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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벌에 쏘였다며 로머디스가 펄쩍 뛰었다.
「무, 무, 무슨? 어쩌라고요?」
「말하세요.」
「뭘요.」
「아무거나 좋으니까 어서! 구정물에서 녹색 아메바가 튀어나왔다는 식의 우거지상은 치우도록 하세요. 옆에 있는 내가 다 불편합니다. 어디서 당나귀가 장송곡을 켜고 있답니까?」

이게 다 누구 덕분인데!
그래도 지적당하니 얼른 얼굴색을 바꾼다. 식탁은 밝고 건강해야 한다. 헛기침하곤 하늘에서 천사의 깃털이 내려온다며 팔을 움직였다. 평소 시인이 되었더라면 하는 로망을 품고 있는 남자다. 밤새 불을 밝히고 벌개진 눈으로 (연애) 소설을 읽는 남자답게 혓바닥이 매끄러웠다.
『이것은 기적과도 같군요. 영주님께서 실력이 보통이 아닌 좋은 요리장을 데리고 있으시니 이 몸은 견디기 어렵게 부럽습니다. 음음, 이 오리 구이는 환상이군요. 들판의 너그러운 향기가 느껴집니다. 거기다 이 부드러운 육즙은 봄철의 새싹을 연상케 하는군요. 바람을 타는 엘프가 이 음식을 혀로 맛본다면 기쁨의 시를 한 소절 읊을 것입니다.』
어이없게 장황하긴 해도 칭찬이다. 남작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부족한 요리를 훌륭하다 하시니 주방장이 기뻐할 것입니다.』
『저런, 주방장만 기뻐하면 안되지요. 주방이라 함은 애시당초 아녀자의 영역일지니, 이런 식사를 저희들에게 마련해주신 숙녀분들께도 당연히 인사를 올려야겠지요.』

그런데 여보슈. 다른 집에서야 그런 미사어구가 들어먹히겠지. 하지만 뭐 하나 깜빡했수다. 인버스 가문엔 마나님 자리가 공석이라니까. 젊어서 상처한 남작이 대놓고 슬퍼하는 거 안 보여? 안주인을 칭찬하는 당신의 노력은 지금으로선 되려 긁어 부스럼이라구. 죽은 마누라를 생각나게 하는 네 말에 분위기가 칙칙해졌잖아. 죠르프가 매서운 표정으로 친우의 발을 꽉 밟았다.
『크아악! 아, 아니! 그, 그러니까!』
다행히 인버스 남작은 상인의 재치를 발휘, 상대방의 실수를 너그러히 용서하며 구렁이 담 넘어갔다.
『딸 아이를 칭찬하시니 그 아이도 기뻐할 것입니다.』
그렇지! 이 집엔 마님 대신 여식이 있었지! 살았어, 나는 살았어!
로머디스는 죽다가 살아났다며 좋아했다.
아울러 바로 그 순간, 후작도 덩달아 좋아 죽는다 춤을 추고 있었다.
화제가 자연스럽게 남작의 자녀들로 넘어갔군요. 잘 했습니다, 로머디스.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게 보인다. 후작은 급히 포도주 한 모금을 그 입술에 머금었다.
『시장한 뱃통들을 향해 이다지도 훌륭한 구제를 행하셨으니 당연히 칭송받아야지요. 그래서 말입니다, 인버스 남작. 우리를 살려내신 숙녀분을 소개해주지 않으렵니까. 기왕이면 명철하다는 소문의 아드님과 같이 말입니다.』
이 말에 남작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아들? 나에게 아들이 어디가 있어.
그러길 한 3초, 남작은 내 귀가 요즘 영 신통치가 않아 하고 스스로 납득해버렸다. 바닷물이 들어간 것도 아닌데 귀를 탁탁 치는 걸 봐라.
『영광입니다. 내일 오전 무렵에 각하의 일행이 모두 떠나실 때 배웅하며 기쁘게 인사드릴 터이니 두 아이 모두 기대에 가득차 즐거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것입니다.』

이것 봐라? 하고 후작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내일 아침 우리들은 반드시 여기서 떠나야 한다는 걸 돌려서 강조하고 있군. 거기다 그「기쁘다」는게 우리가 떠나서 기쁘다는 거야, 아님 나랑 아이들이 인사할 수 있어 기쁘다는 거야. 당연히 전자겠지? 누가 물으면 후자라고 대답하겠지만.
내심 감탄해 마지 않았다. 역시 상인이라 그런가, 아슬아슬한 공중곡예를 잘도 타고 있다. 거기다 이쪽에서 그 말의 뉘앙스를 곱씹어 볼 짬을 주지 않기 위해 재빨리 화제를 바꾸기까지 하고 있다.

『아! 그러고보니 사냥이라 하시었는데 그래, 무얼 좀 잡으셨습니까.』
레죠 그레이워즈 후작은 내프킨으로 손가락의 얼룩을 닦아내며 다시 웃었다.
허풍은 태풍과 달라 멀쩡하던 남의 집 지붕을 무너뜨리지 않음이니 남발한다고 하느님이 무어라 하진 않으실 터이다.
『그럼요. 좀 잡았지요. 그렇죠? 로머디스, 죠르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남자가 사이좋게 얼어붙었다. 입안에 든 고기가 수직낙하 해버렸다.
그 화살이 왜 우리에게 날아오는건데?
거기다 후작은 괘씸하게도 확인사살까지 감행한다.
『제 부하들의 검술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요. 유능한 인재들입니다. 사냥 또한 당연히 최고입니다. 1년 전에는 사람을 열 다섯이나 잡아먹은 살인 늑대까지 잡았는걸요.』

로머디스는 작정하고 머리털이라도 뽑고 싶었다. 그리고 눈을 반짝거리며 극적인 모험담을 기대하는 남작에게 한 잔의 물을 권하고 싶어졌다.
사냥이 어땠느냐고 묻지 마. 죽어라 말 달린 기억밖에 없다.
참새라도 떨어뜨렸어야 뭐라고 말씀드릴 거 아뇨. 이거 돌겠네.
떨떠름한 표정으로 로머디스와 죠르프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게... 좀 잡았습니다. 그러니까... 에. 이번에도 늑대였죠.』
『요즘 날씨가 보통입니까. 이런 계절엔 그 흔한 토끼도 땅속으로 숨어버리지요.』
그리곤 엑- 했다. 이런! 박자가 안 맞았다. 누구는 잡았다고 하고, 누구는 허탕쳤다고 했다.
죠르프와 로머디스는 눈에 띄게 허둥대기 시작했다.
『마, 맞습니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늑대도 더위를 먹었는지 영 안 보이더라고요. 하하하.』
『물론 잡았죠. 그놈의 토끼들이 하나같이 땅속으로 숨어버리니까 되려 쫓지 않아 그게 더 좋더라고요. 무슨 감자더미처럼 구멍에서 쏙쏙...』
말을 마치자마자 재차 엑- 했다. 또 박자가 안 맞았다!
두 사람은 식은땀으로 죽을 끓여대며 발버둥쳤다.
『어허허허! 그래도 잡았습죠, 늑대.』
『역시 토끼들은 도망을 잘 치니까 그놈의 소득이...』
이쯤되면 엑- 소리도 안 나온다. 엇박자의 귀신 들렸다.

잠자코 경청하던 남작의 눈자위가 의심을 가득 담아 가늘어졌다. 누구는 남쪽으로 바다가 있다고 하고, 누구는 북쪽으로 있다고 한다. 이러면 두 사람이 가진 지도 모두가 십중팔구 가짜다. 정작 바다는 엉뚱한 동쪽으로 있기 쉽다.
가쉽성 신문 기사로 이런 제목이 올라간다.
집중 분석, 과연 사냥에 나서기는 한 건가.
독점 취재, 잡았다는 건가, 못 잡았다는 건가.
합계잔액시산표의 차대변 숫자가 안 맞았을 때처럼 남작이 손톱으로 테이블을 톡톡 건드렸다.

『그러니까 그게 말입니다.』
이제 사냥 설은 아무도 안 믿어주고 있다. 새로운 거짓말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음류시인으로의 전직을 이참에 심각하게 고려하며 멋진 이야기를 하나 꾸며보자.
로머디스는 지은 죄를 자복하는 죄인인양 읍소하며 고꾸라졌다.
『이쯤해서 진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군요, 남작님. 짐작하셨겠지만 사실 저희들은 부근으로 사냥을 하러 나온 것이 아닙니다. 실은...』
『실은?』
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은밀하게 도적떼들을 소탕하러 나온 겁니다.』
『하아?』
『도적들이 눈치를 채고 미리 도망가는 일 없도록 하기 위해 사냥이라 철저히 위장을 하였지요. 옷도 평상복으로 준비하고요. 늑대 잡으러 간다며 소문도 퍼뜨렸습니다. 아시겠지만 요즘 도둑들이 오죽 극성이어야 말이죠. 거기다 머리도 좋습니다. 듣자하니 아틀라스의 새로운 영주 하르시폼 경은 숨박꼭질 놀이라도 하는 듯한 도적놈들에게 되려 놀림을 당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쪽으로 출동하니 저쪽으로 달아나고, 저쪽으로 출동하니 이쪽으로 도주하고... 하여!』
주먹으로 테이블을 쳤다. 아자자자~ 클라이막스다.
『그 망할 도적떼의 뒷통수를 후려치기 위해 몰래 말을 달려 이곳까지 당도한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하여 저희들은 표면상 계속하여 사냥 중인 거지요. 비록 수중에 그 흔한 토끼 한 마리 없을지언정, 곰 발바닥과 혈투 한 번 못해봤을지언정! 꼼짝마라, 못된 도적놈들! 아아, 슬레진 제국 만세. 우리의 필립 오넬 황태자께 영원무궁토록 영광 있으라.』
왜 거기서 만세 삼창이 나오는 건지 묻지 마라. 로머디스는 로스트 치킨이 무슨 도적놈 머리통이라도 되는양 좌우로 비틀어 꺾었다.

『그런 사연이!』
남작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도적이란다, 도적! 남의 돈을 빼앗는 패륜아들! 강도놈! 충격을 받아 손가락이 하애지도록 내프킨을 움켜잡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작은 상인 출신이다. 구름 위에서만 사는 일반 귀족들과는 달리 지금과 같은 도적떼 이야기는 피부에 직접 와닿았다. 거기다 제피리아가 자급자족 시스템이 아닌 외지와의 상업으로 살림을 꾸려가는 곳이라면? 실제로 제피리아는 특산품인 포도주를 팔아 내일의 일용할 양식을 구입하고 있다. 외지인과의 거래는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으며, 때로는 거대 외국 상단이 방문하기도 한다. 이를 다르게 말해보자. 이곳에선 치안 안정이 경제의 밑거름이다. 돈 싸들고 물건을 사러 왔는데 도둑에게 죄다 털렸네~ 해서는 장사가 안 된다. 품질 좋은 포도주는 두 번째다. 장사의 기본은 첫째도 사회적 안정, 둘째도 사회적 안정이다. 강도가 창궐하는 곳으로 가난도 창궐한다.

『이, 이럴 때가 아냐. 큰 아이를 어서 불러다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도적놈들은 남쪽으로 도망간 듯 하더이다. 코빼기도 못봤지 뭡니까.』
『다, 다, 당장 토벌대를 세우지 않으면!!』
『놈들이 줄행랑을 칠 법도 하죠. 그도 그럴 것이 이분이 누구십니까. 임금님께서도 진저리를 치는... 아, 이건 좋은 표현이 아니지. 아무튼 그 유명한 후작 나으리가 아니십니...』
『거기 누구 없느냐! 당장 가서 리나를 불러와라~!!』
『저기요? 제 말을 들어보셔요. 도적놈들은 도망갔다니까요.』
라고 해도 남작은 이미 아드레날린 과다 분비 상태여서 호흡이 어려웠다.

이 마당에 훌륭한 뒷북 하나.
『맙소사, 남작! 그대는 아들의 이름을 리나라고 지었단 말입니까?! 그 많고 많은 이름 중에 하필 리나?! 폴이나 제임스, 내지는 레이몬드도 아닌! 리나?!』
돌아다보니 누구처럼 남의 이야길 한쪽 귓구멍으로 흘린 레죠 그레이워즈 후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Posted by 미야

2008/03/20 10:29 2008/03/20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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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엘리바스 2008/03/20 12:15 # M/D Reply Permalink

    후후후후후.. 드디어 만나겠군요...

  2. kimmie 2008/03/20 13:26 # M/D Reply Permalink

    아 담편엔 드디어 열여섯 꽃다운 아가씨와 서른 중반의 역시 꽃다운(...) 아저씨의 첫만남이 되겠군요. 미야님 필력이 참 대단하다고 느끼는게, 처음 이 시리즈를 읽었을때 전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레죠리나 커플링을 지지하게 되었거든요. 1기까지 다시 돌려보며 '아아, 둘 사이의 화학작용이 보여...'라고 자가세뇌하고 있었으니까요;;;

거래처 사람들도 잘 모른다. 인버스 포도주 상회의 실질적인 주인은 남작이 아니라 바로 리나 인버스, 그의 첫째 딸이라는 건 말이다.
하긴, 아무도 안 믿을 거다. 억만금을 주물러대는 실세가 타들어가는 저녁 노을의 머리카락을 가진 열 여섯의 애띈 소녀라고 하면 바로 치고 나올 소리는「그거, 웃자고 하는 농담이지?」
그러나 그것이 한 점 틀리지 않은 진실이다.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책망하는 목소리로「아빠-」를 외친 그녀가 바로 마다스의 손인 것이다.

어려서 장난감 대신 주판알을 튕긴 천재.
엄마가 좋으냐, 아빠가 좋으냐는 질문에「돈이 최고 좋아!」라고 당돌하게 대답한 아이.
침대 머리맡에서 주기도문을 외우는 대신 현금 출납부에다 빨간 밑줄 두 개를 긋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소녀.
모친 사망 이후 싫든 좋든 인버스 가의 마님이 되어버린 조숙한 숙녀.
장래 희망은「인류 최강의 부자」이며, 꿈은「금화로 가득 채운 방에서 헤엄치기」.

『아빠- 자그만치 서른 여섯이나 된다고요. 우리 집 침실 사정으론 이들을 모두 지붕 있는 곳에서 재울 수가 없어요. 후작님이랑 수행원 약간 명에게만 침대를 제공하고 나머지 인간들은 야외로 굴려야 해요. 그러니 당연히 텐트를 준비해야지요. 하룻밤이라 할지언정 적어도 밤 이슬을 피하게는 만들어줘야 불평이 나오지 않을 거 아녜요.』
『그렇구나!』
『그럼 주방쪽 지시는 제가 내릴테니까 텐트 문제는 아빠에게 부탁드릴게요.』
『알았다.』
『아참! 토마스에게 일러서 당장 목욕물 준비부터 하라고 하세요. 법 먹기 전에 일단 기사들의 땀냄새 나는 겨드랑이를 씻겨야...』
『어, 토마스는 지친 말에게 먹일 건초더미를 추스르러 나갔는데.』
『그럼 헉슬에게 말해두면 되겠네요. 야니에게는 목간통을 찾아오라고 하세요. 우리한테 그렇게 많은 목간통이 어디에 있느냐고 반문하면 쓰다 남은 포도주통이 네 눈엔 뭐로 보이느냐고 혼내키세요. 그게 끝나면 침대 시트를 있는대로 긁어다가 손질하도록 지시하시고요. 줄리에게는 마을로 내려가 품삭은 넉넉하게 줄 터이니 임시로 잔심부름을 할 사람을 너다섯 명 끌고 오라고 시키고...』
줄줄 나온다, 줄줄 나와.
이 똑똑한 딸네미 없었으면 어떻게 할 뻔했누. 남작은 감격해서 딸을 손을 잡았다.
『네가 최고다, 얘야.』
『당연한 말씀을.』
겸손의 미덕 따위는 화톳불에 오란도란 구워먹고 그렇게 대답하는 리나 인버스였다.

『아자자자! 내 팔뚝 굵다아~!』
식구들의 안녕과 가문의 번영을 위해 죽도록 몸과 머리를 굴려주마.
남작의 영애답게 꽃단장하는 건 포기. 파이팅을 외치고 감자푸대를 들었다.
무겁지 않았느냐고? 식은땀 나도록 당연히 무겁다.
하지만 그놈의 감자푸대가 후작의 잘난 머리통이라고 생각하면 못 끌고 갈 것도 없다.

『에취-』
아마 그 덕분이었나 보다. 저주의 굿판 탓으로 그레이워즈 후작이 가볍게 재채기 했다.
『응? 뭣 때문인지 몰라도 갑자기 뒷 목덜미가 서늘해지는군요.』
『괜찮으십니까.』
가장 좋은 방으로 안내되어 두 다리를 쭈욱 뻗은 후작은 대답하기도 귀찮다며 손사레를 쳤다. 재채기 정도에 민감하게 반응하면 이쪽이 되려 피곤해진다. 감기도 아니고, 몸살도 아니며, 악마에 씌인 것도 아니다. 나이 지긋한 하녀가 가지고 온 차가운 음료수로 손을 뻗다 말고 그래서 입술을 찡그렸다.

『그나저나 찾아봤습니까, 죠르프.』
저것은 보물 지도나 비밀의 방 얘기가 아니다.
인버스 가의 아들, 그러니까 여전히 이름조차 불명인 한 소년에 대한 이야기다.
후작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지긋이 턱을 괴였다. 이렇게 평안히 눈을 감으면 보인다. 아마 지금쯤 열 여섯의 꼬마는 덜덜 떨며「유모, 나 어떻게 해!」라고 울부짖고 있을 것이다. 그 작은 머리가 제대로 움직인다면 자신의 지금 처한 상황이 어떠한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렇다, 위기사항이다. 소년은 궁지에 몰린 쥐였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통례상 귀인이 방문하면 저녁 만찬 자리가 마련된다. 그 자리엔 집주인과 그의 아내, 아울러 상속인이 참석을 하게끔 되어 있다. 메인 요리를 손님들 접시로 하나하나 옮기는 것이 집 주인의 할 일이며, 손님은 훌륭한 대접에 대해 아낌 없는 찬사를 보내는 걸 잊으면 안된다. 이에 화답하여 유려한 궁중 화술로 손님을 즐겁게 만드는 것이 여주인의 몫, 반대로 겸손의 미덕으로 침묵을 지키며 포도주를 손님 잔에 채우는 것이 상속인의 할 일이다.
물론... 이쯤해서 후작은 가볍게 콧김을 뿜었다. 그 아들의 나이가 겨우 열 여섯이니 법적 상속인 자격은 아직 없을 터. 그렇다면 만찬 전이나 후에 간단히 인사를 하러 내려오는게 일반적인 관례이다.
좋다 이거야, 인사를 한답시고 얼굴을 내밀면 그 자리에서 똑바로 쏘아봐주지. 그리고 마음껏 이죽거릴테다. 대 귀족의 얼굴로 손을 올리고도 사과 한마디 하지 않은 봇장 좀 보자구. 절룩거리며 밖으로 기어나가는 꼴을 반드시 본다. 시골 촌뜨기가 선보이는 외발 기러기라는 걸 즐겁게 감상하겠다.

젖 비린내를 풍기는 소년이 당혹감에 눈물을 쏟아낼 걸 상상하자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래. 이 집의 자제분은 어떠신가요. 혹시 만나는 봤나요.』
그래서 후작의 목소리는 기름을 바른 것처럼 무척이나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그게 말입니다요. 각하.』
반면 죠르프의 목소리는 눈에 띄게 기가 죽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겁을 먹고 어딘가로 숨어버렸나 보군요. 그대의 얼굴을 보아하니 말입니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리 기웃거려도 숨소리 하나 안 들립디다~ 그렇게 말하려던 거 아니었습니까. 내 말이 맞죠? 죠르프.』

아닌데요, 하고 죠르프는 조심스럽게 눈을 내리깔았다.
사실은 그보다 더 심각한 이야길 들었다.

「누구요? 도련님? 우리 집엔 도련님이라는게 없는데요.」

기분 나쁜 땀으로 손바닥은 축축하다. 죠르프의 고개가 바닥 아래로 꺼졌다.
멀리 여행을 갔다더라, 내지는 갑작스런 두통을 호소하며 앓아 누웠다더라 식의 이야기가 아니다. 없댄다. 아예 없댄다! 이 집에는 XY의 염색체를 가진 아들이 없단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이마를 훔쳤다. 그리고 속으로 외쳤다.
후작 각하! 제르가디스 도련님의 뺨은 도대체 누가 갈긴 건가요. 지나가는 산들바람이었나요, 아님 호수의 정령이었나요, 그것도 아니면 귀신이었나요. 하여간 산 사람은 아닌 것 같던데요.
목이 칼칼했다. 혓바닥이 마른 육포가 되어버렸다. 말을 하긴 해야 하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이상한 사람 취급하며 눈을 흘깃대던 하녀의 얼굴이 뱅글뱅글 돌았다. 그녀는 정육점에서 호박 달라는 사람을 처음 본다고 말했다. 마굿간에서 양상추를 찾고, 해우소에서 장미꽃 향기를 기대해서야 미친 놈 취급이 전부이다. 하녀는 대놓고 죠르프를 정신병자로 여겼다.
「아들도 인버스, 딸도 인버스라며! 그런데 왜 아들이 없어!」
뭐가 잘못되었던 걸까. 어디서 정보가 틀렸던 걸까.
후작에게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 않았다는 것도 잊어먹고 마른 침만 꼴깍 넘겼다.

『조촐한 자리오나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고집은 쓸데없이 강해서 후작은「아들 없다~」얘기는 일단 강하게 부정하고 보았다. 대신 기대에 가득차 남작의 아들이 턱을 덜덜 떨며 인사하러 나타나길 학수고대 하였다.
아들이 없어? 그럴 리 없다. 본 부인이 생산하지 않았다면 하녀라도 꼬셔 하나 낳았겠지.
인버스 부인의 평소 입버릇이「여보, 바람 피면 내 손에 죽어」였고, 마지막 유언 또한「내가 죽는다고 재혼하거나 하면 한 방에 뒈질 줄 알아」라는 걸 제3자인 후작이 알 길이 없다. 따라서 후작의 신념 - 어쨌든 뒷구멍으로라도 아들은 있다 - 은 굽혀지지 않았다.

느긋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감사합니다, 인버스 남작. 예고도 없이 불쑥 쳐들어온 불청객을 이다지도 환대하시니...』
남작의 인사치례에 후작은 아찔한 미소로 대답의 마침표를 대신했다.
이야. 끝내주게 아름다운 미소였다. 천상의 하모니다. 눈이 부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싶어진다. 남작은 그레이워즈 후작의 머리로 황금빛 후광이 비친다고 착각했다.
「그래봤자 가짜 부처니까 문제지.」
그 옆에서 로머디스와 죠르프는 바늘 방석의 따가움을 원 없이 만끽했다. 불편하지 않다면 공갈이다. 로머디스는 묵묵히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이틀이나 절식한 탓에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이었으나 식욕은 이미 산 너머로 달아난 뒤였다. 이 마당에 밥이 다 뭐라냐. 따가운 땡볕 아래서 말라죽은 해바라기 생각이 절로 났다. 그냥 차가운 냉수나... 바로 그 순간 위가 찌릿거리며 통증을 호소했다.

물론 코앞으로 차려진 밥상의 훌륭함을 보자면 이들의 식욕 저하와 위통은 서로 어울리지 않았다.
후작도 내심 놀란 눈치다. 왕성식 상차림과 비교하자면 절대적으로 허름하지만 그거야 비교 대상의 수준이 너무 높은 것이고... 그의 입술이 굳었다.
전반적으로 시골풍이다. 그렇다고 해도 품위는 잃지 않았다. 꽃과 야채로 장식한 테이블 센스가 일품이다. 과하지 않은 꾸밈이 아름답다. 하얀 식기에, 정갈한 포도주, 향신료가 마음껏 들어간 메인 요리... 거위의 간을 버터바른 감자와 같이 찌고, 색이 멋진 소스를 둘렀다. 풍성해 보이는 양고기 구이는 그저 맛있게 먹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반나절 사이에 이런 요리가 가능한건가. 누군가 마법의 지팡이를 휘둘러댄 건 아닌가 싶다. 요리 나와라, 이얍. 빳빳한 테이블 시트 나와라, 이얍.

기교적으로 윗 입술만 들짝 움직인 후작이 죠르프에게 귓속말을 던졌다.
「이 사람들, 우리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싶군요.」
「에이, 나리도 참. 이 사람들이 무슨 초능력자라도 되나요. 설마요.」
「하지만 이걸 봐요, 작정했다는 듯 차려놨잖습니까. 누군가 기밀을 누설한 겁니다.」
즐거운 계획 하나 와장창.
시간에 쫓기고 당혹감에 허둥대다 최악의 저녁상을 내놓으면「역시나 시골뜨기~」라며 손가락질 해주려고 그랬는데. 먹을게 부실하면「야박한 인심~」이러면서 싫은 소리 해주고, 내온 식기가 조금이라도 촌스러우면「졸부다운 끝장인 취향~」이러고 콧방귀 뀌려 했는데... 이야, 이거 멋지게 한방 먹었다. 이래서는 욕하는 사람이 비정상이다.

가볍게 눈웃음으로 모두에게 인사하며 포도주로 목을 축였다. 욕하는 건 나중에.
대신 후작은 대단히 불편해하고 있는 부하 로머디스의 옆구리를 향해 춉을 넣었다.

Posted by 미야

2008/03/20 09:44 2008/03/20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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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엔 왜 왔니, 왜 왔니~♪」
「위에 빵꾸내러 왔단다, 왔단다~♬」

당연히 인버스 저택은 뒤집어졌다.
평복이라고는 해도 말을 탄 기사가 서른 여섯 명이나 되고, 그 중의 하나는 슬레진 굴지의 명문가인 그레이워즈 가문의 당주이다. 버선발로 현관에서 뛰어나온 인버스 남작은 아, 하고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가 다시 아, 소리를 내곤 땅을 가리켰다. 정리하자면「이게 뭔 일이랍니까?」아무리 명문의 귀족이라고 해도 예고도 없이 남의 영지를 습격 - 아니, 방문하는 일은 흔치 않다. 도대체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 있길래 그간 멀쩡하게 움직이던 남의 심장을 덜컥 주저앉게 만드는 건지. 평소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작 얼굴이 당장 죽을 병에 걸린 환자처럼 창백해졌다.

『무, 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후작님.』
제일 먼저 떠올린 건 산적이나 도적떼의 습격이었다. 이동 중 예기치 않은 공격을 받아 부상자가 발생하면 누구든지 가까운 마을로 내려가 도움을 구하게끔 되어 있다. 그래서 인버스 남작은 혹시 일행 중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는 사람이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쓱 돌아보니.
어랍쇼. 땟국에 절긴 하였으나 전원 얼굴과 의복이 멀쩡하다.
그렇다는 건 도적떼의 습격설은 물 건너갔다는 것.
남작은 다시 아, 하고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가 다시 아, 소리를 내곤 땅을 가리켰다. 해석하자면「도대체 어찌된 영문이랍니까?」라는 거였다.

후작이 홀가분하다는 투로 말에서 껑충 내려섰다.
『실례합니다, 남작. 미안하지만 도움을 좀 받아야겠소이다.』
『도움이라면... 저기, 도움이라뇨? 무슨 도움? 이게 대체.... 후작님?』
무슨 꿍꿍이로 이러는 거냐고? 그렇게 쳐다봐도 안 가르쳐주지.
대답은 뒤로 미뤘다. 일부러 뜸을 들이면서 바지에 묻은 먼지를 탁 소리내어 털었다.
어쩐지 공격적인 그 제스츄어에 남작이 움찔거렸다. 후작의 개 같은 성품에 대해선 그도 귓동냥으로 들은 구절이 있었다. 듣자하니 왕도 쩔쩔매며 어떻게 손을 대질 못한다고... 그러니 안절부절이다.

『후작님?』
꼬리에 불 붙은 고양이 같은 그 반응이 꽤나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레이워즈 후작은 안면 가득히 미소를 띄고 이렇게 말했다.
『사냥을 한답시고 사일라그의 제 영지로부터 출발했다가 보시다시피 길을 잃었습니다. 영지로 서둘러 돌아가고자 했지만 부하들이 도중에 지쳐버렸지 뭡니까. 이곳에서 하룻밤 쉬면서 식량과 물을 조달했으면 합니다만. 괜찮겠지요?』
듣고 있던 로머디스가 쿨럭 기침을 터뜨렸다.
지금 뭐시라. 사냥하러 나왔다 길을 잃어버려?
무려 제피리아에서 사일라그이다. 전속력으로 쉬지 않고 이틀을 달려 도착했지만 느긋하게 가자면 원래 나흘은 족히 걸리는 먼 거리다. 나흘동안 길을 잃고 같은 장소를 뱅뱅 돌았다고? 그것도 정규 훈련을 받은 기사들이? 차라리 고양이가 달걀을 품었다고 해라. 그걸 누가 있는 그대로 믿어주냐! 봐라, 인버스 자작의 뺨이 가볍게 경련을 일으켰다. 속보여, 거짓말 하지마, 누굴 물 먹이려는 거냐 등등의 속마음이 빨랫줄에 걸렸다. 내색을 못할 뿐이지 어이 없다는 반응이다. 남작의 사람 좋아뵈는 갈색의 눈동자로 한줄기 의심의 비가 내렸다.

『사냥... 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개는 어디에 있지요.』
거봐, 내가 뭐랬어. 개가 없으면 안 된다고 했잖아! 당황한 로머디스는 다시 기침했다.
물론 후작은 여전히 태연자약이었지만.
『개 말입니까. 사정이 있어 데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까. 하긴, 후작님 말씀대로 사냥에 꼭 개가 필요하다고는 할 수 없죠. 짖으면 시끄럽고, 뭐니뭐니해도 다 잡은 짐승을 이로 물어뜯으니 기껏 손에 넣은 멋진 모피가 망가지고...』
인버스 남작은 계속해서 횡설수설해하며 손바닥을 비볐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후작의 안색이 달라져 있었다. 고개도 삐딱하다!
『인버스 남작. 반복하여 말하게 되는 것 같아 민망합니다만, 도와줄 수 있는 겁니까, 아님 없다는 겁니까?』
직격탄이다. 인버스 남작은 예를 다해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다.
진실로 그들이 사냥을 나온 것이든 아니든, 이 상황에선 그 점이 중요한게 아니다. 요점은 그레이워즈 후작이 물과 식량, 그리고 하룻밤의 잠자리를 요구했다는 것이며, 남작의 입장에선 그걸 거절하기가 쉽지 않다는 거였다. 포박하여 죽이겠다는 것도 아니고 곤경에 처한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청하는데 냉정하게 거절해봐라. 옛말에도 있지 않던가. 거지가 밥 달라 대문을 두둘겨도 찬 밥을 챙겨주는 법인데 하물며 귀인이 와서 문을 두드린다면... 안방을 내줘야 한다.
판단이 서자 남작은 서둘러 하인들을 불렀다. 앞으로의 일이 많다. 준비도 하지 않은 서른 여섯명 분의 식사도 그러하고, 말들에게 먹일 건초들도 그러하다.
그리고 후작, 후작... 하여간에 후작. 입술을 깨물었다. 귀인을 뙤약볕에 세워두고 있으니 이런 무례가 또 없다.
『안으로 드십시오.』
사나운 맹수에게「날 잡수십시오」간청하는 기분.
인버스 남작의 위장에 스트레스성 구멍을 뚫어주겠다는 그레이워즈 후작의 결심은 그 시점에서 이미 어느 정도의 결실을 맺고 있었다. 남작의 위장이 쓰린 위산과다 증상을 호소했으니 말이다.

죠르프가 작게 귓속말로 공작에게 물었다.
「정말로 남작의 집에서 무작정 하룻밤 묵어가는 겁니까? 각하.」
그레이워즈 후작이 이것 봐라? 식으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 같아선 일주일도 좋고, 한 달도 좋고... 어차피 인버스 가는 부자잖습니까.」
역시나 꿍얼쟁이. 속 좁은 복수의 귀재.
「거덜날 때까지 해보자는 거죠?」
「설마.」
설마는 무슨. 차라리 지나가는 개가 웃는다면 믿겠습니다.
죠르프는 무겁게 한숨 쉬었다.

차라리 개가 웃는다는 걸 믿겠다며 죠르프는 한숨지었지만, 인버스 남작 입장에서는 개가 웃느냐 마느냐는 관심 밖이었다. 남작은 하인을 데리고 나가 비상 시를 대비하여 잠궈놓은 곳간을 열었다. 무거운 자물쇠가 덜걱거리며 풀려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남작은 하느님 맙소사 푸념했다.
곳간에 보리 한 톨을 더 얹기 위해 그간 얼마나 노력했던가. 가뭄이 든 것도 아닌데 이 피 같은 걸 풀어? 내가 워째 잘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이 과연 비상 시기가 맞기는 맞는 거요, 하느님. 남작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눈시울을 적혔다.
이런 아버지를 향해 딸이 훈계했다.
『정신 차리세요, 아빠. 서른 여섯명의 식사 준비예요. 그것도 보통의 입맛이 아니라고요. 느긋하게 있다간 저녁 시간에 맞출 수 없어요. 보아하니 그 작자, 무슨 빈틈이라도 발견하면 올타꾸나 해가면서 우릴 골탕먹일 심보인 것 같던데, 아차하다간 코가 베여요.』
코가 베인다는 표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직은 안녕한 코를 만지며 남작이 딸을 쳐다봤다.
『말도 안돼. 후작 각하가 우리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코를 베고 그러겠니.』
『하.하.하. 억하심정이 있지요. 저번에 우리가 팔아버린 포도원이라는게 있잖아요. 잊으셨어요?』
남작의 딸인 리나 인버스는 그렇게 대꾸하곤 땅바닥에 늘어진 쇠사슬을 서둘러 치웠다. 창고에서 밀가루 포대와 보릿가루, 그리고 감자를 있는대로 끄집어내야 했다. 게으름 피울 시간이라는 건 없다.

젠장, 젠장, 젠장×구우골 플럭스.
알고 있었다. 저 후작이 제피리아 포도밭을 얼마나 간절히 소원했는지는.
놀랍게도 그는 친서까지 보내「나에게 파시오」설득했다. 신분 높은 귀족은 경제적 거래에 직접 나서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생각하자면 이건 놀랄 노자다. 보통은 대행자를 보내 점잖게 분위기만 잡는다. 그런데 이 자는 얼마나 몸이 달았으면 무려 친서를 발송했다.
얼룩 한점 없는 새하얀 편지지를 기억해낸 리나는 신음소리를 흘렸다.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묘하게 매력적이었던 글씨체. 다음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지독하게 정중한 나머지 되려 우스웠던 어투다. 요즘 같은 시대에 그 어느 누가「나로 하여금 그 포도원의 새 주인이 되게 하시고, 태양 아래서 신의 은총을 찬미하게 하십시오」라고 표현하느냔 말이다. 평민 취향인 리나는 곰팡내 나는 문장에 깔깔거렸고, 배가 아픈 나머지 눈물도 흘렸다. 보면 볼수록 그 편지는 웃겼다. 외간 남자로부터 날아든 러브레터도 이보단 산뜻하지 않았다. 얼마나 마음에 들었으면 그녀는 남몰래 아버지의 서재에서 편지를 꺼내와 자기 화장대 속에 숨겨놨다. 그리고 심심할 적마다 펼쳐서 읽어댔다. 혹시나 리나의 방에서 자지러져라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면 편지는 분명 화장대 서랍에서 책상 위로 외출을 감행했다.
물론~ 편지는 편지이고, 거래는 거래다.
리나는 상인의 딸답게「거래의 제1조건은 신분이 아니라 무조건 금전이다」라고 못을 박았다. 상대가 왕후이든 아니든 상관 안 했다. 단돈 1원이라도 더 많이 내겠다며 콜을 부르는 자가 승자다. 그래서 많은 귀족들이 침을 삼켜대던 포도원은 21,500 갈리나를 제시한 제라스 백작 부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앗싸를 외쳤던 백작 부인, 그리고 그녀의 외동 아들... 커튼 뒤에선 리나가 묵묵히 주판알을 튕겼다. 철저한 외부 공개 입찰. 그 공정성엔 자신한다.

『그런데 왜 우리가 원망을 들어야 하는데? 그쪽에서 돈을 더 많이 내겠다고 했으면 됐잖아!』
이래서 대 귀족이라는 종족의 사고 회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엉뚱한 화풀이다. 부하들을 잔뜩 끌고 나타나 인상을 쓰는 걸로 우릴 책망하다니. 나쁜 놈.
『인상은 쓰고 있지 않았단다, 얘야. 화사하고 아름답더구나.』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아빠.』
그녀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하여간 참 특이한 사람이다. 웃는게 더 무서운 사람이라니.
쯧쯧 혀를 차며 감자 푸대를 들어 올렸다.
『이걸 모두 주방으로 옮겨야겠어요. 숫자가 제법 많군요. 그나저나 바깥으로 텐트를 치라는 건 지시하셨나요.』
『텐트? 얘야. 텐트라니?』
『아빠-』
소녀는「나는 순진해서 아무것도 모르거든요」라는 표정의 부친을 향해 쓴웃음을 흘렸다. 남작은 눈을 크게 떴고, 그 딸은 기사의 용맹함을 본받아 품속에서 주판을 꺼내들었다.

Posted by 미야

2008/03/19 10:10 2008/03/19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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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immie 2008/03/19 12:49 # M/D Reply Permalink

    "앗싸를 외쳤던 백작 부인, 그리고 그녀의 외동 아들..." 왠지 심상치 않은 문구네요. 제로스가 등장해 준다면 전 첨에 앗싸를 외쳤던 데에서 덩실덩실 어깨춤까지 추렵니다.
    그나저나 대단한 스피드세요. 벌써 3편째인데...물론 올리시는 족족 기쁘게 낚여 춤추는 물고기 한 마리 신고합니다 (파닥파닥)

  2. 미야 2008/03/19 12:54 # M/D Reply Permalink

    유감이지만 제로스는 안 나옵니다. ^^ 이거, <레죠*리나 커플링> 글이거든요. 부제는 <아저씨는 그만 사랑에 빠졌다> 였어요.
    예전에 썼던 분량은 수정만 하는 거라 중간까지는 휙휙 나갈 거예요.

  3. 엘리바스 2008/03/19 23:12 # M/D Reply Permalink

    으헉! 레죠&리나 커플링이라고요? 이거이거 더욱 더 기대되는걸요~~룰루랄라~

  4. 비밀방문자 2009/06/23 03:37 # M/D Reply Permalink

    후장님?

    1. 미야 2009/06/25 13:22 # M/D Permalink

      아무렴 그게 お-かま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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