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고아원이라는 말을 쓰지 맙시다. 아동보육시설입니다.

뜬금없게 떠오른 꿀돼지 과장님의 목소리에 쓴웃음이 나왔다.
부어라 마셔라 송년회 이런 거 말고 뭔가 뜻 깊은 일을 해보자는 건의에 팀원 여덟 명이 보육원 봉사를 다녀왔었다. 제과점에서 케이크도 좀 사고, 과일상자도 챙겨갔다. 아, 그리고 공구상자도 가져갔다. 세탁실 수도꼭지와 화장실 배관이 영 시원찮다는 얘기가 있어서 기술 기부도 할 생각이었다. 막상 우리에게 떨어진 건 이불빨래였지만. 여하간.

건물은 환하고 청결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새싹 유치원이라는 간판이 붙어있음 직한 어린이집 느낌이어서 「생각했던 것과 다르네. 요즘 고아원은 다 이래?」 라고 귓속말로 물어봤다가 청력 좋은 꿀돼지 과장님으로부터 옆구리 꼬집힘을 당했다.

《뭐예요! 아파요! 성추행이에요!》
《성~추~행?! 내가 진짜 성추행의 맛을 보여줘 봐?》
40대 골드미스인 과장님이 마미손 고무장갑을 휘둘러 철썩철썩 때렸다.
흉기가 고무장갑이라서 하나도 아프진 않았는데 아픈 것만큼이나 기분이 나빴다. 밥상머리에서 몰래 발가락을 긁적이다 엄마에게 등짝을 두들겨 맞는 것 같았다.

《현지 씨는 남편 죽고 홀로 된 여자를 미망인이라고 부를 거지? 다리 절고 걸어가는 사람더러 절름발이라고 할 거고.》
《아뇨.》
《그래. 아동보육시설이야. 고아원이 아니라고.》
고무장갑을 요리조리 피하는 날 아주 못 마땅해 하며 과장님이 눈을 흘겼다.

그치만 과장님. 여기는 진짜 고아원이에요. 그것도 올리버 트위스트라고요!

내 속마음의 외침과는 다르게 밴드레이크 백작령 소속의 가정원은 평판이 좋았다.
아이들을 굶기지 않았고 – 육류가 제한된 2식이 제공되었다.
갈아입을 옷이 있었고 – 사정이 나쁜 곳에서는 더러워진 옷을 세탁하려면 발가벗고 있어야 했다. 옷은 고가품이다.
지나친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으며 – 회초리는 오케이. 뼈를 부러뜨리는 건 반칙.
노예로 팔지 않았다.

21세기의 기억을 가진 현대인의 시선으로는 올리버 트위스트였으나 저 마지막 문구 하나만으로도 밴드레이크 백작은 칭송받아야 마땅했다.
소작민을 헐값에 팔아치워 곳간을 채우는 봉작들의 작태는 제법 흔해 노예제도를 법령으로 폐지를 명한 국왕전하의 면에 금칠이 아닌 똥칠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 마당에 보호자 없는 아이들은 잡아가는 사람이 임자라고 개장수가 복날 시골마을 털어가듯 달구지에 실어가곤 했다.
목줄이 채워진 아이들은 구슬피 울며 애원했지만 인권이 쓰레기인 세상이었다.
《큰 아이는 은화 열두 개, 작은 아이는 다섯 개요.》
종을 울리며 저 말을 반복할 적엔 진짜 어디서 개장수가 나타났다 싶었다.

그렇다면 그것을 금지한 우리네 백작은 아동인권 보호의 선구자였던가.
실은 별 이유 없었다. 뼛속까지 근왕파라서 「전하께서 령으로 금하셨으니」 왕의 뜻에 따라 사람을 사고팔지 말라고 한 거였을 뿐.
딱 거기까지였다. 이후는 나 몰라라 해서 아동 매매가 금지된 당해엔 갈 곳이 없던 아이들 몇이 길가에서 굶다 못해 얼어 죽기도 했다.
시체를 치웠어야 했을 경비병들이 두어 번 난리를 쳤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지 가정원이라는 간판을 건 큼직한 건물 - 헛간을 하나 짓고 갈 곳 없는 아이들을 그리로 쓸어 모은 건 아동 매매 금지령이 선포되고 난 뒤 정확히 2년 뒤다.

「하려면 제대로 좀 하던가.」
한숨만 푹푹 나온다.
이건 뭐 정글 서바이벌이다. 꿀꿀이를 키우는 일에도 정성과 노력이 필요한 법이거늘, 사람 취급이 축사 안 돼지만도 못하다. 밥을 원 없이 먹어보기를 해, 학교 수업을 받기를 해... 손발이 멀쩡하다 싶으면 일찌감치 노동 현장에 투입이다. 물 긷는 일부터 잡초 뽑기, 세탁하기, 바느질, 청소, 가축 돌보기, 농사일 돕기... 고달픈 인생. 하루가 짧다.

올해 아홉 살이 된 나에게 떨어진 일감은 잡초 뽑는 일이다.
음, 보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독초 뽑기다. 목초지에는 여러 풀들이 자라는데 게 중에는 소들이 먹으면 탈이 나는 종류가 있다. 눈썰미 좋게 재빨리 솎아줘야지만 소들이 맛있는 풀을 먹고 크고 아름답게 성장할 수 있다.
1톤 트럭 덩치의 몬스터 같은 소들을 뒤로 하고 특정 모양새의 풀만 골라 야무지게 뜯어내는 것, 그것이 내 임무다.
망할 쥐똥, 오줌똥, 냄새 지독한 소들이 움매 울었다.
처음에 방목되어진 소들을 봤을 적에 난 이것들이 초식동물이 아니라 네발로 걷는 트롤인 줄 알았다. 1리터짜리 우유팩에 그려진 젖소의 외모만 기억하고 있던 나는 기겁했다. 털은 짙은 갈색이고 머리 모양은 앞이마가 툭 튀어나온 게 코뿔소를 연상시켰다. 천만다행으로 뿔은 없었다.

냄새가 역한 건 천적을 막기 위해 액취선이 발달해서이다.
얘네들 암내는 천하제일이다.

구역질을 억지로 참고 있는 내 옆에서 크리스가 뜨끈뜨끈한 똥을 주먹으로 짓이겼다.
보고만 있어도 헛구역질이 더 심해졌다.
반면 똥을 만지작대는 크리스의 표정엔 큰 변화가 없었다.

『다우치 씨앗이 보여.』
아, 그러십니까.
『다우치는 번식이 빨라. 넓게 번지기 전에 싹을 뽑는 게 좋아.』
그러시던지.

귓등으로 흘려들으면서 혀 위로 올라온 시큼한 침을 얼른 뱉었다.
좋은 버릇이 아니다. 침을 자주 뱉으면 갈증이 심해지니까.
풀 뽑기를 하면서 그때그때 수분을 보충해주거나 간식을 집어먹는 건 불가능하다.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면 게으름을 피운다고 어른들로부터 야단을 맞고, 결정적으로 하나하나 손으로 뜯고 있는 풀의 종류가 독초다. 뭔가를 입에 넣으려면 그 전에 손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 이를 무시했다간 설사를 앓는 수가 있다.

『다우치 씨앗.』
내가 딴청을 부린다고 판단한 크리스가 얼굴 표정을 굳혔다.
뭐, 손에 똥 묻히고 정색해봤자 하나도 안 무섭지 말입니다.

묵묵히 고개를 들어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이 세계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색소가 엷어 금발이 흔한 편이다. 크리스도 하얀 피부에 노란색의 머리카락을 가졌다. 하지만 한국인은 까만 눈과 까만 머리카락이죠. 덕분에 지금도 어색해 죽겠다. 여전히 나는 노란머리 = 염색한 양아치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 나부터 갈색머리인데 웃긴 얘기다.

아니 뭐, 머리카락 색은 그렇다 치고.
저건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지.

둥그런 사람 머리 위로 반투명한 글자가 둥둥 떠 있다.

도를 넘어선 차분함. 자연친화적. 어설픈 식물학. 영양이 부족한 성장기.

아무래도 저 글자들은 오로지 내 눈에만 보이는 것 같다.
처음엔 남들 눈에도 저런 망측한 게 보이나 보다 짐작하고 「내 머리 위에는 무슨 글자가 떠있어?」 하고 물어봤다가 상상력이 매우 풍부한 어린애 취급을 받았다.
「글자라니?」
「머리 위에 둥둥 떠 있는 그거.」
「앤셧. 잠이 덜 깼구나.」
사실 상상력이 풍부한 어린애 이전에 정신 나간 미친년 취급을 받았다.

참고로 거울을 통해 보면 글자가 뒤집힌 상태로 보인다.
거울은 가난한 사람들이 쉽게 가질 수 없는, 이 세계에선 매우 귀한 물건이다. 그래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대야에 물을 떠놓고 비춰봤다.
단호함을 담아 볼드한 굴림체로 「잣 되었습니다」 라고... 음.

어쨌거나.
크리스의 머리 위로 떠오른 글자가 스륵 변화했다.

허기. 목초지 내 독초 번식에 대한 걱정.

손에 쥐고 있던 풀떼기를 탁 소리가 나도록 무릎에 내려놓았다.
그래, 자연친화적이다 이거지. 소가 중요해, 내가 중요해. 그래. 소가 중요하구나.

『이봐, 크리스. 넌 송아지와 내가 동시에 강물에 빠진다면 누구부터 건져낼 거야?』
아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질문의 의도를 잘 모르겠다는 눈치다.
『뜬금없는 소리네. 쿤메의 새끼들은 헤엄칠 줄 알아. 불어난 강물을 억지로 건너지 않는 이상 물에 빠지지 않아.』
『아... 씨. 그냥 물에 빠졌다고 해보자고! 걔네들은 평생 실수 안 한데?!』
『그래도 쿤메는 금방 기슭으로 올라올 걸? 이 부근에 그렇게 물살이 센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쿤메의 새끼는 그렇다 치고 나는?』
『네가 왜.』
『강물에 빠졌다니까!』
『그럼 헤엄을 쳐. 앤셧.』
대화가 안 된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플로섬 부인의 눈초리가 사납다.
그녀는 고함을 치기 직전 숨부터 들이마셨다. 덕분에 헐떡이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 게으름뱅이!』
그거 참... 하루 종일 힘들게 풀을 뜯고 돌아온 사람에게 참 위로가 되는 발언이다.
그리고 화를 내는 대상이 틀렸다.
소들의 주인인 겔섬 씨는 목초지 관리를 위해 가정원 아이들을 불러댔지만 막상 일을 마치고 나면 약속한 비용에서 일정금액을 제멋대로 빼곤 했다. 빼돌린 동전을 손바닥에 쥐고 심술궂은 얼굴로 「이건 너희들이 빈둥거린 값이란다.」 라고 말하는 거다.

플로섬 부인은 약속을 밥 먹듯이 어기는 겔섬 씨에게 항의하지 않았다.
대신 아이들의 뺨에 손도장을 찍었다.
『이 못된 것!』
짝 소리와 함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크리스! 너도 잘한 거 없다. 앤셧 저 계집애가 한눈을 팔고 있음 말렸어야지!』
화가 잔뜩 난 부인은 크리스의 팔을 거칠게 잡고 위 아래로 세게 흔들어댔다.
그래도 뺨을 맞은 나와는 달리 취급이 좋다. 저런 식으로 흔들면 재수가 나쁠 시 어깨가 빠질 수도 있다는데 말 그대로 재수가 나쁘면 이라서 보통은 아무 일 없이 넘어간다. 봐라, 지금도 두어 번 더 흔들더니 팔을 놓아버렸다.

『하여간 뭐 하나 제대로 할 줄을 모르니! 청소면 청소, 빨래면 빨래, 전부 엉망이잖아! 얼굴도 못생겨서! 맨날 꾀만 부리고! 밥이나 축내고!』
부인의 목소리가 점점 더 가파르게 올라갔다.
『도대체 이런 멍청하고 쓸데없는 계집은 어디서 굴러온 거야! 시궁창 같은 게! 차라리 병에라도 걸려 죽어버릴 것이지. 아님 트롤에게 잡아먹히기라도 하던가!』
다시 한 번 짝 소리가 났다.

글쎄요, 부인. 저도 제가 어디서 굴러온 건지를 몰라서요.

눈을 깜빡이니 대한민국이 아니었고, 생판 모를 장소에서 낯선 외모의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다.
교통사고로 죽어 판타지 세계로 전이했다 – 아니거든요?
토요일 저녁, 텔레비전을 켜두고 「그것을 알고 싶다」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중이었다.
눈부신 빛이나 지진, 천둥, 하늘의 계시 이딴 거 전혀 없었다.
종이의 앞면과 뒷면이 뒤바뀌듯이 갑자기 예고도 없이 팟.
아니 시발.

서러움이 북받친다. 나도 모르게 울먹였다.
그러게요. 제가 왜 이딴 곳으로 굴러왔을까요.
이제 그만하죠. 월요일 아침에 지하철 타고 출근할래요.
돌려보내주세요!

Posted by 미야

2020/01/10 15:43 2020/01/10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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