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일생생활26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핀치.》
푸스코와 카터가 그의 귀환을 반겨주었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 기쁘다는 뜻 이면으로「만세! 이젠 우린 살았어!」라는 환호성이 숨어 있었다. 늘 사람을 주의깊게 관찰하는 탓에 사소한 감정 변화까지 예민하게 감지하는 핀치는 점잖게 포장된 인사말에 쉽사리 속지 않았다.

리스를 곁눈질하여 쳐다보았다.
나 없는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글쎄요.
미스터 리스? 부탁이니 안나 카레리나는 그만 내려놓고 절 봐주시겠어요? 게다가 그 책은 리스 씨가 싫어할만한 종류라고요.
그래요? 생각만치 그렇게 두껍지 않은데요.
책의 두께를 말하는게 아녜요. 됐으니 파탄 난 결혼 이야기는 그만 쳐다보고 여기를 주목하세요. 부탁합니다.
흐음, 오늘 당신이 맨 넥타이는 못 보던 종류네요.
리스는 꾸중 듣기 싫어하는 소년처럼 굴었다. 그러니까 짐짓 딴청을 부렸다는 얘기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핀치는 카터와 푸스코를 동료로 생각 안 한다. 그들은 리스의 현지 자원이다. 물론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소모성 인간관계라기보다는 훨씬 더 깊은 관계가 되었다고 생각은 하지만... 어쨌든 핀치와 그들과의 거리는 가깝지 않다.
그런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꼬치꼬치 물어야 할까? 그래야 하나?
이야기를 시도하기에 앞서 몇 번이나 망설였는지 모른다.
이성은 그러지 말라 말렸지만 호기심이 고양이의 목을 졸랐다.

《몰라요, 선생. 알게 뭡니까. 내가 왜 이런 반응이냐고요? 왜 그럴 것 같수.》
푸스코가 액땜을 한답시고 허공에 십자가를 그려보였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하면 8번서의 CCTV를 해킹하여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형사는 자신의 책상에서 일어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복도 방향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핀치는 고무지우개가 달린 연필로 단축키를 눌러 동선을 따라갔다. 각도가 바뀌자 이제 푸스코는 상한 햄버거를 먹고 배앓이를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주름지고, 구겨지고. 찌그러지고.
『전 그저 이야기가 듣고 싶은 겁니다.』
《됐수. 소름끼치니까 과거 일은 그냥 묻어두고 언급하지 맙시다. 괜찮겠지요?》
형사의 표정이 영 좋지 않으니 정복을 입은 경관이 눈짓으로 무슨 일이냐고 물어왔다.
핀치가 듣지 못하도록 핸드폰을 손바닥으로 막고 형사가 대답했다.
《이혼한 마누라야.》
졸지에 푸스코의 전부인이 되어버린 핀치는 훔쳐보고 있던 감시 카메라 화면을 꺼버렸다.

카터는 생각했던 것처럼 입이 무거운 사람이었다.
《무엇을 상상했던지 유감스럽게도 그대로 이루어졌어요, 핀치. 하지만 아무렴 어때요?》
전직 군인의 동질감 때문일까. 그녀는 리스의 여러 만행을 이미 용서한 뒤였다.
《존에게 전해줘요. 보스를 다시는 잃어버리지 말라고요.》
이어 매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법이라고, 카터는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담당자로서 핀치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을 던졌다.
《에디 메시의 시체를 그렇게나 빨리 찾아낼 수 있었던 방법이 뭔지 물어보고 싶...》
모르는 척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말이지.
존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말은 잘 들을 거라는 생각은 당신들 착각이거든.

핀치는 거의 애원했다.
『여기서 그런 거 안 했음 좋겠어요, 리스.』
고용주의 잔소리에 리스는 입을 뾰족하게 말았다.
핀치에게 불만을 표현할 적에 그는 버르장머리 없는 10대 소년처럼 군다. 그게 아니라면 눈앞에서 맛있는 멸치를 빼앗긴 고양이와 매우 흡사해진다.
『공원 벤치에서 이걸 점검할 수는 없잖아요.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볼 거예요.』
『것보다 라이플이 왜 도서관에 있는 건가요, 미스터 리스. 좀비 떼라도 쳐들어 올까봐 그래요?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면 창문에 라이플을 걸쳐놓고 조준 사격이라도 할 작정이에요?! 그런 거예요?』
『그런 바보짓을 왜 합니까. 그 전에 당신을 데리고 재빨리 안전한 곳으로 탈출해야죠.』
자신이 그렇게 무능력해 보이냐며 리스가 화를 냈다. 동시에 그는 머리로 안전한 탈출경로를 검토하는 듯했다. 약간 멍한 눈빛은 생각이 복잡해졌음을 암시한다. 거의 티가 나지 않았지만 그의 시선이 해롤드의 불편한 왼쪽다리를 재빨리 훑었다. 엉덩이로 누르고 앉은 의자도 보았다. 순간 리스의 입술이 진정 못 하고 씰룩거렸다.
설마, 날 바퀴달린 의자에 묶어 전속력으로 밀고 가겠다는 건 아니겠지. 안 돼.
핀치가 목덜미를 문지르며 당혹스러워하는 가운데 리스는 여자의 속살을 쓰다듬는 동작으로 총신을 천으로 문질러 정성스레 닦았다.
『이러면 마음이 진정되거든요.』
『알았어요. 그러니까 그게 당신에게는 차를 마시는 것과 같은 행위라는 거군요.』
그렇다, 아니다 대답은 뒷전이고 돌연 리스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쪽으로 못 보던 컵이 있던데요.』
『아... 집에서 안 쓰는 종류를 가져왔습니다. 원래 세 개짜리 세트였는데 하나는 부주의로 깨뜨렸지요.』
『그럼 두 개가 남았잖아요, 그런데 하나만 가지고 왔어요?』
『아뇨. 두 개 모두 가지고 왔습니다. 그치만 리스 씨는 티백 차를 잘 안 마시잖아요.』
『대신 인스턴트 커피는 잘 마시죠. 그 남은 하나를 제가 가져도 되는 거죠?』
핀치는 이해가 안 갔다.
『당연하죠. 그건 그냥... 뭐랄까. 컵이라고요. 씻어서 화장실 세면대 위에 두었습니다. 마음대로 사용하세요. 일부러 제 허락을 구하지 않으셔도 되요.』
『좋아요. 그럼 말 나온 김에 제가 주전자로 물을 끓이죠.』

두 사람은 같은 모양의 컵에 뜨거운 물을 부어 각각 인스턴트 차와 인스턴트 커피를 마셨다.
『저기. 책장에 숨겨둔 수류탄들을 치웠으면 좋겠는데.』
『그것들은 소음탄입니다, 핀치.』
『저번보다 숫자가 늘어났더군요.』
『많이 안 늘었어요. 누군가 도서관에 강제로 침입하려고 하면 혼쭐이 날 겁니다.』
『꼭 그렇게 해야 해요?』
리스는 엉뚱한 방향을 쳐다보며 뜨거운 커피를 후룩 소리를 내어 마셨다.

그러니까 말이지.
존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말 하나는 잘 들을 거라 생각하면 안 된다니까.

핀치는 정말 이렇게 나올 거냐며 찌푸린 표정으로 리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봤자 간이 튼튼한 그는 동요하지 않는다.
『컵의 모양이 똑같아서 헷갈리겠는데요.』
『제가 쓰는 컵의 바닥으로 빨간색 스티커를 붙여놨어요.』
『그래요? 흐음.』
『왜요.』
『내 컵에는 스티커 안 붙여줄 겁니까. 파란색이나 초록색이면 좋겠는데요.』
『존.』
핀치의 타박에 그는 어린애처럼 씨익 웃었다.

Posted by 미야

2012/11/22 10:27 2012/11/22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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