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의 기억은 뒤죽박죽이다.
큰 열을 내며 드러누운 탓에 벌어진 일의 순서라던가, 장소라던가, 사람의 얼굴 같은 것들이 죄다 섞여 혼란스런 그림이 되어버렸다.
아무튼 나는 서남문 한 가운데서 기절했고, 어린애가 죽었다 누군가 소리를 질렀고, 누군가의 등에 업혀 어딘가로 옮겨졌고, 의원으로 짐작되는 자가「몸살입니다, (이 정도로는) 안 죽습니다.」말했고, 열을 식히기 위해 얼굴을 덮은 차가운 물수건이 코와 입을 막아 질식사의 위기를 겪었고, 누군가 물그릇을 엎었고, 젖먹이가 울어댔고, 정복을 입은 관원이 찾아와 질문에 답을 하라며 침상에 누운 내 몸을 마구 흔들었으며, 포도 알보다 곱절은 굵은 약을 억지로 삼켰고, 까무룩 정신을 놓고 잠들었다. 그러다 다시 깨어나면 이름이 무엇입니까, 이 손가락은 몇 개입니까, 식의 우문이 이어졌다.
만사가 귀찮아 제대로 보지도 않고 그 손가락은 두 개요, 대꾸했더니 억지로 복용해야 할 약이 더 늘어 포도 알 크기가 복숭아 크기가 되어버렸다. 맛 또한 상상초월로 지독해졌다.
담 너머 익숙한 향취 맡으매 님과의 밀월 약속이 꿈처럼 아득하여 슬픔을 지운 달은 뜨고 지고 -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속벽향가에 실린 연애시나 실컷 중얼거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진짜 미쳤을지도 모른다.
1편부터 42편까지 외우고 나서야 입안을 맴돌던 지독한 쓴맛이 가셨다. 몸에는 좋을지 몰라도 정신에는 해로운 약이었다.

『얼굴빛이 많이 좋아졌구나.』
진통제에 취해 다소 멍한 기분으로 날 찾아온 손님을 쳐다보았다.
『누구신지요.』
『아... 그게. 이 아저씨는... 그러니까 뭐랄까... 음.』
사내는 차마 자신이 저질렀던 만행을 제 입으로 털어놓기가 민망했던지 있지도 않은 티끌을 털어내겠다며 뒷목을 문질렀다. 그러면서 투명한 더듬이를 길게 뻗어 내 안색을 주의 깊게 살폈다. 뭐냐, 이 인간. 군장을 벗고 평복으로 갈아입어 인상이 크게 달라졌을 터이니 포박한 나를 성문 안쪽을 향해 집어던진 본인이라는 걸 들키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는 눈치다. 그걸 노리고 일부러 구렛나루까지 밀었다.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이라벽치, 이 등신각치야. 소원대로 끝까지 모르는 척해주마.
나는 시치미를 잡아떼고 다시 한 번 질문했다.
『누구신지요.』

이라벽치의 어두웠던 표정이 활짝 펴졌다. 내가 누군지 못 알아보는구나, 지화자. 사내는 신이 나서 가까이 있던 의자를 세게 끌어당겼다.
나는 다소곳하게 손을 모으고 그가 의자에 앉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상당히 덩치가 큰 자였다. 산속에서 그 난리를 쳤을 적엔 몰랐는데 그가 엉덩이를 붙이자 방 자체가 비좁게 느껴졌다. 심지어 천장도 아까보다 1척은 낮아진 것 같아 숨이 막혔다. 과연, 그래서 이름에 치 라는 글자가 붙는 거였다. 치는 큰 남자를 의미한다. 속어로 거대한 남근이라는 의미도 있다.

『우선 이걸 가져왔다. 네게 무척 중요한 물건 맞지?』
많고 많은 잡동사니 중 하필이면 그가 가지고 온 물건은 아버지가 먼 길 떠나는 나에게 내려준「자결 상자」였다. 새카만 빛깔의 자개 장식 상자를 보자 뺨 근육이 굳으려 했다. 집안의 명예를 항시 잊지 말고 행동을 바르게 하여 - 그는 안에 든 서찰을 꺼내 읽고 내가 어느 집 자식인지 확인했다. 그리고 중요한 거라 판단하여 일부러 챙겨왔다.
목이 터져라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은 내 심정은 까마득히 모르고... 치밀어 오르는 걸 삼킨 채 상자를 받았다.

『훌륭하신 아버지다. 허락을 구하지 않고 읽었는데 좋은 내용이었다.』
물론 그랬을 것이다. 적은 글 속에 영혼은 없어도 최소한 모양새 하나는 반듯했으니까.
『도중에 사고가 있었노라 빈사국으로 연락을 취하긴 했는데 답장을 받기까지는 시일이 걸릴 것 같구나. 그래도 자식인 네가 무사하다는 걸 아시면 부모님께선 크게 기뻐하실 거야.』
과연 그럴까, 이번에도 마당을 향하여 벼루를 집어 던지실 지도.
『네가 학업을 할 내재원에도 알려 머무를 방을 준비해둬라 급히 일러뒀다.』

이쯤해서 이라벽치는 송충이 모양의 눈썹이 가렵다며 손가락을 얼굴로 가져가 긁기 시작했다.
『끄응... 그런데 뭔가 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아. 내재원 숙사감 양반이 엄청나게 화를 내더라고. 계란을 얻으려면 일단 닭부터 키워야 한다나, 뭐라나. 닭이 없는데 알을 내놓으라는 법이 어디에 있느냐면서...』
다음으로 나올 얘기가 어떤 종류일지 짐작이 갔다.
『있잖아, 이거 제법 민망한 이야긴데...』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거다. 어차피 가던 도중 죽임을 당할 아이라서 아버지는 사전에 미리 예비할 일을 등한시했다. 책값이니 수업료니 하는 것들을 마련하지 않았고 내재원의 숙소도 미리 잡아두지 않았다. 황제에게 선물을 보내는 건 자존심을 세워가며 엄청 신경을 썼는데 그 다음부터는 신호가 뚝 끊겨 아이의 의식주 문제 전부가 허공으로 붕 떠버렸다.
『사친으로 온 네가 여기 이사실에서 굶어 죽는 일은 결단코 일어나지 않겠지만... 곤란하게 되었구나.』
수중엔 땡전 한 푼 없는데다 심지어 당장 갈아입을 속옷조차 없다.

이런 건 싫으니 집으로 보내 달라, 울음을 터뜨릴 거라 짐작했던 모양이다. 커다란 몸을 긴장시키고 곧 가득 차올라 이불을 흥건히 적실 눈물을 각오했다. 이라벽치는 호랑이를 잡는 것보다 아이들 달래는데 더 어려움을 느끼는 남자였다.
『어허! 울지 마! 울지 말고!』
하지만 나는 희노애락을 전부 잊어버린 멍한 표정으로 그를 가만히 쳐다봤다.
울어서 해결이 된다면야 맹인이 될 때까지 눈물을 떨굴 것이다. 매운 양파를 얼굴에 문질러서라도 울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우는 건 단순히 체력 낭비다.
당장 급하게 된 건 그동안의 약값이다.
자연스럽게 무릎 위로 올려놓은 세공품 상자로 시선이 갔다.
이걸 팔아 한 달치 생활비라도 벌면 좋으련만.
『곧 집에서 좋은 연락이 올 거다. 그때까지만 힘내서 참는 거야, 알겠지?』
남의 사정도 모르고 이라벽치는 속 편한 소리를 꺼냈다.
허나 고국 빈사국에서 달가운 답장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어쩐지 알 수 있었다.

약간의 호의를 얻어 깨끗한 옷을 구했다.
『우리 아들 놈 옷이야.』
이 정도면 대충 맞을 거라며 사내 옷을 몇 벌 꺼낸 이라벽치는 꿈에도 내가 여자아이라는 걸 모르는 눈치다. 내 몸을 진찰을 한 의원이 사실을 바로잡아주었을 법도 했는데 어째서인지 나는 계속 사내 취급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빈사국 지리가 家의 장자(長子) 안즈」로 적힌 서류들이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그 범인은 바로 이라벽치였다.
벌써부터 피곤해진다. 언제부터 일이 꼬였는지... 이걸 무슨 재주로 바로 잡아야 할까.
『저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러니? 내 눈엔 그다지 낡은 것 같진 않은데...』
『마음에 듭니다.』
잘라 말하고 감청색의 옷을 손으로 잡아챘다.

Posted by 미야

2015/05/12 16:36 2015/05/12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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