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Happy Birthday 04

민을 처음 보았던 건 중등교육과정 시절이다.
「모두 주목. 오늘부터 새 친구가 생겼어요.」
당시 나는 학기 중 전학을 온 소년의 이름이 창 연민인 줄 알았고, 귀화한 중국인일 거라고 자기 멋대로 착각했고, 이름 그대로 소년에게서 연민을 느꼈고, 동시에 견딜 수 없는 시큼한 냄새에 코를 쥐어뜯어야 했다.
열한 살 소년은 끔찍스러울 정도의 토쟁이였다.

「미친 거야. 소화기관이 어떻게 된 게 분명해. 아님 십이지장 대신 달팽이이관이 달렸던가.」
시리도록 찬 물에 걸레를 빨면서 이를 갈아대던 기억이 선명하다.
교실이라는 작은 정글 안에서 먹이사슬 최하층 밑바닥을 기어 다니던 나는 또 다른 최하층인 전입생이 소화가 되다 만 음식을 게워낼 적마다 청소를 도맡아 해야 했다.
나는 급우들이 편하게 누르면 되는 부저와 다를 바 없었다. 속 뒤집어지는 웩 – 소리가 나면 교실의 모든 눈동자가 곧장 나에게로 향했다. 모르는 척하고 노트 필기를 하고 있자면 독촉의 의미로 고무지우개가 날아 들어와 머리를 건드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모르는 척하고 있으면? 그냥 이 말만 하겠다. 인간은 때로 한계가 어디인지 모를 정도로 잔인해질 수 있다.
이후 나는 자연스럽게 빗자루와 걸레를 가지러 자리에서 일어났고, 수업 중임에도 교실 밖으로 나가도 그 누구도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다.

「올라온다 싶으면 빨리 화장실로 가란 말이야.」
내가 녀석더러 귀화한 중국인일 거라 착각한 건 아무리 애원하고, 윽박지르고, 구슬려 봐도 일절 대꾸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꾸만 안한 게 아니라 고무찰흙으로 빚은 인형인양 표정 변화조차 없었던 걸 봐선 아예 한국어를 모르는 것 같았다.
「닌 샹 쩐머 쭤 터우파? (좀 더 싼 것은 없습니까?)」
간단한 생활 중국어 몇 마디에도 반응이 없던 걸로 봐선 그조차 아닐 수도 있었지만.

아무튼 녀석은 학교에서 딱 세 가지밖에 안 했다.
밤새 게임 삼매경에 빠졌던 사람처럼 흐느적거리기.
만사 귀찮다며 눈을 감고 있기.
토하기.
책걸상에 들러붙은 토사물 찌꺼기를 하도 문질러 치우다보니 없던 알통이 새로 생길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근육이 붙어 두꺼워진 팔뚝을 이유로 전학생을 점점 꺼려하게 되었고.
불안정한 사춘기 소녀의 짜증은 소년의 이름이 창연 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정점을 찍고 폭발했다.


「뭐? 한국말을 모르는 귀화 중국인?」
마철은 데굴데굴 구르며 웃었다. 나중엔 너무 웃어 호흡곤란을 일으키고 배가 아프다며 히꺽히꺽 소리를 냈다.
「녀석은 창연이야. 알파 창연 씨라고. 어떻게 그걸 몰랐을 수가 있어. 푸흐흙, 진짜 걸작이야. 중국인 창 씨... 푸흐륵! 아이고, 배야!」

0.05%의 알파들은 이차성징과 함께 감각과잉 증상을 겪는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대포의 굉음으로 들리고 1킬로미터 밖의 참새가 재크와 콩나무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 잡아먹는 거인이 된다. 뭐, 그 정도야 눈 감고 귀 막아 참는다 해도 약간의 상처에도 참기 어려운 통증이 몰아닥친다는 게 가장 문제다. 작은 생채기만 생겼을 뿐인데 산채로 화형을 당하는 사람처럼 울부짖는다. 광란을 일으킨 통각 탓에 앉지도 못하고 눕지도 못한다. 가뜩이나 성장기라서 몸의 변화가 많을 시기인데 그 전부가 고통이다.
다행히 치료제가 개발되어 있으나... 알만카로젝은 일반 멀미약의 50배 강화판이다.

「미친놈들. 감각 과잉인 알파 새끼를 약에 절여서 일반인 학교에 던져놓다니.」
나는 즉각 소년으로부터 연민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내 분신과도 다를 바 없게 된 걸레도 바닥을 향해 집어 던졌다.
「안 해! 이딴 짓 앞으로 절대 안 한다고!」
이성이 끈이 뚝 끊겨서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화장실에서 똥 싸고, 방귀뀌는 소리까지 쟤 귀엔 전부 다 들릴 거 아냐!!」
그 많고 많은 것들 중에서 내가 왜 그걸 가장 끔찍하게 여겼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또 딴 생각하고 있군.』
대리석 조각처럼 잘 생긴 얼굴이 코앞으로 불쑥 들어왔다.
『깜짝이야!』
거 깜빡이 좀 켜고 다닙시다. 백만 관객을 몰고 다니는 배우의 맨 얼굴은 심장에 매우 나쁩니다.
『사람을 앞에 두고 저 혼자 꽃밭으로 가버리는 거, 무진장 실례 아냐?』
『아닌데요. 엄청 집중! 집중 했거든요? 진짭니다.』
재빨리 영업 모드로 들어가 손바닥을 마주 비볐다. 오늘의 추천 제품은 화이트 소보로 밀크 크림빵입니다, 고객님. 필요한 거 있으시면 저에게 말씀하세요! 두 달 전부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제과점에서 하루에도 수백 번씩 외치던 멘트가 자동으로 혀에 감겼다. 이런. 눈이 부릅떠졌다. 천만다행으로 자동재생 1초 전에 혀를 꽉 깨물 수 있었다.
『아부버머어!』
아픈 혀를 내밀고 있자니 민의 표정이 가관이다.
해석하자면 이런 병신을 다 봤나.
점프에 실패하고 의자에서 굴러 떨어진 고양이가 된 기분이다. 잇자국이 선명하게 난 혀를 재빨리 갈무리하고 아무렇지도 않음을 증명하고자 테이블 위에 놓인 냉수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여기서 더 물고 늘어지면 본인만 손해라고 생각한 듯하다.
가느다란 은색 실반지가 끼워진 검지로 의자 팔걸이 부분을 톡톡 치다가 이내 자세를 바꿨다.
『아무튼 생일 축하한다.』
『땡. 대상이 틀렸네요. 난 아냐. 오늘은 마철의 생일.』
『그게 상관있나?』
민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말했다.

너희는 모두 내 앞에서 평등한 버러지들이야. 벌레1, 벌레2, 벌레3. 그러니 누구의 생일이든 내 알 바 아니고. 인심 후 하게 쳐서 축하는 해드릴게.

나는 삐쳐서 외쳤다.
『생일 선물 정도는 내 놓고 축하한다고 말해.』
녀석도 지지 않고 외쳤다.
『누구처럼 슬리퍼 찍찍 끌고 빈손으로 잔칫집에 오는 싸가지는 없거든? 프린스턴 로얄 호텔 VIP 이그제큐티브 룸을 우중충 패밀리 이름으로 예약해뒀어. 하루 숙박료 5천만 원 짜리야.』
『하루에 5천만 원?! 인기 배우라서 돈이 썩어 나냐?! 차라리 과자 사먹게 돈으로 줘!』
『네 생일도 아니라며 뭘 이래라 저래라 야.』
『아까워서 그러지!』
뺨에 바람을 넣어 부풀리며 불만을 표현했다.
영화가 대박을 칠 때마다 돈을 갈퀴로 벌어들이는 녀석에게 5천만 원은 있으나마나 한 돈이겠지만 우리 같은 바닥 인생에겐 작지 않은 돈이다. 사성급 호텔 하루 이용료로 쓰기엔 너무 아깝다. 차라리 저금을 해뒀다가 다음 학기 마철의 대학 등록금으로 쓰는 게 훨씬 이롭다.

속이 쓰렸다.
『아이고, 억울해. 누구는 돈이 없어 파마도 못 하고 한 여름에 선풍기도 마음껏 못 트는데...』
『돈이 없어?』
『그게 팔자라서 그렇다. 금수저인 너는 평생 이해 못 하겠지만 센터에서 독립해서 나오면 대부분 거지가 되어버려. 죽어라 저금한 돈도 방 하나 구하면 다 없어져 버리니까. 심하면 끼니 걱정도 해야 해. 깍두기나 단무지 없이 라면만 먹어야 한다고.』
『흠... 그래서 돈을 얻어내려고 소 유님을 만났던 건가.』
『뭐?』

순간 숨 쉬는 걸 잊어버렸다.

Posted by 미야

2019/01/12 10:52 2019/01/12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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