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일상생활46

초원을 불살랐던 화마는 마침내 그 기세가 꺾였고, 오랜만에 일어난 핀치는 외출복을 걸쳤다.
차렷 자세로 선 상태로 손을 각각 배꼽과 그 건너편 허리로 가져갔다. 그 상태에서 자신의 자세를 점검해봤다. 물리치료가 효과가 있어 엉덩이를 뒤로 내민, 속칭 오리 궁댕이 포즈라고 불리우는 디스크 환자의 전형적인 굴욕의 자세까지는 가지 않았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모습은 나쁜 징조를 걱정하는 점술가의 카드처럼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오만상을 찡그리며 척추 보호대를 챙겼다. 이른바 영감님 코르셋이라 부르는 종류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 날씬한 허리를 인위적으로 만들기 위해 여성들이 착용했던 속옷과는 그 기능이 다르면서도 방식은 비슷하다 하겠다. 나이 탓에 어쩔 수 없이 늘어진 아랫배를 이리저리 끌어 모은 뒤, 탄력감 제로의 플라스틱 안에 꾸겨 넣고 모두 여섯 개나 되는 벨크로로 단단히 조였다. 헐렁하면 효과가 없다. 의사는 밭은 호흡이 나올 정도로 잡아당기라 조언했다.
끙끙거리며 작업을 마치고 거울을 보니 피가 머리로 몰려 얼굴이 시뻘겋게 되었다.
핀치는 다시 양손을 배꼽과 그 건너편 허리로 가져갔다. 상당히... 꼴불견이었다.

지팡이를 두고 나온 노인네처럼 힘겹게 걷다 택시를 발견했다.
손을 흔들어 신호를 보냈다.
뉴욕시 택시는 승객이 몸이 불편하다고 해서 승차거부를 하면 라이센스를 박탈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택시기사는 재수가 없다는 미신을 들어 장애인을 잘 태우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라미시는 달랐다. 그의 생각에 맹인이나 불구자는 영업에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역겨운 체취가 나는 마약중독자나 바닥에 토하는 술주정뱅이가 더 싫고 무서웠다. 지지난 밤에도 토사물이 묻은 시트를 닦아내느라 엄청 고생을 했다. 게다가 역한 냄새는 아무리 걸레로 문질러도 잘 빠지지 않았다.
뒷좌석에 올라탄 승객이 몸을 움찔 떠는게 보였다. 특유의 시큼한 냄새를 맡은 것이리라. 라미시는 이번 차례가 끝나면 적당한 장소에 차를 세우고 시트를 걸레로 다시 닦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다만 2시간 전에도 같은 내용을 떠올렸다는게 함정 - 가게에 들려 시트러스 향이 나는 방향제를 사야겠다며 투덜거리며 핸들 위로 올려놓은 손가락을 툭툭 움직였다.

『어디로 모실까요.』
핀치는 20분 거리에 있는 공원 이름을 댔다. 림보에서 두 블럭 떨어진 곳이다.
『좀 늦으셨네요.』
백미러를 뒤편을 흘끔거리던 라미시의 말에 다시 한 번 몸을 움찔 떨었다.
『실례지만... 지금 뭐라고요?』
『늦으셨다고요.』
이 업계의 사람들 다수가 그러하듯 라미시는 수다가 많은 편이다.
『어린이 바자회 때문에 거기로 가는 거죠? 오전에 학부모 한 명을 태워서 알아요. 행사는 오후 2시부터인데 지금 출발하면 늦으신 거죠. 하지만...』
그가 핀치의 허리 보호대를 알아차렸다.
『흐음, 선생님이 늦어도 다들 이해를 해주실 겁니다. 허리는 어쩌다 다치셨어요? 무거운 걸 들다가? 아님 학교에서 넘어지신 건가요? 요즘 애들은 많이 거칠어서 큰일이겠어요.』
핀치는 자신이 교사로 오해받았음을 깨달았다. 돗자리만 펴지 않았을 뿐, 남의 관상도 볼 줄 안다던 택시 운전자들은 종종 그를 교사나 도서관 사서로 오인하곤 한다. 두꺼운 안경 탓인가? 아니면 손에 들고 다니는 책 때문일까? 누군들 알까. 라미시가 백미러로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음을 깨닫자 핀치는 애매한 미소를 띄운 채 적당히 박자를 맞췄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게 뼈아픈 실수였다. 라미시는 신이 났다.
『그렇구 말고요. 저도 자녀가 있지만 이건 뭐 걸어 다니는 폭탄 수준이라니까요. 저번에는 친구와 싸우고 돌아와서는 엉뚱하게 제 애미에게 화풀이를 하지 뭡니까. 네 태도가 그게 뭐냐 야단을 쳤습지요. 그랬더니 요 밤톨만한 자식이 자기 방에 대화 거부 - 부시는 사탄이었다, 라고 적혀진 스티커를 붙여놓고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놓지 뭡니까. 제가 어렸을 적엔 상상도 못 했던...』
핀치의 안색이 서서히 납빛으로 변해갔다. 라미시의 수다는 이제 전반적인 교육 불신으로 주제가 옮겨가「바자회랍시고 코흘리개 애들에게 장사를 시키다니오. 나는 반댈세!」가 되었다.
『어떤 학교에서는 지각을 하지 않고 수업에 꼬박꼬박 참석을 하면 현찰로 돈을 준다면서요? 완전 미친 짓이예요. 세상은 돈이 전부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우리 아들은 생각이 달라요. 돈이 정의이고, 돈이 곧 만능이고, 돈이 권력이고... 뭔가 기본부터 잘못되었어요.』
나는 사실 선생님이 아닙니다 고백할 타이밍을 놓친 핀치는 음, 이러고 미소를 지었다.
리스는 그런 억지 웃음을 짓는 걸 대단히 싫어했는데 라미시는 반대로 좋아하는 눈치다.
『역시 선생님은 대화가 통하는군요!』
우리가 언제 대화를 했다고? 자기 혼자서 다 말해놓고 - 핀치는 이번에도 웃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라미시의 수다가 교육에서 갑자기 낙태 금지나 동성 결혼 문제로 건너뛰었다는 얘기는 아니고.
신호를 기다리며 서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면서 시커멓게 생긴 사람이 허겁지겁 올라탔다.
《어라... 리스 씨?》
그럴 리 없었다. 목이 불편한 핀치는 최대한 고개를 돌려 동석자의 얼굴을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핀치의 시야로는 콧잔등 일부만 보였을 뿐이고 대신 제법 묵직해 보이는 검은색 가방과 왼손으로 쥐고 있었던 권총 한 자루는 보기 싫어도 눈에 잘 들어왔다. 무기에 반응, 그는 두 팔을 엉성하게 들어올렸다.
『헤이! 이보쇼! 뭐하는 짓입니까. 합승은 안 돼요. 그러니 도로 내리는게 좋...』
『잔말 말고 출발해. 어서!』
이제 라미시도 권총을 보았다. 수다쟁이 운전기사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쏘, 쏘지 말아요. 제발 쏘지 마세요!』
『출발하라니까.』
불청객은 안전장치를 풀고 라미시의 머리를 겨눴다.
핀치의 눈이 가늘어졌다. 총을 쥐고 있는 남자의 손은 떨리지 않았다.

『비상 단추를 누를 생각은 하지 마. 양손을 계속 핸들 위에 올려놓고 직진하도록.』
『돈이 필요한 겁니까? 그럼 다 가져가세요! 다 드릴게요! 그, 그러니 제발!』
『머리가 날아가기 싫으면 입 다물어.』
『예, 예예!!』
『속도를 더 내. 하지만 과속은 안 돼. 눈치보지 마. 계속 직진한다.』
택시 기사를 겁준 사내는 다시 핀치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신! 고개를 숙여.』
곤란하다. 하라는 대로 하고 싶지만 신체는 협조를 거부했다.
『그게...』
『뭐야, 교통사고 환자냐.』
네, 아니오 대답을 생략한 핀치는 최대한 몸을 숙이려고 노력하며 남자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예기치 않은 동석자는 그가 보인 신체 언어를 제대로 읽어낸게 분명했다.
『운이 나빴다고 생각해. 하지만 제대로 협조하면 다치는 일은 생기지 않아.』

슬프게도 리스는 그제야 연락을 취해왔다.
《핀치? 지금 어딥니까. 번호가 나왔습니다.》
거기에 차분히 대답할 수가 없다는게 아쉽다.
그래도 이번 번호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리스가 핀치의 응답 없음에 의아함을 표현하며 다시 이름을 불러왔다.
《핀치?》

핀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우린 어디로 가는 거죠.』
『조용히 해.』
『무슨 일인가요. 왜 이러는 건가요.』
『질문을 하지 말라고 했잖아!』
권총을 쥔 동석자가 짜증이 난다며 고함을 질러댔다.
이 정도면 리스의 귀에도 충분히 들렸을 터, 실제로 리스가 흡, 이러고 놀란 소리를 냈다.
《금방 갈게요.》
소리를 낼 수 없었던 핀치는 눈동자만 옆으로 조용히 굴렸다.

Posted by 미야

2012/12/24 11:03 2012/12/24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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