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벽치는 제일 먼저 내 옷을 알아봤고, 그 다음에야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봤다.
보통은 순서가 거꾸로일텐데 내 얼굴보다는 알거지가 된 나를 측은하게 생각해 아들 옷을 몇 점 주었다는 기억이 컸던 모양이다.
다 떠나서 이 자는 뺨을 얻어맞고 엎어진 내가 누구인지 깨닫자마자 좋아하던 여자에게 털복숭이 엉덩이를 들킨 남자처럼 혼이 나간 표정을 지었는데 아무래도 나와 얽혔던 옛날 일들을 순서대로 곱씹다가 그 종착지로 자기비하에 빠진 눈치였다.
요괴, 소동, 저 녀석은 아직 어린 아이라고요, 자손 - 화내는 자손 - 분노하는 자손, 강도로 추정되는 시체, 토사물, 어린애를 포박해서 끌고 다니다 명령에 따라 집어던짐, 모두로부터 손가락질.
죄다 무시하고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을 강하게 느낀 것 같다. 빙글 돌아서서「어디서 이렇게 소란스러운 거야! 여기가 아니라 다음 골목인가!」딴소리를 하는 걸 봐선 분명 현실도피를 하고 싶은 거였다.
『아는 얼굴입니까. 혹 친척이라던가.』
『아냐... 하은. 그런 것은 아니고... 에, 또. 그냥 알고 있는 정도.』
이라벽치가 끙 소리를 내며 다시 몸을 돌렸다. 다음 골목은 개뿔, 현실 회피는 거기까지였다.
『이 아이는 빈사국에서 올해 사친으로 왔네. 이사실로 오는 도중에 강도를 만나 봉변을 당했길래 곤란할 것 같아 도와준 적이 있어. 내재원에 문의하면 답변을 해줄 걸세. 수상한 신분은 아니야.』
『하지만 저 아이는 재(災)와 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재가 자기 일행이라 주장했고요.』
인상을 쓰고 있던 이라벽치는 하은이라는 자의 설명을 면전에서 부정했다.
『에이. 그럴 리가 없잖아.』
하지만 하은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그럴 리가 없는게 아니고 그랬습니다만.』
『하면 너는 이 아이가 술법을 써서 요괴를 부렸다고 생각하나, 하은?』
『그럴 가능성을 배재하지 않고 있습니다.』
『직접 목격했나.』
『어. 그건...』
하은이 입술을 깨물었다. 직접 봤느냐고? 그가 보았던 건 정신이 나가 칼부림을 하는 자와 그에게서 도망치는 요괴와 어린이의 조합이었다. 사람을 물어뜯는 요괴를 본 건 아니다. 그랬다면 화살을 쏨에 있어 순서가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요괴는 상처 투성이었다. 언뜻 봐도 열 군데가 넘는 베인 자국과 찔린 자국이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실수한 건가. 남자의 눈동자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본인조차 인식하지 못할 눈동자의 흔들림을 이라벽치는 정확히 파악했던 것 같다.
『직접 보지 않은 것을 단서에 의거하여 합리적으로 추론하는 건 좋은 일이야. 하지만 이랬을 것이다 저랬을 것이다 단정 짓는 건 보다 신중하게 하도록 하게. 자네가 이런 류의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으익?! 뭐야, 시체도 있잖아! 이건 상당히 엉망이군. 뭐? 다시 말해보게. 죽어 있었는데 만약을 위해 다시 목을 베었다고? 재에 오염되어서?! 그런데 피가 왜 이리 많아!』
깜짝 놀란 이라벽치가 시체를 들춰보는 사이, 나는 다른 병사에게 팔을 잡혀 자리를 벗어나게 되었다.
밧줄에 꽁꽁 묶여, 거적으로 가리워져, 짐짝으로 취급되어 - 여러가지 근심걱정이 빙글빙글 도는 가운데 락연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숨이 끊어진 건 아닌데 적절한 조처를 받지도 못하고 그대로... 고개를 붕붕 휘저었다.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보고 인간인지 아닌지 판단을 할 거라는 얘기가 떠올랐다. 그저 겁을 주려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그렇게 한다면? 락연에게도 그런 몹쓸 짓을 한다면!
잡힌 팔을 빼내려 했지만 상대는 군인이었다. 관절을 통째로 뽑아내지 않는 이상 달아난다는 건 무리다.
『놓아주세요.』
나는 아무 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제 일행이!』
하지만 밑바닥부터 뒤흔드는 이 죄책감은 내가 큰 잘못을 저질렀음을 우회하여 증명하는 거겠지.
『그만 놓아달라고요!』
잘 훈련된 군인은 이럴수록 들은 체도 안 하는 법이다. 내 팔을 잡은 자는 나를 그냥 통상적인 물건처럼 취급했다. 들어 올려야 한다면 들어올린다. 내리라고 하면 내린다. 단지 그뿐이다. 그래서 그 자는 나를 소극 상은에서 잡아온 관계자들과 한 줄로 나란히 앉혀놓는 작은 실수를 저질렀다.
《rm skawkrk dnflf thrdls rjsrk. dlfjf rjfkrhs akfgkwl dksgdkTwksgdk. 그 남자가 우릴 속인 건가. 이럴 거라곤 말하지 않았잖아.》
표준 대륙어가 아니고 북방대륙의 알란밧 방언이었다. 코가 납작하고 이마가 평평한 생김새로 보아 그쪽 출신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무역을 해온 탓에 자력으로 말을 익힌 것 같았다. 병사들이 알아듣기 어려운 알란밧 방언을 골라 쓰면서 자기네들끼리 입을 맞추려 하는 것 같았다. 소곤거리면서 남들이 모르도록 얼굴을 무릎에 파묻었는데 태도와 억양 탓에 흡사 조상신에게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들의 말을 알아듣고 있다는 내색을 지우고 마찬가지로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조금이라도 더 작게 만들며 한껏 웅크렸다.
《알아서 하겠으니 눈 감아 달라 말한 걸 곧이곧대로 믿은 우리의 잘못일지도.》
《우린 그냥 기회만 제공했을 뿐인데.》
《제기랄, 이래서 처음부터 느낌이 안 좋았다니까. 수수료도 많이 받은 것도 아니고. 손해야, 손해!》
나는 자세를 바꾸지 않은 채 가만히 그들 대화에 끼어들었다.
《djfaksms qkedkTsmsepdy. 얼마를 받았는데요.》
《많지 않다니까. 겨우 50동... 허억?》
남자는 흡사 나른한 졸음에서 깨어난 것처럼 목을 똑바로 세웠다. 착각인가! 설마, 착각이겠지. 단춧구멍을 닮은 작은 눈이 재빠르게 내 얼굴을 위아래 방향으로 훑었다.
《anjdi. qkdrma sjduTsl? 뭐야. 방금 너였니?》
《rmfo, sork akfgoTek. dl ehowl toRldi. 그래, 내가 말했다. 이 돼지 새끼야.》
이를 악물고 대꾸하자 상은 사람의 낯빛이 새카맣게 변했다.
50동이라. 하루 벌어먹고 살아가는 평민에게는 입맛이 동할 큰돈이지만 귀족에게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의 금액은 아니다. 최하위 막노동꾼의 하루 임금은 대략 30전이고, 글을 쓸 줄 알거나 기술을 배우면 200~300전까지 오른다. 100전이 1동이니까 상위 노동자의 약 2년치 (추정) 급료다. 그게 내 목숨 값이었다. 암산을 해보니 속이 쓰렸다.
하지만 아버지 성격에 굳이 날 죽이겠다며 50동을 썼다는 건 놀라웠다. 이익과 손해를 따져보곤「당분간 내버려 두어라」이러는게 그 남자 성격에 맞을 것 같다. 내가 당장 빈사국으로 쳐들어가 집안을 장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다, 빈사국 왕의 핏줄을 이은 서녀라서 내 존재 자체가 위협인 것은 더더욱 아니며... 나 같은 쭉정이는 그냥 멀리 보내놓고 나 몰라라 이러고 잊어버리면 되는데 굳이 손을 써서 나를 죽이겠다고 바득바득 우길 까닭은... 젠장. 서글퍼져 배까지 고파졌다.
결박되어 있던 자들이 작전을 바꿔 병사들에게 호소하기 시작했다.
『제 말을 들어보세요. 전부 오해하신 거라니까요! 아무렴 우리가 사무월 기간에 사술을 써서 요괴를 부리겠어요? 우리는 그렇게 미친 사람들이 아닙니다. 위대하신 황제폐하의 핏줄께서 마을 곳곳을 행차하시며 땅을 다지고 계시는데 그런 발칙한 짓을 할 리가 없잖아요. 들키면 사형인데 말입니다!』
『암요, 암요! 우리가 아니라고요. 왜 있잖습니까, 저~기에 죽어있는! 외국에서 온 사내 짓입니다!』
『그 자의 짓입니다! 칼을 들고 우리를 협박했습니다!』
『그 자가 사술을 썼습니다! 눈도 시뻘겋고, 머리는 산발했고! 맹세합니다, 나리!』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
『살려주세요, 살려만 주세요!』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 모든 책임을 타평에게로 떠넘기는 작전인가 보다. 타평은 빈사국 사람이다. 게다가 도망 노예다.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우기엔 매우 적합한 신분이었다. 나라도 타평을 지목하고 나섰을 거다.
그런데 잠깐, 방금 전 저 자가 뭐라고 했더라.
위대하신 황제폐하의 핏줄께서 마을 곳곳을 행차하시며 땅을 다져?
의문은 곧 풀려 내가 잘 알고 있는 목소리가 더위를 호소하며 짜증을 냈다.
『나도 내가 이 짓을 왜 해야 하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 사무월 동안 십이문대로에서 일주로까지 반복 교차하여 왕복하라니. 내전관들 머리통을 전부 박살내고 싶어 미치겠구먼. 정 해야 한다면 자기네들이 발 벗고 나와서 직접 하라고 그래! 양심도 없는 것들, 이 더위에! 그것도 두 다리로 걸어서! 미친. 말은 장식이냐?!』
더위를 먹은 것이 분명해 보이는 자손이 병사들에게 겹겹이 에워싸인 채 투덜대며 물을 마시고 있었다.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