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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조사] 풀피리 41

제7장 나라카(地獄)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삼킨 물을 토하는 거라 생각했다.
입안에 가득 찬 이물질을 뱉어내는 동안 호흡이 어려워 괴로웠다.

이발소 의자에서는 벗어난 상태였다. 엎드린 자세로 정신을 차린 곳은 상투를 푼 채 칼을 쓰고 앉아있으면 어울릴 법한 감옥이었고, 뿌옇게 흐려진 눈에는 온통 검댕밖엔 안 보였다. 어쩌면 눈이 잘못되어 얼룩이라 착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 요란하게 쿨럭거렸다. 그런데 실제로 뱉어낸 물의 빛깔이 석탄의 색이었다. 온통 뿌옇고 검었다.
기침이 멎지를 않았다. 이제 코로도 검은 가루가 쏟아졌다.
‘그렇군, 꿈을 꾸고 있는 거군.’
코로 가루를 뿜고 있음에도 몸은 가벼웠다. 역시나 꿈이다. 그렇지 않다면 내 몸 주변으로 나풀거리며 날아다니는 검댕의 존재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검댕은 빠르게 멀어졌다가 봄의 왈츠를 추듯 스륵 돌아 나에게로 돌아왔다. 손으로 가볍게 쥐자 정전기가 일어난 것처럼 따끔했다. 날벌레에 물린 것 같기도 했다. 손을 펴자 날파리처럼 생긴 것이 날아올랐다.

갑자기 카메라 앵글이 바뀌며 시야의 높이가 변했다. 앉았다가 벌떡 일어서기라도 한 것 같았다.
꿈이라면 가능한 일이기에 이상하게 여기진 않았다. 덜 회복되어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옥문을 움켜쥐고 흔드는 내 손이 들어왔다. 배추 250근을 한 번에 들어 올리는 괴력에 정체불명의 검은 가루까지 합세하자 강철로 만든 경첩이 둘로 쪼개지며 옥문이 주저앉았다.
큰소리가 나자 경계를 서던 자가 횃불을 들고 뛰어왔다.
가까이 불을 비춰보고는 어째서인지 비명을 질렀다.
검은 가루가 파리 떼처럼 몰려가 그 남자의 얼굴을 덮었고 자지러지던 비명이 뚝 그쳤다.
‘와... 특수효과가 꼭 영화 미이라 같다.’
사람이 저리 죽을 리 없으니 역시 꿈이다. 쓰러진 남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쳐 출구를 찾았다.

한쪽은 복도였고 한쪽으로 감옥 같은 공간이 길게 나열되어 있었다. 그 감옥의 어둠 깊은 속에서 그르륵, 그륵 이러고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소음이 들렸다.
‘이건 워킹데드 1시즌이네.’
가까이 접근하면 썩은 손톱이 달린 마른 여자의 손이 튀어나와 벽을 긁을 것이다.
‘이곳에 죽은 자가 있음! 접근하지 마시오.’ 경고문이 걸려 있음 딱 주인공이 깨어난 병원 장면이었다.
호기심이 생겨 그 안을 들여다보고 싶었는데 원래 꿈은 자각몽이 아닌 이상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이라서 금세 장면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불편한 다리로 계단을 오르는 중이었다. 시야가 좋지 않아 몇 번을 미끄러졌는지 모른다.
무릎을 찧었을 적엔 제법 아팠다.
‘응? 아프다고?’
허우적거리다 말고 이상하다 생각했다. 꿈에서 넘어지면 무릎이 아픈가?
벽면을 더듬거리며 방향을 잡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쩌면 턱이 아픈 걸 착각한 것일 수도 있다. 멍들고 어금니가 빠져 얼굴이 퉁퉁 부었다.

계단을 올라가 출구를 찾았다고 여겼는데 막다른 방이 나왔다.
이번에도 검은 벌레가 출동해서 자물쇠를 갉아먹었다. 황제의 보물창고 문지기도 이 벌레들 앞에선 맥을 추지 못할 것이다. 커다란 쇠붙이가 형태를 잃고 추락하자 안에서 희게 눈을 까뒤집은 주시들이 무더기로 튀어나왔다. 입고 있는 옷은 단정했으나 피부가 썩어 냄새가 엄청났다. 그런 놈들이 딱딱 턱을 놀리며 내 몸을 씹으려 했다.

이러다 이빨 자국 생긴다 걱정하던 찰나 위치가 역전되어 내 입으로 남의 살이 가득 찼다.
이제 살을 씹고 있는 건 걸람, 피를 흘리는 자는 아버지가 되었다.
아버지가 발버둥 쳤다.
‘이게 무슨! 이게 무슨!!’
나는 눈을 하얗게 까뒤집고 게걸스럽게 살을 탐했다.
‘살려주시오! 부인! 살려줘!’
문밖에서 어머니가 지키고 서계셨다.
여자는 남편이 산채로 잡아먹히고 있음에도 결코 문을 열지 않았다.
‘상공, 아들을 위해섭니다. 온서염, 내 아들아. 그렇게 먹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주지 않았느냐.’
걸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고 씹던 살을 뱉어낸 아이는 까맣게 변한 손을 뻗어 아버지의 맨 살을 더듬었다.
‘명혼을 삼키는 거다. 붙잡고 끌어와 네 것으로 삼으렴.’
어머니의 지시에 아이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겁에 질린 아버지가 어떻게든 걸람을 뿌리치려 했지만 아이는 괴물처럼 자신의 입을 아비의 심장이 있는 피부로 가져갔다.

《그만둬. 이런 걸 떠올리고 싶진 않아.》
경고하는 온서염의 목소리가 들렸고 나는 걸어 다니는 시체로부터 얼른 입술을 떼어냈다.
《그런 건 먹지 마. 여기서 나가.》
온서염의 말대로 더는 움직이지 않게 된 시체를 바닥에 집어던졌다.
시체 곁을 방황하던 검은 벌레들이 꾸물거리며 미련을 드러냈지만 내가 다른 길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하자 얌전히 따라왔다. 뒤를 돌아보자 흐릿한 검댕 얼룩이 꼭 도둑놈이 남긴 발자국처럼 보였다.
그 자국이 재밌다고 생각하며 도로 앞을 향했는데 갑자기 벽이라고 생각한 곳에서 창이 튀어나와 내 옆구리를 깊게 찔렀다.

“아?”
벽이 아니라 벽으로 위장된 통로였다.
창을 든 남자가 날카롭고 짧게 휘파람을 불어 동료에게 신호하자 이번엔 검을 든 사람이 나타났다.
이런 일에 대비하여 평소 훈련을 해왔는지 창과 검의 호흡이 딱딱 맞았다.
“흉시야? 이거 흉시냐고. 얼굴이 피범벅이잖아.”
“몰라. 어쨌든 물리면 안 돼. 최대한 벽으로 밀어!”
그러다 검을 들고 있는 쪽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무기를 떨어뜨렸다. 돌아보자 검댕이 그의 얼굴을 빈틈없이 덮고 있었고, 한눈에 봐도 살 가망이 없어 보였다.
창으로 미는 힘이 약해졌다. 흉살을 당한 동료의 모습에 놀라 무의식적으로 팔에서 힘을 빼버린 거다.
옆구리 살이 찢어지는 걸 개의치 않아하며 몸통을 비틀자 창을 든 자의 자세가 나빠졌다.
그걸 기회로 그 자의 목덜미를 와지끈 물어뜯었다.
《먹지 말래도.》
온서염의 잔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며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눈이 제대로 낫지 않아서인지 소매에 묻은 체액의 색이 붉지 않고 검었다.
아무래도 눈을 찾아야겠다. 불편해서 참기 힘들었다. 잘 보이는 눈으로 갈아 끼워야겠다.
그리 생각하며 여기저기를 쏘다니다 미로 같은 구조를 벗어나 운 좋게 출구를 찾았다.

오랜만에 들이마시는 공기가 시원했다.
검댕으로 얼룩진 눈은 빛을 거의 구분하지 못했지만 머리 위로 따스한 햇살이 비치고 있음은 냄새로도 알 수 있었다. 화창한 날이었다. 시각은 대낮이었다. 운심부지처의 문하생들은 지금쯤 몸을 풀고 체력단련을 한창 하고 있을 때였다.
다만 지금 여기서 빠르게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은 거기 문하생들처럼 체력단련의 시간을 가진 눈치는 아니었다. 소지한 무기의 종류가 압도적으로 창이 많았는데 몸에 금단을 맺고 수련을 하는 사람들치고 창술을 연마하는 자는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창은 리치가 길어 일반인들이 익히기엔 좋은 무기지만 영력을 사용하는 무기로는 걸맞지 않았다. 그러니 여기 모인 사람들은 도를 수련을 하는 자가 아니고...... ­
“야, 이 새끼들아! 깜짝 놀랐잖아. 니들은 예의도 없냐. 꼼짝 마라, 이런 말부터 해야지!”
사극 드라마도 안 보는 것들 같으니.
에워싸고 창으로 찌르려 해서 하마터면 고슴도치가 될 뻔했다.
나를 보호하려는 건지 철가루 검댕이 미친 듯이 회오리쳤다.
그깟 석탄 가루라고 얕보면 큰 코 다친다. 오는 길에 몇 명을 먹어치운 뒤라 힘이 장사였다.

비명소리가 요란했다. 검댕 묻은 얼굴을 쥐어뜯으며 바닥을 뒹굴던 자들이 칠공으로 피를 뿜었다.
거치적거린다. 비켜라.
똑바로 걸어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느라 바쁜 놈 앞에 섰다.
음...... 신장의 차이 탓에 올려다보고 있자니 불쾌했다.
내 마음을 읽었는지 철가루 검댕이 일제히 몰려가 남자의 몸을 강제로 찍어 눌렀다.
“거의 숨을 쉬지 않았...는데, 어떻게?! 분명 그랬는데?! 그리고 그 힘은...!! 허억.”
손이 작으니 손바닥을 활짝 펴도 남자의 얼굴을 다 덮는 건 무리였다. 농구공처럼 가지고 놀다 땅바닥에 드리볼을 해볼 작정이었는데 이래선 무리다. 쯧, 하고 혀를 차고 손을 치우자 손가락 숫자만큼 눌린 자국이 생겼다. 둥글게 눌린 붉은 자국이 연지라도 찍은 모습이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아니, 그런데 마음대로 웃지도 못해.
내가 웃자 강제로 꿇려져 나를 올려다보던 눈에 공포가 서렸다.
무서워하긴. 나는 물고문도 안 할 건데. 상냥하게 웃으며 덥석 남자의 머리통을 물었다.
비명소리로 귀가 다 얼얼했다.

“이건 꿈이지?”
《응.》
“그리 기분 좋은 꿈은 아니네. 프로이드의 이론대로라면 나는 아직도 구강기 단계라는 거잖아.”
피투성이가 된 입을 닦으며 그렇게 말했더니 온서염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사실 나도 잘 몰라. 교양수업으로 심리학 개론 들은 지도 오래고... 구항남잠생, 구강기-­항문기-­남근기-­잠복기-생식기, 이러고 개굴개굴 염불 외웠던 것밖에 기억 안 나. 그런데 구항남장생 이런 거 몰라도 사는 데 아무 지장 없지. 우울하면 치맥이고, 슬프면 노래방이야.”
《치맥이 뭐야?》
“그러게. 치맥이 뭘까. 그게 어떤 맛이었는지 이젠 생각도 안 난다.”

내가 열고 나온 길을 따라 제법 되는 숫자의 주시들이 비틀비틀 걸어 나왔다.
다들 썩은 내를 심하게 풍겼고 눈은 동공이 없이 흰자만 보였다.
농사를 짓던 사람들일까, 아님 가게에서 장사를 하던 사람들일까.
입고 있는 옷의 옷감이 좋은 것으로 보아 생전에 그래도 나름대로 한 가닥 했던 사람들이었을 거다. 어떤 사연인지는 모르나 시변한 이후부터 오랫동안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던 것 같다.
놀랍게도 그중에는 여인도 있었고, 나이 많은 노인도 섞여 있었다. 얼굴이 썩어버린 탓에 전부 형제자매처럼 보였는데 어쩌면 생전에도 한 가족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은 엄마, 이 사람은 아빠, 그리고 저기서 구멍 난 머리통을 맛있게 먹고 있는 건 삼촌...
아비규환이었다. 검댕 벌레들까지 합세해서 서로 먹고 먹히고 난리였다. 쩝쩝 소리가 요란했다.

이제 그만 꿈에서 깨고 싶다. 머리를 주먹으로 툭툭 때렸다.
왜 깨질 않는 거지. 게다가 눈은 왜 이렇게 시리고 쑤시는 걸까.
머리를 들자 물속에 잠수한 채 올려다 본 햇님처럼 일렁이며 반짝이는 밝은 빛이 보였다.
어쩐지 그게 꼭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느껴져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Posted by 미야

2021/12/10 17:09 2021/12/10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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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조사] 풀피리 40

제7장 나라카(地獄)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사람은 의외로 튼튼한 구석이 있어 손가락뼈가 다섯 번 부러지는 정도로는 의식을 잃지 않았다.
웅웅거리는 귀로 소리를 듣고, 침 흘리는 입으로 신음을 뱉으며 기절하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상대는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며 고통의 가감을 조율했다.
여기가 어디고, 나는 누구인지를 한참 헷갈리고 있는데 뺨을 여러 번 맞았다.
눈을 떠도 앞이 새카매서 제대로 반응을 못했더니 마지막에는 주먹으로 후려갈겼다.
목구멍으로 빠진 어금니가 넘어가는 걸 느끼며 흐느꼈다. 어떻게든 편안해지고 싶어 차라리 더 세게 맞고 싶었다. 기절만 하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효성진 도장을 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 그동안 난 산속에 살인 곰이랑 같이 갇혀 있었다고.”
그동안 내가 떠들어댄 내용은 두서가 없었다. 아무튼 닥치는 대로 떠벌렸다. 배추 배달을 하면서 얻어먹던 엿기름 바른 누룽지 이야기에 밭에 거름을 뿌리던 진소 노인 이야기까지 다 했다. 약양의 의장에 숨었던 일, 내세에 부자가 되기를 기원하며 지전에 일억 원, 십억 원 금액을 적었던 것도 떠들어댔다. 송자침이 주먹밥 하나 보태어준 적 없으면서 나더러 덩치가 작다 흉봤던 것도 시시콜콜 일러바쳤다.
“이봐요... 듣고 있어?”
목이 타들어갔다. 그렇지만 물을 달라고 부탁하기가 겁이 났다.
고문이 취미생활인 저 자는 나에게 물을 먹인다면서 입이 아니라 콧구멍에 주전자 주둥이를 꽂고도 남았다. 앉은 의자의 기울어진 각도를 보아 물고문 코스는 여흥거리로 이미 준비가 되어있을 거였고, 내가 먼저 물을 달라고 하여 고통을 앞당기고 싶진 않았다.
“듣고 있냐고. 이 씨발 잡놈아. 5년 동안 아무 소식을 듣지 못했어. 효성진 도장이 어디서 잘 살고 있는지는 나도 몰라. 알았음 내가 짐 싸들고 쳐들어갔을 거야.”

문득 효성진이 나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내용이 떠올랐다.
난릉 금씨와 고소 남씨는 한패다. 믿지 마라. 미안하다.
잘 살고 있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소식하진 않지. 나는 넋 나간 사람처럼 흐느끼며 웃었다.

“이제 음호부에 대해 말해봐라.”
“켈로그 콘푸로스트. 아침마다 호랑이 힘이 솟는다.”
“왜 이래. 아직 괜찮잖아? 재미 보는 중에 정신 나간 척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야.”
그가 맞아서 퉁퉁 부운 내 뺨을 꾹꾹 눌렀다. 눌릴 적마다 피부가 질척거렸다.
“정신 안 나갔어. 음호부가 뭔지는 나도 알아. 호랑이라고 들었어. 호랑이 호. 호랑이 조각.”
“그래, 음철로 만들어진 호랑이 조각이다. 효성진 도장이 빼돌렸지.”
“응? 음철? 뭘 빼돌려? 음호부? 뭔 미친 소리야. 그럴 리가 없는데?”
낄낄거리는 내 목소리가 DC 빌런 조커의 그것처럼 기괴해졌다. 감정이 조절이 되지 않았다. 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폭소를 터뜨렸고, 막판에는 갈비뼈가 아려질 지경이 될 때까지 마구 웃었다.
“맙소사, 뭘 빼돌렸다는 거야. 못 찾았어. 팔관 저택 참상의 증거라고 송자침이랑 둘이서 그렇게 찾아다녔는데. 설양 그 망할 새끼가 어디에 숨겼는지 결국 못 찾았다고. 그 덕에 고소 남씨는 뒤로 빠지고, 운몽 강씨는 이죽거렸고, 난릉 금씨는 과장된 헛소문으로 치부해버렸고, 청하 섭씨는 쫄딱 망했다! 하하하! 아, 그런데 아저씨, 설양이 누군지는 아세요? 하하하!”

웃다가 사례가 들려 잠시 꺽꺽거렸다.
“당신이 음호부가 뭔지 알아? 동네 깡패 같은 놈이 음호부를 만들었지. 설양 그 새끼가 음호부를 만들... 아니다. 이릉노조라고 했는데. 응? 아니다. 설영이 맞아. 그 자식이 음호부를. 그 자식, 새끼손가락이 없었어. 앗핫핫이히힛!”

요괴를 잡고 악신을 겁박하실 신묘하신 설 공자,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심지어 새끼손가락만 있어도 충분할 겁니다.
그런데 그에겐 새끼손가락이 없었다.
새끼손가락이 없으니 요괴를 잡고 악신을 겁박할 수 없다며 그가 화를 내며 말했다.
‘내 기분이 어떠했겠어, 걸람. 너도 짐작이 가지? 슬펐어. 화났어. 속상했어. 속에서 분이 올라왔어. 그러자 내 새끼손가락을 망가뜨린 인간에게 복수가 하고 싶어지더라. 당연하지! 복수를 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그래서야. 내가 상씨 집안 사람들 전부를 죽인 건 그래서야.’

웃음을 뚝 그치고 정색하며 질문했다.
“아저씨는 새끼손가락 있어요?”
대답 대신 긴 한숨이 날아왔다.
요즘 애들은 의지박약이니, 우리 때는 더 심신이 강인했다느니 식의 불평을 늘어놓으며 그가 내 콧구멍으로 금속의 기다란 관을 삽입했다.
그 다음부터는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뒤로 기대어 누운 상태에서 주는 물을 꼴깍꼴깍 받아 삼키며 아가미가 제거된 금붕어처럼 팔딱거렸다. 채 삼키지 못한 물이 기도로 넘어가 기침이 터져 나왔지만 물을 붓는 속도는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높으신 분의 술잔을 채워나간다는 식으로 얼마나 정성을 들이던지 물이 옆으로 새지도 않았다.
시원하게 한 잔 들이키면 좋았을 물이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었다.
머리에서 하얗게 불꽃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점멸했다.
차라리 기뻤다. 이제 드디어 기절이라는 걸 할 수 있었다. 꼬록 소리를 내며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여자와 남자, 그리고 어린 남자아이.’
귀신이 보였다. 내 앞으로 허깨비처럼 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한 가족인 듯하다. 세 사람 모두 얼굴 부위가 새카맣게 지워진 상태여서 내가 알던 사람인지 알아볼 수는 없었다. 부부는 젊었다. 아이는 여섯 살 정도로 되어 보였다.
여자가 아이 손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어쩐지 화가 난 기색이고 말을 붙이기가 두려울 정도로 신경질적이었다. 부부싸움이라도 했는지 남자는 모자와 떨어져 덩그러니 혼자 서서 바닥만 쳐다보았다.

‘안 됩니다, 부인.’
‘무엇이 안 된다는 겁니까. 당신은 다른 누구도 아닌, 해와 함께 공적을 빛내며, 해와 함께 장수하는 온씨 사람입니다!’
‘그러니 안 된다는 겁니다. 아니. 부인 말대로 못하겠습니다. 저는 못합니다.’
남자의 거절하는 말에 여자의 기세가 악귀처럼 흉흉해졌다.
‘이 우유부단하고 지질한 인간 같으니라고! 그저 작은 조각만 가져오면 된다고 했잖아! 손톱보다 작아도 됩니다. 정말 작은 조각이라도 괜찮아요. 그것조차 못한다는 겁니까! 당신 아들을 살리는 일인데?’
‘죽은 건 죽은 거요. 음철을 사용하겠다는 계획은 포기하시오.’
‘싫어. 포기 못하겠다고! 우리 아염을 살릴 방도가 있는데 당신은 아비가 되어 포기하겠다는 겁니까!’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가 남자의 등을 때렸다.
‘쌀알처럼 작아도 됩니다. 아염을 살리려면 그 조각이 필요해. 가져와, 가져오라고!’

어머니 옆에 선 키 작은 어린아이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이는 병색이 짙어 몸집이 왜소했다. 얼굴은 새카만 안개 같은 것으로 덮여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익숙했다.
“걸람?”
《내 이름은 온서염이다.》
아이가 나와 똑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그렇지 않다.
어떻게 해도 같을 수가 없었다. 지금의 나는 서른네 살의 회사원 안선준이었으니까.

나는 놀란 얼굴로 아직도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부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럼 저 두 사람은...”
《내 부모님이다.》
아... 그렇군. 알겠다. 이건 걸람의 기억이다. 이렇게 구분지어 말하는 건 모양새가 우습지만 여섯 살 이전의 걸람의 기억이 물고문으로 쇼트가 난 뇌에서 강제 재생이 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본명을 떠올렸으면서 왜 부모님 얼굴 부분이 진하게 먹칠이 되어 있는지 그 까닭을 모르겠다.

호기심이 생겨 세 사람에게로 가까이 접근했다.
그러자 싸움을 멈춘 부부가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똑바로 섰다.
걸람까지 합세하여 세 사람이 나란히 서자 마치 의류상가에 장식된 마네킹 장식 느낌이었다.
“이 사람이 내 아버지?”
펑퍼짐한 체격에 싸구려 바람막이 점퍼를 곧잘 입고 다녔던 그 사람이 내 아버지였다. 젊어서 상처하고 누나와 나를 힘들게 키워내셨다. 키가 크고 몸이 호리호리한 이 남자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다.
“어머니?”
어째서인지 여자를 봤을 적에 생리적으로 싫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그립다던가, 품에 안기고 싶다던가, 고운 살결을 만지고 싶다는 생각은 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 감정은 걸람의 것이 아니라 서른네 살 회사원 안선준의 것이다. 나와는 다르게 걸람... 아니, 온서염은 작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어머니의 옷자락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한손으로 팥알처럼 생긴 금속조각을 목숨인양 쥐고 있었다.

《나는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해.》
온서염이 말했다.
《그러니 너도 기억을 하지 못할 거야.》
온서염이 손바닥을 펼쳐 팥알처럼 생긴 그걸 나에게 보여주었다.

뭔가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다이아몬드나 루비, 에메랄드라면 그만한 크기도 눈 튀어나오게 비쌌을 거다. 그런데 이건 그냥 쇳덩이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불순물 조각이었다. 검은 빛깔에 가까웠고 광택은 거의 없었다. 땅바닥에 떨어뜨리면 도로 찾을 수는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만큼 볼품이 없어 쓰레기라고 생각하고 휴지통으로 버려도 그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지.’
월석 같은 걸까? 아니면 운석? 부부가 다투면서 이걸 뭐라고 불렀더라...... 그래, 음철이었다.
‘운철이라 했는데 내가 잘못 들은 걸지도? 운철이면 그거잖아. 루팡3세 이시카와 고에몽의 검. 그런데 표면이 지저분한 걸로 보아 운철이 아닌 것도 같고... 뭐지? 이건.’
경계심을 드러내며 손톱으로만 조각을 살짝 건드려 보았다.
모르겠다. 아무 느낌도 없고 그냥 막연했다.
나는 뒷목을 긁으며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너도 기억을 하지 못하는구나.》
아이가 무감각한 어조로 말했다.
기억을 하지 못해 유감이라는 건지, 아니면 기억을 하지 않아 다행이라는 건지 구분이 안 갔다.
어쨌거나 내가 기억하는 단편적인 조각은 어머니가 날 흙속에 묻었다는 거다. 어머니는 창과 칼을 든 병사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나는 흙에 파묻혀 죽어갔다.
《아니야.》
그 이전을 떠올려 보라며 걸람이 잔뜩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떠올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몸이 약했어. 어머니가 지극정성을 들였지만 죽어버렸지.》
소년은 검어 보이는 조각을 내게 내밀었다. 마치 가져가라고 종용하는 듯했다.

《이것이 바로 음철이다.》
걸람이 내 손바닥 위로 조각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허벅지까지 닿지도 않는 작은 어린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안개처럼 흐릿했지만 걸람의 뺨은 하도 울어 눈물범벅이었다. 거기다 눈물마저 검은색이었다.
모든 것이 검었다. 검은 재와 검은 먼지, 검댕이 사방에 있었다.
아이가 입을 벌렸다. 순간 아이의 입속으로부터 검은 철가루가 폭발하듯 비산했다.

Posted by 미야

2021/12/09 10:03 2021/12/09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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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조사] 풀피리 39

제7장 나라카(地獄)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잔인한 표현 가감 없이 사용합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암살에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일반적으로 범인은 현장에서 빠르게 달아나는 것이 국룰이다.
복면을 사용하여 얼굴을 감췄으니 정체가 드러난 것도 아니다. 공력을 쓰는 수사들은 청하로 방향을 튼 염방존을 따라가 여기엔 마차를 끄는 마부와 하인들밖엔 없었다. 1회 출연 알바비 5만원 지급에 이름도 나오지 않을 엑스트라를 굳이 수고를 들여 죽여 없앨 까닭이...
내 옆에서 가슴을 찔린 하인이 꾸르륵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다. 폐에 피가 고여 익사하는 중이다.
그 옆에선 복면인이 하나하나 급소를 찔러 확실하게 죽었는지를 확인을 했다.
아직 죽지 않은 자가 외쳤다.
“약속이 틀리잖소!”
맨 처음에 내 등을 떠민 남자다.
이상했다. 저 대사는 ‘나는 외아들이고, 집에 늙은 어머니가 계시오! 제발 살려주시오!’ 여야 했다. 저래선 원래 복면인과 처음부터 한통속이었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고통으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멱살이 잡혀 들어 올려졌다.
“이놈이 맞느냐?”
어째서인지 복면인은 무릎을 꿇고 앉은 하인에게 내 얼굴을 확인시켰다.
부처에게 향을 올릴 기세로 절을 하며 ‘그놈이 맞다.’ 하자 그 즉시 칼춤이 이어졌다. 무엇을 약속받았는지는 몰라도 복면인은 처음부터 그를 죽일 계획이었는지 손속에 머뭇거림이 없었다.
“그깟 돈 몇 푼에 열리는 입이라면 살려둘 필요가 없지.”
그렇게 말한 사람은 비어있는 마차를 조정하던 마부였다.
암살자가 마차를 노리고 뛰어내렸을 적에 마부는 재빨리 고삐를 집어던지고 바닥을 굴렀다. 돌이켜보면 잘 짜인 각본대로의 움직임이였던 것도 같다.
정신이 실 가닥 같이 끊어지려는 찰나, 마부와 내 눈이 서로 마주쳤다.
아니, 내 눈과 마주친 건 잘 버려진 단도 날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똑바로 세워진 칼날이 내 눈을 가로로 그었다.

“뭐야. 씨발 것들. 염방존을 노린 거라며...... 야, 이 미친 새끼야! 아악!”
“앞으로 눈은 필요가 없을 것 같아 미리 없앴다. 혀는 필요하다는 게 참 아쉽군.”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나를 거적 같은 것으로 대충 싸더니 다시 나무로 된 궤짝 같은 곳에 넣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 내가 들어간 상자가 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다만 관은 아니었다. 안에서 다리를 똑바로 펼 수 없어 무릎을 접어야 했다.
“옮겨라.”
우두머리로 짐작되는 자가 명령하자 궤짝이 들어 올려졌다. 이동은 신속했다.

‘염방존을 노린 것처럼 술수를 부렸지만 처음부터 노린 건 나였어. 이놈들 정체가 뭐지.’
고통을 참지 못하고 신음하자 궤짝이 크게 요동쳤다.
조용히 하라는 말을 참으로 와일드하게도 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라면 강도로 위장했을 텐데...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아파 죽겠어! 날 이렇게 잡아가는 이유조차 모르는데 눈도 안 보이게 되고!’
눈꺼풀은 절반이 잘려나갔고 대신 그 자리에 피가 엉겨 붙었다. 상처는 아물겠지만 시력이 돌아올 것인지는 확신이 가지 않았다. 일부러 눈을 망가뜨렸으니 치료를 제대로 해줄 리도 없고, 흉터가 남은 눈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해줄지는 알 수 없었다.
눈도 그렇지만 그보다 당면한 문제가 더 심각했다.
궤짝에 틈새가 없어 얼마 지나지 않아 산소가 고갈되고 있었다.
게다가 거적으로 둘둘 말린 상태다.
‘산소부족으로 얼마 후면 기절하겠는데.’
그걸 노린 거라면 칭찬해주겠다. 귀에서 이명이 들렸고, 물 먹은 솜이 코 속으로 가득 들어오는 기분이 들면서 의식의 줄이 뚝 끊어졌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적엔 궤짝에서 꺼내어져 실내로 이동되어 의자에 묶인 상태로 바뀌어져 있었다.
눈이 회복되지 않았기에 공기의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 분위기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는데 악취가 상당했다. 가까운 곳으로 피가 살점이 썩어가고 있어 도축장인가 생각했을 정도다.
동물을 도축했든, 사람을 도축했든, 청소상태가 매우 불량해서 생리적으로 구역질이 나왔다.
지금의 내 상태를 의식한다면 구토는 어떻게든 참아야 했다. 역겨운 오물을 한바가지 쏟는 것도 그렇지만 이물질이 기도로 들어가는 날엔 대 참사다.
내가 이런 걱정을 하는 까닭은 앉은 의자의 각도가 예사롭지 않아서이다.
손님의 면도를 돕기 위해 뒤로 젖혀진 이발소 의자 같았달까, 비스듬하게 눕혀져 있으니 토하면 필연적으로 구토물 일부가 목으로 넘어가게 되어 있었다.
‘이발소 의자일 리 없으니 고문용 의자이겠군.’
끙끙거리며 의자에 묶인 팔과 다리를 버둥거렸다.
움직임에 따라 철겅거리는 쇳소리가 났다. 중세시절 고문의자처럼 쇠고리에 사지를 고정시켜 둔 것 같았다. 주먹을 쥐고 팔을 움직이자 삐걱거리는 소리만 났을 뿐, 움직임이 용이하지 않았다.

“효성진 도장의 제자님께서 드디어 정신을 차리신 거 같군.”
거짓말 보태지 않고 펄쩍 뛰었다. 아무리 눈이 보이지 않아도 귀는 멀쩡한데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이 있다는 기척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거기다 목소리가 들린 방향도 짐작이 쉽지 않았다. 방음설비가 된 음악실처럼 벽이 울퉁불퉁하여 소리의 전달을 먹어치우는 눈치다.
나는 겁을 집어먹은 채 보이지 않는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알았지만 의외로 상대는 나를 볼 수 있어도 나는 상대를 볼 수 없다는 점이 무서웠다.

“거기 누구요!”
“지금 이 시점에서 그게 중요할까?”
스윽, 스윽,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숫돌에 날을 가는 소리와 비슷하게 들려 전설의 고향 드라마에서 구미호가 나그네의 간을 꺼낸답시고 부엌에서 칼을 가는 장면이 연상되었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공포는 배가 되었다.
“그럼 무엇이 중요하다는 거요!”
“네가 효성진의 제자라는 것이 중요하지.”
“제자? 누가요. 나? 나 그 사람 제자 아닌데?? 언제부터 내가 제자가 되었지?”
“그래, 어쩐지 그렇게 나올 거 같더라. 처음부터 고분거릴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
다시 작게 달그닥 소리가 이어졌다. 그게 밥그릇을 정리하는 소리 같기도 하고, 아니면 치과에서 썩은 이빨 쑤실 도구를 정리할 때 나는 소음처럼 들리기도 했다. 물건은 핀셋처럼 가벼운 종류부터 망치 같이 무거운 종류까지 다양했다.

순간 훅, 하고 얼음처럼 찬바람이 불었다. 나는 질겁했다.
“몇 살이지?”
“이거 하나는 확실하게 합시다. 제대로 대답을 하기 싫어서가 아니고요... 진짜로 제가 나이를 정확하게 몰라요. 어쨌든 댁에게 최대한 협조하고 싶은 마음이라는 건 알아주세요!”
“그래서 몇 살이지?”
“올해 스물하나라고 하면 믿지 않으시겠지만 제가 헤아려봤을 적엔 그 정도 나이가 됐습니다! 거짓말로 속이려는 것도 아니고, 농담 따먹기 하자는 건 더더욱 아닙니다!”
“몇 살이지?”
“아, 진짜! 저에게 왜 그러시는 건데요~~!!”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걸 봐선 제대로 걸린 거다. 상대는 전문가였다.
나는 대충 이쪽이겠거니 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최대한 불쌍하게 보이도록 울상을 지어보였다. 효과는 없겠지만 어쨌든 상대방에게 협조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었다. 나는 숨기는 것도 없고, 감추고 있는 비밀도 없다.

“몇 살이지.”
“스물하나 입니다. 그런데 못 먹고 자라 열네 살이라고 다들 착각합니다.”
“몇 살이지.”
“선생님.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웃자고 이러는 거 아닙니다. 저는 어려서 고아로 자랐고, 그래서 나이를 정확히 모릅니다.”
“몇 살이지.”
갑자기 끌려와 어딘지도 모르는 장소에서 정신이 들었는데 상대방은 계속 내가 몇 살이냐 묻기만 한다. 이러면 내가 굳이 대답을 할 의미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답이 없자 다른 질문이 이어졌다.
“사람의 뼈가 모두 몇 개인지 알고 있니?”
전생에서 퀴즈로 잘 써먹는 의학 상식이다. 206개다.
“그럼 손에는 모두 몇 개의 뼈가 있는지는 아니?”
세어본 적도 없어 모른다. 농구를 하다 손가락뼈를 삐었을 때 엑스레이도 찍어봤지만 몇 개인지는 모른다. 알고 있었어야 하는 거였나.
“손가락뼈는 열네 개. 손바닥뼈는 다섯 개, 손목뼈는 여덟 개란다.”
“꽤 많군요.”
대답하기가 무섭게 엄지손가락이 뚝 부러졌다.
“으하하악, 아륵!!”
“축하한다. 이제 네 손가락뼈가 열다섯 개로 늘었구나.”

이러지 말고 그냥 원하는 게 뭔지 시원하게 물어봐줬음 좋겠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발버둥 쳤다. 굳이 기선제압 이런 거 하지 없어도 순순히 다 말해줄 거였다. 뭘 원하는데. 뭘 바라는데. 아니면 그저 고문이 좋아서 이러는 거냐고. 그러지 말고 궁금한 거 있음 다 물어보라고. 팬티 사이즈에 동정 잃은 날짜까지 다 말해줄 수 있다. 나는 지켜야 할 자존심 같은 건 가지고 있지도 않고, 신념이나 신앙도 가지고 있지 않다.
“표정이 왜 그래. 기쁘지 않은 거니? 그럼 손가락뼈가 열여섯 개가 되면 행복해질까?”
“아니오!”
대답을 듣고도 놈은 삶은 닭 뼈 고르듯 손가락 이곳저곳을 만지작거렸다.
이어 우드득 불쾌한 소리를 내며 뭔가가 끊어졌다.
“아으악! 악! 아니라고 했잖아! 아악! 악악!”
“그래, 넌 올해 몇 살이지?”
확실히 알겠다. 이놈은 제정신이 아니다. 사이코다. 내 나이가 몇 살이나 묻는 건 핑계고 내 뼈의 개수를 하나둘 늘려가면서 기뻐하고 있다.

“이유나 좀 알자! 그냥 취미생활로 이러는 건 아닐 거 아냐!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러는 건데!”
“여전히 화를 내는 걸 보니 아직 팔팔하네. 한참 즐길 수 있겠어.”
그가 기특하다는 투로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과연 명월청풍 효성진이 제자로 삼을 만해. 그럼 나랑 같이 오랫동안 놀아볼까? 자, 그럼 다시 질문할게. 네 나이가 몇이지?”
“야, 이 개새끼야악~!! 허윽.”
비명 섞인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맹렬하게 두뇌를 풀가동시켰다.

‘명월청풍 효성진의 제자.’
이 사람들은 효성진과 연관 지어 나를 고문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Posted by 미야

2021/12/08 11:59 2021/12/08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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