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 : 1 : 2 : 3 : 4 : 5 : 6 : ... 16 : Next »

아가씨. 후작님 장난에 놀아나면 안된다니까요. 뭐가 당밀이고 뭐가 파리입니까.
당황해하는 죠르프의 속사정도 모른 채 리나는 턱짓으로 마차를 가리켰다.
『이 정도면 황금을 싣고 간다는 기분이 들고도 남겠지요? 사실감을 내기 위해 궤짝에는 돌을 넣어두었습니다. 마차가 바람둥이 엉덩이처럼 가볍게 보여선 도적들이 의심할테니까요. 돌의 무게는 약 50kg으로 잡았습니다. 이만하면 군침을 흘리고도 남을 겁니다.』
설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차에서 하얀 드레스 차림새의 어린 소녀가 폴짝 뛰어내렸다. 뺨이 복숭아 빛깔이고, 머리카락은 땋는게 불가능할 정도로 짧은 아이였다.
『언니! 준비 완료예요~ 여기는 오케이예요~!』
『오, 수고했다, 아멜리아!』
동생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준 뒤, 리나는 죠르프와 로머디스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저쪽의 아이는 두 살 터울의 동생으로 이름은 아멜리아라고 합니다.』
사내들은 밧줄에 목이 졸린 듯한 표정으로 자매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지독한! 서, 설마, 당신은 동생까지 미끼로 사용할 작정인 겁니까아~!!

『그, 저, 에흠... 동생분께서 마차를 타고 가는 건 아니겠지요?!』
『아닙니다.』
- 다행이군.
『동생은 여기에 남아 소문을 한층 더 퍼뜨리는 역할을 맡을 겁니다. 저는 말을 타고 마차 뒤를 따라가고요.』
- 다행이라는 말 취소.

죠르프는 볼 안쪽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승마라는게 아무래도 숙녀들에게 권장되는 스포츠가 아니다보니 마음이 불안할 수밖에 없다. 전속력으로 달리다 실수로 말에서 떨어지는 날엔 척추가 부러진다. 재수가 없으면 그 즉시 황천행이다. 그렇다고 어린애가 조랑말 몰 듯 굼벵이 속도로 기어가선 한 달이 지나도록 길바닥 노숙 신세인 건 불을 보듯 뻔하고... 모세 따라 광야 생활 30년은 사절이다. 일단 소매춤 잡고 늘어지자.
『아가씨가 뭐 하러 험한 곳까지 따라오려 하십니까. 이런 일은 그냥 남자들에게 맡기시지요.』
『음?! 제가 못미더운 건가요.』
『그게 아닙니다, 숙녀님. 오해하진 마십시오. 그러니까 제가 드리고픈 말은 아녀자의 일과 남정네의 하는 일은 서로 다르다는 겁니다. 저희들이 부엌에 들어가 감히 스튜를 만들거나 빵을 굽겠다고 설치지는 않지 않습니까. 아기를 뱃속에 잉태하겠다고 벼르는 남자도 없지요. 비슷한 겁니다. 말 달려 도둑을 잡는 일은 그냥 우리들 남자에게 맡겨주시면...』

반대 의견은 엉뚱한 곳에서 등장했다.
『왜요. 저는 그녀가 이 작전에 참여하는 거 찬성인데.』
『후작님!』
정원쪽에서부터 홀연히 나타난 후작은 부하들을 향해 따가운 눈총을 던졌다. 더하여 비난의 손가락질도.
『그대들은 여성을 폄하하려는 것입니까.』
『네?』
『작위를 여성도 승계하는 세상입니다. 그런 성차별적 발언은 시대착오적입니다. 필요하면 남정네들도 부엌에 들어가 밀가루를 반죽하고 감자 껍질을 벗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어 리나와 어깨를 나란히 한 후작은 언제 그랬느냐며 아까와는 다르게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리나양. 나름대로의 각오도 있으신 듯 하오만, 말은 타실 줄 아는 거죠?』
『후작님 만큼은 탑니다.』
『그렇게 장담하고 말에서 보란 듯이 떨어지는 건 아니겠지요.』
『후작님이나 실수하여 떨어지지 마세요. 보아하니 펜은 잘 잡아도 말 고삐를 잡으신 일이 거의 없으신 듯 합니다만.』
손바닥에 거친 면이 없으니 일단 의심하고 본다. 아닌게 아니라 잘 가꿔진 여자들 손처럼 피부가 보드라웠다. 방금 전에 우윳병에서 건져낸 것 같아 심히 부럽다. 무슨 비법이라도 있나. 굳은 살을 찾겠다는 원래의 목적은 잊고 미용 크림은 어떤 종류를 사용하는지가 궁금해졌다.

후작은 어린 여자에게 덥썩 손을 잡혔다는 점에 깜짝 놀란 듯했다. 하지만 반감을 드러내며 손을 빼기는커녕 눈웃음부터 쳤다.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지금의 돌발 상황을 오히려 즐기는 것 같기도 하다.
『저런- 그쪽 손도 만만치 않다는 걸 아십니까. 작고 따스하군요. 매일 꽃만 만지는 건가요.』
『꽃은 안 만져요. 그런 건 취미가 아니라서.』
『그럼 무엇이 취미이신지?』
『장부 정리. 숫자에 자 대고 밑줄 긋기.』
『남다르십니다.』
응? 칭찬은 둘째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기분에 리나는 가만히 이마를 찌푸렸다. 그러길 3초? 어라, 외간 남자와 이렇게 친한 척 손을 잡아도 되는 건가. 놀라서 손을 확 놓았다.
『왜요? 그냥 잡고 있어도 괜찮은데.』
『시, 실례했습니다!』
『실례는 무슨. 언제든지 잡아도 좋으니까. 자아~ 아저씨랑 같이 손?』
리나는 정색하고 한 걸음 떨어졌다. 그리곤 급히 목례했다.
『그럼, 후작님! 준비가 끝나는대로 다시 뵙겠습니다.』
『아니, 손...』
『출발하기 전에 뵙죠.』
후작은 적잖게 실망한 눈치였다.

여자들이 들판으로 나올 적에 하는 말이라는 건「벌레가 많아 끔찍해, 햇빛이 너무 뜨거워, 바람이 불어 머리 스타일이 엉망이 되었어, 말똥은 질색이야, 땀에 젖어 기분이 좋지 않아」등등일 거라 생각한다. 때문에 남자들은 여간한 일이 아닌 이상 숙녀를 대동하고 여행하는 일을 반가워하지 않는다. 아무리 사랑해도 화살처럼 내리꽂는 불평불만을 들어줄만한 심적 여유라는 건 그리 많지 않음이다. 터미네이터에게 반복해서 말해보자.「벌레가 많아 끔찍해, 햇빛이 너무 뜨거워...」장담하는데 자기가 알아서 용광로로 뛰어들 거다. 이때의 대사는「I'll be back」이 아니고「다신 날 찾지 말아요」다.

그런 까닭으로 서른 다섯 명의 기사들은 예정에도 없던 리나 인버스의 동행을 반기지 않았다. 그녀가 남장을 하고 있다고 해도 그랬다. 쥐뿔도 모르는 주제에 귀찮게 굴고 있다 - 라는 것이 그들의 솔직한 생각이었다. 흘끔거리고 살피는 눈초리엔 그리하여 불편한 기색이 하나 가득이었다. 여자면 여자답게 집구석에서 수나 놓을 것이지. 더러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쓰며 혀를 차기도 했다.
그러나 저택을 떠나온지 약 2시간이 경과하자 흘끔대는 시선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놀랍게도 그녀가 지금껏 입에 올린 불평이라는 건「배고파」가 전부였다. 나무에서 진초록색의 메롱벌레가 떨어졌을 때에도 까무라치지 않고 대신 침착하게 손가락으로 그걸 집어 땅바닥에 버렸다.
다시 2시간이 경과하자 얼굴을 찌푸리며 돌아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대신 옆으로 붙어 참견질하는 인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꼬리뼈가 말안장에 닿아 얼얼할 적엔 이렇게 하는게 좋다, 멀미가 날 것 같으면 이렇게 침을 삼켜라 등등의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로부터 다시 1시간이 흐르자「누가 여자고 누가 남자냐」식으로 완전히 섞여버렸다.
말 달리자.

죠르프는 나지막히 휘파람을 불었다.
『달리는 폼이 굉장히 익숙해 보이는군. 자세도 딱 잡혔고. 그렇지 않나? 로머디스. 꼭 기사단에 막내가 들어온 것 같어.』
기사단의 막내! 그래도 여자인데 막내!
로머디스는 대답하기가 심히 민망하여 하아~! 기합을 넣고 말 궁둥이나 때렸다.
알렉산드리아의 등대가 무너진다. 저 바다 건너편에서부터 가치관이 붕괴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말 궁둥이를 한 번 더 때려보자. 이랴.
그런 로머디스에게 죠르프는 한층 더 가깝게 들러붙었다.
『이봐, 이봐. 주름살 펴라고. 이 정도면 한시름 놓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제피리아에서 따라붙은 기사들도 나름대로 아가씨를 잘 호휘하고 있고 말이지. 자네의 눈썹이 작살 맞은 갈매기가 될 까닭이 없어 보이는구먼. 응? 로머디스?』
제피리아에서 리나를 따라나선 기사는 모두 셋.
게중에서 제일 눈에 띄는 금발의 미청년은 이름이 가우리 가브리에프라고 한다. 강아지를 연상시키는 착한 눈매에 여자 뺨치는 예쁘장한 얼굴이다. 겉가죽만 봐선 벌레 한 마리 못 죽일 것 같다. 작년에 있었던 전국 검술대회에서 아깝게 2위를 차지한 남자라곤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실력은 누가 뭐래도 진짜다. 결국 무승부로 판가름난 박빙의 승부에서 동점연하승의 법칙에 따라 2위로 입상, 현 국왕대리인 피리오넬 왕자로부터 기사의 검을 선사 받았다. 단순히 상대방보다 나이가 많아 진 것이다.

『그랬대?』
『그랬네.』
『호오- 1위는 누구였는데?』
『제르가디스 도련님.』
『아이쿠.』

무명의 평민 씨가 굴지의 명문가 도련님을 제치고 우승을 한다는 건 대회 스폰서들의 감정을 긁어놓는 법이다. 슬레진 제국이 신분상 제약에 관해 꽤 너그러운 편이라고 해도 그렇다. 공주는 아름다워야 하며, 기사는 비단으로 옷을 해입어야 한다. 못생긴 공주와 누더기 옷의 기사는 예로부터 반사회적이라며 배격받아왔다. 따라서 이 자는 순전히 신분상의 까닭으로 경기에서 불이익을 받았을 확률이 높다. 그런데도 2위. 그것도 단순히 나이 때문에.
그거 참... 진짜 실력자다 이거지. 로머디스는 슬그머니 뺨을 쓸었다.
그러고보니 생각난다. 우승자의 화관을 받아왔음에도 그들의 얼음 도련님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한 술 더 떠서 도련님은 화관을 내팽개쳤다.

『에잇. 쓸데없는 추측은 그만둬. 어쨌거나 이쪽 나이가 더 어린 건 사실이니까. 작년 우리 도련님은 열 아덟, 저쪽은 스물 다섯이었다고. 그러니까 아주 조작된 승부라고도 할 수 없을 거야. 체격 차이라는 것도 있잖아? 저치는 아무리 봐도 190cm는 넘게 생겼구먼.』

여덟 다음의 숫자가 열이라고 믿는 청년이 제대로 자기 나이를 세었는지를 오늘에 이르러 캐캐미 묻지 말자. 거기다 가우리 가브리에프 본인이 승부에 별 집착을 두지 않았으니 이제 와서 왈가왈부할 까닭이 없다. 가우리는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했으며,「저기요? 돈 많이 주나요? 우리 아가씨가 돈을 무지하게 좋아하세요」라고 말해 모두를 경악시켰다. 그리고는 제법 두둑한 상금을 챙겨 웃는 낯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좋은 사내로고.』
『그렇지? 나 젊었을 적 생각이 나는구먼.』
『듣지 않은 걸로 치겠네.』
로머디스는 차갑게 대꾸했다.

Posted by 미야

2008/03/27 13:18 2008/03/27 13:18
Response
No Trackback , a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828

Comments List

  1. kimmie 2008/03/27 19:53 # M/D Reply Permalink

    "아니, 손..." 에서 뒤집어졌습니다. 아아, 귀여워서 어쩌면 좋아요. 아쉬워하는 레죠 아저씨의 표정이 눈에 보이네요. 이번 수정본은 예전것 보다 좀더 위트가 섞여있네요. 벌써 8편이면 꽤나 중편인데, 순탄히 완결하시길 빌어요. (두손을 모은다)

Leave a comment

『자아, 아가씨께서 그렇게 신경쓰실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레이워즈 후작은 나긋나긋 웃으며 테이블 위로 펼쳐진 지도를 돌돌 말아버렸다.
『도적떼 출몰 이야긴 단순한 동네 헛소문이었나 봅니다. 여기까지 오는데 도둑놈들은 하나도 나오질 않았답니다. 제 부하놈들이 열심히 뒤졌음에도 머리카락 하나 안보이던걸요.』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놈들도 눈치가 있는데「날 한 입에 잡아 잡슈~」하고 군인에게 덤벼들까. 차라리 밧줄을 들고 스스로 교수대를 향해 걸어간다. 그것도 아니라면 온 몸에 날고기 매달고 상어 밥이 되겠습니다 복창한 뒤에 바다 한 가운데로 뛰어들거나.

『저희들은 평복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하! 이 남자가 지금 백 살 구렁이가 미끄럼틀 타는 소리를 하나. 평복이 뭐가 어째?
갑옷만 벗어던지면 뭐하느냔 말이다. 수십 명의 젊은 남자들이 일제히 말을 달리는데 도적들이 그걸 보고 매력을 느끼면 그 날로 천지개벽이다. 산적들의 입맛에 맞으려면 연약해 보이는 귀부인, 옷차림이 훌륭한 시동, 더러는 배 나온 대머리 아저씨, 호기심을 자아내는 커다란 보따리가 필수이다. 이쪽에서 찌르면 곧장 반격할 것이 분명한 튼튼한 남자들을 뭐 하러 건드리냐. 손수건만 팔랑 흔들고 그냥 보낸다.
『산적놈 주제에 취향에 따라 골라 먹는다는 겁니까.』
당연히 골라 먹는다. 강도질에 평등 개념이 어디에 있누. 가진게 많아 보이고, 끽소리 내지 못할 약한 놈부터 턴다.

이 무능한 집단아, 아무것도 모르면서 강도 토벌이라는 걸 하겠다는 거냐.

무능이라는 단어에 반응, 후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더니만 돌돌 말았던 지도를 손수 다시 펼쳤다.
무능하다고? 누가. 내가?
『알고 있습니까? 리나양. 쫓아가는 것보다 더 쉬운 것은 따라오게끔 만드는 겁니다. 기껏 따라갔더니 죄다 도망쳤더라, 하르시폼 경의 넋두리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안 됩니다. 리나양은 도둑들을 따라가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는 소득이 없어요. 꿀단지엔 파리가, 파이 조각엔 어린애가 달라붙는 겁니다. 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여기까지 말한 레죠 그레이워즈 후작은 손가락으로 달그닥 달그닥 말 달리는 흉내를 내며 버닛사 대로를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 뿐만 아니라 검지손가락을 척 들어올리고는「히히힝-」하고 말이 앞다리 차는 모양도 냈다.
『호오- 봉화를 올리라는 건가요.』
『바로 그겁니다. 소문을 진득하게 뿌려 차라리 산적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이쪽으로 달려오게끔 하는 거죠. 그게 더 효과적입니다. 예를 들자면 인버스 남작의 영애와 그녀가 운반하는 모종의 궤짝을 보호하기 위해 그레이워즈 후작가에서 사람을 보내왔다더라~ 어떻습니까. 머리에서 불꽃이 번쩍하는 기분이 들지 않습니까.』
『그거 확실하겠는데요. 좋은 생각입니다.』
그녀는 후작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며 깊게 수긍하는 눈치였다.

뭐가 확실하고, 뭐가 좋은 생각이냐!
똥침이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다급해진 로머디스는 천식 발작을 일으킨 환자인양 기침을 터뜨렸다.
『실례하겠습니다! 주인 나리, 잠시만... 아가씨? 죄송합니다.』
로머디스는 남작의 영애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뒤, 철판을 덧댄 슬리퍼로 흠씬 두드려 맞을 것을 각오하고 후작과 함께 뒤쪽으로 물러났다.
『허억, 허억. 나으리,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그렇죠?』
당연하다. 정체가 의심스러운 궤짝 자체도 문제가 되는데 한 술 더 떠서 남작의 열 여섯 난 영애를 에스코트 하는 일에 후작가에서 수십 명의 사람을 보냈다고 해봐라. 소문 좋아하는 인간들이 그걸 두고 뭐라 상상할지는 너무나 뻔하다.

지금껏 서신 왕래조차 없던 사이면서 갑자기 웬 친한 척?
후작이 제피리아에 거금의 자본을 투자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고.
남작이 후작에게 거금의 정치 자금을 건네줄 정도로 나라에 큰 사건이 벌어질 조짐도 없고.
그렇다면 들고 가는 궤짝은 돈뭉치가 아니라 단순한 옷상자?
이래서는「아항~ 후작이 남작의 어린 딸을 첩으로 들이려고 하는구먼」으로 결론이 난다.

첩이다. 애인도 아니고, 약혼자도 아니고. 첩이다!
『소문이라는게 원래 그런 거죠. 그걸 잘 아시면서 소문을 진득하게 뿌린다고요?!』
세상에. 결혼이나 미리 하고 염문을 뿌려라, 이 빌어먹을 노총각아.
거기다 열 여섯 소녀의 앞 날을 새까맣게 망칠 일 있냐. 로머디스는 울상지었다.
『후작님! 절대로 안되요!』
『안되긴. 내가 안된다고 해도 저쪽에선 강제로라도 하겠다는 눈치구먼.』
『그러니까아~!! 재밌어 죽겠다는 식으로 허벅지를 때리면 안된다니까요!』
『허벅지는 때리지 않았습니다. 그냥 손뼉만 쳤지.』
『그게 그거잖습니까!』
즐기고 있는 거죠? 즐기고 있는 거죠?! 눈동자 굴리는 거 봐라. 로머디스는 발버둥쳤다.
『여자와 아이는 지켜줘야 합니다. 망가뜨려서는 안됩니다. 그게 기사의 정신입니다!』
『어허! 기사도 정신이야 기사들이 지켜야지요. 하지만 나는 기사가 아닙니다. 내가 어려서 한때나마 수도승 생활을 했다는 이야긴 이미 들어 알고 있겠지요? 로머디스. 나는 지금도 법사 지망생입니다.』

흥! 그렇게 나오깁니까. 그렇지만 이걸 아셔야지.
우리 슬레진 왕국 황태자의 캐치플레이즈는「악당은 물렀거라」잖소. 일이 하나라도 잘못되면 그 때는 스무 살 연하를 건드린 변태로 낙인찍혀 귀족 사회에서 영구 추방이오!

순간 그레이워즈 후작의 얼굴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스물! 맙소사. 그렇게나 벌어지나요. 우리들 나이 차이가.』
『지금 나이 차이가 얼마냐를 깨닫고 새삼 쇼크 받을 때가 아닙니다. 그리고「우리들」이라뇨? 언제부터 각하와 리나양이 우리라고 불리우는 가까운 사이가 된 겁니까?!』
『그렇군. 올해로 내 나이가 서른 여섯이군. 세월 참 빠르다.』
『각하! 이 시대엔 우주선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습니다! 안드로메다까지 가지 마시고 어여 이리로 돌아오십시오!』
『허. 그리 멀리 가지 않았으니 작은 목소리로 부르십시오, 로머디스. 귀가 아픕니다.』
『하여간 전 반대입니다, 나으리. 남작의 영애를 일에 말려들게 하지 마세요.』
『맙소사. 내가 그렇게 하라고 명령이라도 했답니까. 난 그저 의견을 제시했을 뿐이고 저쪽에서 그거 좋겠다고 맞장구를 치던데요, 뭐.』
그리고는 고개를 빼꼼 돌려 남들 다 들으라며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리나 인버스양. 제 부하가 그 작전은 위험하니 그렇게 하지 말 것을 강력히 주장하는데-』
저편에서 열 여섯의 소녀가 재빨리 대답했다.
『인생은 어차피 모험이에요. 남자가 어딜 뒤로 빼요!』
과연 그럴 줄 알았습니다. 후작은 만족스러워하며 팔을 벌렸다.
『들었습니까, 로머디스. 아가씨는 산적들을 붙잡아 정의를 구현하고 싶어합니다.』
『안된다니까요오-』

계속되는 부하의 읍소에 후작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슬슬 짜증이 치솟는데 이걸 어쩌지. 로머디스? 그대는 목이 밧줄로 졸린 뒤에 괜찮다고 할 겁니까. 아님 그냥 괜찮다고 할 겁니까.』
내가 미쳤지. 이 작자에게 뭔 잡소리를... 풀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하지만 막상 일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자 로머디스는 입이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그들을 막아야 했었다며 후회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쌍두마차다. 감청색의 최고급형 휘장이 드리워진, 여성 귀족들이 애용하는 스타일의 마차다.
진땀을 줄줄 흘려가며 마차의 문을 열었다. 안으로 금으로 치장한 궤짝이 보였다. 그리고 최고급 실크 드레스 - 그것도 결혼식을 연상시키는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어린 소녀가 등을 돌리고 앉아 궤짝의 자물쇠를 손보고 있었다. 노랑도 빨강도 아닌, 하필이면 흰색이다.
갑작스런 인기척에 소녀가 흥얼흥얼 콧노래를 멈추고 뒤를 돌아다 보려고 했다. 로머디스는 겁이 덜컥 나서 실례했습니다 인사도 잊고 마차의 문을 쾅 닫아버렸다.
정말로 하는 거야, 정말로 하는 거야... 하도 가슴이 뛰어 성호라도 긋고 싶어졌다.

『허억, 허억. 여보게, 죠르프!』
『왜 그러나, 로머디스. 발작인가, 아님 두통이 심한가. 그리 머리를 움켜쥐고.』
『두통은 무슨!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졌네. 뒷일을 부탁함세.』
『하지만 뒷 일이고 앞 일이고 우리가 나서서 할 일은 별로 없는 걸.』
죠르프의 말 그대로이다. 일은 저쪽에서 알아서 추진하고 있다. 하다못해 술값 몇 푼을 쥐어주고 소문 좋아하는 허풍쟁이들도 몇 구한 듯하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같은 말을 하고 또 하는 주당들에게야 이건 공짜로 먹는 꿩이나 마찬가지일 터, 따라서 내일이면「인버스 남작네 뒷뜰에서 공룡 알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산 다섯 개는 넘어갈 거다.
『공룡 알?』
『왜 눈을 꿈뻑거리고 그러나. 드래곤의 알 말일세.』
『진짜?』
『남의 뒤뜰에 쭈그리고 앉아 새끼를 치는 드래곤이 있다면 있는 거겠지.』

본가에서의 준비도 착착 진행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온 식구가 아침부터 부산을 떨고 있다. 일부러 과시하듯 온 집안을 뒤집어놓고 지붕 꼭대기로 인부들의 세탁한 바지를 널었다. 이삿짐을 싸서 집 팔고 제피리아를 떠난다고 해도 믿겠다. 뛰어다니는 하인들에 깨지는 접시들, 날아다니는 부지깽이들, 굴러다니는 지구방위대 및 외계인들...
이 와중에 홀로 독보적인 모양새로 사람들을 호령하고 있는 건 이 집의 첫째 딸이다.
『더 커다란 자물쇠를 가져오라니까! 됐어! 그 다음은 거기! 이걸 옮겨! 다음!』
왜들 그리 느려 터졌느냐며 언성을 높인다. 기다란 홍옥 빛깔의 머리카락을 질끈 끈으로 묶어놓고 전두지휘하고 있다. 거기다 사람 기절하게끔 남성용 바지를 입고 있다.
로머디스는 뽀얀 거품을 물었다.
바지이-?! 하얀 드레스 입고 마차 속에 들어가 있던 숙녀는 그럼 도대체 누구여?!

이쪽을 발견했다. 리나 인버스가 반색을 하고 다가왔다.
『여어, 로머디스 씨, 죠르프 씨.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걷는 모양새도, 하다못해 말투까지 이미 남자다.
『아, 아, 아가씨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날씨가 매우 좋군요.』
산전수전 다 겪은 죠르프는 패닉까지는 일으키진 않았다. 그래도 입은 떨렸다. 아첨하듯 손바닥을 부비대며 허리를 숙이는 건 그가 매우 당황했다는 의미이다.

『그나저나 이게 다?』
『당밀로 파리를 잡는다 작전입니다.』
그렇게 말한 리나는 손을 탁탁 털며 짐꾼들을 향해「그 상자는 이리로!」라고 호령했다.

Posted by 미야

2008/03/21 09:35 2008/03/21 09:35
Response
No Trackback , a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823

Comments List

  1. 엘리바스 2008/03/24 22:41 # M/D Reply Permalink

    얼라? 엊그제부터 오늘아침까지 이 페이지가 안뜨더니 갑자기 다시 되네요?
    잠적하신 줄 알고 심히 놀랐었습니다..ㅠㅠ

Leave a comment

『처음 뵙겠습니다, 후작님.』
아들 역할도 오케이, 딸 역할도 오케이.

이제 그들은「아들도 인버스, 딸도 인버스」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깨달았다.
한쪽 무릎을 살짝 굽혔다 일어선 그녀는 평상복에 가까운 단순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나풀거리는 레이스 장식과 갖은 꽃장식으로 치장한 귀족 처녀들과는 거리가 멀다. 색상은 단아한 감청색. 치맛단과 허리 부위로 금색의 선이 들어간 걸 제외하고는 장식이라는게 아예 붙어있질 않다. 옷차림만 봐서는 슬레진 제국에서도 손가락을 꼽는 부잣집 딸네미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소매 모양새조차 대도시 유행 스타일이 아니다. 아니, 아니. 그 이전에... 죠르프는 무의식중에 턱수염을 어루만졌다. 뭐랄까, 치마는 치마인데 치마로 안 보인다. 소녀라기 보다는 소년의 느낌이다. 작지만 무지 단단해 보인다. 선이 분명한 얼굴, 대단히 총명해 보이는 두 눈동자. 끝내준다.
그러다 퍼득 느꼈다.
여자라고? 아니다. 저건 남자다. 사랑에 울고 사랑에 죽는 연약한 온실의 꽃이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저런 식의 눈빛은 가질 수 없다. 선술집에서 술도 마셔봤고, 한량답게 계집을 껴안고 농탕질도 해본 얼굴이다. 돈 맛을 알고 권력의 맛을 안다. 자긍심으로 심장을 단단하게 하고 간계로 적들을 우롱한다. 화관으로 머리를 장식한게 아니라 튼튼한 철로 관을 만들어 썼다. 사자를 단칼에 찔러 죽이고 온 몸에 뜨거운 짐승의 피를 뒤집어 썼다.
그런데도 호적상으로 열 여섯의 소녀라는 건가. 이건 실수가 분명하다. 뭔가 잘못되었다.

후작도 비슷한 감상을 느꼈던 것 같다.
무어라 말 한마디 없이 덥썩 손부터 올리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말이다.

죠르프와 로머디스는 숨을 멈춘 채 기절했다.
잠깐만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구애도 생략한 채 가슴부터 만지깁니까?!

『이봐요!』
반응은 리나 인버스가 더 빨랐다.
가슴을 향해 올라오던 후작의 손을 찰싹 소리내어 후려쳤다.
『댁의 조카분처럼 실수하려는 거라면 진작에 정신 차리세요.』
『하?』
『정말이지 한 핏줄 아니랠까봐.「신이 정해놓은 운명을 부정하고 남자가 치마를 입어, 보는 이들을 타락의 길로 인도하며, 남의 마음을 농락하는 은밀한 즐거움에 빠져들어 스스로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건가」우짠가 식의 이상한 대사를 늘어놓는 것으로도 모자라, 정말로 여자인지 아닌지를 확인한답시고 남의 가슴을 막 주물러대는 건 이제 사절이라고요. 척 보면 몰라요? 도대체 세상의 어느 남자가 나처럼 아름답고, 우아하며, 사랑스럽냐고. 새삼 깨닫는 거지만 당신네 가문 사람들은 시력이 나빠요.』
반론의 여지가 없다. 후작은 얼얼한 통증을 호소하고 있는 손을 도로 거둬들였다.
하지만 여전히 헷갈린다. 저 연령대의 소년이라는 건 때로 소녀들보다 더 섹시한 법이다. 세이렌들은 높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바다 저 깊은 곳으로 배를 침몰시킨다. 본인은 고약한 취미라고 생각하지만 미령의 소년에게 홀려 스캔들을 일으키는 작자도 없지 않다. 뺨에 분칠을 하고, 수컷을 함락시키는 페로몬을 발산하는, 이른바 소년 꿀벌에게 당해 패가망신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무료함에 어쩔 줄 몰라하는 귀부인들의 단골 입방아 주제다. 실제로 여장을 한 유명한 남창으로는 마젠다라는 이도 있다. 슬레진 제국의 왕족 중 하나가 마젠다에게 홀려 가산을 탕진했다는 이야기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다들 쉬쉬하고 있어도 후작은 그 문제의 멍청이가 크리스토퍼 왕자의 아들 알프레드라는 걸 진작에 눈치챘다. 알프레드는 분노한 아버지에게 의절당하고 지금은 빈털터리 신세로 외국으로 쫓겨난 상태다.
『아앗?!』
그러니 최후까지 확인하는 것이다.
한 번 실패했다고 뒷짐 지고 퇴각할까보냐. 오른손이 아니면 왼손이 있다.

커다란 손으로 가슴을 덮었다.
이건가 싶자 후작의 표정이 답지 않게 살짝 흔들렸다.
『가슴이... 저런. 작군요.』
『이게 뭔 짓이야~!!』

- 찰싹.

로머디스는 깨달았다. 그네들 얼음 도련님이 뺨 맞은 사연이라는게 과연 무엇인지를.
그 숙부라는 자가 거짓말처럼 고스란히 그 실수라는 걸 반복하고 있는데야, 뭐.

『이이이이이잇~! 다시 말해두지만 지위의 높고 낮음을 떠나 그쪽이 잘못한 거예요!』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뭐예요! 잘못을 인정한다면서 왜 그놈의 손은 아직도 원위치로 돌아가지 않는 거죠.』
확실히 원위치로 안 돌아가고 있다. 손가락 끝이 아슬아슬하게 가슴섶에 닿아 있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가슴 굴곡을 스치게 된다. 아니, 이미 스치고 있다. 그 당연한 결과로 리나 인버스의 얼굴색은 불타는 석탄 비슷하게 되었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화가 치밀어 새빨간 색이다.
그런데도 얄미운 아저씨는 뭐가 그리 좋은지 희희락락.
『꽃이 피어난 곳에서 나비는 잠시 날개를 접고 쉬어가는 법이지요.』
『하지만 꽃도 징그러운 송충이는 질색할 겁니다. 자! 장난은 그만하시지요. 할 일이 산더미입니다.』

저 두 사람은 서로 제대로 된 통성명도 안 했다는 걸 알고는 있나.
뭐, 둘 다 그런 세세한 곳엔 신경을 쓰고 있지 않으니 감히 지적할 의무감을 못 느낀다.
리나는 능구렁이 표정을 짓고 있는 그레이워즈 후작을 힘 주어 노려본 뒤에 테이블 위로 지도 하나를 펼쳤다. 그리고는 정확히 한 지점을 향해 검지손가락을 찍었다.

- 제피리아

바퀴벌레라도 일시에 압사시킬 박력이었으나 그녀의 손가락 끝을 쳐다보는 남자들의 눈초리는 변함이 없다. 아무튼 그들은 통나무 군인, 더러는 그 기질이 풍부한 사람들이었다.
『이곳이 제피리아입니다.』
『그렇군요.』
이어 앙증맞은 손가락은「버닛사 대로」라고 적혀진 길다란 선을 따라 움직였다. 산 밑둥을 돌고, 나지막한 언덕을 두어 개 넘어, 다리를 세 개 지나면 저 반대편으로는 후작의 영지인 사일라그가 있다. 다만 그녀가 가져온 지도는 그렇게 큰 면적을 한 면에 담을 수 있을 정도로는 크지 않아 사일라그의 이름은 사일- 에서 썽둥 잘려나갔다. 하지만 테이블에 모인 사람들은 그리 신경을 쓰는 눈치가 아니다. 어디가 어디인지만 알아볼 수만 있으면 족하다. 거기다 지금 그들이 주목할 곳은 사일라그가 아닌, 그곳으로 이르는 길목이니까.

버닛사 대로.

『여기는 치안 상태가 괜찮아요. 최근까지 도적이 나타났다는 이야긴 듣지 못했어요.』
당연하다. 일직선의 모양을 갖춘 버닛사 대로는 그 별명이「민둥 대머리」이다. 쉽게 말해 길게 뻗어나간 길 가장자리로 몸을 숨길만한 바위라던가, 큰 나무 숲이라던가, 깊은 동굴이라던가 하는 것들이 일절 없다. 강도짓을 하려면 어딘가로 매복하고 있다가 근처로 굴러들어온 먹잇감을 공격해야 하는데 200미터 떨어진 저만치에서도 사람 머리가 뚜렷하게 잘 보여서야 원... 날씨가 화창하면 가시거리는 그 곱절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칼 들고 어험 헛기침을 하면 그걸로 장사 끝. 알아서 죄다 도망을 쳐버린다. 산적떼 입장에선 주머니 불리기엔 최악의 장소인 셈이다.

그녀는 다시금 손가락을 들어 대로에서 약간 벗어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샛길인 이곳 덤블 길은 길이 외진데다 주변이 모두 숲이라서 매복이 가능하지만...』

- 곰이 산다.

고로 패스. 살인 곰 제이슨 앞에선 산적도 그 위상을 잃는다.

리나는 귀찮게 흘러내린 옆머리를 정리하며 지도의 한 부분을 다시 지적했다.
『이쪽 위킬스로 내려가는 길은 좁아서 마차가 지나가긴 힘들죠.』
그런 연유로 마차를 즐겨 애용하는 부자들은 당연히 그 길을 기피한다. 돈줄이 기피하니 산적들도 기피한다. 위킬스로 내려가는 길은 보따리가 가벼운 농민들이나 나무꾼들, 더러는 사냥꾼들의 한가로운 산책로나 마찬가지다. 그녀는 두고 볼 것도 없다며 시선을 돌렸다.
『문제는 바로 이곳. 물레방앗간 위쪽으로 이어지는 흙외담 길입니다.』
손가락이 강조의 의미를 담아 둥글게 원을 그렸다.
『3년 전까지만 해도 산적들이 득시글거렸던 장소이죠.』
그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카타트 산맥에까지 이른다.
카타트 산맥이 어떤 곳이더냐. 모험가들의 천국, 검술 수련의 백미, 아울러 저승 사자들의 대기소다. 듣기로는 살벌한 날짐승들의 천국이랜다. 그래서 슬레진의 초대 국왕은 카타트 산맥에서 사람을 잡아먹으러 내려올 야생 동물들을 차단하고자 길고도 지루한 토담을 쌓아 국민을 보호하려 했다.
높이는 약 1미터, 길이는 측량 불가. 오늘날에 이르러 간혹 무너진 곳이 없잖아 있지만 30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문제는 토담 저 건녀편으로 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숨으면 감쪽같이 안 보인다는 것.
거기다 높이가 겨우 1미터이니 날쌘돌이들은 한 걸음에 뛰어 넘는다.
그 결과 여차하면 나타나는게 도둑놈들, 내지는 엄마 찌찌를 밝히는 치한, 더러는 강도가 되어 버렸다. 산적들은 밥그릇의 은총을 베푼 격이 되어버린 슬레진 초대 국왕에게 기쁜 마음으로 헌화했다.

『우린 그걸 진작에 헐어버렸지요, 로머디스? 그게 한 4년 전이었던가...』
『물론입니다, 후작님.』
골머리를 썩힌 일부 영주들은 문제의 토담을 곡괭이로 헐어버렸다. 그러나 그놈의 토담이라는 것이 유서 깊은 문화유적지 - 그것도 자신들의 초대 국왕이 만든 - 이고 보니 그 짓도 쉽지만은 않다. 왕실에 밉보여서 좋을 건 없다.
『음? 황태자는 내가 그걸 부셨다고 했을 때도 아무 말 안 하던데.』
『당연하죠!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닌 후작님이니까요.』
고개를 갸우뚱하는 주인을 뒤로 하고 로머디스는 땀에 젖은 수건을 비틀어 짰다.

『그래서 말인데요.』
여기서 리나 인버스가 의미하는 건 다음과 같다.
산적 토벌을 하러 나왔다면 구체적인 정보가 있을 거 아닌가.
토담길 최후 토벌의 기억은 정확히 1년 8개월 전이다. 바퀴벌레의 완벽 박멸이 사실상 불가능하듯 토벌대가 도적들을 쓸어버려도 잔당은 매번 남는다. 외눈박이 스미스 일당이 궤멸되면 다음은 다리 털은 면도기로 밀자 형제들이 주름을 잡는 식이다.
이번엔 어떤 놈들일까.
하여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로머디스를 응시했다.

그런데 어랍쇼.
꽃사슴이 뛰어갑니다 하며 로머디스가 고개를 획- 돌렸다.
리나는 다소 어리둥절해 하며 이번엔 죠르프를 바라봤다.
사내는 구두에 뭐가 묻었나보다 식으로 땅만 쳐다보았다.
이봐요들?

Posted by 미야

2008/03/20 16:39 2008/03/20 16:39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821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2 : 3 : 4 : 5 : 6 : ... 16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990656
Today:
113
Yesterday:
182

Calendar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