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일상생활37

데이지의 꽃말은 희망, 평화, 천진난만함, 아름다움.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꽃향기가 코를 간질인다.

이승과 저승간의 불분명한 경계와도 같은 도서관에 도자기로 된 아름다운 꽃병이 있을 리 없다. 폐허로 변해버린 지하실까지 직접 내려가 곳곳을 두리번거렸지만 이거다 싶은 물건은 찾지 못했다. 다만 운이 좋아 청소용품을 넣어뒀을 창고로부터 모서리가 떨어져나간 깨진 플라스틱 물통을 겨우 하나 건졌다. 그렇다고 해도 3층 작업실에 있는 책과 컴퓨터 전부가 물기와는 상극이다. 그런 까닭으로 핀치는 먼지만 대충 털어낸 마른 물통에 리스가 선물한 꽃다발을 비스듬히 세워놓았다.
꽃을 보낸 사람의 성의를 대놓고 무시하는 작태다.
그 이전에 벌써부터 목말라하며 시들거리는 데이지가 가엾다.
어쩌다 애수에 젖어 턱받침을 한 자세로 꽃을 응시했다.

남자에게 꽃을 받을 거라 생각해본 적이 없다.
아마도 장난 - 도넛을 보란 듯이 상자에 담아와 베어에게 먹이고「강아지용 간식입니다, 미안하지만 당신 몫은 없어요.」이러며 짓궂게 구는 사내다. 시저는 황제다. 시저는 남자다. 나도 남자다. 고로 나도 황제다, 여러 추리의 단계를 거쳐 리스가 건넨 귀여운 데이지 꽃다발 역시 짓궂은 장난의 일종이라고 판단했다. 하여 장난에 유머로 대응,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었다.
「이거... 지금 저에게 청혼하시는 건가요, 미스터 리스?」
「에엣?」
「그런데 반지가 빠졌군요. 그러니까 무효.」
리스는 새치름하게 삐진 모습의 고용주를 상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연장자의 근엄함으로 야단을 치기는커녕 아무렇지도 않게 꽃다발을 품에 안자 눈이 커졌다. 청혼 어쩌고 농담을 하자 입도 벌렸다. 순간 핀치는 벌린 입 구멍으로 껍질을 벗긴 땅콩을 던져 넣으면 반응이 끝내주겠다 생각하며 재밌어 했다.
「고마워요, 존. 참 예쁜 꽃이네요.」
「당신도 엄청 예뻐 보여요.」
「네? 뭐라고요?」
리스는 재빨리 고개를 흔들고 정신을 수습했다.
「아뇨. 저번에 언성을 높였던 점에 대해 사과하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카드에 미안합니다, 이렇게 적었어야죠.」
「꽃집 주인이 그러지 말라던데요.」
「데이지와는 안 어울리니까요. 말씀대로라면 히야신스를 골랐어야죠.」
「왜요?」
「히야신스의 꽃말이 미안합니다, 이거든요.」
리스의 눈썹이 점점 더 기괴한 각도로 구부러졌다. 여러 개의 테니스공이 그의 머릿속에서 한꺼번에 통통 튀었다. 몇 개의 공은 기어코 바구니 밖으로 튕겨나갔는데 도로 주워 담을 여유 따윈 없어 보였다. 그는 짐짓 바깥을 손가락질하며 핀치의 의견을 구했다.
「그럼 가서 히야신스를 다시 사가지고 와야 해요?」
「그러지 말아요. 데이지가 불쌍하잖아요.」
거기까지 대화가 진행되었을 적에 핀치는「설마, 장난이 아니고 진짜인가?」의구심을 품었다. 리스는 뒷통수를 긁었고, 정신 사납게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특정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찾고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시선을 어디에 두면 좋을지 몰라 그러는 거였다.
「에잇! 베어를 산책시키고 올게요!」
그러더니 휑하니 달아나 버렸다.
이후로 2시간 동안 연락도 없다.
참 이상한 사람이다.
『나도 모르겠다. 공원에서 양복 차림새로 달리기라도 하는가 보지.』
꽃잎을 건드리자 손가락으로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 약간의 터치에 꽃잎이 기력을 잃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사실 리스는 달리기를 하고 있지 않았다.
개를 끌고 광장을 지나 좁은 산책로로 접어들었다.
몸에 달라붙은 운동복을 입고 뜀박질을 즐기던 여성이「잠시만요.」이러고 양해를 구한 뒤 베어를 지나쳐 빠르게 달려 나갔다. 목줄에 매어있는 개는 끙끙 앓았는데 본능에 충실한 나머지 여자를 앞질러 뛰어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 듯했다. 허락만 해주신다면 제가 1등을 먹겠습니다, 짙은 갈색의 눈이 애원을 담아 리스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오늘따라 유별나게 차갑게 굴고 있는 주인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의미로 목줄을 바짝 잡아당겼다.
개의 목덜미가 추욱 처졌다. 아아, 대단히 실망.
『지금은 안 돼. 왜냐하면 우린 어떤 사람을 몰래 훔쳐보는 중이니까.』
광장 방향에선 우거진 나뭇가지가 내려앉은 산책로를 쳐다봐도 사람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반대로 이쪽에선 광장의 모습이 한눈에 잘 내려다 보여서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애들이라던가, 아이스크림을 주문하는 여자, 비둘기를 관찰하는 노인, 그리고 휴대용 이젤을 펼쳐놓고 스케치에 여념이 없는 무명 화가의 존재를 알아보기 쉬웠다.
『붉은 머리카락의 저 여자란다. 이름은 그레이스지. 너도 잘 기억해두렴.』
망원경이 없는 탓에 이 거리에서는 그녀가 종이에 옮기는 내용이 어떤 종류인지 판가름하기 힘들다. 풍경을 그리고 있는 걸까? 아님 사람을?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하늘을 떠도는 구름 형태를 베끼는 중일 수도 있다. 여자는 간혹 가다 머리를 들어 정면을 응시했고, 그때마다 지우개를 들어 어렵게 그린 형체를 지웠다. 좀처럼 뜻대로 되질 않았던지 콧잔등으로 주름을 만들고 한숨을 내쉰다. 이윽고 연필 - 혹은 색연필이 빠른 속도로 슥슥 움직였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귀에 이어폰을 꽂지 않았다.
다른 길거리 화가와 달리 음악을 들으면서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온전히 집중하며 - 집중하는 모습이 누구와 많이 닮았다 - 빛으로 가득한 풍요로운 세계에 매료되어버린 모습은 꽃처럼 화사하고 고왔다.

부디 나와 결혼해 주세요.
그녀에게 청혼했겠지.
반지도 줬을까.
금으로 된 가락지를 주었을 거야.
그리고 키스했겠지.
누구보다 사랑스럽게.

이글거리는 눈으로 광장을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자 사람들이 불편해하기 시작했다.
이제 슬슬 물러서야 할 때다.
『베어, 그만 갈까?』
엉덩이를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붙이고 앉았던 개가 벌떡 일어나 꼬리를 흔들어댔다.
『그래. 핀치가 우리가 돌아오길 기다릴 거야.』
후회와 미련을 담아 돌아보는 짓은 하지 않는다.
다만 앞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Posted by 미야

2012/12/07 15:27 2012/12/07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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