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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fanfic] Summertime 02

우스개 얘기로「냉장고에 코끼리를 집어넣는 법」이라는게 있다.
이것에 대한 딘의 대답은 지극히 평범했다.
엄청나게 큰 사이즈의 특제 냉장고 앞에서 코끼리 엉덩이를 뻥 걷어찬다 - 이래선 생각하는 것조차 귀찮아했다는 것이 눈에 훤히 보인다. 하품이 나오도록 진부하기 그지없다. 물론 서른 시간 가까이 제대로 숙면을 취하지 못했고, 몸에서 썩은 흙냄새가 진동하는 마당에 창의력 어쩌고를 따지는 건 우습지만서도.
그렇다면 샘 윈체스터의 대답은 어떨까. 유니콘이 실재한다고 믿는 만큼「코끼리에게 마법을 걸어 손바닥만큼 작게 만들면 되지」라고 사랑스럽게 말하진 않았을까.

딘의 뺨이 일그러졌다. 하! 꿈도 야무져라. 샘은 특유의 멍청이를 비웃는 표정을 짓곤 이렇게 말했다.
코끼리는 아프리카나 말레이시아처럼 더운 곳에서 살아. 냉기를 싫어한다고. 그러니 차가운 냉장고에 들어갈 까닭이 없지.
그래서 동물원에 놀러간 가족들이 재미랍시고 음료수 컵 안에 든 얼음을 코끼리를 향해 먹어 보라 내미는 건 정신 나간 짓거리라는 거다.

손가락으로 눈두덩이를 세게 문지르던 딘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쯤해서 아프리카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법은 접도록 하자.
대신 오늘의 골칫거리는「샘 윈체스터를 임팔라 안에 집어넣는 법」이다.

① 안 움직이면 주먹으로 때리겠다고 한다.
오한이 들어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엄마 젖도 못 먹고 자란 불쌍한 자식, 어딜 때린다는 건가. 두고 볼 것도 없이 기각.

② 이대로 길바닥에 두고 가겠다고 윽박지른다.
최악의 선택이다. 샘은 제발 날 두고 가라며 동네 시끄럽게 소리소리 질러댈 것이다.

③ 자동차 시트 아래로 좋은 걸 감춰뒀다며 안에 들어가라 꼬신다.
옵티머스-프라임 트럭 모형을 차 속에 숨겨뒀다고 거짓말했다 들통 난 이후 샘은 자동차 시트 아래로는 손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걸 학습했다. 그때가 네 살이었고 다음부터는 같은 수법에 절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빌어먹게도 샘은 기억력이 비상했다.

『형, 아무래도 이건 다 들어가지 않겠어.』
채 싣지 못한 짐을 땅바닥에 내려놓은 동생은 불만을 표시하며 입을 삐죽거렸다. 가져가도 된다고 허락받은 소지품의 전부가 약간의 옷가지에 불과할 뿐인데도 그까짓 옷가방 몇 개로 이미 자동차 내부는 포화 상태였다. 부피가 큰 겨울 코트를 과감하게 쓰레기통으로 던져넣었음에도 큰 차이가 없었다. 결국 몇 개의 물건은 그 중요함과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포기해야 할 것이다. 대략 5초 정도 생각한 뒤, 딘은 그중에서 오래된 신발 두 켤레를 빼냈다.
『너도 미련 갖지 말고 책을 버려.』
『안돼. 이건 다 못 읽었어.』
『줄거리는 이미 알고 있잖아. 거시기 뭐냐, 독한 살충제를 맞고 머리가 이상해진 개미가 종교를 갖게 되면서 손가락 혁명을 일으킨다는 거지? 개미 귀신이 되지 않으려면 꼭 소금을 뿌려 화장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질 못하니까 여왕 개미가 악령에 빙의되어...』
『뭔 소리야.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그런 줄거리로 글을 쓰지 않았는데.』
『안 썼으면 다행이지. 바글바글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개미들의 유령이라니, 끔찍하잖아.』
『글쎄, 그런 내용이 아니라니까. 형.』
『아녀? 이상하네. 여왕 개미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니까 일개미가 화가 나 반란을 일으키는 거잖아. 죽도록 일만 하진 않겠다, 우리에게도 시원한 맥주를 지급하라. 그리고 여왕 개미의 반라의 나체 사진도 같이... 아니야?』
『아니래도.』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은 샘은 기존의 가방 위로 다시 가방을 포개어 쌓았다. 딘의 판단으로는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잡동사니로 꽉 들어찬 틈바구니에서 한껏 쭈그린 자세로 몇 시간이고 참아야 하는 건 다른 사람도 아닌 그들이다. 옴짝달짝 못한 채 그대로 주 경계선을 넘으면 다리에 쥐가 나 나중엔 걷지도 못하게 된다.
『형은 정말 바보구나. 일개미의 성별은 전부 암컷이야. 그런데 뭐하러 여왕 개미가 팬티만 입은 사진을 요구하겠어. 걔네들이 전부 레즈야?』
『에?!』
『진짜지 학교는 폼으로 다녔어?』
『...』

쑥스러움을 감추고저 딘은 시선을 자동차에서 집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아빠가 늦네. 케일럽 아저씨랑 뭐하고 계시는지 가서 보고 오마. 넌 마저 정리하고 있어.』
샘은 당연히 짜증을 부렸다.
『정리고 뭐고 더 이상 안 들어간다니까.』
『그러니까 레즈 개미가 나오는 쓰잘대기 없는 책들은 걍 버려.』
『딘!』
『냉.장.고. 속에 네 놈 엉덩이를 집어 넣으려면 포기하라고.』
얼떨결에 자동차라는 단어 대신 냉장고라는 말이 나왔다.「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냉장고?」샘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끔씩 터져나오는 형의 돌발 발언은 수퍼맨이 고주망태가 되어 수영장에서 익사했다는 뉴스 만큼이나 그 느낌이 신선했다.
샘은 눈치를 살살 살피며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냉장고?』
『그래! 냉장고!』
여전히 어리둥절해 하는 동생을 뒤로하고 딘은 집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삿짐 옮기는데 큰 도움이 되질 못해 미안허우요, 존.』
『괜찮네.』
『갈비뼈가 덜 붙어서요.』
『무리하지 말게. 교.통.사.고.가 난지 이제 4개월이잖나.』
딘이 현관문 손잡이를 쥐고 오른편으로 돌리는 것과 같이 해서 안쪽에서 들려오던 말소리가 갑자기 끊겼다. 그러다 인기척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아차린 두 사람은 긴장을 풀고 곧추세운 어깨를 도로 누그려뜨렸다. 케일럽이 오른손을 슬며시 들어 딘에게 인사했다. 시선은 존에게 향한 채였다. 그 상태로 두 사람의 대화는 다시 이어졌다.
 『덕션은 폐차했나?』
『폐차를 하기는 남은 부품이 아까비라 어떻게든 고쳐보려고요.』
『뼈가 부러졌다면서 부숴진 자동차를 만져?』
『심심해서요. 이 몸으론 일은 당분간 무리고, 그렇다고 소파에 죽치고 누워 TV만 보는 건 취향이 아녭니다.』

케일럽의 나이는 존보다 여덟 살 아래다. 하지만 존과는 이미 여러 번 같이 일한 적이 있는 명실공히 헌터다. 실제로 이번 부상은 일반적인 교통사고 때문이 아니라 특이한 폴터가이스트 현상 때문으로, 아끼던 애마에 탑승한 채로 귀신 붙은 정원에서 데굴데굴 굴려졌다고나 할까, 양철 깡통 차기 신세가 되었다고나 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붕 날아올라 물이 메마른 연못으로 처박혔다고 할까... 야외에서의 폴터가이스트 현상은 흔치 않다. 기껏해야 2층 다락방에서 의자가 날아오겠거니 짐작했던 케일럽에겐 날벼락과 같은 일이어서 우여곡절 끝에 귀신 붙은 저택을 빠져나왔을 적엔 앰뷸런스의 도움이 필요했다고 한다. 그때 입은 상처가 완쾌되지 않아 지금도 무거운 짐을 들거나 빠르게 달리거나 할 수 없다. 덕분에 근래엔 개점휴업 상태.

『아무래도 나이가 들면 부러진 뼈가 쉽게 붙지 않죠.』
『그 말 얼른 취소하지 않음 빨간 비디오 안 빌려준다.』
킬킬 웃는 딘을 찢어진 칼눈으로 흘겨보던 케일럽이 화를 냈다.
『비앙카 라지브와 패티쉬 걸작 3부작은 물 건너간 줄 알어.』
이걸 돌려 말하면 아들에게 엄한 줄거리의 성인 비디오를 곧잘 보여줬다는 얘기가 된다. 바위처럼 단단해진 존은 케일럽을 무섭게 쏘아봤다.
『패티쉬 걸작 3부작?!』
지뢰 밟았다. 케일럽은 자세를 똑바로 하고 재빨리 말을 바꿨다.
『착각했어요. 제가 빌려준다고 한 건 리셀웨폰 1, 2, 3부예요. 그치? 딘.』
『맞아요, 아버지. 멜 깁슨 나오는 영화요. 전 아직 3편을 못 봤거든요.』
딘은 정리된 것 같으면서도 정리되지 않은 집안을 둘러보는 척하며 거짓말을 둘러댔다.

가구니 텔레비전이니 하는 것들은 그대로다. 주방 선반에 있는 양념통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와 이곳을 둘러본다면 여기에 살던 식구들이 잠시 외출을 한 모양이라 생각할 것이다. 야밤도주를 했다고 판단하기엔 남겨진 물건이 너무 많다 - 소파에 풀썩 주저앉은 딘은 샘이 셀로판 테이프로 붙여놓은 메모를 슬픈 눈으로 쳐다봤다. 월요일은 쓰레기를 버리는 날. 수요일은 세탁하는 날. 목요일엔 시장에 가서 장을 보고, 금요일은 감시하는 날.
입이 썼다. 감시는 쥐뿔. 아무리 데이트가 길어져도 집에는 꼭꼭 들어왔다고, 샘.

어쨌거나 딘의 등장으로 잠시 옆길로 샜던 어른들끼리의 이야기는 이제 마무리 단계로 접어드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디로 갈 건지 미리 정해놓은 장소는 있고요?』
『아직까지는.』
『엑- 그럼 저에게 맡기신 물건들을 제가 알아서 장기 보관해야 하는 겁니까?』
『그건...』
『뭐, 저야 상관은 없는데요. 대신 보관료 청구하면 줄 겁니까?』
『음.』
『에이, 농담이예요.』
다친 갈비뼈가 쿡쿡 쑤시는지라 손을 머리 위로 번쩍 드는 건 어려웠다. 그래도 케일럽은 어떻게든 팔을 벌리는 시늉을 해보였다. 절반은 장난이고, 절반은 무서워서였다. 헌터 생활 15년에 싸움에는 이골이 난 몸이라도 존과 붙어 싸우는 건 사절이다. 농담이 아니다. (전직) 해병대 사내와는 친한 친구인 편이 좋지 원수가 되면 엄청나게 골치가 아프다. 그들은 패배라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포기라는 걸 모른다. 영원히 충성을!

『말투가 거슬리는데.』
존이 두드러지게 인상을 썼다.
『자잘한 건 좀 넘어가고 그러슈, 상등병님. 그나저나 해병하니까 갑자기 생각나는군요. 헌터들 중에 도슨이라는 사람, 혹시 알고 계십니까?』
『누구?』
『도슨. 이름이 도슨 어빙인가 그럴 겁니다. 그 남자도 해병 출신입지요.』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군. 그런데 내가 달리 기억하고 있어야 할 까닭이라도.』
『없죠.』
케일럽은 싱겁게도 고개를 흔들었다.
『어쩌다 생각이 났을 뿐이예요. 저번에 단골 술집에 들렸을 적에 누군가 그럽디다. 술주정뱅이 도슨 어빙이 행방불명 되었다고요. 뭐라드라. 해리스 노블랜드... 촌닭 우는 동네에서 어느날 갑자기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감쪽같이 사라졌는데 아무래도 술을 지나치게 즐긴 나머지 감각이 둔해져「그것」에게 당한 것 같다는 거였어요.』

헌터가「그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의 정체는 뻔하다.
존의 표정이 돌연 심각해졌다.

Posted by 미야

2009/07/15 14:53 2009/07/15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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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List

  1. 나마리에 2009/07/15 19:30 # M/D Reply Permalink

    ...금요일은 새미가 형님 외박할까 봐 감시하는 날인가요? ㅎㅎㅎ
    샘 임팔라에 집어 넣는 법 너무 좋아요. ㅎㅎㅎㅎ

  2. 아이렌드 2009/07/15 20:37 # M/D Reply Permalink

    「샘 윈체스터를 임팔라 안에 집어넣는 법」

    : 보고싶어하던 책을 뒷좌석에 던져놓고 "물어!"
    (아니, 두줄 직직 긋고...)

    아무래도 새미는 복슬복슬한 강아지가 떠오른단 말이죠 ( '')

    1. 미야 2009/07/16 14:37 # M/D Permalink

      저게 성인버전이 되면 고민이고 뭐고 넘 쉬워진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형님 뒷좌석에서 유혹한다 <- 한 방에 끗.

  3. T&J 2009/07/16 20:48 # M/D Reply Permalink

    아하, 성인이 되면 정말 한방이네요-으크크크
    이번 편의 핵심은 샘 윈체스터를 임팔라에 집어넣는 법과, 케일럽과 딘의 모종의(?) 거래, 금요일마다 딘을 감시해야 하는 샘인가요?...
    근데, 일개미들이 모다 암컷이었냐며-헉, 나도 학교에서 뭘 배운거지...;;;나, 난 딘과 비슷한 수준인가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렇다고 걔네가 다 레즈들이 되는건가-아,놔-미야님, 너무 재미있으셔요,,,으크크크크

  4. ameretat 2009/07/20 22:49 # M/D Reply Permalink

    일개미들이 다 레즈-라는 말에 뿜었습니다. ㅋㅋㅋ
    아니 것보다 금요일은 감시하는 날이라고 적혀있는 메모를 보며 슬픈 딘인가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 멋집니다ㅠㅠ

[S☆N-fanfic] Summertime 01

※ 열러분, 오랜만입니다. 그리고 범인은 골렘 인형입니다. 냐하. ※


『짐을 꾸리도록 해라. 사흘 뒤에 출발할 거다.』

명령이나 다를 바 없는 존의 일방적인 통보에 두 소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짐을 꾸리라고요?』
보다 더 많이 찡그린 쪽의 소년이 반항적으로 눈을 치켜떴다.
경찰의 추적을 피해 도주 중인 은행 강도도 이보단 덜 거주지를 옮길 것이다. 게다가 그들의 계산이 맞다면 - 딘의 수학 점수가 바닥이라는 점은 별개로 치고 - 윈체스터 가족이 사글세를 다 까먹고 길바닥으로 쫒겨나기까지 아직 2개월 가량의 여유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 사흘 뒤? 샘은 탄식했다. 더하기와 빼기의 오류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이건 너무 빨랐다.
평소「최소한 다음 학기가 끝날 때까지 여기서 이사 가지 않게 해주세요」라며 하늘의 반짝이는 별님에게 소원을 빌던 샘은 절박감에 사로잡혀 시선으로 그의 형을 찾았다. 왜냐하면 장남이 약간의 푼돈을 침대 매트리스 아래로 꿍쳐두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발 - 마른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호소했다. 지금이야말로 돼지 저금통을 깨부술 시간이야, 형! - 그는 이사 가고 싶지 않았다.

『사이먼이...』
사이먼은 샘이 이곳에서 사귄 단짝 친구의 이름이다. 두 소년 모두 외골수인데다, 누가 뭐래도 고집쟁이이고, 변죽이 들끓었으며, 책이라면 환장했다. 그리고 엄마가 없어 불행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렇게 비슷한 점이 많으면 서로 반발할 것도 같건만, 둘은 찰떡처럼 붙어다녔다. 숙제도 곧잘 같이 했고, 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전거를 타고 꽤 멀리까지 놀러나가는 일도 많았다. 게다가 그들은 이번 여름방학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하여 계획도 짰다. 그중에는 자연사 박물관을 방문하는 일도 있었다. 서른 여덟 살 먹은 사이먼의 삼촌을 보호자로 대동하고 시카고까지 버스를 타고 가자며 틈만 나면 노선표를 들여다보곤 했다. 거사일도 7월 20일로 정해놨다.

『사자 박제가~!!』
마이클 더글러스가 주연으로 나온 영화「고스트 앤 다크니스」개봉 탓일까, 박물관 견학 기대에 부푼 샘은 140명 이상의 철도 인부를 잡아먹은 것으로 알려진 차보의 식인 사자의 박제에 대해 곧잘 떠들곤 했다. 어린애도 아닌데 솜을 넣어 만든 인형에 흥분하는 거냐, 딘이 구박을 해도 샘의 흥분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디즈니랜드에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색연필로 달력에 표시를 해두고 비밀스런 미소를 짓곤 했다. 존이 반대를 하면? 아무에게도 말하진 않았지만 그때는 가방 하나 끌어안고 가출을 감행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가출이고 뭐고 다른 마을로 이사를 가버리면 삽시간에 모든게 끝장.

뜬금없이 튀어나온 사자 박제 이야기에 눈살을 찌푸린 존은 가만히 두 아들을 응시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냐.』
『물론 있고 말고요. 아버지! 저는... 읍!』
저수지에 물이 말라 벼농사가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읍소가 터져나오기 전에 딘은 재빨리 팔을 앞으로 뻗어 동생의 아래턱을 재빨리 움켜잡았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아버지.』
발끈해서 크게 소리를 지르려던 샘은 적잖게 당황한 눈치다. 재갈이 물린 짐승 신세가 된 건 둘째고 딘 가라사대, 아무 문제 없댄다. 화가 잔뜩 치밀어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쌍심지를 곤두세웠다. 그래봤자 딘은 동생을 쉽게 풀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팔꿈치를 세게 꼬집어도 요지부동. 발등을 밟아도 요지부동. 붙잡힌 턱이 쓰라렸다.
『더 하실 말씀이 없다면 방으로 돌아가도 될까요.』
앞에서는 아닌 척하고 뒤로 엎치락뒤치락하는 두 아이들을 바라보는 존의 표정은 대단히 복잡했다.

거의 끌려오다시피 해서 방으로 돌아온 샘은 결국 계집애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난 이사 안 가! 못 가!』
꺼이꺼이 흐느끼며 침대를 향해 꺽다리 몸을 던졌다.
『딘은 바보!』
분에 넘쳐 주먹으로 베개를 마구 때렸다.
그 나이에 으앙 소리를 내어 울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무릇 남자라면 울음이 나와도 꾹 참아야 하는 법 아닌가. 그런데도 샘은 봇물이 터지기라도 한 것처럼 눈물을 쏟아내며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엉망진창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코를 들이마시면서 동시에 딸꾹질도 했다. 불가항력적으로 호흡이 짧게 끊어져 얼굴이 새빨갛게 되었다. 그런 주제에 욕이란 욕은 죄다 주워 삼켰다.
『문어 대가리! 돼지 방구! 부스럼 땜빵!』
흑백 텔레비전이 처음 나왔을 적에나 유행했을 욕말에 딘은 신음했다.
마지막으로는 구겨진 버스 노선표가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을 날았다.

『샘. 그만해.』
우는 동생을 측은히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모든게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있다. 애시당초 박물관 견학은 무리한 계획이다. 권총 한 번 잡아보지 않았을 평범한 사람에게 존이 샘의 안전을 위임할 리 없으니까. 그걸 모르지 않으면서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샘도 어지간히 징그럽다.
딘은 오른발을 사용해 구겨진 버스 노선표를 구석으로 걷어찼다.
『아빠가 뭐라고 하기 전에 그만 울어.』
막상 뱉어놓고 보니 아차 싶었다. 샘은 지금 반항기다. 존이 시끄럽다고 신경질적으로 문을 노크하면 동생은 여봐라 해가며 더욱 크게 목 놓아 울어버릴 거다. 그래서 서둘러 말을 고쳤다.
『이사 가는 곳에서 새 친구를 또 사귀면 되잖니.』
순전히 입에 발린 말이다. 어울리지도 않은 땡땡이무늬 넥타이를 착용한 사장에게 센스가 멋지다고 칭찬하는 것과 같다.
『아니면 나랑 같이 박물관에 갈 수도 있다고.』
동생의 울음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대하며 지키지도 않을 공수표를 남발했다.

계속해서 흐느껴 울던 샘은 만사 포기했다는 투로 질끈 눈을 감았다.
『새미?』
『됐어.』
『진짜야, 형이 약속할게. 그 유명한 살인마 사자 앞에서 둘이서 사진 찍자.』
『필요 없어.』
다 끝났다. 몽땅 망쳤다. 작년에도 그랬고 재작년에도 그랬던 것처럼 올해 여름 역시.
등 돌리고 누운 동생은 피곤했던지 그대로 잠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제기랄. 사이먼에게 뭐라고 말을 하지...』
훌쩍이는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다시 거실로 돌아온 딘은 이번에는 할 말이 잔뜩 있음에도 이마에 굵은 주름살을 만드는 것밖엔 재주가 없는 사내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인생이 왜 이렇게 거지 같을까. 딘은 순간적으로 뒤돌아 달아나고픈 충동과 싸웠다.
『음.』
벽이 얇은 집이다. 동생이 꺼이꺼이 흐느끼던 소리는 고스란히 거실까지 전해졌을 거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하시라니까요 - 민망하기 짝이 없는 이 상황에서 성공적으로 탈출하려면 신문지에서 오려낸 5% 할인쿠폰을 쥐고 수퍼마켓에 가는 시늉이라도 해야할 것이다. 딘은 냉장고를 열어 콜라를 꺼냈다.
존은 다시 한 번 더 굵게 음, 목을 울렸다.
『맥주는 떨어졌어요. 아버지도 콜라 드실래요?』
『아니다.』
『좀 있다가 팬 케이크를 만들게요. 아니면 인스턴트 스파게티가 남았는데...』
『괜찮다.』
딘은 속으로 외쳤다.
괜찮지 않아요, 아버지. 하나도 괜찮지가 않다니까요!!
하지만 일부러 멍청한 표정을 지은 장남은 손에 쥐고 있던 콜라를 연거푸 홀짝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고보니 저번에 웨어울프를 쫓을 적에 샘이랑 저랑 밤낮으로 엄청난 양의 은탄환을 만들었었죠. 집세가 모자랄 법도 하네요. 게다가 지랄맞은 은탄환이라는 놈은 한 번 사용하면 재활용도 되지 않고... 아, 깜빡 잊고 있었다. 그때 현금이 없어 카드로 긁었잖아요. 슬슬 청구서가 날아오면서 미스터 블로비치가 가짜라는게 들통날 것도 같은데.』
존은 위장이 쓰리다는 투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들통났다.』
과연... 그게 이 마을에서 떠야 하는 진짜 이유군. 딘은 씁쓸하게 웃었다.

신용카드 사기는 늘 뒷맛이 구리다. 싸구려 술집에서 사기 포커를 치다 조무래기 건달에게 들키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 주먹으로 뒈지게 얻어맞는 일로는 절대로 안 끝난다. 일단 쫓아오는 상대가 완전히 틀린 것이다. 뱃지를 꺼낸 연방요원이 대문을 탕탕 치는 걸 상상한 딘은 마시다 남은 음료를 개수대 위로 남김없이 쏟아부었다.
『그런데도 사흘 뒤에나 여기서 빠져나가면 조금 위험한 거 아녜요? 아버지.』
『끄음.』
『어차피 샘은 사이먼에게 작별 인사따윈 하지 않을 거예요. 녀석은 늘 그래왔으니까. 사흘씩이나 죽치고 있을 필요는 없어요.』
예의 가래 끓는 소리를 내던 존은 이번엔 장남의 얼굴을 지긋이 응시하기 시작했다.
『너는 어떠냐.』
그건 딘으로선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었다.
『예?』
『줄곧 만나던 여자친구가 있잖니. 이 애비는 그 여자애 이름은 잘 모르겠다만... 베키?』
서둘러 손사레를 쳤다.
『그냥 재미로 가끔 만나던 거예요. 친구도 아니니까 작별인사 따위 안 해도 괜찮아요.』
『음...』
『그보다 케일럽 아저씨에게 전화라도 해야겠어요. 지하실에 있는 몇몇 잡동사니는 집주인이 발견하면 골치가 아파지는 종류니까 사전에 완벽하게 정리를 해둬야 할 거예요. 저번에 산 만도 같은 건 임팔라 트렁크에는 안 들어갈 거구요.』
『자루와 날을 분리하면 된다.』
『떼어낸 날을 다시 끼우는게 골치 아프니까 그러죠.』
『연습하면 된다.』
『그럼 만도는 챙겨서 가져가고 블릿 프레스기 처리는 케일럽 아저씨에게 맡기죠.』
모처럼 중고로 산 식탁 세트와 샘이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소설책의 처리를 제일 먼저 걱정했으면서도 딘은 그 점을 내색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런 건 끌어안고 가져갈 수 없다. 식탁은 임팔라 트렁크에 당연히 안 들어간다. 책? 그런 걸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다. 최소한의 옷가지와 칫솔 같은 생필품만 챙겨도 자동차에 엉덩이를 꾸겨넣을 공간이 부족해진다. 더욱이 존은 무기에 관하여선 타협을 하지 않았다. 총 한 자루를 더 챙길 수 있다면 신던 구두를 유리창 밖으로 던지고도 남는 위인이었다. 그러니 고집쟁이 동생이 책을 가져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면 일은 엄청 복잡해질 것이다.

『잠시 밖에 있을게요.』
『어디 나가느냐.』
『담배 좀 피우려구요.』
숨이 턱턱 막히는 건 찌는 듯한 더위 탓이라 여기면서 현관으로 나섰다.
그래봤자 여름은 이제 막 시작이어서 그늘에 몸을 숨겨봤자 짜증이 가라앉지는 않았다.

Posted by 미야

2009/07/07 11:00 2009/07/0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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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J 2009/07/08 14:53 # M/D Reply Permalink

    구상하신다던 소설이군요,
    틴체스터는 어쩐지 우울하네요-사냥에만 메달리는 아버지와 평범함을 꿈꾸는 동생사이에서 딘만 죽어나는 일이 많아서일까요?-그럴 때 보면 파파존 미워!를 막 외치고 싶은데-지난번에 하일라이트가 할아버지 할머니께 빗자루로 얻어맞는 존이라고 하셨던가?...ㅎㅎㅎ 형제들의 십대는 조금 우울하지만, 그런 색다른 재미를 주신다면 두 손들고 환영입니다. 뭐-미야님 소설이라면 언제나 그렇지만..ㄲㄲㄲㄲ
    암튼, 다음편도 기대할게요~!

  2. 나마리에 2009/07/09 09:04 # M/D Reply Permalink

    와, 자식 앞에서도 서툰 남자 존이군요. ㅋㅋ 존이 무척 귀여운데요? ㅋㅋㅋ
    사춘기 소년 샘도 귀엽구. 아버지가 말이 없으니 장남이 말이 많군요. 쯔쯧 불쌍해요. ㅋㅋㅋㅋㅋㅋ

  3. ameretat 2009/07/09 20:32 # M/D Reply Permalink

    윈체스터 형제의 십대라.. 그저 아이고 소리만.. 우울하고 어둡고 위험한 나날들이라고 생각되니 안쓰럽네요. 특히 파파존과 샘 사이에서 끼어있는 딘이 애처로워요ㅠㅠ 멋진 글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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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fanfic] Summertime

가까운 곳에 위치한 - 그렇다고 해도 평생 찾아가본 일은 없다. 처음부터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지만 어쩌면 내가 사는 곳에서 가까운게 아닌 건지도 모른다 - 화물용 비행기 이착륙장 탓에 해리스 노블랜드의 온도는 타 지역보다 섭씨 3도가 더 높다.
『얼레. 무더위가 왜 비행기 탓인가?』
『비행기가 날아가는 소리만 들어도 땀이 차니까.』
하늘을 올려다보면 구름이 회색의 양철 뚜껑으로 보일 정도다.
지긋지긋한 열기. 아스팔트는 지글지글.
등팍이 젖어 둥근 소금의 얼룩을 그리고 있다.
나 같은 노인네에게 무더위는 건강에 좋지 않다. 심장이 엇박자로 뛰어 현기증이 난다. 불어오는 바람도 땀을 식혀주지 않는다. 되려 피부를 활활 핥는 열기에 짜증이 치솟는다.

『자네는 뭐든지 비행기 탓으로 돌리는군. 잘 해보라카이. 마누라 뱃살이 불어난 것도 다 뱅기 잘못이지.』
『뚱보는 자네 마누라잖나. 내 마누라는 날씬해! 그리고 미인이야!』
『망할 콩깍지... 그 나이가 되어서... 카아악, 퉤.』
더러워 죽겠다며 아니꼬운 시선으로 날 쳐다보는 이쪽은 친구인 제이크다.
잠시 소개하자면 일주일에 단 한 번도 샤워를 하지 않는 추악한 게으름뱅이에다 맥주를 너무 마셔 코가 빨간 작자다. 입냄새 지독하고, 머리는 벗겨졌다.
『그래, 내 머리는 인디언이 기념품 만든다고 홀랑 벗겨갔다. 어쩔겨.』
기분이 상했다는 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지만 그렇다고 해도 제이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팔순이 내일 모레인 우리 나이에 신속한 반응 - 이를테면 주먹을 쥐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는 동작은 무리다. 몸이 안 따라주는 걸 억지를 부렸다간 동네 돌팔이 의사인 팔머 군에게서 무릎 관절에 대한 일장 연설을 들어야 한다.
깡마른 몸집의 팔머를 나는 대단히 싫어한다. 술을 끊으라고 하지를 않나, 담배를 줄이라고 하지를 않나... 딱 잘라 말해 인생 사는 맛을 모르는 녀석이다. 앞으로 살 날이 얼마나 남았다고 폐암 무섭다 담배를 끊나.

『폐암은 아니지만... 거시기가 암이라며.』
아까까지도 입을 삐죽거리던 노인네가 표정을 바꾸더니 조심스럽게 참견을 해왔다.
뻣뻣한 다리를 주무르던 나는 콧방귀만 뀌었다.
『걱정일랑 치우게, 제이크. 내 묘비에「프랭크는 전립선암으로 죽었다, 얼레리꼴레리~」라고 적진 않을테니.』
푸념조의 내 말에 친구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래? 의사가 좋은 얘기를 해줬나보군. 수술을 하면 괜찮아진다고 하던가?』
『알게 뭐람. 팔머가 하는 말의 절반도 제대로 알아듣질 못했는데. 골치가 아파 한쪽 귀로 흘려들었네. 나중엔 눈 뜨고 한참 졸았던 것 같기도 하고... 어허! 그렇게 노려보지 말게. 치료를 포기한 건 아니니까. 다만 이 나이에 악착같이 덤비는게 좀 그래서 그래. 치료비 문제도 그렇고...』
『...』
자기 일처럼 좋아하던 제이크는 어느새 쌍심지를 곤두세운 채 이쪽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 마음을 안다. 화가 났다라기 보다는 속상한 것이리라.
그래서 일부러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우리는 곧 떠나간다. 누구도 그걸 막을 수 없다. 육신은 병들고, 정신은 쇠락해간다. 다리 하나는 이미 무덤 속에 집어넣었다. 저승사자의 낫질 소리가 가깝게 들려온다. 쉭쉭, 이러고 무거운 뭔가를 허공에 대고 휘둘러대는...

『소리는 나에게도 들리는데 자네가 표현한 것과는 조금 틀린데.』
『으음...』
정확하게는 어린 소년이 양손에 운동화를 쥐고 걸음아 나 살려라 달아나는 소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호기심이 발동한 제이크가 목을 길게 빼고 주변을 탐색했다.
『무슨 일이지.』
그와 거의 동시에 호리호리한 몸집의 꺽다리 소년이 우리집 앞을 광속의 스피드로 스쳐 지나갔다.
그보다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선「거기 안 서, 샘 윈체스터?!」협박하는 외침이 들려왔고.

눈빛만으로 묻고 있는 제이크를 위해 짧게 대꾸했다.
『오드리네 집에 월세를 얻어 살고 있는 아이들일세. 아까 달아난 놈이 차남. 목청이 찢어져라 고함을 질러댄 쪽이 장남.』
오드리 할망네 집에 잠시 신세를 지고 있는 그들 식구들에 대해선 제이크도 잘 알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낯선 동네로 이사를 와서 처음으로 이웃과 악수를 나누는 자리에서「댁의 집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거나 전등이 기이하게 깜빡거리는 일은 없나요」질문을 던지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니까.

『짐이라고 했던가?』
『아니. 그 남자의 이름은 존일세.』
『짐이 아니라 존이었나. 아무튼 그 존이라는 남자는 직업이 수리공인 모양이야. 저번엔 캐서린 여사의 집을 방문해선 똑같이 그 질문을 했다더군.』
『이상한 소리가 난다고 하면 망가진 수도관을 살펴준다는 겐가?』
『배관보다는 전기 쪽이 전공인지도 몰라. 삑삑 소리가 나는 작은 라디오 같은 걸 들고 다니는 걸 봤거든. 계기판이 달린 작은 장치로 여기저기를 살피더라고. 빨간 단추가 반짝거리는데 그게 뭐요 - 하고 물어보니까 쑥스럽다는 표정으로 나쁜 게 없는지 찾아보고 있다고 대답하던 걸?』
『옳커니! 마침 잘 되었군! 지하실에 누전이 되는 곳이 있는데 그 남자가 고칠 수 있을까?』
『아마도.』

고칠 수 있나, 없나는 직접 물어보면 된다. 때마침 씩씩거리며 언덕을 내려온 장남을 불러세웠다.
『이보게, 젊은이.』
『예, 할아버지!』
이 친구는 싹싹하니 성격이 좋다. 맨발로 달아난 동생의 다리몽둥이를 분질러야겠다는 고결한 의무는 잠시 접고 구린내 나는 영감탱이들이 부르는 소리에 반응하여 가까이 다가왔다.
『왜 그러십니까?』
그거 참 예의도 바르지. 제이크와 나는 흐믓하게 미소를 지었다.
『자네 아버지가 수리공이지? 그럼 누전되는 곳을 고칠...』
『아까 보니 샘이 빠르게 뛰어가던데 뭔 짓을 저질렀나?』
제이크의 말을 자르고 도중에 끼어들었다. 하여간 이놈의 못 말릴 호기심.

다시 분통이 터지는 모양이었다. 장남의 목소리가 끝도 없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녀석이 나 몰래 내 소지품을 뒤졌어요! 만지기만 하면 괜찮은데 그걸 망가뜨렸다고요!』
『저런. 뭘 망가뜨렸는데?』
『아시아 쭉쭉빵빵..........』흥분해서 솔직하게 불었다가 부끄러움에 뺨이 붉어졌다.『잡지요!』덧붙여 울분을 토했다.『차, 창간호라서 여지껏 기념으로 가지고 있던 거였는데!』
제이크와 나는 서로 눈짓을 나눴다. 그런 걸 누가 속아. 창간호는 핑계지.
『귀하다는 것도 모르고!』
딘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걸 하필이면 냄비받침으로...!!』
청년을 손가락 마디를 뚝뚝 소리내어 꺾었다.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 샘 윈체스터!』

지하실 누전은 까마득히 잊어먹었다. 제이크는 응응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을 보니 발이 엄청 빠르던데 이렇게 여유를 부려서 어디 잡을 수 있겠나.』
『물론 잡을 수 있죠!』
딘은 주머니에서 자동차 열쇠를 꺼내 이것 보라며 눈앞에서 흔들어댔다.
제이크와 나는 다시 의미심장하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뛰어서 달아난 사람을 자동차로 따라가 잡겠다니... 이거 너무 불공평하다.

그렇게 생각한 건 동생 쪽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애비뉴 거리까지 죽어라 뜀박질하던 소년이 돌연 방향을 바꿔 엔진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속력을 내던 자동차가 덕분에 옆으로 삐긋했다.
달아난 동생을 잡으려는게 목적이지 치어 죽이려는게 목적은 아니었으니까.
식은땀을 뚝뚝 흘리며 차를 세운 딘이 운전석에서 내렸다.

『임마! 무슨 짓이야! 사고 날 뻔 했잖아!』
『형! 멋지다! 임팔라잖아! 아빠가 형 혼자서 이걸 운전해도 된다고 허락하셨어?!』
멋지다고 하는데 이마를 찡그리고 있을 수 없다. 언제 화산이 폭발했느냐며 표정을 바꾼 딘이 실실 웃음을 쪼갰다. 뭐야... 실망스러운데. 제삿날로 만든다며.
『허락하셨으니까 이렇게 열쇠를 나에게 맡기셨지!』
『정말 근사하다!』
『엣헴!』
『앞으로 계속 형이 운전하는 거야?』
『아빠가 일 끝내고 돌아오시기 전까지만. 어때. 형이랑 같이 드라이브 할까?』
냄비받침이 되어버린 아시아 쭉쭉빵빵은 잊혀졌다.
흥분한 동생을 조수석에 태운 장남은 신나서 사라져버렸다.

『형제들끼리 사이가 좋네.』
『사이가 좋지.』
『그래도 나는 처음으로 내 차를 샀을 적에 우리 마누라를 태웠는데.』
『그랬던가.』
『그랬네.』
『자네는 누굴 태웠는지 기억하나?』
『글세. 그게 누구였더라. 이딴 똥차를 왜 샀느냐며 구박했던 인간이었는데.』
제이크가 발끈했다.
『똥차라고 구박하지 않았네! 제 가격보다 바가지를 썼다고만 했지!』
알게 뭐람. 웃음을 터뜨린 나는 머리를 흔들어대며 구름이 낮게 깔린 하늘을 쳐다보았다.

Posted by 미야

2009/06/28 22:09 2009/06/28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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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이렌드 2009/06/29 09:04 # M/D Reply Permalink

    이건 뭐... 새미, 순진한 건가요...계획적인 건가요....( '')

  2. T&J 2009/06/29 10:11 # M/D Reply Permalink

    미야님, 소설 오랜만이네요~~제삼자의 눈으로 보는 샘딘인가요?...ㅋㅋㅋㅋ미야님, 자주자주 뵙고 싶다는...ㅠㅡㅠ

  3. 나마리에 2009/06/29 10:24 # M/D Reply Permalink

    새미 약았어요. ㅋㅋ
    홀라당 넘어가는 딘 형님. 어휴 귀여워요. >.</

  4. 달비 2009/06/29 22:14 # M/D Reply Permalink

    죽어라 달음박질치는 어린 샘의 모습이나 씩닥거리면서 이를 빠득빠득 갈 딘의 모습.. 아 왜이렇게 좋은거죠^^;; 귀여워요 ㅠㅠ

  5. 쥬레스 2009/07/07 21:20 # M/D Reply Permalink

    와 ㅋㅋ 이 형제들 왤케 귀엽나요ㅠㅠㅠ

    샘이 멋지다면서 감탄하니까

    샘이 잡지 태워먹은건 어느새 잊고

    형이랑 같이 드라이브나 할까라니ㅋㅋㅋㅋㅋㅋ

  6. ameretat 2009/07/09 20:24 # M/D Reply Permalink

    귀엽군요ㅋㅋㅋ 같이 드라이브ㅋㅋㅋㅋㅋ 창간호에 대한 사랑은 역시나 동생보다 못했던 거구나, 딘.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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