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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름이 뭐냐 물어보자 「머저리」 라 했다.
자기에게 욕을 한다 생각한 하녀가 화가 잔뜩 나 콧구멍을 벌렁거렸는데 이상하리만치 애 표정이 천진난만하다.

어라. 이거 좀 이상한데.
진정하고 숨을 가다듬었다.

『다시 한 번 더 묻자. 이름이 뭐라고?』
『머저리.』

뒤늦게 깨달음이 벼락같이 왔다. 아니 뭐 이딴 개 같은 경우가.

오래된 시골 풍습이다. 아들 이름은 개똥이고 손녀의 이름은 광년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진짜 이름은 아니고 아명이다. 이름을 늦게 지어주면 사악한 악귀들에게 잡혀가지 않는다고 믿기에 이것아 저것아 하고 아무렇게나 부르는 거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장녀는 머저리, 둘째는 돼지, 셋째는 개자식으로 그 명칭이 고착된다. 편하게 첫째, 둘째, 막내, 이런 식으로 영혼 없이 불리는 일도 많다.

하여간 시골 사람들이란. 인상을 찌푸리고 다시 물었다.
『그렇다고 내가 너를 머저리로 부를 수는 없지 않겠니. 호적상 이름이 뭐지?』
『호적?』
환장할 일이다. 아이는 호적이 뭔지 전혀 모르는 눈치다. 여전히 그 표정이 천진난만하다.
속으로 천천히 1부터 10을 세었다.
『좋다, 그럼 이건 어떠냐. 기도를 드리러 신전에 간 적은 있겠지. 그때 신관님이 널 뭐라고 부르든?』
『머저리.』
『돌겠어... 진짜 돌겠어!!』

신음하며 이마로 손을 가져갔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동네야?! 신관이 코딱지 후벼먹게 생긴 아이더러 머저리, 머저리, 이랬... 잠깐만. 만장하신 가운데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코딱지를 맛있게 후벼먹고 있으면 머저리가 맞겠지.

『코는 그만 후비고.』
『네.』
『몇 살이지?』
『아홉 살.』
『생각보다 나이가 많구나. 체구가 작아 훨씬 어린 줄 알았는데.』
『그럼 여덟 살.』
『얘는. 고무줄도 아닌데 사람 나이가 막 줄었다 늘었다 할 수 있니?!』
쏘아붙이며 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잠가주었다.

임자가 따로 있던 옷이라서 그럴까, 품도 크고 소매가 길게 늘어져 펄럭거렸다.
야무지게 두 번 접으니 손등까지 올라갔다.
안 되겠다. 제대로 수선을 하려면 가위로 옷감을 잘라내야 할 것이다.
여자는 눈으로 오려낼 길이를 대중하며 또 한 번 소매를 접었다. 애들은 어차피 금방 자라는 법이지만... 늘어진 소매를 주렁주렁 매단 꼬락서니로 저택을 쏘다니게 만들 수는 없었다. 이곳은 귀족이 머무르는 저택이었고, 똥간을 푸는 막일꾼조차 보우타이를 매고 다녔다.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겠어?』
불량스러운 태도로 벽에 기대어 서서 팔짱을 끼고 있던 기사가 킥, 하고 웃음소리를 흘렸다.
『바느질을 다 마치기 전에 시체를 치워야 할지도 모르는 일인데.』
『애가 듣습니다, 기체릿 님.』
『들으라고 한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입술을 끌어당겨 보는 이로부터 정나미 뚝뚝 떨어지게 만드는 비열한 미소를 만들어냈다.
웃는 낯에 침을 뱉지 못한다는 속설과 다르게 뺨이라도 치고 싶은 미소였다.
『자고로 솔직한 게 최고야. 얘도 진실을 알아야지. 오늘부터 귀족 도련님의 놀이 상대가 되었으니 시궁창 인생에서 탈출해 드디어 찬란한 오색빛깔 무지개를 만났노라 착각이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안 그래?』

앞전에 그런 소년이 있었다. 자신에게 닥친 재앙을 무지개로 착각한 주근깨 소년이.
「소공자께서는 어떤 분이신가요? 상냥하신가요? 멋지신가요?」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처럼 흔하디흔한 어린애였다. 게을러 잠도 많았고, 더럽게 투정도 많았다. 침대가 딱딱해요, 흰 빵이 먹고 싶어요, 추운 건 별로에요, 이러쿵저러쿵. 가난한 집구석에서 입을 줄일 목적으로 팔려왔다는 것도 모르고 어지간히 앵앵거렸다.

영특한 아이니 무엇을 시켜도 잘 배울 겁니다. 눈치도 좋아요. 도련님의 놀이상대로 그만입니다.

영특한 거 좋아하시네. 기체릿은 더욱 입술을 비틀었다.
몇 살이냐 물어보니 손가락을 가만히 세었다.
참을성이 바닥날 즈음에 엄지와 검지를 접기를 슬그머니 그만두었다. 그러더니 스스로가 헷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마도 열세 살일 거라고 대답했다. 자신감은 요만큼도 없었다... 그런 아이였다. 만사 자신감 없어하는. 소공자 앞에서도 주눅이 들어 고개도 들지 못했다. 출신이 소작농의 자식이니 귀족 앞에서 고개를 들어서도 안 되었지만 – 그래도 고개를 들라 명령을 받았으면 번쩍 들었어야지, 거기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무서워서 오줌이라도 쌀 거 같아요, 이러고 울어서는 안 되었다.

『어디 보자... 네가 보기에 걔는 얼마나 갈 거 같아? 한 일주일?』
『기체릿 님!』
『아이구머니. 나 귀 안 먹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오늘 당장 저 어린아이가 오체분시 되어 뒈질 일은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기체릿 소아르가 – 동대륙 사람이라면 그 이름만 듣고도 벌벌 떠는 섬멸 기사단의 일원인 기체릿 소아르가, 멍청한 하인들이나 할 법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몸소 아이를 데리고 소공자와 놀이상대 대면식을 할 예정이었으니까.
하얀 이를 드러내며 아이의 어깨를 툭툭 쳤다.
『영광이라고 생각하렴. 원래 이 몸은 일국의 대사 정도 되는 분들을 호위한단다. 아~아주 비싼 인력이지. 속된 재주를 부린다는 장점이 알려진 탓에 언제부터인가 도련님 전속이 되었다는 슬픈 사정이 있긴 하다만... 이 이야기는 나중에 차분히 얘기하도록 하고 준비가 다 되었으면 가보도록 할까?』
 
전쟁터와 다를 바 없는 수라장에서 높으신 분들의 호위를 맡았던 일과 비교하자면 이건 그냥 소꿉장난 수준이다. 대포가 날아올 일도 없고, 불붙은 화살이 쏟아지지도 않고, 사방에서 칼날이 번득이지도 않는다. 마물들이 송곳니를 드러내지도 않고, 바닥이 꺼지지도 않고, 거푸집이 무너지지도 않고, 그냥 팟! 하고 보이지 않는 바람에 피부가 베이는 정도.

기체릿은 손등으로 화끈거리는 통증을 호소하는 오른쪽 뺨을 문질렀다.
내일 아침이면 사람들로부터 키우던 고양이가 발톱으로 할퀴었느냐는 질문을 받을 것이다.
아니면 면도날로 수염을 깎으면서 집중은 하지 않고 무슨 딴 생각을 했느냐는 면박을 들을 수도 있다.
가끔은 몸 파는 여자와 화대를 흥정하다 싸운 거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와우, 오늘도 환영인사가 참 멋지군요, 일로이 공자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소인의 절을 받으소서. 오늘은 공자님께 소개해드릴 자가 있어 같이 왔습니다. 잠시 시간 좀 내주시죠.』
『꺼져.』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꺼지라고 경고했다.』
『저도 공자님을 꺼지게 만들고 싶습니다. 진짭니다. 루름의 신전에서 앙망 와코와르 신관님의 손을 꼬옥 붙잡고 소원풀이를 기원했지요. 그런데 신께서 언제 제 기도를 들어주실지 짐작이 가질 않아 짜증스럽습니다.』
『간절하게 빌어봤어? 아니면 공물이 적었나보지.』
『글쎄요. 공물이 좀 부족했던 건지도... 제 급여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라서요.』
『술과 여자, 도박을 멀리하면 적게 느껴지던 급여가 다시 많아질 거야. 기체릿 경.』
『허어, 그거 참... 피와 살이 되는 충고로군요. 감사합니다.』
입으로는 감사하다고 말하면서도 전혀 감사해하는 것 같지 않은 표정을 지은 기체릿이 거칠게 문을 열어젖혔다.

별관의 응접실은 항시 어두컴컴하다. 암막기능이 있는 두꺼운 커튼을 사계절 내내 길게 늘어뜨린 탓이다.
그렇게 햇빛을 꺼리는 까닭은 응접실 상태가 영 좋지 않기 때문이었는데 그 예로 눈앞에 놓인 4인용 소파는 고가품임에도 불구하고 거꾸로 뒤집혀진 채 양말도 신지 않은 맨 다리를 천장을 향해 번쩍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흡사 순결을 잃을 위협에 처한 가련한 처녀처럼 느껴지는지라 기체릿은 「실례」 라고 짧게 말한 뒤, 한 손만 사용하여 소파를 다시 뒤집었다.
처녀치고는 그 몸무게가 상당했다. 들었다 놓이자 쿵, 하고 응접실 바닥이 울렸다.
그런데 얼씨구, 뒷모습만 봤을 적에는 젊은 처녀였는데 앞으로 되돌리니 주름살이 가득한 노파였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그러했다. 갈고랑이 진 모양새가 장난이 아니었다. 흠의 너비와 깊이는 제각각이어서 미친놈이 광분하여 손도끼로 마구 찍어댄 것 같았다.
문제는 가구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거였다. 패널로 장식된 벽면 또한 잔뜩 긁혀 흡사 응접실 한 가운데서 성능 나쁜 사제 폭탄이 터진 몰골이었다. 전장의 상흔이라도 입은 것 같은 천장은 또 어떠한가. 요인 암살을 노리고 일개 그림자 부대가 휩쓸고 지나간 식의 아찔함이 가득했다.

그 난장판 한 가운데.
두통과 현기증, 졸음, 무기력, 짜증, 분노, 한탄, 좌절, 기타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종류들이 한 소년의 몸을 빌어 저마다 악을 쓰며 발현 중이었다.
심지어 그 중에는 시원하게 나오지 않는 방구와 억압된 배변 욕구까지 포함되어 - 사악하고 불쾌했다.
식사로 나왔던 닭고기 탓에 배앓이라도 하는 중인가 – 알게 뭐람. 어제의 명품 가구는 오늘의 불쏘시개였다. 기체릿은 능숙하게 전진하며 파편만 남은 가구들을 발등을 사용해 죽죽 밀었다.
음, 방금 전 둥근 모양새 탓에 공이라고 착각하고 걷어찼던 건 떨어져나간 조각상의 머리 부분인가 보다.
데굴데굴 굴러가기에 흥미가 돋아 한 번 더 찼다.

『그게 내 머리라고 상상하니 재미있어졌나 보군. 기체릿 경.』
『설마요. 밟아서 터뜨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재미있을 리가.』
짐짓 변명하며 주변 정리하는 것을 멈추었다.

Posted by 미야

2017/10/20 17:43 2017/10/20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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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분홍빛의 묽은 스프를 억지로 삼키자 평소보다 몇 갑절 빠르게 의식이 흐리멍덩해졌다.

「평소보다 누월초를 강하게 썼군. 이거, 이래서는 치샤량 아닌가.」
숨이 멎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한 톨도 하지 않았음에도 속으로 툴툴거렸다.
어차피 쉽게 죽지 않는 몸이다.
치사량이 문제가 아니고 결정적으로 맛이 개판이다. 식초 비슷한데다 떫었다. 퉤, 하고 뱉고 싶은 맛이다.
차라리 몽둥이로 단숨에 머리를 쳐서 기절시킬 것이지 – 그릇을 통째로 뒤집어엎고 싶은 욕구를 참고 수저를 입으로 가져갔다.

마침내 눈꺼풀 아래로 무거운 납덩이가 달리자 멀리서 이를 훔쳐보던 하인이 서로 눈짓을 나누었다.
문이 열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여자가 작은 신사용 구두와 레이스로 깃이 장식된 겉옷을 들고 긴장한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서두르라고 누구 하나 입 뻥긋하여 말하지 않았음에도 여자의 보폭은 매우 컸다. 그 모양새가 흡사 불가에 오래 두고 졸아붙은 스튜를 화덕에서 내려놓기 위해 호들갑을 떠는 시골 아낙네 같아서 약간은 우스꽝스러웠다. 뛰는 것도 아니고 걷는 것도 아니다. 그 중간 어디쯤 될 것 같다. 무엇보다 여자는 씨근덕거리고 있었다.

약에 취해 눈을 감았던 소년이 인기척에 반응하여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보석처럼 새파란 눈동자였다. 좋게 표현하면 그렇다는 것이고 – 나쁘게 말하자면 사람 느낌이 일절 안 났다.
옷가지를 들고 있던 여자는 초점이 흐려진 소년의 시선이 얼굴에 닿자 경기를 일으켰다.

『아, 안전할 거라고 했잖아요!』
『약을 세 배는 더 썼어. 괜찮아.』

정확히 얼마나 더 썼는지 모른다. 허나 약을 더 쓴 건 사실이다. 그러니 세 배라고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
약을 가져온 본가의 시종장은 한 끼 식사마다 말린 잎사귀를 두 장씩 넣으라고 지시했다.
그렇지만 정량 따윈 잊은 지 이미 오래다. 잎사귀는 바싹 말라붙어 조금만 건드려도 부스러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형태를 잃고 가루가 되었다. 그 가루로 「잎사귀 두 장」 정도의 분량을 추측하라고? 말도 안 되었다. 그래서 게으르고 부덕한 하인들은 티스푼을 사용해서 눈대중으로 대충 양을 쟀고, 당연히 최초의 「잎사귀 두 장」 이야기는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알게 뭐람. 얼마면 어떠랴. 요컨대 요괴가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라는 거다.

옷이 입혀진 소년은 전쟁 포로처럼 양 팔이 모두 붙잡힌 채 다른 장소로 옮겨졌다.
무릎의 힘이 풀려 거의 끌려가는 수준이었지만 하인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신분이 위니악의 소공자 – 메디발의 공주가 배 아파 낳은 둘째 아들이었어도 그랬다.
『서둘러. 시간이 촉박하다.』
약에 취해 오락가락하는 소공자의 정신이 가끔씩 돌아올 때가 있었다. 그럴 적마다 소년은 흔들거리던 머리를 애써 세우곤 했는데 하인들은 그 때마다 히익 소리를 내곤 했다.
소문으로는 소공자가 입으로 용암을 내뿜는다고 했다.
물론 소문이다. 소공자는 용이 아니니까. 그래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다.

《어서 오세요.》
메디발의 공주는 왕가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은 한 떨기 장미꽃이었다.
곱슬거리는 금발머리는 장인이 만든 보관보다 아름다웠으며 피부는 백옥 같았다.
결혼을 하고, 나이를 먹고, 세 아이를 낳았음에도 여전히 그녀는 숨구멍조차 없는 완벽한 진주였다.
《오늘도 착하게 잘 지내셨나요.》
여인은 카나리아처럼 노래한다.
《어서 이리 오세요, 나의 작은 보물.》

소년은 흐려진 눈으로 여자를 응시했다. 초점이 맞지 않아 어미의 눈코입이 전부 뭉개져 보였다.
사랑스럽고 귀하다고 말하면서도 그녀는 한참 거리를 두고 서서 손깍지를 단단히 꼈다.
그 손을 내밀어 아이의 머리를 만져주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며.
행동은 하지 않고 오로지 입으로만 노래해 그 심장에 담긴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한다.
《사랑스런 나의 아이.》

힘들여 눈을 깜빡이자 잔상이 다소 가셨다.
그래봤자 여인의 얼굴은 다 마르지 않은 물감을 손가락으로 마구 뭉개버린 형상이었다. 빨갛고, 노랗고... 그리고 사방에서 불쾌한 빛이 번득였다. 덕분에 눈이 시려 눈물이 났다.
금발, 노란색. 빨강의. 두껍게 덧칠된... 아아, 피냄새. 그렇군. 소년은 느리게 깨달았다.

당신은 이미 죽었지.

순간 참을 수 없이 두통이 심해졌다. 도끼로 머리를 찍는 수준이었다.

『약이 너무 과한 거 아닌가.』
『아니옵니다. 평상시와 같사옵니다, 대공자님.』
『내 판단에는 그렇지 않은데. 앞으로는 좀 줄이게.』
주인의 말에 노인은 저어했다.
『저어, 죄송하오나 그러지 않는 편이...』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게.』
『알겠습니다, 대공자님. 약을 줄이라고 지시해 두겠습니다.』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콧잔등에 주름을 잔뜩 만든 사내가 서있었다.
언제나의 표정이었다.

무엇이 불쾌하다는 걸까. 무엇이 짜증스럽다는 건가.
방금 전 자다 일어난 사람처럼 헝클어진 머리? 끼워 맞춘 것처럼 보이는 옷? 그나마 격식을 갖춘 겉옷 아래로는 속옷이나 마찬가지인 셔츠 차림이다. 준 왕족이나 다를 바 없는 위니악의 후계자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추태일 터, 그 사실을 잘 알았기에 목깃까지 잘 채워져 있던 단추를 주먹으로 쥐고 뜯어버렸다.

『무슨 짓이냐.』
『숨 쉬기가 답답해서.』
누월초는 원래 독초다. 중독되면 심장박동이 느려진다. 그래서 숨이 느려지고 심하면 정신을 놓는다.
그 효능만 보자면 정적을 독살하기에 안성맞춤인 종류이나 무색무취의 다른 독과는 달리 감춰지지 않는 특유의 신맛이 있다. 그래서 보통은 사람을 쓰러뜨릴 종로서가 아니고 동물을 사냥할 적에 쓴다. 사냥꾼들은 누월초의 즙을 화살촉에 발라놓고 사용한다.

『역시 복용량을 줄이는 편이 좋겠어.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겠느냐.』
『지금은 눈이 잘 안 보여. 하지만 귀는 닫히지 않아 그 목소리는 잘 알아듣겠군. 형님.』
소년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축 늘어진 자세 그대로 고개만 까닥였다.
『한 달 보름여 만인가? 달력을 보며 세지 않아 정확하진 않지만.』
『세 달이다. 미안하구나, 일로이. 그동안 좀 바빴다.』
『전혀 미안해 할 것 없어, 형님... 덕분에 평안했으니. 매일 약에 취해 입을 벌린 채 침을 흘렸지. 정신을 차리면 밤이고, 다시 정신을 차리니 밤이더라고. 아주 달콤하고 태평한 나날이었어.』
순간 테이블에 놓여있던 장식 화병이 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일로이!』
『귀 아프다고. 소리 좀 지르지 마, 형님. 어차피 싸구려 도자기잖아.』
『싸구려가 아니야. 바다 건너 대륙에서 어렵게 공수해 온... 아니다. 지금 도자기 문제가 아니잖아!』
『그럼 뭐가 문젠데.』
『...』
남자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열두 살 어린 남동생의 제어되지 않는 이능이 골치라고는 말하기 싫었다.
그래서 대화가 잠시 중단되었고, 이윽고 몇 단계를 훌쩍 건너뛰어 다시 시작되었다.

대공자가 자세를 가다듬었다.
『네게 곧 놀이상대가 생길 거다.』
『뭐?! 갑자기 웬 놀이상대?』
『아니면 개인 시종이라고 생각하던지. 어쩌다보니 사정이 있는 어린아이를 잠시 맡게 되었다. 손님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니 저택에 머무르는 동안 그동안 밥값은 해야 할 테고, 아직 팔목에 힘이 없어 본관에서 일을 시키기는 무리더구나. 그래서 생각해본 끝에...』
소년이 재빨리 말꼬리를 잘랐다.
『맙소사. 그래서 기껏 생각한 게 내 놀이상대나 하라고? 하아? 지금 장난해?』

대공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상대가 한 배에서 태어난 동생이라 할지라도 말꼬리가 잘리는 건 무척 불쾌한 경험이다. 신분으로나 직급으로나 그의 말꼬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자를 수 있는 자는 왕국에서 손가락을 꼽을 정도밖에 없다. 그리고 정직하게 따지자면 열두 살 터울의 동생은 대공자의 말꼬리를 자를 위치가 전혀 되지 못한다.

자신도 모르게 턱이 당겨지고 말투가 싸늘해졌다.
『아무렴 장난이겠느냐.』
눈매도 가늘어졌다.
『참고로 말해두지만 지난 번 네가 「실수랍시고」 호숫가에 거꾸로 처박아 죽인 아이의 부모에겐 사과의 의미로 농작지를 따로 떼어 내려줬다. 그런데 새로 온 아이에게는 양친이 없으니 덜 부담스럽구나. 참으로 다행이지 않느냐. 천애고아라서. 어찌나 감사할 노릇인지. 내 죽은 자식의 몸뚱이가 왜 다섯 조각으로 돌아왔느냐는 물음에 수중에 사는 짐승에게 물어 뜯겼노라 거짓말 하지 않아도 되고.』
『...』
『존재하지도 않을 짐승을 잡겠다며 기사를 풀어 들판을 쑤셔대지 않아도 될 테고.』

그때 또 커다란 유리창이 쩍 하고 굉음을 내며 세로로 갈라졌다.
『일로이!』
『어쩌라고!』
소년과 사내는 서로를 죽도록 노려봤다.

Posted by 미야

2017/10/17 15:55 2017/10/17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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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입니다. 솔직히 저도 내용을 다 까먹었습니다.

인적이 드믄 장소를 찾는다고 했지만 때와 장소를 염두에 둬야 했다.
이래서는 휴가철 행락객들이 잔뜩 모여든 모래사장에서 빈 파라솔 찾기다. 축제 탓에 어디에고 사람들이 넘쳐났다.
게다가 어디를 봐도 외지인으로 보이는 그들은 잡아먹기에 안성맞춤인 존재였다. 잘게 썰어 적당히 물기를 뺀 사과를 꿀물에 버무린 간식거리를 파는 어린 소녀가 웃으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나이는 어렸지만 여행객의 주머니를 털겠다는 굳건한 의지가 엿보이는 눈빛을 반짝였다. 그녀 뒤로는 파로 국수를 파는 장사꾼이 손바닥을 비볐고, 그 다음으로는 쭉정이 같은 싸구려 기념품을 파는 장사꾼이, 그 다음으로는 갈증을 해소해줄 시원한 음료수를 파는... 그 다음으로는.
이래서는 끝이 나질 않겠다 판단한 오남은 슬그머니 손바닥을 펴 보이며 건물 위로 흘끔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펄럭이는 빨랫줄 틈새로 새가 푸드득 날갯짓을 하였다.
동시에 뭔가가 쏜살같이 내려와 오남의 소매 속으로 숨었다.

『웩. 몇 번을 봐도 기분 나빠.』
『그럼 보지 않은 셈 쳐.』
오남이 잘 보이지 않는 작은 것을 갈무리하며 감추는 것과 동시에 생명 징후를 잃은 새가 발치로 뚝 떨어졌다.
아니, 그것은 원래부터 죽어 있었던 것이다. 아까부터 날개를 퍼득이며 움직임을 보이던 건 전혀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혹처럼 달려 있던 것이 죽은 새로부터 떨어져 나와 살아있는 사람인 오남에게 들러붙은 것이냐 - 그의 설명으로는 아니라고 한다. 그가 다루는 정령은 원래 살아있는 생물에 기생하는 종류도 아닐뿐더러 가진 힘으로는 고등동물을 조정하는 건 무리라나.
『그 고등동물이라 함의 기준이 뭐지? 오남.』
『밥 먹고, 잠자고, 배설하고, 성생활 이외의 걸 할 줄 아는게 고등동물이지.』
『엇? 그럼 위험하잖아. 너에게 기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딨어.』
『야, 인마.』
기분이 상했던지 오남이 발길질을 시도했다.
태영은 살짝 다리를 들어 피했다.

어쨌든 태영은 그렇게 해야 하는 상황이 닥친다고 해도 흡사 뽑혀 나온 눈알처럼 생긴 걸 소매 속에 감추고 싶은 마음은 요만큼도 없다. 협박해도 거절이다. 그것이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 달라붙지 않으니 안심하라고 말해줘도「어디서 약을 팔아」대꾸할련다.
게다가 그 눈알은 터진 주둥이도 없는 주제에 말도 했다.

《중중입니다.》
『그랬나. 하지만 중중이라 하기엔 미스트 자네가 여기까지 뚫고 들어오는데 시간을 좀 잡아먹은 듯한데.』
여기서 중중은 상, 중, 하의 중을 일컫는다. 그리고 그 중을 다시 세분화해서 상, 중, 하 단계로 다시 나눴다. 총 아홉 단계다.
《어... 흠, 그런가요. 그럼, 저. 중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래 걸렸나요?》
그것이 말을 더듬었다는 부분이 중요한게 아니다. 중중이든, 중 대가리든, 문제는 지나가는 여인의 미모를 품평하는 것도 아니고 시내 유명 레스토랑의 스테이크 맛 품평 또한 아니라는 거였다.
이들은「결계」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다.

이 세계에는 결계라는 것이 존재한다.
태영은 그 부분이 희한했다. 마법사라 부를만한 종족이 있는 것도 아닌데 여기엔 결계가 있단다.
「결계?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투명한 막 같은 건가?」
하늘과 땅을 가로지르는, 매우 튼튼하여 뚫고 지나가기가 불가능한 천막을 상상했더니 비웃음 당했다. 오남 왈, 어린애도 그런 깜찍한 상상은 하지 않는단다.
「결계라며.」
입을 삐죽이며 불평했더니「그러니까 내 말이.」라며 더 비웃었다.
흡사 텔레비전이라는 물건을 모르는 사람에게 텔레비전을 설명하는 것과 비슷했다.
이만한 크기의 네모난 상자가 있는데 전기로 작동하고요, 전원을 켜면 화면에 실물과 흡사한 그림이 빠르게 지나가며 춤도 추고 얘기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럽니다.
전기라는 걸 모르는 사람 앞에서 전기로 작동하는 물건에 대해 설명해봤자.

「굳이 상상하지 말고 머리로 받아들여, 텐. 국경선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잘 될 거야. 저 어딘가로 넘지 말라고 약조된 선이 있는 걸세. 그게 결계야.」
제대로 된 설명도 아니었다. 국경선은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주지만 결계는 인간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지 않는다. 아주 특수한 경우를 빼고는 눈으로 볼 수도 없다. 결계를 넘나들어도 기침 한 번 하지 않는다. 머리가 아프지도 않다. 그걸 넘는다고 벌금을 무는 경우도 없다. 체포당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결계의 존재가 왜 중요한가.

『여기에 바다가 있어. 그리고 바다 속에는 많은 물고기가 살고 있어. 그 중엔 얕은 물에 사는 물고기도 있고, 깊은 물에 사는 물고기도 있겠지. 더운 바다에서 사는 녀석도 있고, 반대로 더운 바다에서 살고 있는 녀석도 있어. 서로가 사는 공간이 나눠져 있는 걸세. 그런데 알고 있나? 바닷물은 찬물과 더운물이 층을 이룬 채 서로 잘 섞이지 않아. 미묘하게 구분되지. 결계는 그런 거야.』
『지금 무어라?』
『그러니까 더운물에 사는 생선과 찬물에서 사는 생선을 나눠놓은 거라고. 자네와 나는 더운물에 사는 생선이야. 그리고 내 손에 있는 이 미스트는 일종의 찬물 생선이고. 이제 좀 이해가 가나?』
『전혀.』
『...... 닭대가리.』
『누구더러 닭이라는 거냐, 이 개새끼. 설명을 거지처럼 해놓은 주제에!』
더운물 생선은 왈칵 화를 냈다.

이를 갈면서 동시에 태영은 생각했다.
예전부터 오남은 시장조사를 핑계로 대륙의 결계를 하나하나 확인하고 다녔다. 때로는 그 일에 황제가 직접 끼어드는 일도 있었다. 자세한 건 모른다. 다만 그 문제로 오남이 황제와 독대하는 자리에서 찻잔과 물병이 신명나게 날아다녔다는 소문이 있다. 심지어 오남이 먼저 던졌다는 얘기도 있는데 그랬다간 모욕죄로 목이 달아났을 터이니 화를 내며 물건을 집어던진 건 역시 황제 쪽이 먼저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지지 않고 대응했다는 부분에서 오남은 역시 보통 사내가 아니긴 하다.
「황제로부터 경쟁 국가의 결계를 약하게 만들라는 주문을 들었던 걸까? 오남은 그걸 거부하고?」
파도물결 잔잔한 깊은 바다에서 생선들이 저마다 지느러미를 흔들어가며 헤엄을 쳤다.

『중상이면 나빠?』
『그다지.』
『흠... 그래도 상 레벨로 올리는게 네 목표겠지?』
『전혀.』
『어? 그래? 찬물 생선과 더운물 생선이 한곳에 섞이면 안 좋은 거 아닌가?』
『좋을 건 없지.』
『뭔 대답이 그리 민숭민숭하누.』
타박하는 말에 오남이 슬그머니 태영을 쳐다봤다.
동시에 그의 손바닥 안에서 미스트가 제멋대로 빙글 돌아 손등으로 위치를 옮겼다.

Posted by 미야

2016/01/18 16:57 2016/01/18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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