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일상생활45

※ 낙서 식으로 짧게 이어가고 있는 미드 Person Of Interest 팬픽입니다. ※


불붙는 고통이 영혼을 잠식해 들어갔다.
짐작했던 바 그대로 벤조디아제핀 계열의 진통제는 그다지 효과를 내지 못했다.
의사는 1부터 5까지의 숫자 중에서 지금 느끼는 통증의 수치가 어느 정도 될 것 같으냐 질문을 던져왔다. 핀치는 잠시 생각한 후 4.327 라고 대답했다. 닥터 에반즈는 소수점을 찍고도 뒤로 세 자리나 덧붙인 구체적인 숫자에 놀란 눈치였다. 당황하여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요령으로 책상을 툭툭 건드렸다. 그렇다고 해도 어리석게「그거 참 독특하네요」입방정을 떨지는 않았다. 그의 환자는 통증을 통제하려고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었고, 계속해서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있었다. 성자의 고행을 닮은 그 눈물겨운 노력을 비웃어서는 안 될 것이다. 노련한 의사는 고개를 숙여 독일어나 라틴어로 추측되는 단어 몇 가지를 기록했다. 악필인데다 필기체여서 어지간하지 않은 이상 알아볼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오늘날의 병원은 손으로 쓴 챠트 말고 컴퓨터 전산 작업으로 환자에 대한 자료를 기록한다. 그러니 여기서 그의 악필이 문제될 일은 없다.
「곤란합니다. 저번보다 더 강한 약을 지어드릴 수 없어요. 제 양심을 걸고 당신을 중독자로 만들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냥 옥시코돈 사흘치 처방전만 써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단호하게 거절하는 의사 앞에서 핀치는 더 이상 약을 달라 졸라대지 않았다.
손바닥을 싹싹 빌며 애원할 수도 있었으나 품위를 잃기 싫었다.

무슨 짓을 해도 편안해지지 않았다.
똑바로 누웠다가 지금은 엎드린 자세로 부드러운 베개에 코를 박았다. 덕분에 호흡이 곤란해졌다. 그렇다고 해도 뼈에 고정 핀을 넣은 상태로는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는 별 거 아닌 동작이 발레의 데벨로뻬 만큼 어려워지는 법이다. 얼굴을 돌릴 수 없으니 남는 길은 질식사밖에 없다. 핀치는 속으로 조소했다. 엎드려 졸다 죽으면 그야말로 해외토픽 감 - 그래서 다시 노력을 기울여 베개를 코가 아닌 이마에 대는 것으로 약간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코가 뚫리자 살 것 같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허리 통증은 장난이 아니다.
에라 모르겠다 이러고 약통에 든 알약을 전부 입안에 털어놓고 와드득 꿀꺽 먹어버릴까 생각도 해봤다. 그러니까 생각만 해봤다. 그 일을 실천에 옮기려면 그만한 각오와 다짐이 필요한 법인데 핀치로서는 그만한 분량의 결심을 끌어 모을 수 없었다. 약통의 뚜껑을 열고나면 늘 손이 떨렸다. 결국 거기까지였다.
대신 후회와 죄책감이라는 것이.
수십 개의 발이 달린 벌레처럼 스멀스멀 올라온다.

TV를 보는 걸 퍽이나 싫어했지만 리모컨을 조작하여 코미디 프로그램을 틀었다.
웃음소리를 들으면 통증이 완화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본인이 직접 웃으면 더 효과가 있고.
유감스럽게도 윙윙 소리를 내는 머리로는 유명 코미디언의 잡담 까먹는 내용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핀치는「너희들끼리 맘대로 떠들어」이러고 조작된 웃음소리를 한쪽 귀로 흘려보냈다. 깔깔 웃는 방청객들이 눈물을 닦으며 박수를 치고 있다. 고속도로에서 운전 중 문득 고개를 돌리니 위협적인 표정을 한 타조가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는 줄거리였다. 그게 그렇게 웃긴 이야기던가. 모르겠다. 핀치는 방송을 따라갈 수 없었다. 입담이 대단한 코미디언이 다시 너스레를 떨었다. 팬더가 1등석을 타고 미국에 왔어요. 기내식으로 뭐가 나왔게요. 대나무 잎사귀요, 와하하.
그 한심스러움에 동조할 수 없었던 핀치는 그레이스와 손을 잡고 공원 산책로를 걸었던 좋은 시절을 회상하며 행복한 꿈을 꾸기로 결심했다. 눈을 감고 있으니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레이스는 파란색 외투를 입었다. 작업 중 실수를 저질러 소매에 물감이 묻어있다. 다행히 비슷한 초록색 물감이 튀었다며 그녀가 웃었다. 파란색과 초록색의 조합이라니, 마티스가 좋아할 조합 아니겠느냐며 아무렇지도 않게 얼룩을 문지른다. 그녀의 가냘픈 손가락으로 짙은 초록색이 번져간다.
물감이 번진 손을 활짝 펴보이며 그레이스가 질문을 해왔다.
「이런 나와 팔짱을 낄 수 있어요? 해롤드.」
「물론. 물감 따윈 무섭지 않아.」
이것이 과연 졸음인지, 아니면 단순한 피로감인지는 구분이 되지 않았다.
멍한 느낌이 더 커졌다. 상상 속의 걷는 동작은 굼떠졌고 빛은 나뭇잎 그늘에 녹아들었다.
이곳은 저승인가. 그레이스는 페르세포네인가. 명부의 여왕과 기꺼이 팔짱을 끼고 숲속을 걸었다.
소리를 내어 대화를 하지 않아도 영혼과 영혼이 하나로 통했다는 그런 충족된 느낌.

애정을 담아 그녀의 팔과 손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파란색 코트는 어디에 벗어뒀어요? 그레이스.」
「어라. 내 이름은 그레이스가 아닌데요, 핀치.」
어느새 상대는 키가 더 커졌고, 훨씬 늠름해졌다. 이제 핀치는 눈을 맞추기 위해 까치발을 해야 했다. 어리둥절한 기분이다. 동시에 이 변화가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그렇다, 이 모든 건 화색의 뇌세포가 만들어낸 가상현실이다. 질서정연하고 논리적인 것은 여기에 없다. 핀치의 몸은 무게감을 잃고 바닥에서 1cm가량 떠올랐다.
멍한 눈빛을 하고 있자 상대가 코앞에서 손가락을 딱딱 소리를 내어 튕겼다.
「뭐예요. 잠들지 말아요. 지금 꿈 꿔요? 해롤드.」
「어... 음. 어차피 꿈이잖습니까.」
입으로 내뱉고 나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렇다. 이건 꿈이다. 그러니 곤란해질 일 따위는 없다. 심호흡을 하며 아기처럼 배를 볼록 내밀었다. 그렇게 하는 걸 리스가 재밌다며 구부러진 새우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레이스는요?」
「안전한 곳으로 돌아갔는데요.」
「그럼 우리도 안전한 곳으로 돌아가야 하겠군요, 미스터 리스.」
「그래야 하겠지만...」
친구는 밝은 모습으로 웃었다.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바보처럼 보이기도 하는 미소였다.
「서두를 필요는 없어요, 핀치. 그렇지 않나요?」
대답 대신 팔을 뻗어 새치로 뒤덮인 남자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 - 핀치는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 의견에 동의했다.

못이 박힌 투박한 손이 핀치의 등을 덮었다.
이것은 마법의 손이다. 아픔은 사라져라, 그들은 함께 주문을 외웠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를 잘 알고 있다며 손바닥이 목덜미에서부터 꼬리뼈 부근까지 왕복하여 움직였다.
의사가 뭐라고 그랬더라... 맞다. 이완. 긴장을 풀고.
뒤틀린 뼈들이 수다를 떨며 각자 제자리를 찾아 덜걱거리기 시작했다. 간혹가다 리스가 그것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너는 이쪽으로. 너는 다음 순서로. 차례를 지키렴. 오글거리며 뼈들이 소음을 내었다. 동시에 적당히 꾹꾹 누르는 압박이 느껴졌다. 핀치는 입을 둥글게 벌렸다. 와, 기분 좋다.
「굉장해요.」
「그거 참 다행이군요.」
「리스 씨, 그거 다시 해봐요.」
「어떤 거요.」
「꾹꾹 누르는 거.」
「이건 지압이라고 하는 겁니다.」
「리스 씨, 그거 좋아요. 정말 좋아요.」

간호사들이 킥킥 소리를 내어 웃었다.
물리치료 중에 조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인데 환자가 잠에 취해 잠꼬대를 하고 있다.
『리스 씨. 그거 기분 좋아요...』
글쎄다. 깨어나면 창피해 죽을지도.

Posted by 미야

2012/12/21 13:33 2012/12/21 13:33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1792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 440 : 441 : 442 : 443 : 444 : 445 : 446 : 447 : 448 : ... 1974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992402
Today:
224
Yesterday:
213

Calendar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