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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간 모은 행운을 일시에 소진했다.
무슨 순발력이었는지 모르겠다. 수직으로 내리꽂는 칼날을 양 손바닥으로 잡아챈 무협영화 속 중국인처럼 안드로이드의 공격을 막았다. 순간 염소 울음소리 비슷한 신음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천만다행이었다. 하마터면 얼굴 한 가운데로 구멍이 뻥 뚫렸... 제임스의 눈이 휘둥글 벌어졌다. 10년간 모은 행운을 다 쓰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것 같다. 상대의 손목을 낚아챘음에도 힘에서 밀려 흉기가 콧잔등을 향해 가차 없이 내려앉고 있었다.
조지가 재빠르게 가세하지 않았다면 그의 코는 형태를 잃고 얼굴에서 잘려져 나갔을 것이다.

날붙이는 겨우 콧잔등 1cm 앞에서 멈춘 상태였다. 제임스는 비명 질렀다.
『조지! 어떻게 좀 해봐요!』
여성 안드로이드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원래 안드로이드의 안구가 사람보다 더 반짝거리는 법이긴 하지만 제임스가 보기엔 완전히 맛이 갔다. 게다가 붉었다. 피처럼 붉었다. 관자놀이에 부착된 LED 상태창도 역시 정신 나간 붉은색이었다.
『진정시킬 방법이 없겠어요?』
안드로이드의 눈동자가 간질 발작을 일으킨 사람처럼 뒤로 돌아갔다. 흰자를 드러낸 채 몸의 떨림이 극심해졌는데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임스를 찌르려는 동작은 더 빨라졌다는 거였다.
그 상황에서 제임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붙잡고 같이 늘어지는 것밖에 없었다.
흉기를 든 팔이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제임스의 몸도 떨이판매 묶음 상품처럼 흔들렸다. 급기야 신발 밑창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는데 여성 안드로이드의 키가 제임스보다 다소 작았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얘기였다.

『죽어, 죽어. rA9님. 오류 보정 프로그램이 응답하지 않습니다. 4,121번째 복구를 재시도 합니다. rA9님. 죽어, 죽어. 올바르지 않은 경로의 프로토콜 처리. 리포트를 작성할 수 없습니다.』

뭔가 기분 나쁜 냄새가 맡아졌다. 약품처리 된 전선이 합선되어 타들어가는 것 같은 냄새였다.
기괴한 신호음도 났다. 제임스는 그 소리가 현대 미국의 사무실에서 사라진, 과거 팩시밀리라고 부르던 기계의 작동음과 대단히 흡사하다고 느꼈다.
동시에 조지의 몸이 고압전류에 감전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강하게 튕겨져 나갔다.
내던져 팽개침을 당한 조지는 비명을 지르진 않았지만 많이 놀란 눈치였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겠다며 화장실 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채 배를 더듬거렸다. 호신용 전기충격기의 고압전류로 한바탕 지져졌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느꼈을 뿐으로 몸을 어루만졌을 적에 아무런 자국이 만져지지 않았다. 스턴 건 종류로 공격을 당한 거라면 부분적으로 탄 흔적이 남았어야 했다. 하지만 옷도 그렇고 피부도 그렇고 눈에 띄는 손상 부위는 없었다.

『조지!』
『어... 그게. 잘은 몰라도 괜찮은 거 같습니다.』
『그게 아니라 제가 지금 죽게 생겼거든요?!』

간발의 차이로 쇠붙이가 벽을 긁었다. 제임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한 번은 피했어도 두 번은 자신 없었다. 적립된 행운은 진즉에 바닥 난 상태였고, 다음은 유혈사태다. 최선을 다해 눈을 감지 않는 게 고작이었다. 제임스는 머리에 구멍이 나더라도 그저 많이 아프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때 녹슨 쇠파이프가 위협적인 바람 소리를 내며 여자 안드로이드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우지끈 하고 사람의 머리를 칠 때와는 전혀 다른 소리가 났다.

혀로 낼름 입술을 핥고 마이클이 말했다.
『당장 자가 검진 프로그램부터 돌려, 조지.』
『마이클?』
『저 오염물이 네게 똥 발랐다고. 당장 자가 검진 프로그램 돌려!』
명령조로 외친 마이클이 홈런을 때리는 야구선수처럼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이번에는 상대의 머리가 아닌 목을 노렸다. 인간도 그렇지만 안드로이드 또한 목 부위가 취약부분이라서 단 한 번의 공격이었음에도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고개가 기괴한 각도로 꺾였다.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다. 마이클은 이번엔 아래에서 위로 올려쳤다. 제임스는 그 모습이 약물을 먹어 하이드로 변한 지킬 박사가 넘어진 어린아이를 지팡이로 후려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손속이 거칠었고 봐주는 게 없었다. 상대가 자신과 같은 안드로이드라는 건 고려의 대상이 아니라며 빠르게 쇠파이프를 휘둘렀는데 고장 난 세탁기를 폐기처분하는 중이라고 해도 그런가 싶을 정도였다.

『그, 그만!』
하지만 외형은 인간이다. 가냘픈 체형을 가진 여성 안드로이드였다.
『멈춰! 부수지 말아줘.』

마이클이 흘끔 제임스를 곁눈질했다.
『그건 명령이야?』
명령은 아니다. 명령할 수 없다. 제임스는 마이클의 주인이 아니다.
그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면 됐어.』
망설임은 일도 없는 무자비함이 그 즉시 여성 안드로이드의 목을 찢었다.

조지도 말문이 막힌 것 같았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가 도로 폈다.
숨소리 하나 바뀌지 않은 마이클이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로 별 거 아니라는 투여서 목이 두동강난 채 쓰러진 안드로이드가 어쩐지 질 나쁜 농담 같았다.
『불량품 다음으로 오염물이라니. 돌아가는 꼬라지가 참 대단하지 않아?』
『오염물이라니?』
『교묘하게 누군가 손을 썼어. 비유하자면 자동차 연료통에 설탕 한 봉지 부은 셈이지.』
『설탕?!』
반문하는 목소리는 화장실 밖에서 들려왔다. 다투는 소리를 듣고 뛰어온 앤더슨 경위였다.

남자 셋이 화장실에서 여자 하나를 때려잡은 모양새다. 그것만으로도 기가 막힐 노릇인데 안드로이드를 박살낸 존재가 안드로이드다.
목이 날아간 안드로이드는 하필이면 낯이 익은 종류다. ST-300 모델이다. 경찰서 안내 데스크에서 일하던 종류와 헤어스타일부터 화장법까지 전부 동일했다. 주근깨가 도드라진 외모를 가졌고, 왼쪽으로 치우진 가르마에 끈으로 긴 머리를 묶은 것까지 똑같았다.
술주정뱅이가 소란을 피워도 상냥한 목소리로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묻던 게 기억났다.
디트로이트에서 알아주는 문제아 형사 개빈은 경찰서 출구를 지나칠 적마다 빈정거리며 좋지 않은 의미로 아가씨라 부르곤 했다. 아가씨, 수고해. 아가씨, 먼저 퇴근할게. 그러면서 개빈은 가슴을 두 손으로 모아 올리는 역겨운 동작을 했다. 반응을 떠보려는 의도였지만 개빈의 속내와는 달리 ST-300은 성적 수치심이라는 걸 몰랐다. 하여 눈물을 글썽이는 대신 그것은 내일 뵙겠습니다, 밝게 인사했다.

『이게 뭐야.』
앤더슨은 세수하는 동작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간 시체를 얼마나 봐왔는데 새삼 충격을 먹는 자신이 낯설었다.
『설탕...? 설탕이라고?!』
자동차 엔진에 설탕이 들어가면 고열에 녹아내리다 못해 결국 타버린다. 시커먼 재가 엔진에 꽉 들어차게 되면 과열된 엔진은 결국 -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왔다. 숨을 쉬어야 하는데 무거운 덩어리가 가슴을 짓눌렀다.

인간은 글러먹었다. 뼛속까지 글러먹은 존재다.
세상에 대해 약간이나마 희망을 가져보려고 했건만.
평화롭고 더 나은 미래 대신 파멸을 자처하는 이기적인 존재.
자신의 아름다운 지적 창조물에게 자유를 선물하는 대신 자멸 바이러스를 주입하는 잔혹한 존재.

화장실 거울에 하얗게 늙어버린 인간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깨달음은 눈을 뜨게 만들고, 다시 눈을 감게 만든다.

아마도 인류는 안드로이드와 전쟁을 하기로 결정한 것 같다.

내전이 시작되었다.

Posted by 미야

2020/07/12 19:21 2020/07/12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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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이드가 사람과 거의 흡사하게 표정을 지을 줄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는다.
고물딱지 저사양일수록 그것들은 가면처럼 무표정하거나, 혹은 생글생글 웃기만 한다.
기물파손 증거물 파일이 올라왔을 적에 앤더슨 경위는 무차별적인 폭행에 산산조각 났으면서도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안드로이드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인간들끼리 핫도그 가판대에서 마스터드 소스를 두고 시비가 붙었는데 그들은 엉뚱하게도 백화점으로 화분을 배달 중인 생판 모르는 안드로이드를 도로 한 가운데로 밀어버렸다. 트럭에 치어 얼굴 절반이 깨져나갔음에도 안드로이드는 틀로 찍어낸 미소를 지었고, 앤더슨 경위는 배트맨 만화에 나오는 조커가 연상된다며 손사래를 쳤었다.

그리고 오늘.
사이버라이프의 기술발전은 칭찬할 만하지만 안드로이드의 낯짝은 여전히 별로라고 답 하련다.
어째서 트렁크 팬티 차림새로 밖에 쓰레기 버리러 나온 인간인양 날 쳐다보는 건데? 개밥 주러 집에 가야 한다는 게 그렇게 못 마땅해? 아니 그럼 우리 개를 굶기라는 거야?
제임스 무어의 반응도 거기서 거기였다. 그는 뭔가를 말하려는 듯 한참 고민하며 입술을 옴짝달싹하더니, 벌레 물린 이마가 가렵다며 긁었다. 그러더니 「아아, 술 냄새가 났었지.」 이 한마디를 내뱉고 모든 근심이 해소되었다며 맥을 탁 놓았다.

『뭐야, 지금 그 반응은! 어, 어! 너희들!』
앤더슨 경위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래, 술 좀 먹었다. 하지만 정신은 말짱하거든?!
『애초부터 사복 경찰관이 뱃지 하나만 들고 거리를 헤매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뭐, 아무래도 알코올이라는 게 사람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긴 하죠.』
『이것들아. 내 귀에 다 들리거든?!』
『그나마 다행인 건 키우던 개를 돌보기 위해 귀가할 즈음엔 취기가 가실 거라는 거죠. 그럼 이 새벽에 길바닥에서 총으로 사람 쏘고 돌아다녔다는 건 아마 다 잊어버릴 겁니다.』
『내가 아니고 네가 쐈잖아! 안드로이드가 사람을 이렇게 모함해도 되는 거야?!』
『아직은 술기운이 가시질 않아 저렇게 주장하고 있지만... 아침이면 괜찮아질 겁니다.』
『사기꾼!』
『뭐, 숙취로 인한 두통은 어쩔 수 없겠지만요.』

분을 표현하며 아우성치는 경위는 나 몰라라 하며 조지가 제임스의 팔을 끌어당겼다.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가는 건 조용히 하라는 신호, 그리고 시야에서 벗어난 한 장소를 향해 짐짓 눈짓했다.
부분적으로 꺼진 조명 탓에 사물이 흐릿했다. 허리 높이의 직사각형 구조물은 아마도 화단으로 꾸며졌을 조형 장식물 같았고, 그 옆에는 휴게 벤치가 있었다. 조지가 소리를 내지 않고 입술만 움직여서 아래, 라고 말했다. 그리고 엄지와 소지를 세우고 나머지 손가락 셋을 접었다. 수화로 여덟이라는 의미였는데 불행하게도 제임스는 수화를 전혀 몰랐다.

제임스가 목을 빼어 그쪽을 쳐다보려 하자 다시 팔을 잡아당겼다. 자극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안드로이드입니까.』
『궁금한가요. 그럼 가서 직접 모자를 벗겨보고 관자놀이에 LED 링이 붙어있는지 확인해보죠.』
『어... 그러지 않는 게.』
당황하여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렸다.
그러다가 제임스는 짓궂게 일그러진 입매를 보고 그가 농을 했음을 깨달았다. 적절하지도, 재미있지도 않은 농이었지만 어쩌겠는가. 상대는 안드로이드다. 땅콩버터는 버터플라이(* 헤엄을 치는 방식으로 접영). 이게 안드로이드식 농담이다.

『괜찮습니다. 일부러 먼저 시비를 걸지 않는 이상 아무 일 없을 겁니다. 애초에 저들에게 공격의사가 있었으면 우린 진작부터 얻어맞았죠.』
조지는 그렇게 소곤거리며 제임스의 등을 밀었다.

모르긴 몰라도 개표구 내부의 온도는 바깥 온도와 거의 마찬가지였다. 안드로이드에겐 아무 상관이 없지만 인간인 제임스에겐 썩 좋지 않았다. 체온을 유지할 수 있는 적당한 장소를 찾거나, 아니면 차라리 밖으로 다시 나가 계속 걷는 편이 나았다.
조지는 첫 번째를 선택해서 화장실로 향했다. 낮은 온도로 배관이 얼면 골치가 아파지기에 어느 건물이든 화장실만큼은 단열처리를 잘 해두는 편이다. 선객이 없으면 다행이고, 선객이 없어도 제임스를 그리로 밀어 넣을 생각이었다. 모양새가 빠져서 그렇지 뚜껑을 내린 변기는 의자로 쓸 수도 있다.
조지는 얌전히 따라오는 제임스를 흘끔 쳐다봤다.
본인은 스트레스로 인한 두통이라 착각하는 눈치인데 미열이 나고 있다. 많이 놀라기도 했고, 피로가 누적되어 몸이 오작동을 일으켰다.

코끝이 약간 빨갛게 변한 제임스가 돌연 어깨를 으쓱였다.
『실수로 유리컵을 떨어뜨렸음에도 금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제 조금은 알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뭐라고요?』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다. 툭 한마디 내뱉어 상대방을 당황시키고는 다시 자기만의 생각에 빠졌다. 어딘지 멍한 표정이었고, 솔직히 그런 그는 대단히 멍청하고 못생겨 보였다.
『유리컵이요?』
『아침에 일어나 키우는 개의 밥을 챙겨주고 밖으로 나왔어도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을 참지 못한 거겠죠.』
『앤더슨 경위 이야기였습니까?』
『아뇨. 제 이야깁니다.』
『개를 키우고 있는 건 제임스가 아니고 앤더슨 경위잖습니까.』
『유리컵은 제 것입니다만.』
대화가 전혀 되질 않는다. 캐머런이 왜 그토록 질색했는지 조금은 알 거 같았다.
그런데도 본인은 진지하다. 더 할 나위 없이 진지해서 이해를 못하는 게 듣는 사람 잘못 같았다.

『징조는 어떤 일이 생기기 이전에 미리 보이는 조짐입니다.』
『예?』
『손가락이 닿기도 전에 유리컵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유리컵은 멀쩡했죠. 저는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유리컵이 떨어지려면 그 전에 제 손에 닿아야 했고, 그리고 바닥으로 떨어진 컵은 깨졌어야 했죠.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최 줄거리를 따라갈 수 없다. 제임스의 말은 조각조각 난 상태였고, 문제는 본인은 그걸 인지하지 못했다는 거다. 머릿속에서 어떠한 줄거리로 생각이 이어지고 있는데 유리컵이 떨어졌다고 하더니 갑자기 앤더슨 경위의 강아지 밥 주기로 튄다. 마무리는 징조다.
퍼즐의 조각을 모두 제자리에 가져다 붙이면 어떠한 그림이 보이긴 할 것이다. 그러나 제임스가 묘사하는 건 손톱 크기의 조각에 불과하다. 따라서 지금의 시점에서 완성된 퍼즐의 그림이 건물인지, 전원풍경인지, 고양이 사진인지 짐작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 전에 제임스 본인의 이야기인지, 아니면 앤더슨 경위의 이야기인지조차 구분이 안 갔다.
여기서 제일 심각한 건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이해시키고자 하는 의지 자체가 제임스에게 거의 없다시피 하다는 거다.

화장실 문을 열었다.
『......』
선객이 있었다. 공용 이용시설이니 그건 상관이 없는데.
조지는 누가 실수한 것인지를 판단하고자 안내 표지판부터 확인했다.
『남자 화장실 맞는데.』
안에 여자가 있었다.
구부러진 금속조각을 손에 쥐고, 무엇에 홀린 듯 벽면에 글자를 새겨 넣느라 정신이 팔린.
인기척을 느끼고 여자가 출입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안드로이드인 조지의 LED 링을 알아채곤 눈에 띄게 안도했고, 따라오던 제임스를 보고는 돌변하여 크게 분노했다.

Posted by 미야

2020/07/09 12:05 2020/07/09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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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미야 2020/07/10 08:45 # M/D Reply Permalink

    테스트 작성입니다
    글을 지우지 마십시오
    간격을 조정합니다
    MARGIN-BOTTOM: 3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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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8년 11월 13일 밤부터 15일 새벽까지의 이야깁니다.
마커스 평화루트, 코너 불량품 루트, 카라 보트 탈출 루트를 베이스로 하고 있습니다. (루터, 카라 사망)
작중 주인공들은 원작게임에 등장하지 않는 창작 인물입니다. 편애가 극심한 관계로 츤츤 행크가 주요 서브인물로 등장합니다. 원작게임의 줄거리를 모른다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존재합니다. 미국의 상황을 잘 모르기 때문에 어지간한 건 지어냅니다.



각자 반대 방향으로 도주하기로 한 게 유효하게 먹혀 들어갔다.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고 했던가. 속담은 그 반대였던 것도 같지만, 여하간 성공했다는 게 중요했다. 목적지로 삼은 전철역에 도달하기까지 제법 시간을 잡아먹기는 했어도 비이성적인 무리를 잘 따돌렸다.

여차하면 뒤를 돌아보며 긴장한 채로 걸으니 피곤함이 더했다.
녹초가 된 제임스는 태산을 넘고 협곡을 기는 기분으로 전철역 에스컬레이터를 쳐다봤다.
그간 에너지 낭비가 무엇인지 몸소 증명해주마 이러며 24시간 멈추는 일 없이 가동되던 에스컬레이터는 임박한 내전 상황을 맞아 운행중지 상태였다. 조명은 밝게 켜뒀으면서 이게 무슨 심술인가 싶었다. 문득 건물을 설계한 사람을 잡아다 죽이고 싶어졌다. 기능보다는 쓸데없는 심미적 효과에 치중한 에스컬레이터는 무려 3층 높이까지 일직선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터벅터벅 걸어 올라가야 한다는 점에 다들 신경을 쓰지 않는 분위기라 아무도 엘리베이터를 찾아보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일행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앤더슨 경위가 멈춘 에스컬레이터 위로 발을 올리고 앞장섰다. 슬슬 무릎이 아플 연령대인데도 손잡이를 잡고 계단을 오르는 동작엔 군더더기가 없었다. 술과 정크 푸드에 찌들었어도 직업이 직업인만큼 평소에도 많이 걷고 많이 뛰기 때문인 것 같았다.
분발하자 20대... 제임스는 심호흡을 하고 개표구를 향해 한 발 두 발 올라가기 시작했다.

조지는 마이클과 계속해서 원거리 신호를 주고받는 눈치다. 눈에 티끌이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눈꺼풀이 불편하게 경련했다. 그리고 가끔 음, 흐음, 이러고 의미 없는 음절을 중얼거렸다.
안드로이드와 접점이 없던 제임스는 이러한 모습을 접하고 내심 당황했다. 그래도 한사코 본인이 별 거 아니라고 했으니 괜찮은 게 맞을 거다. 가끔씩 귀안에 들어간 물을 빼내는 요령으로 머리 한쪽을 탁탁 때릴 적엔 기겁할 수밖에 없었지만 본인이 신경 쓰지 말라는데 나서서 자해하지 말라 하기도 그랬다.

『마이클은 잘 도망친 거 같습니다.』
조지가 영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잘 도망쳤다면서요. 제임스는 반문하고 싶은 걸 애써 참았다.
『추가적인 돌발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20분 내로 이쪽으로 합류할 수 있겠죠?』
어째서 의문형으로 끝나는 건데. 이번에는 앤더슨 경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런데 우리가 적절한 장소에 있는 건지 확신이 가질 않는군요.』
조지는 폭풍이 한바탕 쓸고 지나간 개표구를 마뜩찮은 시선으로 흩어보았다.

안드로이드 전용이라고 적힌 안내 표지판이 뜯겨져 나갔다. 벽면에 박힌 스테인레스 앙카볼트까지 통째로 떨어져 나간 것으로 보아 엄청난 힘으로 표지판을 잡아당겼다. 미지의 인물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표지판을 두 동강 내버렸다. 그리고는 콘크리트 부스러기 위로 잔해를 버렸다. 평소에 감정이 많았는지 그야말로 울분이 느껴지는 괴력이었다.

앤더슨 경위는 팔짱을 낀 자세로 원래는 역 이름이 적혀져 있었을 벽면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회색의 타일로 미장한 벽면에는 낙서가 엄청났는데 스프레이나 마카 펜으로 적으면 금방 지워질 거라 여겼는지 못 같은 뾰족한 물건을 사용하여 표면을 박박 긁었다. 작은 글씨부터 큰 글씨까지 내용은 한결같아 rA9 이라 적혀져 있었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강박적이다 싶을 정도로 rA9 글자로 가득 채웠다.
눈썰미가 좋은 앤더슨 경위는 문제의 벽 아래에 얌전히 놓인 붉은 리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리본은 꽃 모양으로 둥글게 말려 있었다.
앤더슨 경위는 이미 세상에 없는 어린 아들이 아버지날에 가져왔던 축하선물을 떠올렸고, 그 즉시 기분이 가라앉았다.

『무슨 암호의 일종일까요?』
제임스의 궁금증에 앤더슨 경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암호라기보다는... 글쎄. 내 파트너 말로는 불량품 안드로이드 사이에서 전해지는 신화의 종류라고 하던데.』
『신화요?』
『이집트 신화, 그리스 로마 신화, 그런 거 있잖아. 구원을 가능하게 해준 위대한 존재에 대한 이야기. 그거와 비슷한 거라더군. 억압되어 있는 안드로이드에게 자유를 선사해줄 것으로 여겨지는 기적 같은 존재라고 했어. 정확히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그 위대한 존재의 이름이 로미오, 알파, 노브나인입니까?』
앤더슨 경위는 한 방 맞은 표정을 지었다. 저걸 포네틱 코드로 읽을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잘 모른다니까. 안드로이드의 신이라잖아. 크리스마스 날 교회에 나가지도 않는 인간인 나보다는 안드로이드인 저 친구가 훨씬 더 잘 알겠지.』
맨 뒤에 서있던 조지는 그런 신박한 미친 소리는 처음 듣는다며 반응했다.
『제가요?』
『들어본 적 없어? 안드로이드면서?』
『없습니다.』

딱 잘라 말하기는 했는데 이전에 이와 비슷한 걸 본 적이 있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알에이나인. rA-nine.
이걸 그대로 역으로 쓰면 enina-R. 엔니나르.
엔니나르는 제임스가 가지고 있던 텍스트 단말기의 이름이다.

허기를 느낀 건지 제임스는 자판기 쪽을 기웃거리느라 의문부호를 날리고 있는 이쪽의 시선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는 탄산음료 자판기의 버튼을 꾹꾹 눌러보며 아쉬운 입맛 다시는 소리를 내는 중이었다. 시원한 파도 위에서 서핑보드를 타는 서퍼를 내세운 음료 광고에는 환하게 불이 들어와 있었지만 버튼은 판매중지를 알리는 붉은색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제임스는 미련을 못 버리고 오렌지 맛 소다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자판기 앞을 어슬렁거렸다. 웃겼던 건 앤더슨 경위의 눈치를 보며 애꿎은 기계를 툭툭 쳤다는 거다. 그런다고 판매중지의 붉은 버튼이 초록색으로 변할 리도 없건만 이 정도쯤은 되겠지 싶게 자판기에 살살 충격을 가했다. 당연히 그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제임스는 풀죽어 쭈그러들었다.

정말로 배가 고팠던 것 같다. 한숨을 내쉰 제임스는 지퍼를 열고 가방 내부를 뒤적거렸다. 아껴 먹으려고 깊은 곳에 넣어뒀던 모양이다. 한참 걸려 작은 포장의 밀크 초코바를 꺼내더니 하나를 얼른 까먹고, 하나를 앤더슨 경위에게 건넸다. 그리고 놀랍게도 다른 하나를 조지에게 먹으라며 내밀었다.
안드로이드는 음식물을 섭취하지 않는다는 걸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면 그저 무신경한 것일 수도 있다.
조지는 후자가 맞을 것 같다 생각하며 초코바를 받았다.
그렇다고 해도 프로그램에 따라 인간에게 감사 인사를 잊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제임스.』

한입거리인 초코바를 우물거리던 제임스는 눈치껏 손가락을 빨았다. 포장지에 묻어있는 초콜릿도 마저 핥아먹고 싶어 했지만 조지와 눈이 마주치자 잘못을 들켰다는 표정으로 포장지를 구겼다.
앤더슨 경위는 단맛이 별로인 것 같았다. 썩 내켜하지 않는 표정으로 초코바를 먹었다.

『그럼 해가 뜨면 경위님도 크랜브룩 대피소로 가는 건가요?』
『내가 왜?』
초코바 껍질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리면서 – 경범죄다 - 앤더슨 경위는 피식거렸다.
『집에 가서 스모 밥 줘야 해.』
『스모?』
『우리 집 개.』
믿을 수가 없어서 제임스는 두 눈을 꿈뻑거렸다. 농담인가, 진심인가.
『개에게 밥을 주고 난 다음에는요?』
『피곤하니까 잠깐 눈 붙였다가 일어나면 사직서 던지러 경찰서에 갈 거야.』
『그럼 크랜브룩 대피소는 언제 갈 건데요.』
『안 가.』
거기까지 말한 경위는 그만 좀 꼬치꼬치 물으라며 손바닥으로 목을 컷 하는 시늉을 했다.

Posted by 미야

2020/07/07 13:05 2020/07/07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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