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불식 중 도살장으로 끌려간다는 표현을 떠올렸다.
「그쪽」 세계에서는 부족한 원자재와 환경 문제로 도축된 동물의 고기를 더 이상 식용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돼지와 닭의 캐리커처 그림이 붙은 고기가 정기적으로 식탁에 올라왔지만 죄다 공장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들이었고 혀로 느껴지는 맛과는 달리 돼지나 닭의 살코기는 손톱만치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된 연유에서인지 「고기로 만들어지기 위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가축」 의 이미지는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동물의 그림이 그려진 식료품 스티커를 포장지에서 떼어낼 적마다 목덜미로 소름이 돋곤 했다.


발아래서 파삭, 도자기 파편이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빗자루로 깨끗하게 쓸어낸 건 아니니 조심한다고 해도 실수로 작은 조각을 밟은 모양이다.
아이는 들숨처럼 신음했다.
그래도 상처가 생겼을 발바닥을 보겠다며 신고 있던 신발을 뒤집어 까지는 않았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내려 발아래를 흘끔 쳐다보았을 뿐, 「아이고, 내 발!」 이러고 뛰지도 않았다.
머저리라는 아명과는 달리 귀족 앞에서 해야 할 짓과 하지 말아야할 짓을 그만하면 잘 구분하고 있었다.
그만하면 출발이 썩 좋다. 
기체릿이 입구 근처에서 서성이지만 말고 안으로 더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인사해라. 소공자님이시다.』
『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응?』

양팔로 가슴을 감싼 채 한쪽 무릎을 살짝 구부리는 인사법은 신관들의 예법이다.
시골뜨기 촌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보고 주워들은 것이 그리 많을 리 없으니 나름 열심히 궁리하여 높으신 분들이라 생각한 신관들의 동작을 따라한 모양이다.
이때 구부려야 할 무릎이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이어야 한다는 문제는 잠시 옆으로 미뤄두고 –
지금 뭐라고.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기체릿의 얼굴이 부풀어 올랐다.
『푸흐흣!』
서둘러 손바닥을 사용해 칠칠치 못한 당나귀 콧소리가 새어나오는 입을 틀어막았지만 소리를 내어 웃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아이의 귀에도 웃음소리는 잘 들렸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졌다. 웃기는 짓을 했다는 자각은 있었다.
어쨌든 변명하자면 진부한 역사극 따윈 취향이 아니었고, 따라서 아는 표현이라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와 「통촉하여 주시옵소서」가 전부였다. 전자는 감사합니다, 이고 후자는 미안합니다, 의 의미이다 –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 모르겠다. 후회한들 뱉은 말은 도로 주워 담을 수 없다. 애당초 망했다고 봐야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공자는 이 희극 같은 상황 앞에서도 웃지 않았다.
그래도 어처구니없어하는 건 쉽게 감춰지지가 않아서 답지 않게 입이 약간 헤 벌어졌다.

『내게 새로운 놀이친구가 생길 거라고 들었는데 알고 봤더니 재롱을 떨 광대를 얻게 되었군.』
『......』
『아니면 눈이 옹이구멍이던지. 네 눈엔 내가 머리 위로 왕관을 쓰고 있는 걸로 보이니? 보인다면 한 번 말해봐. 내 왕관의 색과 모양이 어떠한지.』
『저어.』
『장난으로라도 왕이 아닌 자에게 성은이 망극하다는 표현을 사용하면 반도의 무리다. 주의해라.』
『반도?』
『역모자, 반역자 말이다.』
야단을 맞은 아이는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더니 제 딴에는 제법 심각해져서 진지한 자세로 사죄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어쩔 수 없었다. 아는 표현은 딱 두 가지밖에 없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리고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죄송하다는 의미로 그리 말했더니 이번에도 기사가 옆에서 푸흐흣, 푸흐흣! 하고 듣기 싫은 숨 참는 소리를 냈다.

진짜지 전부 다 때려죽이고 싶다.
일로이 모젠 위니악은 무익하게 천장을 쳐다봤다가 다시 고개를 숙여 구두 앞코를 응시했다.
발가락에 힘을 주자 엄지발가락 즈음의 부드러운 구두 가죽이 발가락 모양으로 봉긋 솟아올랐다. 발가락을 도로하자 앞코가 도로 주저앉았다.
한탄할 일이다. 소공자 일로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겨우 이런 일 뿐이다. 구두 안에서 발가락이나 꿈질거리는 것, 손톱이 박히도록 주먹을 꽉 쥐는 것, 그 정도다. 멍청한 광대와 당나귀 소리를 내는 기사를 면전에서 치워버리는 건 그의 능력 밖이다. 섬멸 기사단의 일원인 기체릿은 아버지인 위니악 공작의 말만 들었고 저택의 사용인들은 형인 위니악 대공자의 명령을 따랐다.

이를 악물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빈말으로라도 그가 신고 있는 구두보다 더 가치가 없을 아이를 노려봤다.

체구가 작았다. 못 먹어서 그럴 게다. 입술의 색이 붉지 않고 창백한 것이 가벼운 영양실조 상태로 추측되었다. 짧게 자른 갈색 머리카락은 푸석푸석했고 피부는 건조했다. 손톱이나 발톱은 굳이 보지 않아도 어떤 상태일지 짐작이 갔다. 살집이 없으니 근육 또한 붙지 않았고... 발길질하면 동강이 나버릴 것 같은 뼈가 얇게 들러붙은 한 장짜리 피부 위로 도드라졌다. 앙상한 몸은 겨울의 바람에 얼어붙은 나뭇가지를 연상시켰고, 그리고 감히 예언하건데 겨울잠에 빠진 들판엔 영원히 봄이 오지 않을 것이다.
그냥 한 대 치기만 하면 된다. 겨우 그 정도로 - 아이의 등뼈는 박살이 날 테니.

살기를 담아 아이를 쏘아보는 일로이를 앞에 두고 기체릿의 눈 또한 곱게 휘어졌다.
죽음을 친절한 이웃사촌이라 착각하는 저 섬멸의 기사는 소공자가 저 작은 머릿속에서 뭘 생각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아니면 익숙한 냄새를 맡았을지도 모르겠다.
섬멸의 기사는 살기를 갗 구워낸 빵 냄새처럼 여기곤 했으니까.
그래서 기분이 좋다며 싱글벙글거렸다.

우리에게 더 많은 시체를.
그리고 신이여, 그 곱절의 죄책감을 우리에게 더하소서.

『무슨 꽃을 좋아하지.』
『네?』
갑자기 생뚱맞게 웬 꽃?
눈빛이 날카로운 도련님이 그리 멀지 않을 미래에 있을, 누군가의 장례식장에 쓰일 꽃의 종류를 물었다는 걸 알아차릴 리 없다.
갈팡질팡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짐작가는게 하나 있기는 했는데 그게 과연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언젠가 나란히 앉은 분들 앞에서 좋아하는 대중음악에 대한 질문을 듣고 땀을 한 바가지나 흘렸던 기억이 있다. 아니다, 대중음악이 아니고 좋아하는 작가에 대한 거였다. 그래서 대충 이거다 싶은 작가의 이름을 두 서넛 주워 담고, 책의 줄거리랍시고 한참을 횡설수설한 끝에, 주눅이 잔뜩 들어 독서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면접관은 자신이 판단하기에도 그럴 것 같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더듬거리며 입에 올렸던 소설의 줄거리는 영화 줄거리였고, 작가는 예술영화감독이었다.
「덕분에 창피한 꼴을 당했지. 최악의 취업 면접이었어.」
지금에 이르러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잘 생각한 뒤에 무난하게 답변했다.
『분홍색 꽃이요. 종류는 가리지 않아요. 꽃들은 전부 예쁘고... 저어.』
『분홍색 꽃이라. 기억해두지.』
무도회장도 아닌 무덤을 분홍색 꽃으로 장식하는 건 악취미다. 그래도 고인의 희망이라는데 제가 어쩔 건가. 풍성하고 화려하게 장미로 – 분홍색으로 준비해서 미르나무로 짠 관 위로 던져버리면 될 터.
조촐한 장례식을 상상하자 언짢았던 기분이 조금은 풀리려 했다.

여전히 영문을 알 길 없는 아이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저기요?』
『달리 할 말이라도?』
『그게 전부인가요? 왜 분홍색 꽃이 좋은지는 안 물어보세요? 아니면 분홍색 꽃의 종류를 읊어 보라던가...』
『물어야 하나.』
『아뇨.』
답답할 정도로 아까부터 대화가 전혀 되고 있지 않다.

아니, 따지고 보면 첫 단추부터 잘못 꿰었다. 그들은 서로 통성명조차 하지 않았다.
글쎄다. 이 몸이 평민이고 저쪽이 신분 높으신 귀족이라 그런 건지도.
대입하여 상상하면 이해 안 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먼 옛날, 아주 먼 옛날... 관리과장이나 본부장 이런 사람들도 밑바닥을 구르는 시설 근로자의 이름이 뭔지 궁금해 하는 법이 없었다. 호칭은 늘 거기! 였다. 빨리 와! 이기도 했다. 위아래가 붙은 회색의 작업복 한 가운데로 플라스틸로 제작된 명찰이 달려 있었어도 아무도 그 명찰에 적혀진 이름 석 자를 소리 내어 불러주지 않았다.

갑자기 코가 시큰해졌다.
「내 이름.」
류 시화.

그런데 역으로 얘기하자면 류 시화 또한 본부장의 이름을 기억 못했다. 뚱뚱하고, 머리숱 적고, 기름진 피부에 배가 나온 마흔 중반의 아저씨 – 본부장님 – 그 또한 규칙에 따라 출입허가증을 겸한 플라스틸 명찰을 걸고 있었지만... 딱 거기까지다. 류 시화의 명찰이 흰색이었다면 본부장의 출입허가증 색은 파란색이었다. 한 번 죽고 살아난 오늘에 이르러 본부장에 대한 기억은 기껏해야 명찰이 파란색이라는 것 정도다. 멱살이 잡혀 폭행까지 당해 제법 원한이 깊었음에도 떠오르는 거라고는 명찰의 빛깔이 전부... 본부장의 이름은 뭐였을까.

「나라는 인간은 어지간히 변화가 없군. 지금도 저 소년의 이름이 무엇인지조차 궁금하지가 않으니.」
깨닫고 나니 만사가 시큰둥해졌다.

Posted by 미야

2017/10/27 13:45 2017/10/27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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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름이 뭐냐 물어보자 「머저리」 라 했다.
자기에게 욕을 한다 생각한 하녀가 화가 잔뜩 나 콧구멍을 벌렁거렸는데 이상하리만치 애 표정이 천진난만하다.

어라. 이거 좀 이상한데.
진정하고 숨을 가다듬었다.

『다시 한 번 더 묻자. 이름이 뭐라고?』
『머저리.』

뒤늦게 깨달음이 벼락같이 왔다. 아니 뭐 이딴 개 같은 경우가.

오래된 시골 풍습이다. 아들 이름은 개똥이고 손녀의 이름은 광년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진짜 이름은 아니고 아명이다. 이름을 늦게 지어주면 사악한 악귀들에게 잡혀가지 않는다고 믿기에 이것아 저것아 하고 아무렇게나 부르는 거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장녀는 머저리, 둘째는 돼지, 셋째는 개자식으로 그 명칭이 고착된다. 편하게 첫째, 둘째, 막내, 이런 식으로 영혼 없이 불리는 일도 많다.

하여간 시골 사람들이란. 인상을 찌푸리고 다시 물었다.
『그렇다고 내가 너를 머저리로 부를 수는 없지 않겠니. 호적상 이름이 뭐지?』
『호적?』
환장할 일이다. 아이는 호적이 뭔지 전혀 모르는 눈치다. 여전히 그 표정이 천진난만하다.
속으로 천천히 1부터 10을 세었다.
『좋다, 그럼 이건 어떠냐. 기도를 드리러 신전에 간 적은 있겠지. 그때 신관님이 널 뭐라고 부르든?』
『머저리.』
『돌겠어... 진짜 돌겠어!!』

신음하며 이마로 손을 가져갔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동네야?! 신관이 코딱지 후벼먹게 생긴 아이더러 머저리, 머저리, 이랬... 잠깐만. 만장하신 가운데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코딱지를 맛있게 후벼먹고 있으면 머저리가 맞겠지.

『코는 그만 후비고.』
『네.』
『몇 살이지?』
『아홉 살.』
『생각보다 나이가 많구나. 체구가 작아 훨씬 어린 줄 알았는데.』
『그럼 여덟 살.』
『얘는. 고무줄도 아닌데 사람 나이가 막 줄었다 늘었다 할 수 있니?!』
쏘아붙이며 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잠가주었다.

임자가 따로 있던 옷이라서 그럴까, 품도 크고 소매가 길게 늘어져 펄럭거렸다.
야무지게 두 번 접으니 손등까지 올라갔다.
안 되겠다. 제대로 수선을 하려면 가위로 옷감을 잘라내야 할 것이다.
여자는 눈으로 오려낼 길이를 대중하며 또 한 번 소매를 접었다. 애들은 어차피 금방 자라는 법이지만... 늘어진 소매를 주렁주렁 매단 꼬락서니로 저택을 쏘다니게 만들 수는 없었다. 이곳은 귀족이 머무르는 저택이었고, 똥간을 푸는 막일꾼조차 보우타이를 매고 다녔다.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겠어?』
불량스러운 태도로 벽에 기대어 서서 팔짱을 끼고 있던 기사가 킥, 하고 웃음소리를 흘렸다.
『바느질을 다 마치기 전에 시체를 치워야 할지도 모르는 일인데.』
『애가 듣습니다, 기체릿 님.』
『들으라고 한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입술을 끌어당겨 보는 이로부터 정나미 뚝뚝 떨어지게 만드는 비열한 미소를 만들어냈다.
웃는 낯에 침을 뱉지 못한다는 속설과 다르게 뺨이라도 치고 싶은 미소였다.
『자고로 솔직한 게 최고야. 얘도 진실을 알아야지. 오늘부터 귀족 도련님의 놀이 상대가 되었으니 시궁창 인생에서 탈출해 드디어 찬란한 오색빛깔 무지개를 만났노라 착각이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안 그래?』

앞전에 그런 소년이 있었다. 자신에게 닥친 재앙을 무지개로 착각한 주근깨 소년이.
「소공자께서는 어떤 분이신가요? 상냥하신가요? 멋지신가요?」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처럼 흔하디흔한 어린애였다. 게을러 잠도 많았고, 더럽게 투정도 많았다. 침대가 딱딱해요, 흰 빵이 먹고 싶어요, 추운 건 별로에요, 이러쿵저러쿵. 가난한 집구석에서 입을 줄일 목적으로 팔려왔다는 것도 모르고 어지간히 앵앵거렸다.

영특한 아이니 무엇을 시켜도 잘 배울 겁니다. 눈치도 좋아요. 도련님의 놀이상대로 그만입니다.

영특한 거 좋아하시네. 기체릿은 더욱 입술을 비틀었다.
몇 살이냐 물어보니 손가락을 가만히 세었다.
참을성이 바닥날 즈음에 엄지와 검지를 접기를 슬그머니 그만두었다. 그러더니 스스로가 헷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마도 열세 살일 거라고 대답했다. 자신감은 요만큼도 없었다... 그런 아이였다. 만사 자신감 없어하는. 소공자 앞에서도 주눅이 들어 고개도 들지 못했다. 출신이 소작농의 자식이니 귀족 앞에서 고개를 들어서도 안 되었지만 – 그래도 고개를 들라 명령을 받았으면 번쩍 들었어야지, 거기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무서워서 오줌이라도 쌀 거 같아요, 이러고 울어서는 안 되었다.

『어디 보자... 네가 보기에 걔는 얼마나 갈 거 같아? 한 일주일?』
『기체릿 님!』
『아이구머니. 나 귀 안 먹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오늘 당장 저 어린아이가 오체분시 되어 뒈질 일은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기체릿 소아르가 – 동대륙 사람이라면 그 이름만 듣고도 벌벌 떠는 섬멸 기사단의 일원인 기체릿 소아르가, 멍청한 하인들이나 할 법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몸소 아이를 데리고 소공자와 놀이상대 대면식을 할 예정이었으니까.
하얀 이를 드러내며 아이의 어깨를 툭툭 쳤다.
『영광이라고 생각하렴. 원래 이 몸은 일국의 대사 정도 되는 분들을 호위한단다. 아~아주 비싼 인력이지. 속된 재주를 부린다는 장점이 알려진 탓에 언제부터인가 도련님 전속이 되었다는 슬픈 사정이 있긴 하다만... 이 이야기는 나중에 차분히 얘기하도록 하고 준비가 다 되었으면 가보도록 할까?』
 
전쟁터와 다를 바 없는 수라장에서 높으신 분들의 호위를 맡았던 일과 비교하자면 이건 그냥 소꿉장난 수준이다. 대포가 날아올 일도 없고, 불붙은 화살이 쏟아지지도 않고, 사방에서 칼날이 번득이지도 않는다. 마물들이 송곳니를 드러내지도 않고, 바닥이 꺼지지도 않고, 거푸집이 무너지지도 않고, 그냥 팟! 하고 보이지 않는 바람에 피부가 베이는 정도.

기체릿은 손등으로 화끈거리는 통증을 호소하는 오른쪽 뺨을 문질렀다.
내일 아침이면 사람들로부터 키우던 고양이가 발톱으로 할퀴었느냐는 질문을 받을 것이다.
아니면 면도날로 수염을 깎으면서 집중은 하지 않고 무슨 딴 생각을 했느냐는 면박을 들을 수도 있다.
가끔은 몸 파는 여자와 화대를 흥정하다 싸운 거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와우, 오늘도 환영인사가 참 멋지군요, 일로이 공자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소인의 절을 받으소서. 오늘은 공자님께 소개해드릴 자가 있어 같이 왔습니다. 잠시 시간 좀 내주시죠.』
『꺼져.』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꺼지라고 경고했다.』
『저도 공자님을 꺼지게 만들고 싶습니다. 진짭니다. 루름의 신전에서 앙망 와코와르 신관님의 손을 꼬옥 붙잡고 소원풀이를 기원했지요. 그런데 신께서 언제 제 기도를 들어주실지 짐작이 가질 않아 짜증스럽습니다.』
『간절하게 빌어봤어? 아니면 공물이 적었나보지.』
『글쎄요. 공물이 좀 부족했던 건지도... 제 급여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라서요.』
『술과 여자, 도박을 멀리하면 적게 느껴지던 급여가 다시 많아질 거야. 기체릿 경.』
『허어, 그거 참... 피와 살이 되는 충고로군요. 감사합니다.』
입으로는 감사하다고 말하면서도 전혀 감사해하는 것 같지 않은 표정을 지은 기체릿이 거칠게 문을 열어젖혔다.

별관의 응접실은 항시 어두컴컴하다. 암막기능이 있는 두꺼운 커튼을 사계절 내내 길게 늘어뜨린 탓이다.
그렇게 햇빛을 꺼리는 까닭은 응접실 상태가 영 좋지 않기 때문이었는데 그 예로 눈앞에 놓인 4인용 소파는 고가품임에도 불구하고 거꾸로 뒤집혀진 채 양말도 신지 않은 맨 다리를 천장을 향해 번쩍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흡사 순결을 잃을 위협에 처한 가련한 처녀처럼 느껴지는지라 기체릿은 「실례」 라고 짧게 말한 뒤, 한 손만 사용하여 소파를 다시 뒤집었다.
처녀치고는 그 몸무게가 상당했다. 들었다 놓이자 쿵, 하고 응접실 바닥이 울렸다.
그런데 얼씨구, 뒷모습만 봤을 적에는 젊은 처녀였는데 앞으로 되돌리니 주름살이 가득한 노파였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그러했다. 갈고랑이 진 모양새가 장난이 아니었다. 흠의 너비와 깊이는 제각각이어서 미친놈이 광분하여 손도끼로 마구 찍어댄 것 같았다.
문제는 가구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거였다. 패널로 장식된 벽면 또한 잔뜩 긁혀 흡사 응접실 한 가운데서 성능 나쁜 사제 폭탄이 터진 몰골이었다. 전장의 상흔이라도 입은 것 같은 천장은 또 어떠한가. 요인 암살을 노리고 일개 그림자 부대가 휩쓸고 지나간 식의 아찔함이 가득했다.

그 난장판 한 가운데.
두통과 현기증, 졸음, 무기력, 짜증, 분노, 한탄, 좌절, 기타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종류들이 한 소년의 몸을 빌어 저마다 악을 쓰며 발현 중이었다.
심지어 그 중에는 시원하게 나오지 않는 방구와 억압된 배변 욕구까지 포함되어 - 사악하고 불쾌했다.
식사로 나왔던 닭고기 탓에 배앓이라도 하는 중인가 – 알게 뭐람. 어제의 명품 가구는 오늘의 불쏘시개였다. 기체릿은 능숙하게 전진하며 파편만 남은 가구들을 발등을 사용해 죽죽 밀었다.
음, 방금 전 둥근 모양새 탓에 공이라고 착각하고 걷어찼던 건 떨어져나간 조각상의 머리 부분인가 보다.
데굴데굴 굴러가기에 흥미가 돋아 한 번 더 찼다.

『그게 내 머리라고 상상하니 재미있어졌나 보군. 기체릿 경.』
『설마요. 밟아서 터뜨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재미있을 리가.』
짐짓 변명하며 주변 정리하는 것을 멈추었다.

Posted by 미야

2017/10/20 17:43 2017/10/20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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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분홍빛의 묽은 스프를 억지로 삼키자 평소보다 몇 갑절 빠르게 의식이 흐리멍덩해졌다.

「평소보다 누월초를 강하게 썼군. 이거, 이래서는 치샤량 아닌가.」
숨이 멎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한 톨도 하지 않았음에도 속으로 툴툴거렸다.
어차피 쉽게 죽지 않는 몸이다.
치사량이 문제가 아니고 결정적으로 맛이 개판이다. 식초 비슷한데다 떫었다. 퉤, 하고 뱉고 싶은 맛이다.
차라리 몽둥이로 단숨에 머리를 쳐서 기절시킬 것이지 – 그릇을 통째로 뒤집어엎고 싶은 욕구를 참고 수저를 입으로 가져갔다.

마침내 눈꺼풀 아래로 무거운 납덩이가 달리자 멀리서 이를 훔쳐보던 하인이 서로 눈짓을 나누었다.
문이 열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여자가 작은 신사용 구두와 레이스로 깃이 장식된 겉옷을 들고 긴장한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서두르라고 누구 하나 입 뻥긋하여 말하지 않았음에도 여자의 보폭은 매우 컸다. 그 모양새가 흡사 불가에 오래 두고 졸아붙은 스튜를 화덕에서 내려놓기 위해 호들갑을 떠는 시골 아낙네 같아서 약간은 우스꽝스러웠다. 뛰는 것도 아니고 걷는 것도 아니다. 그 중간 어디쯤 될 것 같다. 무엇보다 여자는 씨근덕거리고 있었다.

약에 취해 눈을 감았던 소년이 인기척에 반응하여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보석처럼 새파란 눈동자였다. 좋게 표현하면 그렇다는 것이고 – 나쁘게 말하자면 사람 느낌이 일절 안 났다.
옷가지를 들고 있던 여자는 초점이 흐려진 소년의 시선이 얼굴에 닿자 경기를 일으켰다.

『아, 안전할 거라고 했잖아요!』
『약을 세 배는 더 썼어. 괜찮아.』

정확히 얼마나 더 썼는지 모른다. 허나 약을 더 쓴 건 사실이다. 그러니 세 배라고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
약을 가져온 본가의 시종장은 한 끼 식사마다 말린 잎사귀를 두 장씩 넣으라고 지시했다.
그렇지만 정량 따윈 잊은 지 이미 오래다. 잎사귀는 바싹 말라붙어 조금만 건드려도 부스러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형태를 잃고 가루가 되었다. 그 가루로 「잎사귀 두 장」 정도의 분량을 추측하라고? 말도 안 되었다. 그래서 게으르고 부덕한 하인들은 티스푼을 사용해서 눈대중으로 대충 양을 쟀고, 당연히 최초의 「잎사귀 두 장」 이야기는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알게 뭐람. 얼마면 어떠랴. 요컨대 요괴가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라는 거다.

옷이 입혀진 소년은 전쟁 포로처럼 양 팔이 모두 붙잡힌 채 다른 장소로 옮겨졌다.
무릎의 힘이 풀려 거의 끌려가는 수준이었지만 하인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신분이 위니악의 소공자 – 메디발의 공주가 배 아파 낳은 둘째 아들이었어도 그랬다.
『서둘러. 시간이 촉박하다.』
약에 취해 오락가락하는 소공자의 정신이 가끔씩 돌아올 때가 있었다. 그럴 적마다 소년은 흔들거리던 머리를 애써 세우곤 했는데 하인들은 그 때마다 히익 소리를 내곤 했다.
소문으로는 소공자가 입으로 용암을 내뿜는다고 했다.
물론 소문이다. 소공자는 용이 아니니까. 그래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다.

《어서 오세요.》
메디발의 공주는 왕가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은 한 떨기 장미꽃이었다.
곱슬거리는 금발머리는 장인이 만든 보관보다 아름다웠으며 피부는 백옥 같았다.
결혼을 하고, 나이를 먹고, 세 아이를 낳았음에도 여전히 그녀는 숨구멍조차 없는 완벽한 진주였다.
《오늘도 착하게 잘 지내셨나요.》
여인은 카나리아처럼 노래한다.
《어서 이리 오세요, 나의 작은 보물.》

소년은 흐려진 눈으로 여자를 응시했다. 초점이 맞지 않아 어미의 눈코입이 전부 뭉개져 보였다.
사랑스럽고 귀하다고 말하면서도 그녀는 한참 거리를 두고 서서 손깍지를 단단히 꼈다.
그 손을 내밀어 아이의 머리를 만져주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며.
행동은 하지 않고 오로지 입으로만 노래해 그 심장에 담긴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한다.
《사랑스런 나의 아이.》

힘들여 눈을 깜빡이자 잔상이 다소 가셨다.
그래봤자 여인의 얼굴은 다 마르지 않은 물감을 손가락으로 마구 뭉개버린 형상이었다. 빨갛고, 노랗고... 그리고 사방에서 불쾌한 빛이 번득였다. 덕분에 눈이 시려 눈물이 났다.
금발, 노란색. 빨강의. 두껍게 덧칠된... 아아, 피냄새. 그렇군. 소년은 느리게 깨달았다.

당신은 이미 죽었지.

순간 참을 수 없이 두통이 심해졌다. 도끼로 머리를 찍는 수준이었다.

『약이 너무 과한 거 아닌가.』
『아니옵니다. 평상시와 같사옵니다, 대공자님.』
『내 판단에는 그렇지 않은데. 앞으로는 좀 줄이게.』
주인의 말에 노인은 저어했다.
『저어, 죄송하오나 그러지 않는 편이...』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게.』
『알겠습니다, 대공자님. 약을 줄이라고 지시해 두겠습니다.』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콧잔등에 주름을 잔뜩 만든 사내가 서있었다.
언제나의 표정이었다.

무엇이 불쾌하다는 걸까. 무엇이 짜증스럽다는 건가.
방금 전 자다 일어난 사람처럼 헝클어진 머리? 끼워 맞춘 것처럼 보이는 옷? 그나마 격식을 갖춘 겉옷 아래로는 속옷이나 마찬가지인 셔츠 차림이다. 준 왕족이나 다를 바 없는 위니악의 후계자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추태일 터, 그 사실을 잘 알았기에 목깃까지 잘 채워져 있던 단추를 주먹으로 쥐고 뜯어버렸다.

『무슨 짓이냐.』
『숨 쉬기가 답답해서.』
누월초는 원래 독초다. 중독되면 심장박동이 느려진다. 그래서 숨이 느려지고 심하면 정신을 놓는다.
그 효능만 보자면 정적을 독살하기에 안성맞춤인 종류이나 무색무취의 다른 독과는 달리 감춰지지 않는 특유의 신맛이 있다. 그래서 보통은 사람을 쓰러뜨릴 종로서가 아니고 동물을 사냥할 적에 쓴다. 사냥꾼들은 누월초의 즙을 화살촉에 발라놓고 사용한다.

『역시 복용량을 줄이는 편이 좋겠어.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겠느냐.』
『지금은 눈이 잘 안 보여. 하지만 귀는 닫히지 않아 그 목소리는 잘 알아듣겠군. 형님.』
소년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축 늘어진 자세 그대로 고개만 까닥였다.
『한 달 보름여 만인가? 달력을 보며 세지 않아 정확하진 않지만.』
『세 달이다. 미안하구나, 일로이. 그동안 좀 바빴다.』
『전혀 미안해 할 것 없어, 형님... 덕분에 평안했으니. 매일 약에 취해 입을 벌린 채 침을 흘렸지. 정신을 차리면 밤이고, 다시 정신을 차리니 밤이더라고. 아주 달콤하고 태평한 나날이었어.』
순간 테이블에 놓여있던 장식 화병이 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일로이!』
『귀 아프다고. 소리 좀 지르지 마, 형님. 어차피 싸구려 도자기잖아.』
『싸구려가 아니야. 바다 건너 대륙에서 어렵게 공수해 온... 아니다. 지금 도자기 문제가 아니잖아!』
『그럼 뭐가 문젠데.』
『...』
남자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열두 살 어린 남동생의 제어되지 않는 이능이 골치라고는 말하기 싫었다.
그래서 대화가 잠시 중단되었고, 이윽고 몇 단계를 훌쩍 건너뛰어 다시 시작되었다.

대공자가 자세를 가다듬었다.
『네게 곧 놀이상대가 생길 거다.』
『뭐?! 갑자기 웬 놀이상대?』
『아니면 개인 시종이라고 생각하던지. 어쩌다보니 사정이 있는 어린아이를 잠시 맡게 되었다. 손님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니 저택에 머무르는 동안 그동안 밥값은 해야 할 테고, 아직 팔목에 힘이 없어 본관에서 일을 시키기는 무리더구나. 그래서 생각해본 끝에...』
소년이 재빨리 말꼬리를 잘랐다.
『맙소사. 그래서 기껏 생각한 게 내 놀이상대나 하라고? 하아? 지금 장난해?』

대공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상대가 한 배에서 태어난 동생이라 할지라도 말꼬리가 잘리는 건 무척 불쾌한 경험이다. 신분으로나 직급으로나 그의 말꼬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자를 수 있는 자는 왕국에서 손가락을 꼽을 정도밖에 없다. 그리고 정직하게 따지자면 열두 살 터울의 동생은 대공자의 말꼬리를 자를 위치가 전혀 되지 못한다.

자신도 모르게 턱이 당겨지고 말투가 싸늘해졌다.
『아무렴 장난이겠느냐.』
눈매도 가늘어졌다.
『참고로 말해두지만 지난 번 네가 「실수랍시고」 호숫가에 거꾸로 처박아 죽인 아이의 부모에겐 사과의 의미로 농작지를 따로 떼어 내려줬다. 그런데 새로 온 아이에게는 양친이 없으니 덜 부담스럽구나. 참으로 다행이지 않느냐. 천애고아라서. 어찌나 감사할 노릇인지. 내 죽은 자식의 몸뚱이가 왜 다섯 조각으로 돌아왔느냐는 물음에 수중에 사는 짐승에게 물어 뜯겼노라 거짓말 하지 않아도 되고.』
『...』
『존재하지도 않을 짐승을 잡겠다며 기사를 풀어 들판을 쑤셔대지 않아도 될 테고.』

그때 또 커다란 유리창이 쩍 하고 굉음을 내며 세로로 갈라졌다.
『일로이!』
『어쩌라고!』
소년과 사내는 서로를 죽도록 노려봤다.

Posted by 미야

2017/10/17 15:55 2017/10/17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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