.

『이, 이럴 때가 아냐. 큰 아이를 어서 불러다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도적놈들은 남쪽으로 도망간 듯 하더이다. 코빼기도 못봤지 뭡니까.』
『다, 다, 당장 토벌대를 세우지 않으면!!』
『놈들이 줄행랑을 칠 법도 하죠. 그도 그럴 것이 이분이 누구십니까. 임금님께서도 진저리를 치는... 아, 이건 좋은 표현이 아니지. 아무튼 그 유명한 후작 나으리가 아니십니...』
『거기 누구 없느냐! 당장 가서 리나를 불러와라~!!』
『저기요? 제 말을 들어보셔요. 도적놈들은 도망갔다니까요.』
라고 해도 남작은 이미 아드레날린 과다 분비 상태여서 호흡이 어려웠다.

이 마당에 훌륭한 뒷북 하나.
『맙소사, 남작! 그대는 아들의 이름을 리나라고 지었단 말입니까?! 그 많고 많은 이름 중에 하필 리나?! 폴이나 제임스, 내지는 레이몬드도 아닌! 리나?!』
돌아다보니 누구처럼 남의 이야길 한쪽 귓구멍으로 흘린 레죠 그레이워즈 후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Posted by 미야

2008/03/20 10:29 2008/03/20 10:29
Response
No Trackback , 2 Comments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819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Comments List

  1. 엘리바스 2008/03/20 12:15 # M/D Reply Permalink

    후후후후후.. 드디어 만나겠군요...

  2. kimmie 2008/03/20 13:26 # M/D Reply Permalink

    아 담편엔 드디어 열여섯 꽃다운 아가씨와 서른 중반의 역시 꽃다운(...) 아저씨의 첫만남이 되겠군요. 미야님 필력이 참 대단하다고 느끼는게, 처음 이 시리즈를 읽었을때 전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레죠리나 커플링을 지지하게 되었거든요. 1기까지 다시 돌려보며 '아아, 둘 사이의 화학작용이 보여...'라고 자가세뇌하고 있었으니까요;;;

« Previous : 1 : ... 1237 : 1238 : 1239 : 1240 : 1241 : 1242 : 1243 : 1244 : 1245 : ... 1974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993100
Today:
37
Yesterday:
192

Calendar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